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8/24 12:04:33
Name 깐딩
Subject [일반] 동물의 고백(4)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꽤 큰 시스템의 총책임자 역할을 수행 중이다.

후배는 내 직속 후임이었고 그러다 보니 하는 일 역시 나와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언급했던 큰 위기는 시빌 워를 보고 난 이후 다음에 개봉될 엑스맨:아포칼립스를 보기 위해

회사에서 후배와 엑스맨을 정주행 하고 있을 때였다.

시스템의 핵심 기능은 아니었지만 일부 기능이 약 1시간가량 에러가 발생되어 정상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똑바로 일했다면 10분 내로 알았을 테지만 영화 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알 수가 있나...





우리는 다음날 팀장을 비롯한 임원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어야 했고

나는 총책임자 및 선임이라는 이유로 거기서 며칠을 더 사유서, 장애 보고서, 근무 상세일지 작성에 시달리며 고통받아야 했다.

2년을 넘게 다니면서 문제 한번 없이 일할 때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막상 문제가 터지고 나니

나를 이렇게 쥐잡듯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 보고 정말 회의감이 들었다.

다 때려치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묵묵히 욕을 먹으며 작성하라는 문서를 꼬박꼬박 작성해서 제출했다.

내가 여기서 똑바로 뒷수습을 하지 않으면 후배에게 불똥이 튈 거라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OO선배,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내가 잘못한 건데. 너는 잘 해왔어. 앞으로도 잘하면 되고"



그러면서 후배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내가 마블 히어로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스파이디의 열쇠고리를 선물로 주었다.

후배는 미안해 할줄 알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에 많은 내용이 들어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 열쇠고리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아마 평생 간직할지도 모르겠다.

여차저차해서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확히 3주 뒤 동일한 시스템 오류가 또 발생하여 장시간 서비스 장애가 일어난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처음 일이 발생했을 때는 '처음이라는 이유' + '지금까지 잘 해왔다는 이유' +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등의 다양한 수식을 갖다 붙이며

사건을 잘 무마시켰으나 채 한달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똑같은 오류가 발생했는데 그걸 또 몰랐다니.

행복에 겨워 눈이 먼 것인가... 내가 아홉수를 겪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나는 또 2주를 더 시달려야 했다.





두 번째 장애사건이 일단락되고 회사의 높으신 한 분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처음엔 시시콜콜한 내 입사 면접 때부터 시작하여 요즘 사는 얘기를 이어나가다 자리가 끝날 때쯤 본론으로 들어왔다.



"OO씨, OO씨가 우리회사랑 잘 안맞으면 내가 다른회사를 알아봐 줄 수도 있어"



권고 사직은 아니었으나 그와 비슷한 형태였다.



'네가 딱히 우리 회사에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아. 딴 데 갈 생각 있으면 가는게 어때?'



딱 이정도 의미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억울하기도 했고 분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회사를 나가야 한다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의 나였으면 받아들였을 제안을 그때의 나는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나는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일, 해냈던 일, 서운했던 일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토해냈다.

구차하고 추접스러웠지만 지금 이 회사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했던 저녁식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나게 되었고 내 목은 붙여놓을 수 있었다.

높으신 그분은 나에게 하루 휴가를 주었다.

머리를 식히고 오랜다.





그날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또 맥주를 꺼냈다.

'지금껏 잘 해왔는데 올해 들어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거야?'

아홉수 같은 미신을 핑계로 문제를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꼴에 프로그래머라고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정리하여 해결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려 보고 있었다.

그렇게 도달한 결과는 내가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된 그 일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원래 시야가 좁은 사람이다.

목적지가 있으면 그곳을 향해 똑바로 전진하며 주위에 뭐가 있던 신경 쓰지 않는 그런 타입이다.

이 회사에서도 이런 성향을 고수하며 살아왔는데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회사 사람들과 입이 트이고

주위를 자꾸 둘러보며 깝죽거리고 다녔던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짓을 해왔을까...'

다이어트를 시작해서 몸은 건강해졌지만 정신은 피폐해지다니.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올 초부터 나에게 생긴 모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자고.

친구에게 빌려준 돈,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정년퇴임으로 발생한 집안일, 두 번의 시스템 오류를 처리하면서 깨진 팀장과의 인간관계

등등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물론 거기엔 후배를 좋아하는 내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6/08/24 12:36
수정 아이콘
? 결론이 왜 이런식으로 달려가죠? ㅠㅠ
cluefake
16/08/24 13:03
수정 아이콘
결론이 음..
끝부분이 달지는 않을거같은 느낌이..
16/08/24 13:05
수정 아이콘
죽창 손질을 멈추어야...
어리버리
16/08/24 13:10
수정 아이콘
아니 지난편에서는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처럼 떡밥을 던져 놓으시더니 바로 다음편에서 다시 반대되는 떡밥을 던지시다니...스토리가 반전에 반전. 보는 사람도 이렇게 궁금해지고 답답한데 그 당시 글 쓰신 분은 무척 힘드셨겠네요.
16/08/24 13:18
수정 아이콘
그래서 인생이 참 재미있는거 같습니다 핳하
GreyKnight
16/08/24 13:40
수정 아이콘
저 정리는 이 애매한 관계로 인해 소비되는 정신력을 줄이겠다는 의미의 정리로 보이고
결국 '모 아니면 도'라는 마음으로 고백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분위기 상 결말은 죽창을 준비해도 될거라고 믿습니다...크크
제 어머
16/08/24 13:55
수정 아이콘
절단신공!
공개무시금지
16/08/24 14:56
수정 아이콘
평생 간직할지 모른다에 왠지 죽창을 준비해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도 솔로로 지낸다면 혹시 모를일이지만.

뒷이야기 기대해 봅니다 으흐흐흐
뚱뚱한아빠곰
16/08/24 15:08
수정 아이콘
답은 이미 나온거 같은데요?
"어쩌면 아마 평생 간직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사귀고 있으며, 결혼할 생각도 있고, 결혼이 실패하지 않는 한 평생 간직할 거라는 얘기자나요?

죽창!!! 죽창을... 아니지... 언능 유부남의 세계로 오시죠? 크크크
세인트
16/08/24 17:36
수정 아이콘
기쁜마음으로 죽창을 찌를 수 있는 결말이길 바랍니다.
죽창 내려놓고 위로하고 싶지 않아요...
살려야한다
16/08/24 19:19
수정 아이콘
죽창 찌르게 해주세요..!
16/09/28 07:24
수정 아이콘
미래에서 왔습니다. 아직도 후속편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메세지를 남깁니다.
16/09/28 09:15
수정 아이콘
으앙 크크
17/04/26 09:45
수정 아이콘
미래에서 왔습니다. 후속편이 나왔다는 메세지를 남깁니다
16/10/19 20:12
수정 아이콘
저도기다립니다..
17/04/26 09:46
수정 아이콘
미래에서 왔습니다. 후속편이 나왔다는 메세지를 남깁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7218 [일반] [야구] 한화 권혁 검진결과 팔꿈치염증 [34] 이홍기8118 16/08/25 8118 0
67217 [일반] 8월 전기요금이 나왔습니다. [81] 13043 16/08/25 13043 0
67216 [일반] 주로 보는 음악예능 TV캐스트 조회수 순위 [13] wlsak7102 16/08/25 7102 0
67215 [일반] 우리 시야에 아른거리는 벌레 같은 놈들의 정체는?... [61] Neanderthal12716 16/08/25 12716 21
66520 [일반]  [임시 공지] 관련글 댓글화 공지입니다. (클로저스 티나 성우 사건 관련) [29] Camomile10428 16/07/22 10428 2
67214 [일반] [데이터 약주의] 바르바로사 작전 (7) - 남부 집단군 (4) [22] 이치죠 호타루7261 16/08/25 7261 10
67213 [일반] 청일전쟁 - 평양성 전투, 황해 해전 [43] 눈시8340 16/08/25 8340 16
67212 [일반] [엠팍 펌] 7월 4일 김민우 언급하며 김감독 극딜했던 정세영 기자 코멘트.TXT [45] 피아니시모13225 16/08/24 13225 19
67211 [일반] 결혼할수있을까요 [113] 삭제됨12438 16/08/24 12438 8
67210 [일반] 갤럭시 노트7 충전 중 폭발? [52] 릴리스11275 16/08/24 11275 2
67209 [일반] 정의당 지지율 총선후 처음으로 3%대로 폭락 [118] 에버그린13731 16/08/24 13731 7
67208 [일반] [짤평] <라이트 아웃> - 참신한 아이디어, 식상한 이야기 [52] 마스터충달5304 16/08/24 5304 3
67207 [일반] 빌 게이츠 재산 100조 돌파 [65] 홍승식11453 16/08/24 11453 3
67206 [일반] [해외축구] BBC 여름 이적시장 가쉽., [74] V.serum6084 16/08/24 6084 0
67204 [일반] [야구] 한화 권혁 팔꿈치 통증 1군말소(25일 병원검진) [88] 이홍기10909 16/08/24 10909 2
67203 [일반] 걸스피릿 6화 무대들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27] 5드론저그5801 16/08/24 5801 6
67202 [일반] 주인님 나 이정도면 정말 오래 버틴것 같아요. [33] 녹용젤리11425 16/08/24 11425 26
67201 [일반] 홍준표 주민소환 준비 (거의) 완료 [20] 어강됴리8533 16/08/24 8533 2
67200 [일반] 신 고지라 흥행 대폭발 중 [31] 드라고나10539 16/08/24 10539 1
67199 [일반] 방금 인터파크 티켓에서 겪은 일.... [45] 웅즈9781 16/08/24 9781 1
67198 [일반] 온 세상이 다 대머리면 좋겠다. [65] 벼에서쌀을8506 16/08/24 8506 53
67197 [일반] 동물의 고백(4) [16] 깐딩3618 16/08/24 3618 6
67195 [일반] 기면증과 Modafinil (왜 감기약을 먹으면 졸릴까?) [6] 모모스20137640 16/08/24 7640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