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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6/08/24 12:04:33 |
Name |
깐딩 |
Subject |
[일반] 동물의 고백(4) |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꽤 큰 시스템의 총책임자 역할을 수행 중이다.
후배는 내 직속 후임이었고 그러다 보니 하는 일 역시 나와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언급했던 큰 위기는 시빌 워를 보고 난 이후 다음에 개봉될 엑스맨:아포칼립스를 보기 위해
회사에서 후배와 엑스맨을 정주행 하고 있을 때였다.
시스템의 핵심 기능은 아니었지만 일부 기능이 약 1시간가량 에러가 발생되어 정상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똑바로 일했다면 10분 내로 알았을 테지만 영화 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알 수가 있나...
우리는 다음날 팀장을 비롯한 임원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어야 했고
나는 총책임자 및 선임이라는 이유로 거기서 며칠을 더 사유서, 장애 보고서, 근무 상세일지 작성에 시달리며 고통받아야 했다.
2년을 넘게 다니면서 문제 한번 없이 일할 때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막상 문제가 터지고 나니
나를 이렇게 쥐잡듯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 보고 정말 회의감이 들었다.
다 때려치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묵묵히 욕을 먹으며 작성하라는 문서를 꼬박꼬박 작성해서 제출했다.
내가 여기서 똑바로 뒷수습을 하지 않으면 후배에게 불똥이 튈 거라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OO선배,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내가 잘못한 건데. 너는 잘 해왔어. 앞으로도 잘하면 되고"
그러면서 후배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내가 마블 히어로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스파이디의 열쇠고리를 선물로 주었다.
후배는 미안해 할줄 알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에 많은 내용이 들어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 열쇠고리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아마 평생 간직할지도 모르겠다.
여차저차해서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확히 3주 뒤 동일한 시스템 오류가 또 발생하여 장시간 서비스 장애가 일어난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처음 일이 발생했을 때는 '처음이라는 이유' + '지금까지 잘 해왔다는 이유' +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등의 다양한 수식을 갖다 붙이며
사건을 잘 무마시켰으나 채 한달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똑같은 오류가 발생했는데 그걸 또 몰랐다니.
행복에 겨워 눈이 먼 것인가... 내가 아홉수를 겪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나는 또 2주를 더 시달려야 했다.
두 번째 장애사건이 일단락되고 회사의 높으신 한 분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처음엔 시시콜콜한 내 입사 면접 때부터 시작하여 요즘 사는 얘기를 이어나가다 자리가 끝날 때쯤 본론으로 들어왔다.
"OO씨, OO씨가 우리회사랑 잘 안맞으면 내가 다른회사를 알아봐 줄 수도 있어"
권고 사직은 아니었으나 그와 비슷한 형태였다.
'네가 딱히 우리 회사에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아. 딴 데 갈 생각 있으면 가는게 어때?'
딱 이정도 의미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억울하기도 했고 분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회사를 나가야 한다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의 나였으면 받아들였을 제안을 그때의 나는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나는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일, 해냈던 일, 서운했던 일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토해냈다.
구차하고 추접스러웠지만 지금 이 회사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했던 저녁식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나게 되었고 내 목은 붙여놓을 수 있었다.
높으신 그분은 나에게 하루 휴가를 주었다.
머리를 식히고 오랜다.
그날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또 맥주를 꺼냈다.
'지금껏 잘 해왔는데 올해 들어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거야?'
아홉수 같은 미신을 핑계로 문제를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꼴에 프로그래머라고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정리하여 해결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려 보고 있었다.
그렇게 도달한 결과는 내가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된 그 일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원래 시야가 좁은 사람이다.
목적지가 있으면 그곳을 향해 똑바로 전진하며 주위에 뭐가 있던 신경 쓰지 않는 그런 타입이다.
이 회사에서도 이런 성향을 고수하며 살아왔는데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회사 사람들과 입이 트이고
주위를 자꾸 둘러보며 깝죽거리고 다녔던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짓을 해왔을까...'
다이어트를 시작해서 몸은 건강해졌지만 정신은 피폐해지다니.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올 초부터 나에게 생긴 모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자고.
친구에게 빌려준 돈,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정년퇴임으로 발생한 집안일, 두 번의 시스템 오류를 처리하면서 깨진 팀장과의 인간관계
등등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물론 거기엔 후배를 좋아하는 내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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