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찾아보시다가 날짜가 전체적으로 한 달 가까이 차이나는 글들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나중 쪽이 양력입니다. 이 시대는 양력 음력 헷갈릴 수밖에 없을 때죠. 전 양력으로 가겠습니다.
이 시기에 뭘로 해야 되나 고민되는 문제가 또 있는데 중국의 인명, 지명 문제입니다. 일단 신해혁명(1911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은 한국식으로, 이후는 중국식으로 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 사이에 걸리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뭐 실제로는 다 자기 마음대로죠 뭐. 청나라 사람이었냐, 어떤 방식으로든 탈청나라(=현대) 사람이었냐로 크게 나누긴 합니다. 전자의 마지막이 이홍장, 후자의 시작이 쑨원(손문), 위안스카이(원세개) 등이죠.
7월 말의 첫 전투, 8월 1일의 선전포고, 그 다음 전투는 무려 한 달도 더 넘은 후에 일어납니다. 양쪽의 상황 때문이었죠.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양국의 생산력은 아직 많이 부족했습니다. 특히 전쟁에 쓸 무기와 탄약, 포탄 등에서 말이죠. 생산은 무슨 외국에서 수입하는 게 다수였을텐데요. 소수를 파병하는 거야 크게 문제가 안 됐지만,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한다면?
조선의 환경도 문제였습니다. 전쟁 전이야 뱃길을 통해 왔지만, 전쟁을 시작한 이상 그럴 수 없었습니다. 북양함대는 멀쩡했으니까요. 그래서 일본은 추가병력을 부산과 원산으로 보냅니다. (기존의 파병 병력과 이 병력들 모두 5사단입니다) 문제는 잘 뚫린 길이 없었다는 거죠. 짐은 사람이 짊어지고 가야 했고, 강은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한양에서 충청도 북부로 가는데만 해도 고생했던 일본군입니다. 이 수송을 맡기로 한 조선인들은 일 안하고 도망가 버렸구요. 이 때문에 수송을 맡은 대대장이 자결했다고 합니다. 이후 8월 26일 조선과의 맹약을 통해 조선의 인력과 물자, 군사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었죠. 아예 수송할 인력을 일본 본토에서 보낸다는 결정까지 합니다.
+) 이걸 보면 왜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켜주기 위해 열심히 철도를 깔아주었는지를 좀 더 체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청은 사정이 좀 나았습니다. 한 방 먹었다 해도 북양함대의 강력함은 여전했으니까요. 전장이 북쪽이 될수록 중국 본토와 가까워지기도 했구요. 증원이 계속되고 도망쳐 온 청군이 합류하면서 평양의 병력은 만이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판 해볼만 했겠지만, 이홍장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이유는 있었습니다. 그는 피아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청이 유리해 보이지만, 청군은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거기에 청군의 주력은 그의 회군, 자신의 힘이나 다름없으니 아껴야 된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전투를 하면서 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는 평양을 지키면서 장기전을 준비합니다. 평양의 방어력은 강력했고, 공성은 방어병력의 세 배는 있어야 하니 방어전은 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정도 병력을 준비하려면 일본에겐 두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거라 여겼죠. 그정도면 청군이 준비할 시간도 벌고, 열강도 그쯤이면 개입할거라 여긴 것이죠.
더 북쪽으로, 아예 중국 영토로 간다면 더 유리했을 겁니다. 실제로 성환에서 패배한 섭지초는 평양을 버리고 더 북으로 가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조선을 포기한다는, 너무 소극적인 태도가 돼 버립니다. 정치적인 문제와 자존심이 걸리는 거였죠.
야마가타 아리토모. 조슈 3존 중 하나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이끈 인물이죠. 이토 히로부미급으로, 정말 거물이 온 겁니다. 참고로 세명 다 조선 침략에 큰 역할을 합니다. 다른 하나인 이노우에 가오루는 강화도 조약의 대표이자 조선의 일본 공사였습니다. (을미사변으로 유명한 미우라 고로가 그 후임이죠) 이토 히로부미야 말할 필요 없겠죠.
일본군이 강하다는 판단은 맞았지만, 그런 결정은 일본군에게 오히려 힘이 돼 줬습니다. 총사령관이 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추가로 투입하는 3사단을 인천으로 상륙시킨다는 과감한 결정을 합니다. 적 해군에 걸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강력한 북양함대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죠. 그냥 병사들만 보낸 게 아니고 그 자신도 인천 가는 배에 타고 왔습니다. 청군의 요격은 역시 없었습니다.
일본군이 분산돼서 오는 상황, 청군이 요격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청군의 전투력, 조선의 교통상황을 보면 요격을 못 하긴 했을 겁니다. 뭐 그래도 너무 소극적이었죠. 그리고 두 달은 걸릴 거라는 이홍장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군은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서 너무 적극적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이게 예상 못한 결과를 만들었죠. 이홍장의 예상보다도 양군의 차이는 컸습니다.
9월 중순, 일본군 육군은 평양성을 공격합니다. 한편 해군도 여순(뤼순)에 틀어박힌 청 북양함대와 결전을 벌이려 했죠.
-------------------------------------------------
평양성 전투에서 양군의 병력은 일본군은 1만 2천 정도, 청군은 1만 5천 정도라 합니다. 자료마다 차이가 있군요. 양측이 큰 차이는 아닌가 봅니다. 섭지초(예지차오)는 일본군이 3만이라고 보고했지만, 이미 성환 전투에서 사천도 안 되는 일본군을 2~3만이라고 보고하고 승리했다고 한 적이 있는지라 -_-;
+) 葉자가 여러가지로 읽혀서 섭지초를 엽지초로 읽기도 하는데, 섭지초 쪽이 맞는 모양이더군요
평양성의 방어력은 고구려의 예에서 보듯 나쁘지 않았고, 8월부터 청군이 열심히 보강작업도 했습니다. 하지만 평양이 아무리 알토란 같아도 방어군의 질이 딸린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정예병들은 총도 일본 것보다 좋았고, 각종 대포들도 일본보다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화승총부터 아예 총이 없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급히 징병한 병력들은 훈련도 기강도 형편없었고, 약탈을 일삼았죠. 이렇게 아군, 혹은 민간인에게 강한 자들은 적 앞에선 약해지죠. 여기에 성환 전투의 패잔병이 합류했습니다. 패잔병이 사기를 올려주진 않죠. 무엇보다 대장을 맡은 이가 섭지초, 직접 지휘하진 않았지만 성환 전투의 패장이었습니다.
일본군 일부 병력은 이미 평양 근처에 진출해 있었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평양을 노리는 걸 알게 되자 9월 7일에 7천여명의 병력을 보내 요격하게 하는데, 일본군이 공격한다는 말에 혼란에 빠져 지들끼리 싸우다 돌아갑니다. -_-; 그 후로도 신경전은 계속 벌어졌죠.
13일이 되면서 일본군이 몰려옵니다. 아예 북쪽길까지 틀어막았고, 14일까지 완전히 포위했죠. 일본군이 가장 중요히 여긴 건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군 주력이 가진 식량은 이틀분, 그것도 휴대용으로 들고다닌 찐쌀 뿐이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증원된 3사단은 거의 참전 못 하고 미리 왔던 5사단만 참전한 것이죠. 역시 속도를 중요시하느라 공성전임에도 야포는 거의 들고오지 못 했고, 거의 힘과 사거리가 약한 산포였습니다.
강으로 둘러쌓이고 북쪽엔 산까지 있습니다. 방어에 딱이죠.
일본군(원산에서 왔다 해서 원산지대라 했습니다)이 북쪽까지 막자, 섭지초는 공포에 빠집니다. 포위가 완료되기 전에 성을 버리자고 주장했죠. 하지만 좌보귀가 강력히 반대해서 실패합니다. 좌보귀는 자신의 병력들로 섭지초를 감시하게 합니다. (아예 감금했다는 말도 있네요) 이렇게 되면서 청군의 지휘권은 엉망이 돼 버렸고, 사기도 더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5일 새벽,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대동강 쪽 선교리의 경우 혼성 9여단이 강을 건너서 아침부터 낮까지 공격했지만, 실패합니다. 평지였던데다 방어를 맡은 마옥곤이 잘 지휘했기 때문이었죠. 일본군은 전방 보루를 빼앗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성내의 집들에 불을 질러 연기로 일본군의 진격을 방해하기도 했죠. 여단장 오시마는 결국 2시에 퇴각을 결심합니다. 전사만 140여명, 부상자는 290여명이라 합니다.
5사단의 주력은 서쪽에서 공격합니다. 산의 주요 고지와 보루들을 점령하고 경창문에 이르렀죠. 이후 밤을 기다려 공격하기로 합니다. 3시가 되면서 비가 쏟아져서 공격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요.
한편 5사단 휘하 원산지대와 삭령지대는 북쪽의 현무문을 노립니다. 맹공을 가해 모란대를 점령했고, 이어 현무문으로 갔죠. 하지만 여기서 돌격이 막힙니다. 이 곳을 지키고 있었던 게 바로 위에서 말한 좌보귀(무슬림인 회족이라 합니다), 현무문 위에서 부상을 입으면서도 독전하다가 총에 맞아 전사합니다. 이후 일본군이 무덤을 만들어 예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이후 하라다 주키치라는 자가 단신돌격해서 현무문을 점령했고, 청일전쟁의 상징적인 존재가 됩니다. 뭐 이런 상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특공입니다만, 실제로는 혼자 한 게 아니라는 등의 과장이 있다고 하네요.
이런 상황에서 비가 왔고, 일본군은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평양성의 각 문에서 올라온 백기를 보게 되었죠.
-------------------------------------------------
백기를 올린 것은 섭지초,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백기를 내걸었으니 공격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청군은 퇴각하겠다는 거였죠. 네... 그랬습니다. 좌보귀도 전사한 상황, 마옥곤만이 반대했지만 대세를 막을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문을 열라는 일본군의 요구에 비가 오니 내일 열겠다고 했죠. 하지만 이건 페이크로 밤 중에 몰래 달아날 생각이었습니다.
총대장이 이런데 병사들은 어땠겠습니까. 서쪽의 보통강을 건넌 일본군은 뒤늦게 성으로 가다가 소수의 청 기병을 보게 됩니다. 적절한 공격으로 잡고 포로를 잡았는데 하는 말이 가관이었죠. 좌보귀의 전사로 사기가 떨어졌고 좌보귀 휘하의 기병이 먼저 도망쳤으며, 자신들도 도망치고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역시 기병답게 발이 빨라서 이 때 다수의 기병이 달아났고, 일본군은 그걸 공격해서 132명을 사살하고 말 273두를 얻습니다. 그리고 성까지 가보니 백기가 휘날리고 있었구요.
저녁 7시, 청군 다수가 달아납니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죠. 평양성 전투에서 양군의 피해 차이가 꽤 압도적인데, 대부분이 이런 탈출 과정에서 나온 겁니다. 오히려 (당연한 얘기겠지만) 공성 당시에는 일본군의 피해가 더 컸죠.
+) 이걸 학살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르겠네요. 항복한다곤 했지만 승자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도망간 것이니. 임진왜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도 도망가던 명군이 일본군에게 많이 죽었었죠.
그러고도 참 열심히들 도망갔습니다. 성 내에 남아있던 청군은 부상자와 부상자를 위해 남은 사람 정도였죠. 자정부터 일본군은 평양성에 입성을 시작, 아침까지 평양성을 점령합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약 300년 후에 다시 벌어진 평양성 전투는 이렇게 일본군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청군은 전사자만 2천여명, 부상자는 4천여명까지 집계합니다. 포로가 된 건 부상자 127명을 포함한 600여명, 여기에 청군이 버리고 간 많은 무기들과(소총탄만 56만발이었습니다) 군량으로 일본군은 한숨 돌리게 되었죠.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180명, 부상자 506명이었습니다.
+) 그냥 나름 유명한 사진이고 삼국군 다 있어서 넣어봅니다.
이 때 의외의 조선군 피해도 있습니다. 조선군이 일본군을 돕는다는 건 전에 얘기했지만, 평양에선 좀 달랐죠. 평양감사 민병석은 대원군의 밀서를 받고 휘하 병력으로 청군을 도왔다 합니다. 이 때문에 십수명의 조선군 피해가 있습니다.
양국의 질 차이니 적극이니 소극이니 얘기했지만... 이건 정말 일본이 잘 싸운 게 아닙니다. 청이 그냥 무너진 거였죠. 아니 일본이 청에게 승리당한 전투라고 할까요?
병사의 질도 질이지만, 섭지초는 정말 트롤링 수준입니다. 이홍장의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죠. 좌보귀 등 잘 싸운 이들도 있고 의외로 첫 방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총대장이 무너진 상황에서 다 무너질수밖에요. 여기에 애초에 요격을 잘 못 하고, 강을 도하하는 것도 그냥 내버려둔 점 등도 문제였죠.
이런 점 때문에, 그리고 사상자 수에서 나오는 차이 때문에 일본의 압승으로 생각하기도 쉽지만, 그렇진 않습니다. 조선의 교통환경 때문이라 해도 야포의 수가 적었고, 식량도 탄약도 부족했죠. 첫 날 공격에서 이미 탄약이 거의 바닥난 부대도 있다고 합니다. 반면 성 내의 청군은 물자가 부족하진 않았죠. 정말 2~3일만 더 버텼다면? 우리에겐 참 좋았을 결말이 날수도 있었습니다. 이러면서도 무작정 돌격만 했고, 큰 피해를 입었죠.
이런 속사정을 알기는 힘든 법, 일본 내에서나 외국이나 깜짝 놀랍니다.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던 청군을 물자도 부족하고 긴 행군을 했던 일본군이 이겼으니까요. 승전의 기쁨 속에 멀리해야 할 뽕에 차츰 물들게 됩니다. 물자는 부족하지만 근성정신은 무한한 것,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목숨 걸고 공격하면 적들은 무서워서 내뺀다는 거였습니다. 이 전투만 보면 틀린 얘긴 아닌데요 뭐. 자... 이 얘기를 너무 빨리 했네요. 뒷편에서 마저 얘기하겠습니다.
이세발레 버드 비숍은 조선에 3년동안 살았고,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이라는 기행문을 남깁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죠. 미지와의 조우 시리즈 쓸 때 이 얘기까지 하려고 했었는데 -_-a 아쉽군요. 아무튼 그녀는 전투 1년 후의 평양에 가게 됩니다. 평양은 청이 파괴하고 갔고, 일본군이 들어와서 또 파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1년이 지나도록 그 참상이 남아 있었다고 하죠. 다행히 점령한 초반이 지난 후에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물건을 사거나 쓸 때 대가를 지불했다고 합니다.
육군이 평양을 점령하는 동안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계속 북양함대를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양함대는 소극적으로 나왔고, 일본군의 움직임을 알고도 대련만에서 나오지 않았죠. 하지만 계속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수송선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여기에 청 내의 여론도 계속 북양함대를, 정여창 제독을 쪼아대고 있었습니다. 황제인 광서제까지도 타박했죠. 결국 정여창은 16일, 수송선을 호위할 겸 함대를 출격시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이 정보를 접수하게 되죠.
17일 오전 10시경, 양국 함대는 조우합니다. 각기 10여척씩이었죠.
정여창의 북양함대는 단횡진을 짭니다. 배의 정면을 적을 향해서 돌격하는 거였죠. 배의 앞에 있는 대구경포와 충각을 활용하기 위한 거였습니다.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스케유키
1유격대장 쓰보이 고조. 단종진에 능해서 별명이 미스터 단종진이었다 합니다.
한편 일본군은 단종진을 짭니다. 배의 옆을 적에게 드러내는 거였죠. 측면에 포를 많이 싣는만큼 적에게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죠. 대항해시대부터 계속 유행한 진형입니다.
이런 식이었죠.
양측이 차츰 접근했고, 1유격대는 빠르게 청 함대의 우익으로 파고듭니다. 한편 연합함대 본대도 다가오는 청 함대와 맞서 싸웁니다.
그냥 간단히 이런 걸 떠올려봅시다. 임요환이 마린으로 러커나 울트라리스크를 잡는 장면을요. 충각은 빠르게 움직이는 일본 함대를 따라가지 못 했고, 겨우 잡으려 하니 요리조리 도망가 버립니다. 이러니 오히려 적의 집중포화에 노출되게 되었구요. 13시쯤 돼 청군의 별동대가 전투에 합류했고, 일본군의 피해도 늘어나긴 합니다. 하지만 전황은 일본 쪽으로 기울어 갔죠. 16시가 될 무렵에는 이제 정원과 진원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배는 침몰하거나 큰 피해를 입고 대열을 이탈했죠.
그래도 울트라는 울트라라서 많은 피해를 입고도 정원과 진원은 멀쩡했습니다. 정원이 이 날 맞은 게 159발, 진원은 무려 220발을 버텼다 합니다. 오히려 15시 30분쯤 진원함의 포탄이 일본의 기함 마츠시마에 명중했고, 전투능력을 상실했죠.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당시 중상을 입은 한 수병이 부함장 무카야마 신고에게 이런 질문을 했고, 그는 이렇게 답 했다 합니다.
"안심하라. 적함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
네 이걸로 영웅을 만들었고 [용감한 수병]이라는 군가도 만듭니다.
연합함대는 각기 후퇴하는 적들을 쫓다가 17시 30분쯤 다시 집결합니다.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이었죠. 이들이 후퇴하면서 북양함대 역시 여순항으로 후퇴합니다. 이렇게 황해 해전이 끝이 나죠. 북양함대는 다섯척이 침몰하고 세척이 대파되었고, 연합함대는 네척이 대파되었습니다. 일본군의 압승이었죠.
청일 양국해군의 실력차이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중국의 함대편제는 매우 단순하며 일본해군은 진정한 제국해군으로 함대편제가 완전히 서방해군의 편제를 모방하였다. 일본군함의 모든 수병과 대부분의 군관은 모두 서방의 훈련방식으로 배양되었다. 일본군함은 여러 차례 원거리 항해를 했고, 군관 모두 효율적인 지휘를 할 수 있다. 외국 해군에서는 일반적으로 서양인 고문이 떠난 이후부터 중국함대의 효율이 크게 떨어졌다고 본다. 톤수나 대포문수나 중국이 일본을 이긴다고 말할수 있더라도 편제 규율 훈련에서 일본은 중국보다 크게 앞선다. 따라서 일본 해군 역량은 비교적 강하다고 볼 수 있다 - 청일전쟁 직전, 영국 해군부 비밀문서
황해 해전 역시 청일과 열강 모두를 놀라게 한 해전입니다. 평양성 전투와 황해 해전으로 열강은 일본을 청보다 확실한 우위로 보게 되었죠. 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일본 해군이 유리했고, 당시에도 그걸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북양함대는 정원과 진원이라는 슈퍼스타가 있었지만, 속 빈 강정이었습니다. 이홍장과 정여창은 바다를 몰랐고, 수병들도 제대로 훈련이 안 돼 있었죠. 이러니 배가 아무리 좋고 대포가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었죠. 거기에 이 대구경포(305mm)는 명중률과 연사력이 많이 딸렸습니다. 맞으면 대박이지만 맞히기 힘들고, 수병들도 훈련이 안 되니 더 심했죠. 일본의 승리요인인 중소구경 속사포(120mm, 150mm 등)는 수가 적었고, 정여창이 계속 요구하다가 전쟁 직전에야 겨우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고도 단횡진을 선택해 좌우의 대포를 제대로 활용 못 했죠.
애초에 양측 정부의 의지 차이도 컸습니다. 서태후는 1888년에 해군에 투자를 멈춥니다. 돈이 없으니 더 이상의 보강도 할 수 없었고, 여기에 부정부패까지 끼어들면서 쓸 돈이 더욱 줄었죠. 보유한 포탄도 너무 적었다고 하구요. 그리고 정원과 진원이 강력하다 하지만 이를 호위하고 같이 싸울 순양함들은 작았습니다. 일본군의 주력 순양함들이 2천톤에서 4천톤까지 다양한 반면, 북양함대는 2800톤짜리 두 척을 제외하면 2천톤 초반이거나 천톤까지 내려갔죠. 장갑함들이 일본군에 별 피해를 못 주는 상황이면 순양함끼리의 싸움은 일본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죠.
반면 일본군은 노림수가 잘 맞았습니다. 고속 순양함을 사 기동력으로 승부한 것 말이죠. 전투시에 빨랐던 1 유격대는 속도를 이용해 적의 우익을 파고들었고, 비교적 느렸던 본대는 본대대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꾸준한 기동훈련을 해 왔었고, 덕분에 대단한 조함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대구경포는 없어도 중소구경 속사포를 잘 이용한 것도 주요했죠. 일본의 삼경함에 실은 대구경포도 별 활약을 못 했습니다. 이렇게 속도를 중시한 함대와 본대를 분리해서 쓰는 것과 속사포를 쓴다는 것, 충각은 쓸 게 못 된다는 전훈을 일본과 열강에게 보여준 해전입니다. 평양성 전투가 일본이 승리당한 전투라면, 황해 해전은 청의 문제도 컸지만 일본 해군이 정말 잘 한 전투입니다.
+) 훗날 태평양 전쟁 생각하면 의외인 부분이 삼경함을 사놓고 안 통하는 걸 알자 바로 태도를 바꿨다는 점이죠. 후배들이 선배들보다 못 한 모양입니다
+) 이런 훈련과 군기를 위해 엄청난 구타와 가혹행위가 있었죠 뭐. 러일전쟁 이야기라는 만화를 보시면 이걸 참 재밌게 정당화하는 걸 볼 수 있으실 겁니다. 국군 내 가혹행위를 변명 내지 정당화 하는 논리와 똑같더군요
이후에도 이홍장은 함대의 보전만 요구합니다. 최대한 수비적으로 나오고 배를 지키라는 거였죠. 덕분에 일본 연합함대는 마음껏 날뛸 수 있었습니다. 결국 청일전쟁시기 청 해군은 해군으로서의 역할을 아예 못 한 겁니다. 일본군을 제대로 요격하지 않았고,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수송선을 찾아다니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지 몰라도 일본 육군의 활동은 더 제한됐을 겁니다. 최소한 3사단이 인천에 떡하니 상륙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아직 북양함대가 멸망한 건 아닙니다. 거기에 다른 함대들도 더 있었죠. 하지만 모두 자기 역할을 하지 못 합니다.
조선에서 청군이 모두 축출되었습니다. 청은 일본의 [도움]을 통한 조선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죠. 일본의 1차 목표는 달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 이상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만주였죠.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요즘 드는 느낌이 2016년 현 시점에는 드디어 100년전 이 사건들이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과 상관없이(물론 역사학의 특성상 완전히 분리 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초연한 마음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이 변화일 뿐일수도 있지만 소위 말하는 국뽕, 좀 진지하게 말하면 민족주의가 이전만큼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젊은 층에게는 과거의 절대적이었던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하면서 부터 정치색을 빼 버린 역사로 보게 한달까요. 물론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배는 나쁘다는게 제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일본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일본 정부를 악으로 보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아니다. 이건 좀 오래되었네요. 저도 일본사를 좋아하고 많이 이것저것 찾아 본 사람이라서.
뭐 결론만 정리하자면 이때 일본이 날뛴다고 그걸 한탄하는 마음으로 본다기 보다는 '어 이녀석 대단한걸?' 이런 기분으로 읽는달까요.
실력 차이가 있었기에 얻을 수 있는 운이었겠지만, 그렇죠 뭐. 조금만 더 잘 버텼다면 결과가 달라질 게 많았을 테니까요. 근데 오히려 지휘관이 먼저 도망가 버리고.
진짜 오히려 그 운빨이 더 독으로 다가와 버렸으니, 재밌다 해야할지 씁쓸하다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안 보이는 사진들은 저한테도 보였다 안 보였다 하네요 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
켄신을 챙겨주는 형 중 한명이자 유신정부의 핵심 인물이라는 소개가 나옵니다.
라지만 앞쪽은 가츠라 고고로우에 밀리고(이 사람은 뭐 분량이 많아서), 스타성은 다카스기 신사쿠에 밀리며, 후자는 오오쿠보 도시미치의 존재감에 밀립니다(작중 주요 인물에 의해 암살당함). 사무라이 스타일 모습 한번, 유신 이후 정복 차려입은 모습 한번 나왔던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