[촉기] 진나라 초 부풍왕(扶風王) 사마준(司馬駿)이 관중을 진수할 때, (※ 사마준은 사마의의 아들로 사마염에겐 숙부이며, 진 태시 6년(270년) 이래 진서대장군 도독옹량주등제군사(都督雍凉等州諸軍事)로 관중을 진수함) 사마 고평(高平)사람 유보(劉寶), 장사 형양(滎陽)사람 환습(桓隰) 등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 제갈량에 대해 함께 논했다.
이때 논의하는 자들 다수는, ‘제갈량이 잘못된 곳에 몸을 맡겨 촉 백성들을 수고롭게 했으며, 힘은 적으면서 계획만 거창했으니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금성(金城)사람 곽충(郭沖)은 ‘제갈량의 권지(權智-임기응변과 지혜), 영략(英略-뛰어난 지략)이 관중, 안영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해 논자들이 미혹되었다’고 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관한 다섯 가지 일(이른바 곽충5사)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보 등이 또한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부풍왕은 개연(慨然)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 신 송지가 보건대, 제갈량의 남다른 훌륭함이라면 실로 듣고 싶은 바이나, 곽충의 말은 모두 의심스러우니 삼가 각 일화의 뒤에서 비판하려 한다.
곽충1사(郭沖一事)
제갈량의 형법(刑法)이 준급(峻急-엄하고 급함)해 백성을 각박(刻剝-가혹하게 다룸)하자 군자부터 소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망하고 한탄했다. 법정이 간언했다,
“옛날 고조께서 관(關)으로 들어와 약법삼장(約法三章-법을 3장으로 간략히 함)하니 진(秦)나라 백성들이 그 덕을 알았소. 지금 그대는 위력(威力)을 빌려 한 주(州)를 걸터앉아 점거하고 처음 그 국(國)을 소유했으나 은혜를 베풀어 위무하지 않았소. 게다가 주인과 손님의 의(義)로 보아도 의당 서로 낮추어야 하니, 형(刑)을 느슨하게 하고 금(禁-금령)을 늦추어 그들의 원망을 달래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오. 진(秦)나라는 무도하고 정치가 가혹해 백성들이 원망하니 필부의 함성에 천하가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고, 고조가 이로 인하여 널리 구제할 수 있었소. 유장(劉璋)은 암약(暗弱)하고 유언(劉焉) 이래 누대에 걸쳐 은혜를 베풀어, 문법(文法-문서로 된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서로 승봉(承奉-아첨)하니, 덕정(德政)이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위형(威刑-위엄과 형벌)도 엄숙하지 못했소. 촉 땅 인사들이 전권(專權-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름)하며 스스로 방자하게 되자 군신(君臣)의 도가 점차 쇠퇴했소. 지위로써 총애하니 지위가 극에 다다르면 (주인을) 얕보게 되고, 은혜로써 순종시키니 은혜가 고갈되면 교만해졌소. (금일의) 폐단이 실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오.
이제 내가 법으로 위엄을 세울 것이니 법이 행해지면 은혜로움(恩)을 알 것이고, 작위에 한도를 둘 것이니 작위가 더해지면 영예로움(榮)을 알 것이오. 영(榮)과 은(恩)이 아울러 다스려지면 위아래에 절도가 있게 되니, 다스림의 요체는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오.”
/ (이하 배송지의 비판) 비판한다.
고찰컨대 법정이 살아 있을 땐 유주(劉主-유비)가 죽기 전이었으니, 여기서 법정이 간언했다는 것은 유주(劉主)가 살아있을 때의 일이라는 말이다.
제갈량의 직분은 고굉(股肱)이고, 일은 원수(元首-우두머리, 즉 유비)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또한 유주(劉主)가 살아있을 때 제갈량은 익주를 다스리지 않았으니 경상형정(慶賞刑政-포상과 형벌)이 그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러나 곽충이 서술한 제갈량의 답변을 보면 스스로 그 일을 임의로 할 수 있는 듯하다, 이는 신하가 의당 스스로 처해야 할 본분에 위배되는 것으로, 제갈량의 겸순(謙順)한 몸가짐으로 볼 때 필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또한 제갈량의 형법이 준급(峻急)하고 백성을 각박(刻剝)했다 했는데, 선정(善政)을 두고 각박(刻剝)이라 칭하는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 배송지를 비판한다.
[위씨춘추魏氏春秋] 당초 익주 종사 상방(常房)이 소속 부를 순행하다(行部)하다 주포(朱褒)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듣고 그 주부(主簿)를 붙잡아 심문하고는 죽였다. 주포가 분노해 상방을 공격해 죽이고는 (상방이) 모반했다고 무고했다. 제갈량은 상방의 여러 자식들을 주살하고 그의 동생 네 명을 월수(越嶲) 로 귀양보내 주포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주포는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마침내 군(郡)을 들어 모반하여 옹개(雍闓)에게 호응했다.
- 촉지 후주전 주석 위씨춘추 -
상파(常播)의 자는 문평(文平)으로, 촉군 강원현 사람이다. 상파는 현에 벼슬하여 주부,공조가 되었다. 현장 광도 사람 주유가 건흥 15년(237년) 상관에게 관곡을 빼돌렸다고 무고를 당해, 중죄로 논해지게 되었다. 상파는 옥으로 가서 쟁송하였는데, 몸에 수천 대의 매를 맞아. 살이 다 문드러지고, 장독이 오른 것이 매우 참혹했으며, 다시 세 번의 옥고를 치뤘고, 2년여간 유폐되었다. 매번 고문을 당할 때마다, 관리가 먼저 심문했으나, 상파는 대답하지 않고 말하길 '어서 벌을 내릴 것이지, 여러 번 물을 게 무어냐!' 그 언사가 종시 흔들리지 않았기에, 일이 마침내 밝혀지게 되었고, 현장은 사형을 면했다. 이때 오직 주부 양원이 또한 이 일을 증명했는데, 상파의 말과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상파가 몸을 잊고서 군을 위한 것을 아름답다 하였고, 절의가 지극히 열렬하다고 하였다.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처현의 장에 제수되었으며, 50여세에 죽었다.
- 촉지 양희전 계한보신찬 -
법정을 촉군태수(蜀郡太守)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삼으니, 밖으로 도기(都畿-도읍과 그 주변)를 통수하고 안으로 모주(謀主-주요한 모사)가 되었다. 밥 한 그릇 얻어먹은 은혜(一餐之德)나 눈 흘긴 사소한 원한(睚眥之怨)을 되갚지 않는 법이 없었고, 자신을 훼상(毁傷)한 자 몇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어떤 이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법정이 촉군에서 지나치게 종횡(縱橫)하니 장군께서 의당 주공께 여쭈어 그의 위복(威福-위엄과 은혜, 또는 이를 내리는 권한)을 억누르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주공(主公)께서 공안(公安)에 계실 때 북쪽으로는 조공(曹公-조조)의 강성함을 두려워하고 동쪽으로는 손권이 핍박함을 꺼렸으며, 가까이는 손부인이 곁에서 변고를 일으킬까 겁내시었으니, 그 당시는 진퇴(進退)가 낭발(狼跋-나아가고 물러남이 어려움에 빠짐)하였소. 그러다 법효직이 주공의 보익(輔翼)이 되어 (주공을) 높이 날게 하고 다시 남의 제약을 받지 않게 했으니, 어찌 법정을 금지해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겠소!”
(중략) 제갈량은 또한 선주가 법정을 매우 경애하고 신임함을 알았기에 이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주4)
(주 4) 손성이 말했다 – 무릇 위복(威福)이 아래로부터 함부로 거행되면(自下) 가문을 망치고 나라를 해치는 길이 되고, 형벌이 총신에 의해 전횡되면 정치를 해치고 도리를 어지럽히는 근원이 되니, 어찌 공신(功臣)이 함부로 굴고 폐행(嬖幸-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이 국권을 농단하게 한단 말인가?
옛날 전힐(顚頡)이 비록 부지런했으나 명을 거스른 형벌을 면하지 못했고, 양간(楊幹)이 비록 육친이었으나 오히려 난행(亂行)한 벌을 더해서 받았으니, 무릇 총애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왕헌(王憲-왕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갈씨(諸葛氏-제갈량)의 말은 정치와 형벌을 그르쳤다 할 것이다.
- 촉지 법정전 -
유비가 죽은 뒤 그 사자(嗣子-대를 이은 아들, 즉 유선)가 유약(幼弱)하여,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제갈량이 전담했습니다. 이에 밖으로는 동오와 연결하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시행하며 융려(戎旅-군대, 군무)를 정리하고, 기계에 능하고 교묘한 재주가 있어 이를 극도로 연구하고, 과교(科敎-법과 교령)를 엄명히 해 상벌에 필히 믿음이 있게 하여 악은 필히 처벌되고 선은 필히 현창되니, 관원에게는 간사함이 용납되지 않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며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고 사회기풍이 숙연해졌습니다.
- 촉지 제갈량전 진수 상소문中 -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에 따라 그 실질을 책임지우며(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다는 말)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촉지 제갈량전 진수 評 -
위의 기사를 보면 제갈량이 촉한 내에서 형정을 엄히 한 것은 사실로 보여진다. 유장의 정치는 후한 말의 어지러웠던 상태 그대로였으므로, 이후에 제갈량이 엄격한 법치를 행했다면 당연히 초반에는 원망이 있을 것이 당연하다. 정치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흘러야 제대로 나오는 법이다. 따라서 곽충1사에 대한 배송지의 비판은 과한 감이 있다.
곽충2사(郭沖二事)
조공(曹公)이 자객(刺客)을 보내 유비를 만나게 했다. 바야흐로 서로 만나 위나라를 정벌하는 형세에 관해 논하기 시작하자 심히 유비의 심계에 들어맞았다. (자객이) 좀 더 가까이 가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제갈량이 들어오자 위나라 자객의 안색에 놀라고 당황한 빛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제갈량이 그를 살펴보고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얼마 후 자객이 측간에 가자 유비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좀 전에 기사(奇士-뛰어난 선비)를 얻었으니 족히 그대를 도와 보좌할 만하오.”
그가 어디에 있냐고 제갈량이 묻자 유비가 말했다,
“일어서 나간 이가 그 사람이오.”
제갈량이 천천히 탄식하며 말했다,
“객(客)의 안색과 거동을 살펴보니 두려워하며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자주 눈길을 피했습니다. 간사한 형상이 밖으로 드러나고 사악한 마음이 안에 숨겨져 있으니 필시 조씨(曹氏)의 자객입니다.”
그를 추격했으나 이미 담을 넘어 달아난 뒤였다.
/ 비판한다. 무릇 자객은 포호빙하(暴虎馮河-범을 맨손으로 때려잡고 황하를 걸어서 건넘)하며 죽을지언정 후회하지 않는다.
유주(劉主-유비)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견식이 있는데 이 자객에게 미혹되었으니 즉 이 자객이 필시 일세의 기사(奇士)라는 것이다. 또한 제갈량에게 이르길, ‘족히 그대를 도와 보좌할 만하다’고 했으니 또한 제갈량에 버금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무릇 제갈량에 견줄 만한 인물이 남을 위해 자객이 되는 것은 드문 일이고, 이때 그의 주인 또한 응당 그 기량을 아꼈을 것이니 필시 사지(死地)에 던져 넣었을 리 없다. 게다가 이 사람은 죽지 않았으니 위나라에서 반드시 현달(顯達)되었을 것인데, 필경 이 사람이 누구인가? 어찌 이처럼 적멸(寂蔑-소식, 기척이 없음)되어 알려지지도 않았겠는가!
→ 배송지를 비판한다.
위략(魏略)에 이르길, 맹달(孟達)이 연강(延康:220)원년에 부곡 4천여 호를 이끌고 위나라에 귀순했을 때 조비는 처음 왕위에 막 올랐을 때였다. 조비는 전부터 맹달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어서 잘 알고 있었는데, 맹달이 귀순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기뻐했다. 먼저 사람을 잘 볼 줄 아는 고위 관리를 [貴臣] 보내 과연 맹달을 만나 보게 했다. 그 관리가 돌아와 보고했다.
"장수(將帥)의 재목입니다",
다른 관리는 또 말했다.
"재상의 그릇입니다.".
문제(文帝: 조비)가 더욱 맹달을 흠모해 그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이윤(伊摯)은 상(商)나라를 배신하고 주(周)나라에 귀순해 주나라를 크게 흥성하게 했고 악의(樂毅)는 모국인 조(趙)나라를 떠나 연(燕)나라의 아경(亞卿)이 되어 연나라를 전국 칠웅의 하나로 만들었다.
(중략)
맹달이 초(譙)에 이르러 조비를 만났는데, 여유롭고 우아한 풍모에, 재주와 변설이 보통 사람 이상이었다. 조비도 작은 수레에 같이 타고서 외출할 때, 맹달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경은 혹시 유비가 보낸 자객은 아니겠지요?"
조비는 맹달과 함께 연을 타고 갔다.
- 위지 명제기 주석 위략中 -
(연희) 16년(=253년) 세수(歲首,새해 초)에 큰 모임(大會)이 있었는데 위(魏)의 항인(降人)(→위나라로부터 항복해온 사람) 곽순(郭循)(※)이 그 자리에 있었다. 비의가 환음(歡飮)하여 몹시 취하였다가 곽순이 지니고 있던 칼에 해를 입었다.
- 촉지 비의전 -
연희 16년(253년) 봄 정월, 대장군 비의가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순(郭循)에 의해 한수(漢壽)에서 살해되었다.
- 촉지 후주전 -
→ 비의가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순에 의해 연회에서 죽임을 당하고 조비가 맹달을 봤을때 한 말을 보면 위와 같은 일이 없었던 일이 아니다. 또, 진나라 시황제때 형가와 같이 암살하러 간 진무양도 위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고로 곽충의 2사같은 일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얘기가 아니다.
곽충3사(郭沖三事)
제갈량은 양평(陽平-면양현에 속함)에 주둔하고, 위연(魏延)과 제군을 보내 군사들을 아울러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고는, 제갈량은 단지 만 명을 남겨 성을 지키고 있었다.
진(晉) 선제(宣帝-사마의)가 20만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을 막았는데, 위연 군과 서로 길이 엇갈리고, 곧바로 도착해 제갈량으로부터 60리 앞에 이르렀다. 척후병이 선제(宣帝)에게 보고하길, 제갈량이 성 안에 있으며 군사가 적고 역량이 미약하다고 했다.
제갈량 또한 선제가 거의 당도하여 서로 가까운 것을 이미 알고 있고 위연 군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종적을 뒤쫓아도 미치지 못하니 장사(將士-장졸)들이 놀라 얼굴빛이 변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갈량의 의기(意氣)는 태연자약하며, 군중에 명해 모두 깃발을 눕히고 북치는 것을 멈추게 하고, 함부로 암만(菴幔-군막)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또한 영을 내려 네 성문을 활짝 열고 땅을 쓸며 물을 뿌리게 했다. 선제는 늘 제갈량이 지중(持重-신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갈량이) 함부로 약세를 보여주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이에 군을 이끌고 북쪽 산으로 향했다. 다음날 밥 먹을 때, 제갈량이 박수를 치며 크게 웃으며 참좌(參佐-막료)들에게 말했다,
“사마의는 필시 내가 겁쟁이라 생각하고 장차 강한 복병이 있을 것이라 예상해 산을 따라 달아났을 것이다.”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니 과연 제갈량이 말한 대로였다. 선제가 뒤에 이를 알고 심히 한스러워했다.
/ 비판한다. 고찰컨대, 양평은 한중에 있다. 제갈량이 처음 양평에 주둔할 때 선제(宣帝-사마의)는 형주도독으로 완성(宛城)을 진수하고 있었고, 조진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관중(關中)에서 제갈량과 서로 겨루었다. 위나라에서 일찍이 선제를 보내 완(宛)에서부터 서성(西城)을 거쳐 촉을 토벌하도록 했으나 장맛비를 만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이 있다. 이 앞뒤로는 다시 양평에서 교전한 일이 없다.
곽충의 말대로라면 선제가 20만 군을 이끌었고 이미 제갈량의 군사가 적고 미약함을 알았으니, 만약 복병이 있으리라 의심했다면 바로 방어진을 설치하며 신중을 기해야지, 어찌 곧바로 달아난단 말인가?
<위연전>에 의하면 ‘위연은 늘 제갈량을 수행해 출병할 때마다 군사 1만으로 제갈량과 다른 길로 진격해 동관에서 만날 것을 청했으나 제갈량이 이를 제지하고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위연이 제갈량을 겁쟁이라 하며 자신의 재능이 모두 쓰이지 못함을 한탄했다’고 한다. 제갈량은 위연에게만 명의 군사도 따로 통수하지 못하게 했는데, 곽충이 말대로라면 돌연 중병(重兵-대군)을 이끌게 하여 선두에 세우고, 자신은 가볍고 약한 군사로 수비했다는 말인가?
게다가 곽충은 부풍왕과 함께 대화했는데, 선제의 단점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은 자식 앞에서 부친을 비방하는 것이라 이치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부풍왕이 개연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했다’하니, 고로 이 책(촉기)에서 인용한 말들이 모두 헛된 말임을 알 수 있다.
→ 배송지를 비판한다.
사마선왕이 형주에서 수군을 조련해 면수(沔水=한수)를 따라 장강으로 들어가 오(吳)를 토벌하려 했다. 장합에게 조서를 내려 관중(關中)의 제군을 이끌고 (사마선왕에게로) 가서 절도(節度)를 받도록 했다. 형주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물이 얕았으므로 큰 배가 다닐 수 없었다. 이에 방성(方城-남양군 엽葉현 근처)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제갈량이 다시 출병해 진창(陳倉)을 급공(急攻-급습)하자, 명제는 역마(驛馬)를 내어 장합을 경도(京都-수도)로 오게 했다. 명제는 친히 하남성(河南城)으로 행차해 주연을 베풀며 장합을 전송했다. 남북군사(南北軍士) 3만을 보내고 무위, 호분(虎賁)을 나누어 보내 장합을 호위하도록 했다. 명제가 장합에게 물었다, “장군이 더디게 도착하면 제갈량이 이미 진창을 차지해 버리진 않았겠소?” 장합은 제갈량이 현군(縣軍-외떨어진 군사)으로 군량이 부족해 오랫동안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갈량은 이미 달아났을 것입니다.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볼 때 제갈량의 군량은 10일 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장합이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격해 남정(南鄭)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퇴각했다. 조서를 내려 장합을 경도로 돌아오게 하고 정서장군, 거기장군에 임명했다.
- 위지 장합전 -
당시 사마의는 형주 방면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진창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조진의 전략과 학소의 방어에 막혀 뚫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위지 장합전을 따르면, 장합은 낙양에서 한중의 남정으로 진격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볼때 본 일화는 병력의 과장이나 사건의 주체가 장합이 아닌 사마의로 기록되어 왜곡이나 미화가 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을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화라고도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들에는 잘못 전해지거나 부풀려지는 일이 많다. 그러나 본 일화의 왜곡은 특히 심하기때문에 배송지의 비판이 마냥 틀렸다고 볼수는 없다.
곽충4사(郭沖四事)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 농서(隴西), 남안(南安)의 2군(郡)이 이때에 응해 항복했다. 천수를 포위하고 기성(冀城-천수군 기현)을 함락하여 강유(姜維)를 사로잡고, 남녀 수천 명을 구략(驅略-내몰고 약탈함)해 촉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제갈량에게 축하하자 제갈량이 정색한 채 근심하는 얼굴로 말했다,
“널리 하늘 아래 한(漢)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 국가의 위력이 미치지 못해 백성들이 시랑(豺狼-승냥이와 이리)의 주둥이에서 고통 받도록 하고 있소. 한 사람이 죽어도 모두 나의 죄인데, 이 정도 일로 서로 축하한다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이에 촉인 들이 제갈량에게 위나라를 병탄하려는 뜻이 있으며, 단지 척경(拓境-국경을 넓힘)하려는 뜻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 비판한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병탄하려는 뜻을 품은 지는 이미 오래이니, 이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리 없다. 게다가 이때 출병해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죽거나 다친 채 돌아온 자가 많았고, 세 군(郡)이 항복했으나 소유하지는 못했다. 강유는 천수의 필부일 뿐, 촉이 그를 얻었다고 해서 위나라에 어떤 손실이 있겠는가? 서현의 1천가를 뽑아 왔다고 해도 가정에서의 손실을 보충하지는 못하니, 어찌 이를 공(功)으로 삼아 촉인 들이 서로 축하한단 말인가?
→ 배송지를 비판한다.
위정자의 대전략과 정치는 범인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공적과 실책은 서로 가감加減하는 바가 아니므로 곽충4사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곽충5사(郭沖五事)
위(魏) 명제가 친히 촉을 정벌해 장안에 행차하고, 선왕을 보내 장합과 제군(諸軍), 옹(雍), 량(涼)의 경졸(勁卒-강병, 정병) 30여 만을 이끌고 은밀히 진격해 검각(劍閣)으로 향하게 했다. 제갈량은 이때 기산(祁山)에서 정기(旌旗-깃발)와 날카로운 병기로 험요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10분의 2를 교대해 내려 보내려 하고(十二更下) 남은 군사가 8만이었다.
위군(魏軍)이 처음 진을 펼쳤을 때 깃발과 군사가 때마침 교체되자, 참좌(參佐)들은 모두
‘적군이 강성하여 역량으로 능히 제압하지 못하니 의당 임기응변으로 군사를 내려 보내는 것을 한 달 동안 멈추어 성세(聲勢)를 아울러야 한다.’
고 했다. 제갈량이 말했다,
“내가 군을 통수하고 용병한 이래 큰 신의를 근본으로 삼았고, ‘원(原)을 얻고 신의를 잃는 것’(得原失信)은 옛 사람도 꺼렸던 일이오.
떠날 자들이 행장을 꾸리고 기일을 기다리며, 그 처자들은 학수고대하고 날짜만 헤아리는데, 비록 정벌에 임해 어려움이 있다 해도 의(義)를 폐할 수는 없소.”
그리고는 모두 조속히 보내주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떠날 자들은 감격하여 남아서 일전을 치룰 것을 원하고, 남을 자들은 분용(憤踴-분격)하여 죽기로 싸울 것을 다짐했다. 서로 말했다,
“제갈공의 은혜는 죽음으로도 다 갚을 수 없다.”
싸우는 날에 이르자 칼을 뽑고 선두에 서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일당십(一當十)으로 싸워 장합을 죽이고 선왕을 물리쳤다. 한번 싸움으로 대승을 거두니 이는 제갈량의 신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 비판한다. 신 송지가 보건대, 제갈량이 예전 기산으로 출병했을 때(228년 1차 북벌) 위 명제가 몸소 장안에 도착했으나 이 해에 다시 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갈량의 대군이 관(關), 농(隴)에 있는데 위인(魏人)들이 어찌 제갈량을 뛰어넘어 곧바로 검각으로 향할 수 있단 말인가? 제갈량이 전장에 머문 뒤로 본래 오래도록 주둔하는 법은 없었는데, 바야흐로 병사를 쉬게 하려고 촉으로 돌려보냈다니, 이는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손성(孫盛), 습착치(習鑿齒)가 같고 다른 점을 수구(搜求-조사하여 찾음)해 빠뜨린 것이 없는데, 그들이 모두 곽충의 말을 기재하지 않았으니 그 말에 어그러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배송지를 비판한다.
위의 사례는 제갈량의 1차 북벌과 4차 북벌이 혼합된 형태로 보이는데, 병력의 과장을 제하면 조예가 1차 북벌때 장안으로 순시한 내용이 명제기에 보이며 장합을 사살한 내용은 여러 열전(제갈량전, 장합전)에 보인다. 또, 촉나라의 군제에 대한 내용이므로 구조적 내용인지라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특수한 상황을 상상하거나 날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 결론
곽충의 일화는 촉기와 더불어 풍문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보이므로 특성상 과장과 미화 등이 있었을 것이나 그 일화들이 전부 신빙성이 없거나 事實이 아니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또, 서두에 세간에 전해지지않은 일이라 하였으니 부풀려지거나 과장될 요소는 더 크다. 배송지의 평評을 보면, 종종 자신의 생각과 이해하는 바가 다르면 극렬하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곽충의 일화도 그러한 것의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