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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7/06 19:32:15
Name 王天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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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스포] 홀리워킹데이 보고 왔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시드니에 도착했지만 현실은 비루합니다. 김밥만 말자니 돈도 꿈도 뭐 하나 못 챙기고 그냥 시간만 날아갈 것 같아요. 그래서 감독은 사람들을 모아 농장에서 일하기로 결심합니다. 일차 목표는 세컨드 비자의 획득! 일단 워홀 비자를 연장시키고 나면 그 다음엔 뭘 해도 할 수 있겠죠. 저강도 고수익의 농장일을 찾아보지만 자리 있냐는 질문마다 no만 쏟아집니다. 일거리는 없고, 생활비는 떨어져가고, 남는 시간엔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문제가 아니네요. 과연 먹고 살 수 있을까요?

<홀리워킹데이>는 호주 워킹홀리데이의 현실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감독 자신은 나레이터로만 존재하고 카메라는 감독과 같이 사는 주변인물들, 특히 농장을 찾아 전전하는 주현, 종대, 종현의 일상을 담죠. 영화는 주변인들의 일상을 채취합니다. 남루하지만 간간히 배어있는 능청들이 귀여워요. 특히 깨방정을 열심히 피우는 주현 때문에 퍼석해질 수도 있는 영화에 감정이 배어나옵니다. 나는 호주에 왜 왔고, 호주에서 무엇을 얻어갈 것이며, 가장 시급한 과제가 뭔지 이들은 계속 고민하고 타개하려 합니다. 이게 뭐꼬, 하는 자조의 감정도 무겁지 않게 다가와요.

영화 속 호주 워홀이 현실의 전부라고 할 순 없을 겁니다. 이런 이런 산들을 넘어야 할 수도 있다, 정도로 보면 될 거에요. 일반화하기에는 워홀러로서 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가 있고 본인의 준비나 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도전정신과 의지로는 극복할 수 없는 워킹홀리데이의 구조적 문제입니다. 워홀러 중에 그 누가 야심이 없고 긍정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거 하나로 뚫어볼 만큼 호주의 현실이 녹록치가 않습니다. 필리핀에서 3개월, 호주에서 3개월 어학연수 하고 하이 하와유 를 꼬부라지게 말해봐도 일자리가 뚝뚝 떨어지진 않습니다. 결국 호주에서 머무르는 기한이라도 늘리기 위해 이들은 결심하죠. 영화 속에서 이들은 "세컨드비자"를 따기 위해 농장을 찾습니다. 이들 중에는 이미 세컨드 비자를 딴 경험자도 있어요. 그런데 일을 못합니다. 일거리가 없고, 일하려는 사람들은 너무 많고, 과일 시즌이 끝나면 하던 일도 끊깁니다. 한국에서 알바 구하는 정도의 난이도가 절대 아니라는 이야기죠. 농장을 찾으면?  그렇다고 농장일이 쉽거나 편한 것도 절대 아닙니다. 엄연한 3d 직업인걸요.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호주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의 어려움입니다. 울며 겨자먹기로 한인잡을 구했지만, 굳이 돈과 시간을 써서 온 외국에서 한국식 아르바이트밖에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먼저 들이닥칩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진정한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도전해보지만, 농장들은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딸기농장에서 잠깐 돈을 번 후 이들은 기어이 가지 않겠다던 양파 농장으로 떠밀려갑니다. 돈도 없고 세컨드 비자를 취득할 남은 시간도 없으니까요. 안되는 한국의 현실에 떠밀려왔는데 호주에서도 안되는 현실에 떠밀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거지로 합니다. 그리고 틈틈히 고된 노동의 현실을 보여주죠. 귀한 자식들은 땅에 엎드려서 양파를 뽑고 뿌리를 손질합니다. 먹고 살만큼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신"이 되어야 할만큼 이들의 일당은 짜디 짭니다.

영화가 결정적으로 강조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주인공 일행은 일에도 점점 익숙해지고 돈도 잘 벌게 되지만, 어느날 무너집니다. 워홀러가 아닌 현지 주민의 초대를 받아 바베큐 파티를 가고 이들은 자신들의 농장 경험을 이야기하죠. 호주인은 말합니다. 너네 왜 그런 일을 하는 거야? 이거 완전 노예 취급받는 거잖아? 그러니까, 목표가 뭐고 긍정과 인내로 어떻게 버티건 현실 자체는 비참한 외노자 신세에요. 옷도 꾀죄죄하게밖에 못입고 영어도 못해서 현지 아이들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마음씨 좋은 주민을 만나도 분노 섞인 동정을 받아야 합니다. 주현은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참지 못합니다. 나는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감독도 쉽사리 답을 주지 못합니다. 왜 저 무지막지한 파리떼를 견뎌가며 양파를 캐고 다듬어야 하는지, 그마저도 머리를 비우고 기계처럼 일해야 간신히 먹고 살만해지는지. 이걸 다 겪고 나서 세컨드비자를 따게 되면? 그 때는 뭐가 있을까요? 워홀은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요?

무겁지 않지만 영화가 워홀을 바라보는 시선은 회의에 가깝습니다. 영화가 워홀의 "왜"를 찾지 못합니다. 무슨 목표로 왔는가, 그러면 거의 다가 돈과 영어를 말합니다. 왜 하필 호주 워홀인가, 라는 질문은 이들의 "고국"을 향합니다. 한국에서는 돈을 못 벌겠으니까, 한국에서는 영어를 잘 해야 하니까. 호주로 떠나는 젊은이들의 현실은 떠날 수 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과 직결됩니다. 이래서 떠났고, 그래서 도착했고, 돌아가서는.... 워킹홀리데이는 순수한 도전이나 휴식의 의미가 아닙니다. 한국이 이들을 떠밀고 있습니다. 대학교를 자퇴할 때 비웃던 행정직원의 그 눈빛이, 한국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없다는 예감이, 결국 공무원 준비나 할 거라면 차라리 다른 길을 뚫어봐야겠다는 한국의 막힌 현실이 호주를 열린 문으로 보게 하는 거죠. 결국 영화는 한국을 비춥니다. 왜 꿈과 열정을 지닌 젊은이들이 한국 아닌 다른 곳에서 도전을 찾을 수 밖에 없는가.

영화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면서도 철없는 웃음을 계속 터트립니다. 고된 현실도 명랑하게 웃어 넘길 수 있지요. 그러나 그 모험을 얼마나 잘 버티건, 시작과 중간과 끝에서 호주의 현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떠나오기 전의 한국과, 돌아온 후의 한국도 바뀐 게 없어요. 착취를 당하면서도 무언가를 찾아보려 했던 젊은이들이 돌아왔다고 다른 걸 기대할 수 있을까요. 희망을 찾아보려 한다는 감독의 나레이션이 응원이나 다짐 아닌, 억지 약속인 것 같아서 쓴 맛이 더 맴돕니다. 결국 이 영화는 워홀을 다녀왔던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체험의 재탕을, 워홀을 가고 싶은 사람에게는 섬뜩한 충고가 될 겁니다. 워홀과 연이 없어도 헬조센 아래 다른 형태로 낑낑대는 이들에게서 유대감을 느낄 겁니다. 호주건 한국이건, 맨몸뚱아리로 희망 찾아 삼만리 걷는 이들에게 건강한 웃픔을 선물받을 수 있을 겁니다.

@ GV 때 질문을 못했는데........대체 왜 한국인 에이전시를 통해 농장을 안간 걸까요? 그 편이 훨씬 더 안전하고 빠르게 88일간의 노동경력을 채워줄 수 있는데.

@ 농장일에 초점이 맞춰져있지만 시티잡이라고 해서 그렇게 즐겁거나 만만한 것도 아니죠. 오히려 도시는 도시만의 소외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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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쓴
16/07/06 21:28
수정 아이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호주로 떠난 사람들을 통해 한국에서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네요.
16/07/07 21:50
수정 아이콘
그래도 둘다 해본입장에선 시티잡이....

서울 촌놈이라 그런지 농장일은 너무 힘들더라고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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