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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ea was once fertile farmland. Soon your blood will make it fertile again."
- Ta Hun Kwai, from Command and Conquer Generals: Zero Hour
Previously on Barbarossa...
독일의 부크 강 서안 영토 영유제의를 받고 기꺼이 참전한 루마니아는, 그러나 땅을 되찾고 더 넓히려는 욕심만 앞섰을 뿐 실제로는 소련군을 제대로 당해내기 어려운 약체였습니다. 이는 오데사 공방전에서 루마니아군의 손실과 소련군의 피해를 비교해보았을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공성전이라는 것이, 고대의 손자병법에 따르면 준비에만 여섯 달이 걸리고, 그 이전에 공격을 개시하면 병사의 1/3을 잃게 되며 그러고도 성을 빼앗을 수 없다는, 공격자 입장에서 엄청나게 까다로운 것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공격 개시 당시 다섯 배, 총 투입 병력이 세 배에 이르는 대군을 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자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데사 공방전에서 루마니아군이 9만 2천 명이 넘게 사망할 동안 소련군의 피해는 최대한으로 집계해 봐야 6만 명에 불과했고, 비록 포위섬멸의 우려 때문에 소련에서 스스로 물러나긴 했습니다만 이러한 대선전은 적어도 소련군에게 싸울 의지를 안겨줄 정도는 되었습니다. 결국 두 달 하고도 8일간의 격렬한 공방 끝에 루마니아가 오데사를 점령하긴 합니다만 이는 누가 봐도 피로스의 승리일 뿐이었죠.
8월 25일, 양 군의 상황
우선 중부 집단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는데요... 자세한 건 중부 집단군에 대해서 다룰 때 다루기로 하고, 대강만 이야기해 드리면, 이 때 중부 집단군은 민스크의 병력을 포위 섬멸하는데 성공하고, 계속해서 모스크바로 가는 관문인 스몰렌스크로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중부 집단군이 현재의 벨라루스 땅을 모조리 석권했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스몰렌스크는 러시아 연방 소속이자, 러시아 - 벨라루스 국경 인근에 위치한 도시였기 때문이죠. 이처럼 중부 집단군의 전진은, 남부 집단군의 그것과 비교해보았을 때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남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 사이에 돌출부가 끼어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죠.
그리고 남부 집단군은 우만에서 적의 20만 대군을 격멸시켜버리고 전선에 큰 구멍을 뚫어, 8월 말이 되자 아예 드네프르 강 서안을 죄다 석권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중부 집단군이 오른쪽 위로 가는 사선 방향(↗)으로 크게 전진하고, 남부 집단군이 오른쪽 아래로 가는 사선 방향(↘)으로 크게 전진하자, 당연히 그 교점이 되는 부분은 돌출부로 삐죽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마치 지도상에서 큰 부등호 "〈"를 그리듯이요. 그래도 이해가 안 가신다면, 이전 글에서 제가 써먹었던 전황 지도를 한 번 보시는 게 좋겠군요.
위쪽이 7월 11일, 저 시기가 대략 중부 집단군이 민스크에서 소련군을 격멸하고 소련군의 방어선에 구멍을 뚫어 전과확대(적의 주력부대를 섬멸한 이후 그 틈새로 밀고들어가 적의 후방으로 고속 기동하여 적의 방어선을 강제로 뒤로 밀어버리는 과정)를 노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벨라루스가 거의 석권된 것으로 나타난 겁니다.
아래쪽이 8월 25일, 이 때는 말씀드렸다시피 드네프르 강 서안을 거의 수중에 넣은 시기였습니다. 이제 지도를 보니까 제가 한 이야기가 이해가 가시는지요. 붉은 원 안의 별로 표시된 지점이 키예프로, 남서 전선군의 사령부가 있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돌출부가 그려졌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네요. 다른 것보다도 지형상의 문제였습니다.
지도출처 위키피디아.
빨간색이 키예프입니다. 보시다시피 키예프를 관통해서 강이 흐르고 있죠. 이 강이 바로 드네프르 강입니다. 언제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도강을 하면서 전투를 한다는 건 굉장히 까다로운 일입니다. 다리 자체가 병목 현상 때문에 전력을 강 너머로 보내는데 제한이 걸리고, 보트는 무방비며, 따라서 공병부대가 있지 않는 한 손실이 커지게 마련이죠. 이러한 점 때문에 강은 방어자에게 큰 우위를 가져다주고, 그래서 보통은 강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전선이 형성됩니다. 8월 25일까지의 남부 집단군의 진군이 드네프르 강까지로 정리된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놓고 보니, 졸지에 키예프가 있는 쪽이 불룩 튀어나오게 된 것이죠.
만일 남부 집단군이 격렬한 소련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거나, 소련군의 저항을 아주 효과적으로 분쇄해서 드네프르 강 북쪽에서 전선이 형성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었다면, 키예프가 주 전장이 되는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주 전장이 되었어도 충분히 남부 집단군의 힘으로 깨먹고 동진할 수 있었겠죠. 그러나 격렬한 저항, 특히 제가 남부 집단군 이야기 첫 편에서 언급했던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아주 효과적인 방어로 제1기갑집단군은 심각한 소모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우만 전투에서 적의 상당 병력을 깨먹은 것은 독일군에게 있어 좋은 성과였고, 때마침 중부 집단군은 스몰렌스크를 수중에 넣었습니다. 스몰렌스크가 중부 집단군 손에 떨어진 것이 8월 5일이고, 우만에서 독일군이 적의 주력군을 섬멸한 게 8월 8일의 일입니다. 시기상으로 별 차이가 안 나죠. 이렇게 놓고 전과확대에 들어가고 나서 보니, 로코소프스키만 아니었으면 어쩌면 진작에 먹어치울 수도 있었던 이놈의 키예프가 계속해서 눈엣가시로 걸렸던 겁니다.
제2기갑집단군
여기에서 뭇 2차대전 밀덕들에게 있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이 독자적으로 키예프의 적을 섬멸, 전과확대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고, 더구나 모스크바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경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스크바보다는 우크라이나의 잠재적인 엄청난 경제력 - 곡창 지대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밀과 돈바스의 공업지대 - 를 노리는 것이 백 배 낫다고 여겼던 것이죠. 그래서 히틀러는 스몰렌스크까지 진군하고 이어서 모스크바로 쭉쭉 나갈 준비를 하던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에게, 별안간 남쪽으로 방향을 홱 틀어서 남부 집단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리죠. 이게 그 유명한 "남쪽으로의 선회"입니다.
물론 구데리안이 격렬하게 반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부 집단군의 사령관인 페도르 폰 보크와 독일군 총참모장이었던 프란츠 할더, 그리고 구데리안 모두는 무조건 모스크바로 밀어붙여야한다고 생각했고, 구데리안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히틀러를 줄창 깠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습니다. 아 그런데...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이게, 왜 제가 그렇게 생각하냐면, 무엇보다도 키예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 수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죠. 아무리 남서 전선군의 절반인 소련군 제6군과 제12군이 날아갔기로소니 아직 소련군은 (후방에서 재편성 중이었던 부대까지 포함하여) 여전히 어마어마한 양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많은 병력을 찜찜하게 놔두고 측방이나 뒤통수 맞을 걸 우려해 가면서 모스크바로 돌진? 그건 소련군을 지나치게 "쉽게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키예프에 있던 그 병력이 어느 정도였냐구요? 키예프 방어전 개시 당시, 그러니까 남쪽으로 내려오는 제2기갑집단군을 측면에서 공격한 병력과 키예프 돌출부의 병력을 합쳐서
무려 62만 7천 명. (출처 러시아 어 위키피디아) 그에 맞서는 제2기갑집단군의 사단 수가 15개였으니, 아무리 잘 쳐 줘야 한 20 ~ 25만 가량은 되었겠죠. 이것도 최대 정원을 충족시킬 때 이야기고, 실제로는 계속된 전투로 병력 충원이 더딘 상황이었으니 20만도 안 될 겁니다. 실제로 스몰렌스크/우만/탈린 섬멸전 이전의 8월 2일에 독일군 3개 집단군은 6주간의 전투에서 18만 명에 가까운 인명 손실을 냈는데, 보충된 인원은 고작해야 4만 7천 명 가량뿐이었습니다(《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108).
거 제가 저번 글에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손자병법에서
아군이 적보다 두 배가 많으면 군대를 분할해서 운용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었다고 했었죠? 키예프와 그 측선에 있는 62만 7천 명의 병력이 모스크바로 돌격해 오는 제2기갑집단군을 바라만 보고 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한 사람의 병사가 기관총을 들고 열 명의 맨손으로 다가오는 적군을 사살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그게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 된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아무리 병사가 기관총을 들고 있기로소니 결국 제압당하는 쪽은 기관총을 드는 쯕이 될 테죠. 물론 백 명인 쪽의 피해도 어마어마하겠지만요. 하물며 소련군이 뭐 장비가 부족해서 몽둥이만 들고 나왔다는 제정 시대의 병사들도 아니고...
게다가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 자체도 이미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교두보 확보와 스몰렌스크에서 포위될 소련군의 물리적 섬멸 둘 다 해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마당에, 후방의 적을 무시하고 모스크바로 돌진? 그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그리고 어디 소련군의 예비 부대는 놀고만 있답니까? 외려 구데리안이 그대로 모스크바로 갔으면 측방과 후방은 그대로 노출되어서 역습을 당하기 십상에, 자체 전투력도 어쨌거나 계속되는 전투로 떨어져 있었던 만큼... 그건 그냥 "자살특공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이 독일군 장성들은, 나쁘게 말하면 제 성깔 못 버리고 또다시 적을 깔보고 무시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도 히틀러가 후퇴불가 현지사수를 남발해 대서 전쟁에 대해서 뭣도 모르는 찐따 취급을 오랜 기간 받아왔던 게 사실이고 실제로 전술이나 작전술 단계에서의 히틀러의 생각은 기껏해야 아마추어의 그것이었던 건 확실하지만, 독일군 장성들은 어이없게도 전략적 관점이라는 측면에서만큼은 자신들이 회고록 등에서 그렇게 줄창 깠던 히틀러만 못한 식견을 보여주었습니다. 괜히 히틀러가 우크라이나에 집착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쓰면 히틀러 실드 같아서 좀 거시기합니다마는 히틀러 이 양반도 스탈린만큼이나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우크라이나의 자원과 공업 지대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소련군의 힘을 빼자는 취지였죠. 뭐 하기사, 누가 알았겠습니까. 소련군의 뒤에 렌드리스가 있었을지... 그리고 렌드리스가 제대로 효과를 보기 시작한 건 1943년 가서였으며 렌드리스가 통과된 게 1941년 8월이니 적어도 소련군은 이 때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버텨야 했고, 그런 만큼 히틀러의 생각도 마냥 틀렸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클라우제비츠의 경고문을 다시 한 번 가져오죠.
"막연한 느낌이나 불확실한 상상만으로 공격과 기동만이 전쟁의 모든 것이며, 머리 위로 긴 칼을 휘두르며 전방으로 돌진하는 기병의 모습을 전쟁 양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 출처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p. 552
이것이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구데리안의 "그때 모스크바로 그대로 진격해야 되었다"는 말만큼은 믿기 힘든 이유입니다.
소련측의 문제
아 근데... 독일군에만 문제가 있던 건 또 아니었습니다.
일단 돌출부가 드러나게 되면, 이 돌출부는 당연히 방어하는 입장에서 어려워집니다. 세 방향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것만큼 골치아픈 일이 없죠. 게다가 후방이 잘려나가기라도 하면 그건 그대로 포위입니다.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하고 포위당한다는 건 곧 그냥 죽으라는 이야기죠. 그래서 돌출부가 생겨나면 그 돌출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돌출부를 지켜야 할 이득이 있는가, 적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행동을 빠르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 중 한 가지라도 판단이 어긋나면 최소 집중포화, 최악의 경우 섬멸로 이어지는 파국을 낳게 되죠.
그리고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 동지께서는 아니나다를까 아주 멋지게 헛발질을 넣습니다. 키예프라는 도시가 갖는 상징성 측면에서 키예프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마는, 문제는 이미 독일군의 남단은 드네프르 강을 따라서 소련군을 죽죽 밀어붙이는 통에 키예프 후방의 남측 측방이 엄청나게 노출되어 있었고, 여기에 독일군의 제2기갑집단군이 남측으로 방향을 틀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죠. 바로 이런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게오르기 주코프 당시 총참모장은 키예프에서 아군을 물릴 것을 줄기차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강철의 대원수 서기장 동지는 주코프를 레닌그라드로 보내버리고, 총참모장을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샤포시니코프(Boris Mikhailovich Shaposhnikov,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Ша́пошников)로 교체해 버립니다.
딴 소리를 좀 하자면... 샤포시니코프 이 양반, 놀랍게도 부됸늬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동년배 인물이었습니다.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부됸늬는 독소전 20년 전인 적백내전 때나 영웅이었던 사람인데, 그와 동년배가 총참모장... 그러나 샤포시니코프는 최소한 군의 현대화에 그렇게까지 무지하지는 않았던 인물이었고, 적어도 (주코프 등으로 대표되는) 자기 후배들의 발목을 잡지는 않았습니다. 기록적인 대패를 당하고도 그가 총참모장 자리에서 병환이 심각해질 때까지 앉아 있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마도 스탈린이 있었겠죠. 어쩌면 그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거는 그거고... 하여간 이런 연유로, 후퇴를 요구했다가는 모가지가 달아나거나 최소 좌천이었던 셈이죠. 결국 스탈린의 아집과 독선이 그의 눈을 멀게 만든 셈이었다고 해 두죠. 이게 키예프 비극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됩니다.
끓기 시작하는 가마솥
자세한 이야기는 중부 집단군을 다룰 때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어서 간략하게 언급하면,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 구데리안의 발목을 잡고자 하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2기갑집단군을 키예프 동북쪽의 브랸스크(Bryansk, Брянск)에서 측방을 엄습하는 작전이었는데... 문제는 이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이 밀고내려오는 시점에서는 그들의 준비가 다 끝나 있었고, 오히려 소련군이 인수인계 문제로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는 것이죠(《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111).
스탈린은 당시 브랸스크 전선군을 담당하던 사령관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예레멘코(Andrey Ivanovich Eremenko,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Ерёменко)에게 전화로 길길이 날뛰면서 승전보를 가져오라고 다그쳤지만(《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132), 아 뭐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고 우물물이 숭늉이 된답니까?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고, 그나마도 예비대를 다 까먹는 결과만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 동안에 키예프는 병력을 안 빼고 뭐 했냐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강철의 대원수 상대로 그 정도 정치력을 보일 수 있었으면 예레멘코가 반격을 시도하기 전에 진작에 뺐겠죠. 아니면 그 이전에 대숙청 단계에서 위험 분자로 몰려 제거되었거나. 하여간 이런 결과로, 이제 키예프의 후방에 독일군이 들어닥치는 건 그야말로 시간 문제가 될 뿐이었습니다.
9월 11일이 되어 반격이 완전히 돈좌되자 부됸늬는 모스크바에 전화를 걸어서 당장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요청했고, 그 결과는 부됸늬의 경질이었습니다. 겨울전쟁의 영웅 세묜 티모셴코가 부임한 것이었죠. 아 근데, 티모셴코도 진짜 불쌍한 게,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가 있었겠냐고요. 때문에 애꿏은 패전의 멍에만 티모셴코가 뒤집어쓴 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참을 쉬고 있던 남부 집단군의 제1기갑집단군이 행동을 개시합니다.
드네프르 강의 크레멘추크(Kremenchuk, Кременчу́к)를 돌파하여 크레멘추크의 130 km 북쪽에 있는 로흐비차(Lokhvytsia, Ло́хвиця)로 제1기갑집단군이 돌진해 올라가고, 때맞춰서 코노토프(Konotop, Конотоп)까지 밀고내려왔던 제2기갑집단군이 120 km를 추가로 더 밀고내려와서 로흐비차에서 조우합니다. 양 기갑집단군이 조우한 날짜는 9월 16일. 키예프에서 로흐비차까지의 거리는 약 220 km입니다.
이렇게 후방이 막히자 더 앉아 있다가는 자기가 죽을 판이라 티모셴코와 흐루쇼프(그 스탈린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던 대머리 아저씨 맞습니다)는 철수명령을 내립니다. 모스크바에서도 별수없다는 듯이 9월 17일에 철수명령을 내리죠.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늦어도 한참 때가 늦어버린 이후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빠져나오려면 틈이 있을 때 빠져나오는 게 정상이지, 포위망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의 일방적인 공세를 두들겨맞으면서 혈로를 뚫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이러니 스탈린이 욕을 먹을 수밖에요.
그래도 단기전을 준비했던 독일이었던지라 공군의 지원도 그렇게까지 활발할 수도 없었고, 소련군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치열하게 공격했으며, 무엇보다 독일군이 꽤 지쳐 있었던 탓에 포위망이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덕분에 부됸늬나 티모셴코, 흐루쇼프 등의 상당수 소련군이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어느 정도의 선견지명을 갖추고 독일군의 움직임을 독소전쟁 발발 전에 주시하고 있었던 남서 전선군의 지휘관 키르포노스 상장이 탈출을 시도하던 중 전사하고 맙니다.
이 탈출 당시의 전황도가 이렇습니다.
지도가 찍힌 날짜가 9월 19일인데, 이 날이 키예프가 함락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을 섬멸해 버리기 위한 독일군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었고, 포위망에 갇힌 소련군 4개 야전군 - 남서 전선군 소속 제5군, 제26군, 개전 당시 스타브카 소속 예비대였던 제21군, 스타브카 소속 예비대와 키예프 잔존군을 합쳐서 편성한 제37군 - 이 통째로 날아갑니다. 6월 22일에 남서 전선군의 제5군에 11개 사단과 다수의 연대, 제26군에 6개의 사단과 다수의 연대, 제21군에 10개의 사단과 다수의 연대가 있었고, 제37군이 편성될 때 예하 6개의 사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다 합치면 일단 기본적으로 사단만 30개가 넘는다는 이야기죠. 여기에 방어지원, 재편성 이리저리 끼여든 인근 야전군의 사단까지 포함하면...
영문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 일대의 소련군의 병력 손실은 이렇습니다.
총 사상자 70만 명 가량, 이 중 사망자만 60만 명. 얼마나 스케일이 컸던지 독일군의 피해 또한 사상자가 12만 명을 상회하는 엄청난 것이었는데, 소련군의 사망자 : 부상자 비율이 6 : 1로 어마어마할 때 독일군의 사망자 : 부상자 비율은 1 : 4 정도로 외려 부상자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그런 만큼, 이 키예프 전투는 소련에게 일방적인 피가 강요된 전투였다는 이야기가 되죠. 물론 그 피의 책임은 80% 이상 스탈린이 져야 할 것이구요.
위키백과와는 약간 수치가 다른데,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 의하면 날려먹은 소련군 병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포위망에 걸려든 것만 43개 사단, 병력 45만 2천 7백 20 명. 이 병력들 및 야포와 박격포 3,867문이 함께 전멸. 병력 및 다수의 시민을 합쳐 포로만 60만 명이 넘어감. 탈출에 성공한 것은 오직 이 중 1만 5천 명에 불과한 기록적인 대패였습니다.
여하간 이러한 파멸적인 결과를 세 글자로 요약하면 이만한 게 없죠.
대참사.
거 제가 이 글 서두에 적어놓은,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 제로아워의 장군 중 한 명인 타 훈 콰이의 대사를 보면... 이런 대참사에 소름끼치도록 어울리는 대사도 저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키예프 이후
완전히 키예프의 병력이 일소된 9월 26일 이후의 전황도를 보고 시작합시다.
9월 29일의 전황입니다. 보다시피 동쪽에 구멍이 아주 크게 뻥 뚫렸습니다. 종전에는 키예프에서 섬멸당한 4개 야전군과 함께 7개 야전군이 지킬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 독일군을 막을 소련군의 야전군이 셋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는 방어선이 얇아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따라서 이 틈을 노려서 독일군이 전과확대를 하고자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적의 방어선에 큰 구멍을 뚫어놓았으면 그 구멍으로 몰려들어가서 적의 후방을 교란, 적의 남은 저항을 분쇄하고 전과를 최대한으로 거둬가는 게 바로 투하체프스키의 종심 작전이자 독일군의 전격전의 골자였는데, 당연히 키예프의 섬멸전 이후에도 전과확대가 시도되었습니다.
그 결과 독일군은 자칫 대단히 까다로웠을 드네프르 강 도하의 교두보 확보를 매우 손쉽게 가져갔고, 이는 곧 다음 진격의 발판이 되었죠. 위 지도에서 독일군이 드네프르 강을 넘어 대거 몰려간 것을 눈치채셨습니까? 동쪽으로 약 150 km 를 진군해 가면 이제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의 남부 집단군의 목표인 하리코프(現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 Kharkiv, Харків)를 향해 돌진할 수 있었고, 동시에 남쪽에서는 공업지대인 돈바스로 몰려갈 수 있었으며, 남부 집단군의 예비대였던 제11군은 이제 안심하고 세바스토폴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과가 바로 제1차 하리코프 공방전, 제1차 세바스토폴 공방전 등으로 드러난 것이죠.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은 바르바로사 작전 종료일인 12월 5일입니다). 키예프 포위전을 넘어갔기 때문에 남부 집단군 이야기의 8할이 끝난 것은 맞습니다만... 앞서 언급한 하리코프나 세바스토폴 외에도 로스토프 공방전이라는 녀석이 하나가 더 있거든요. 글자수를 보니 9천에 다가가는 것이... 어째 이번에는 여기에서 잘라야겠습니다. 아마 다음 글, 혹은 그 다음 글 정도면 남부 집단군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그 다음에는 마지막 이야기인 중부 집단군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겠군요.
음, 글을 쓰고 보니 생각이 든 것이, 어쩌면 중부 집단군을 먼저 이야기하는 게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키예프 공방전은 중부 집단군에서 파견나온 덕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성과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뭐 중부 집단군도 북부 집단군에서 파견나온 제4기갑집단군의 도움을 받은 바 있고, 결정적으로 태풍 작전의 주 전장이 모스크바였기 때문에... 하이라이트는 항상 맨 나중에. 그래서 그냥 남부 집단군으로 밀어붙인 겁니다.
그러고 보니 라스푸티차 이야기가 계속해서 빠지는군요. 다음 글에서는 나올 겁니다. 첫 눈이 내리고 길이 진흙탕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10월 6~7일 정도인데, 키예프 공방전이 대강 마무리된 것이 9월 26일이니까요.
잡담입니다만, 말미에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건데, 눈시님 글이 올라온 거 보니 야밤이고 자시고 알아서 자동으로 스팀팩이 빨아지더군요(...)
자료출처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https://pamyat-naroda.ru/ops/ - 이 글에 쓰인 각종 전황 지도의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Kiev_(1941) - 키예프 전투.
https://de.wikipedia.org/wiki/Schematische_Kriegsgliederung_der_Roten_Armee_am_22._Juni_1941#S.C3.BCdwestfront - 남서 전선군 전투서열.
https://ru.wikipedia.org/wiki/37-%D1%8F_%D0%B0%D1%80%D0%BC%D0%B8%D1%8F_(%D0%A1%D0%A1%D0%A1%D0%A0) - 소련군 제37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