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15대 총선의 결과만 놓고 보자면..
96년 당시 통합민주당은 입장과 위치가 현재의 더민주에 비교할 수 있는데
90년 유명한 3당합당이후 홀로 남아있던 김대중의 평민당과
노무현을 비롯한 3당합당 반대파들 거기에 야권무소속 재야인사등 91년에 모인 정당이었습니다..
하지만 96년 총선 9개월전 국민회의와의 분당으로 확 쪼그라들은 상태로
결국 현재 국민의 당 지지율수준의 득표율인 11.6%를 거두게 되죠
국민회의는 92년 대선패배이후 정계은퇴를 한 김대중이 다시 정계복귀를 선언하며
통합민주당에서 호남지분을 빼서 만든 정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당이후 통합민주당과 서로 굵직한 영입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위치야 국민의 당과 비교할 수 있는데
안철수와는 다른 김대중의 이름값으로 호남지분 전부를 빼갈 수 있었기에
득표율은 반대로 현재 더민주의 지지율정도인 25.3%를 얻어냈습니다...
합계 36.9%의 지지를 이렇게 나눠가진 결과는
국민회의 79석 통합민주당 15석이라는 대참패였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상황은 득표율 16.2%를 얻은 자민련까지 낀 4자구도로...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도 득표율 34.5% 139석으로 과반은 넘지 못하게 되었는데요...
자민련이라는 보수표가 있으니 여권도 분열된 것이 아니었냐고 할 수 있기도 한데..
지금도 지역주의가 선거판을 좌우하는 상황인데 당시에는 더한 지역구도로
자민련은 충청과 대구에서 선전했으나 수도권 특히 서울에서는 그리 힘을 못쓰기도 해서 단정하기는 어렵고...
아무튼 수도권에서 한정해서는 상당히 유리한 상황에서 야권분열이라는 사안이
다잡은 승리를 놓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참고로 최근의 국민의 당의 수도권 몰락으로 당시 통합민주당의 수도권 지지율 크기는
요즘의 정의당+국민의 당 일부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 국민의 당의 대부분의 지지는 호남으로 당시 충청 대구의 자민련과 비슷한 성격이겠죠)
당시 서울에서 얻은 의석수가 각각 27(신한국당) : 18(국민회의) : 1(통합민주당) : 1 (무소속) 의 결과로 나왔습니다만
단순한 셈법으로 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의 표를 합쳤을때는 그 의석수가 확연히 달라지게 됩니다..
시간상 세볼 수가 없어 정확한 수치는 없지만 신한국당은 겨우 10석쯤 얻었으려나...
19대총선의 32(민주+통진) : 16(새누리) 보다 더욱 기울어진 스코어가 나왔을 거라는 건 분명했습니다...
이건 절대 과장이 아닌것이 1년전인 95년 지방선거에서 분열되기전 통합민주당은
서울 지역의 기초단체장(구청장) 25석중 23석을 얻어냈고 광역의원(시의원)은 123 : 10 이라는 스코어를 기록했습니다...
지방선거에서조차 서울에서의 압승과 인천 경기에서도 반반을 유지하면서 수도권지역에서 우세를 이끌어냈으니...
이제 노무현등 PK지역을 두드려줄 인물들로 지역구도만 조금씩 착실히 깨어 나가면... 이라는 생각을 할 법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인 지방선거가 끝난후 한달도 지나지 않아..
96년 총선 9개월여를 남긴 시점에 김대중은 다시한번 노욕에 휩싸여 정계복귀를 선언했고
김대중의 은퇴이후 동교동계에서 누가 짱먹을 것인가를 다투었던
김상현 정대철등을 한방에 정리 그들을 모조리 끌고 나와 국민회의를 창당함으로서 야권분열과
그에 따른 참패를 자초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참고로2.. 김상현은 더민주의 서대문을 후보인 김영호의 아버지
정대철은 이번에 컷오프후 국민의 당으로 간 중구 정호준의 아버지입니다)
(참고로3.. 천,신,정이라고 불리는 세사람도 이때 국민회의를 통해 정치계에 입문 국회에도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김한길은 그전에 정주영의 국민당등 정치행보가 있었으나 역시 국민회의를 통해 첫 국회의원에 당선되지요..
출신이 이런 사람들이 참여정부시절 동교동계를 겨냥한 정풍운동을 하며 열린우리당을 주도했으니..
당시에도 그 결과에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의심은 이후에 완벽하게 증명이 되었죠...)
새삼스러울 수도 있게 20년전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몇가지 이유때문입니다..
우선 96년 총선이 지금과 딱 들어맞는 상황은 아니지만 서울 수도권으로 한정해서 보면 지금과 상당히 비슷한 형세이니..
야권분열이 얼마나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과..
97년 대선은 이인제의 출마로 이기게 되었으니 결과만 보면 김대중이 승리의 상징처럼 되었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
야권에 분란이 있을때마다 김대중같은 강력한 리더쉽 보스 정치인의 등장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 단점을 상기하라는 것..
분열전 통합민주당도 김대중이 은퇴상태로 나름 고만고만한 인물들의 각축장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보스 정치인의 등장은 자신의 욕심으로 정치현실을 더욱 후퇴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는 그나마의 브레이크도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희망도 있겠죠.. 아무리 총선을 망해도 상대방이 더 삽질하면 대선에서 이길 수도 있다는 것쯤의 희망같은...?
그래도 20년전엔 현재 더민주의 입장이었던 통합민주당은 단지 15석을 건졌는데 안철수와 김대중이 차이라 해도
지금은 더민주가 당시 국민회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것 또한 희망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