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인 더 스카이>가 설치해 놓은 딜레마의 덫은 상당히 정교하다. 영화는 도입부에 드론의 기술력을 보여주며 "어떻게"에 심취하게 만든다. 헬렌 미렌이 분하는 캐서린을 중심으로 영화는 곧바로 미션을 던진다. 드론을 통해 관객들은 용의자들을 쫓는다. 이들을 추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케냐는 대로변으로 무장군인들이 다니는 곳이다.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추적하는 방법은 바로 육안으로 식별불가능할 만큼의 높이에서 드론의 힘을 빌려 이들을 쫓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사냥감 대 사냥도구의 구도로 도덕적 질문을 잊게 만든다. 정의가 악을 응징하는 기술은 이렇게까지 발전했다라는 경이와. 이들을 안전하게 추적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라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고 만다. 아마 놀랄 것이다. 영화 속 동원되는 기술은 이미 SF에서나 가능하던 수준의 것들을 충분히 현실화하고 있다. 하늘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드론이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정보일치를 이룬 다음 근거리의 영상을 송신할 수 있다. 그게 안되면 새와 벌레로 위장한 카메라들을 원격 조작해 더 가까운 곳으로 침투시킬 수 있다. 이 영화가 섬뜩한 이유는 기술 자체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느끼기 전에도 이 기술을 이용해 "적"을 추적하는 데 온 신경을 쏟게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적인 난관을 세워놓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애쓴다. 마치 인간의 기술은 불충분하고 "다행히도" 이만큼 발전한 기술이 있기 때문에 악의 무리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처럼.
<아이 인 더 스카이>의 주인공은 헬렌 미렌이 연기한 캐서린 대령이다. 이는 영화가 관객들의 도덕적 딜레마를 어지럽히는 두번째 함정이다. 품격있는 군 지도자가 진지하게 어떤 이들을 쫓는다. 쫓기는 이들은 이미 자살테러를 뒤에서 주도한 위험인물들이다. 주인공은 상대적으로 가장 최전방에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고 있다. 주인공에 비해 다른 이들은 우유부단해서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다른 인물들에 비해 캐서린은 무결하며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에게는 보는 사람을 휘어잡는 매력과 주인공으로서의 당위가 함께 한다. 캐서린은 가장 옳아보인다. 관객은 그를 믿고 따라간다. 상황은 위급하고 관객은 캐서린의 책임감과 초조함을 느낀다. 여기다가 시간이 갈 수록 갈팡질팡하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으면 캐서린을 더더욱 지지하게 된다. 작전이 진행되는 곳은 캐서린이 있는 상황실이고, 결국 다른 공간들은 외부로 인식하게 된다. 심지어 캐서린의 상관인 벤슨 장군 역시도 외부인처럼 느껴진다. 그는 정치인들을 설득해 캐서린의 결정을 행동으로 연결해야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는 탁상공론의 다른 참여자처럼 캐서린만큼 대의에 절실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결과 이 영화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는 것은 "할 수 있음"이다. 영화는 영국에서, 미국의 드론 조종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케냐에서 작전을 실행하는 상황을 통해 국가간의 경계는 이미 작전수행에 큰 장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적의 엄밀한 식별을 위해 시간이 다소 걸리고 현장 요원이 고생하긴 하지만 모든 정보는 초중반이 다 지나지도 않아 밝혀진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감추려해도 기술로부터 완전히 달아나지는 못한다. 이제 결정만이 남았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작전은 감시와 체포의 영역에서 사살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고, 오히려 이들을 더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현장 요원을 동원한 다른 대응은 모두 늦거나 아주 어렵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신속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드론으로 이들을 사격해 죽여버리는 것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그런데 영화는 선택을 고사하며 새로운 갈등을 만든다.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이야기한다. 관객들은 답답해하기 시작한다.
영화 중간중간에 나오는 꼬마아이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다. 꼬마는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하기 직전 타겟이 된 집 근처에 자리를 잡고 빵을 팔기 시작한다. 미사일을 발사하기 직전, 드론 조종사들은 고뇌에 빠진다. 영화는 기술의 문제에서 윤리적 딜레마로 넘어간다. 쉬워보이던 문제는 어려워진다. 폭탄테러로 발생할 수백의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저 한명의 무고한 소녀를 죽여도 되는가? 어느 쪽이든 사람이 죽는다. 목숨값을 잰다면 한명분의 목숨이 수백명의 목숨보다 더 싸게 먹힌다. 그럼 저 소녀를 죽여야 할까? "할 수 있다"는 "해도 된다"로 이어지지 않는다. 드론 조종사인 와츠는 명령불복종에 준하는 태도로 미사일의 폭발범위를 다시 계산해달라고 한다. 캐서린은 답답해하면서도 그의 요구를 수긍한다. 그 머뭇거림은 인간의 나약함일수도 있고 인간다움의 마지막 증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서웠던 건, 객석에서 나오던 탄식이 짜증처럼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문제를 극복해도 결국 전쟁은 윤리를 극복하지 못한다. 전세계적인 통신망을 갖추지만 인간의 관료체계는 여전히 번거롭기만 하다. 그리고 그 체계 안에서 사람들은 고민하느라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하지 않으려 책임을 떠넘겨버린다. 결국 문제는 지지부진해지고 피해범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되도 최후의 한 수는 인간의 거짓말이다. 45%~65%의 치사율로 나오는 계산 결과는 의도적으로 45%가 최대한의 수치인양 전달되고 캐서린이 취사선택한 숫자는 와츠의 양심의 근거가 된다. 여기서 영화는 세번째 함정이 있다. 45%였으면 쏴도 되었을까? 그 수치가 진실이라면 과연 그 소녀가 죽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 무고한 누가 죽을지도 모른다 - 라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숫자는 결국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또 다른 표기법이다. 미사일은 발사되고 꼬마는 폭발에 휘말려 빈사상태가 된다. 캐서린은 재발사를 명령한다. 아직 폐허속에서 꿈틀거리는 이가 있으니까. 기술의 진화는 누구를 더 정확하게 죽일 수 있을 뿐, 누구를 지켜내지 못한다. 세계의 관심사는 시민의 보호가 아니라 위험분자의 제거다.
매크로의 확대를 향해 발전해오던 전쟁은 드디어 마이크로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굳이 케냐까지 출동하지 않더라도, 미국까지 날아가 허락을 구하지 않더라도 모든 정의는 앉은 자리에서 척척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현실이 정의의 승리를 보장해주는가. 인간은 인간인 채로 각자의 정의를 지지부진하게 부딪히며 살인의 선택 앞에 떨릴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세계는 쉬운 기술이 담보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다. 선택의 문제를 극복하고 거대한 불의를 진압할 수 있게 된 지금도 날카로운 정의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리는 사람들이 생기고 만다. 얼마나 더 멀리에서 더 정확해질 수 있을지 인간은 그 한계를 모른다. 지금의 한계는 결국 극복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기술은 인간을 지키지 못한다. 전쟁은 결국 적의 섬멸, 살인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인간의 순수 따위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모든 규칙과 숫자가 결국 이를 다루는 또 다른 인간에 의해 흐려질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정의는 불의한 이들을 죽일 수 있을 지언정 무고한 이들을 피해가지 않는다. 전쟁은 늘 그래왔다. 죽을 필요가 없어진 병사들은 죽지 않아야 할 이들을 결국 죽이고 말 것이다. 평화는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는 자들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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