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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8/01 18:45:13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남한산성 이후 - 3. 그 때 그 사람들 (임경업, 정명수, 최명길, 김상헌)


bgm은 또 추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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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경업

"천하 일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나를 죽일 수 없다!"

1618년에 무과에 급제, 이괄의 난 때는 진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으며, 정묘호란 때는 낙안군수였습니다. 임경업을 설명하는 글들에서는 그가 정묘호란 때는 아슬아슬하게 항복해 버려서 공을 못 세웠다느니 -_-; 병자호란 때는 청이 임경업이 무서워서 피했다느니 하지만... 이 전쟁 기간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시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건 그가 죽을 때까지도 계속됩니다.

정세를 모르고 의만 쫓는, 뭔가 임란 때의 먼치킨 그 분이 떠오르는 이미지지만, 실록에 나타나는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예를 들면 28년 낙안군수였을 때 김류에게 선물을 보냈는데, 이 때 품목이 20개나 됐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크게 탄핵을 당했는데 재밌게도 인조는 철저하게 그의 편을 들며 오히려 탄핵한 대간을 처벌했다고 합니다. 공신 김류의 입김이 작용한 건지, 그만큼 임경업의 능력이 인정받은 건지는 모르겠군요.

정말 재밌는 건, 대간이 그를 탄핵할 때 "천얼" 출신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양인 첩에서 나온 자식을 서자라 하고 노비 첩에서 나온 자식을 얼자라고 합니다. 합쳐서 서얼이죠. 그는 노비의 자식이었던 겁니다. -_-; 반정 때 김류의 군관이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별로 주목을 못 받다가 김류의 지원 아래 성장한 거라고 봐야겠죠. 그가 죽었을 때 사관 역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임경업의 모습은 많이 꾸며진 것으로 봐야겠죠.

명의 공유덕, 경중명이 청에 투항할 때 이를 막아 큰 전과를 거뒀다고 하는데, 역시 신빙성은 없습니다. 다만 이 때 명에서 임경업이 잘 했으니 포상하라는 것으로 봐서 뭔가를 열심히 한 것 같긴 합니다. 마찬가지로 청천강 이북을 포기할 때 이에 맞서 싸우다 파직됐다고 하는데 역시 실록에 없습니다. 이건 누락됐을지도 모르겠네요. 청북 방어사에 그를 곧바로 앉힌 것을 보면 그런 주장을 한 건 확실해 보이네요.

33년에 청북방어사가 되었는데, 이 때 조정에서 받은 지원금을 가지고 밀무역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크게 욕 먹지만 다행히 짤리진 않았죠.

이후에 나올 명으로 도망가는 부분에서 인조는 크게 한탄합니다. 이는 숙종까지 이어져서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가서 임금을 근심하게 한 죄"를 논하죠.

우리가 아는, 의만 아는 우직한 임경업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모습들입니다. 호란 이후 그는 송시열 등에 의해 크게 띄워집니다. 저 부분을 나쁘게만 본다면 (광해군 대의 무과 급제도 구라고) 반정 때 김류를 따르는 일개 병사였다가 공을 세워 급속 출세한 거라고 볼 수 있죠. 이후에는 반청의 상징으로 신격화 됐구요.

결론을 내렸으니 임경업 얘기는 이걸로 끝... 내기는 아쉽죠. :) 저런 문제 제기에도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습니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재물을 모은다는 비판이 있지만, 임경업이 실제 저걸 가지고 한 건 출세도, 축재(재물을 모음)도 아닌, 어진 정치였고, 청북의 방비였다는 것이죠. 충청및 전라도의 수령들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그는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아 포상 받았으며, 초토화 된 청북으로 가서 홀로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백마산성을 보수해 계속 주둔했습니다. 가도의 명군에 털리고, 청군에 털려서 고통 받는 백성들이 다시 모인 공은 오로지 임경업 혼자에게 돌려야 될 정도죠.

반청에 맞춰진 것을 한 번 벗겨 보면 다른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상 때문에 청북방어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의주 부윤에 임명됩니다. 밀무역을 한 것은 모두 방어할 물자를 구하려 한 것이었고, 진이 빠질 때로 빠진 백성들도 임경업과 같이 성을 지키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의주의 백마산성은 호란 후에는 청에 밉보인 조선 관리들을 가두는 성으로 이용될 정도로 청과의 교류가 흔한 곳이었습니다. 한편 호란 후에도 명나라의 배(한선)이 계속 나타날만큼 명과의 관계도 깊은 곳이었죠. 그럼에도 그가 명청 양 쪽에 밉보였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국제 정세도 모르면서 반청만 부르짖는 사람을 그런 중요한 곳에 앉혀두면 어떻게 될 지 뻔히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적진에 보내서 죽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던 김상헌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거죠. 하지만 임경업은 청에서 욕은 커녕 칭찬과 상을 받았고, 명을 정벌할 때도 언제나 임경업이 갔습니다. 명도 청도 모두 그를 신뢰했다는 것이죠. 여기서 그의 진정한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처세술이 상당히 좋았던 장수로 봐야 될 것이죠. 남들 다 하는 윗사람과의 교류, 타국 장수들을 대하는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을 고루 갖춘, 어쩌면 일본의 인간 재해였던 그 분도 갖지 못 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물론 능력치 총합에서야 비교가 안 되겠습니다만) 누르하치가 일어난 이후 계속 풍파에 시달리던 청북에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처세술을 가지고서도 재물도 모으기 힘들고 최전방이라서 가장 위험한 청북을 거부하기는커녕 자원한 모습, 이것이 임경업의 모습이었던 거죠. 마찬가지로 충을 너무 강조하다가 진정한 위대함이 깎여버린 그 분과 너무나도 비슷한 케이스입니다.

뭔가 찬양 일색이군요. 뭐 슬픈 건 그럼에도 그 재능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는 거겠죠. 정말 할 얘기가 없습니다. 정묘호란 때는 일찌감치 항복, 병자호란 때는 백마산성에서 틀어박혀 있었고 명나라 원정 때는 태업하다 욕 먹고 하는 식이었죠. 하지만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 옵니다.

육로가 완전히 끊긴 후에도 한선은 계속 나타났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최명길은 정태화, 임경업과 의논하여 한선에 식량을 제공하고, 독보라는 중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기로 합니다. 한편 조선배도 난파됐다는 핑계를 대고 명으로 보내기도 했죠. 하지만, 42년에 걸려버렸고 청은 관련자들을 압송해 오라고 지시합니다. 이 때 심기원이 그를 찾아 오죠.

"그대가 어찌하여 헛되이 죽음의 땅으로 가려 하는가"
"국가에서 잡아 보내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임금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최상(최명길) 이 대처하는 바를 보아서 대처하겠다"

심기원은 그를 계속 설득하며 은 700냥과 승복 및 머리 깎을 칼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결국 탈출을 결심해 머리를 깎고 숨었다가 43년 5월 마포에서 배를 뺏어 명으로 향합니다. 명에서 군사를 청해 의주를 탈환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청에 투항하는 한인들이 늘어만 가던 명은 당연히 그를 환대했죠. 4만을 통솔할 수 있는 평로장군에 앉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상관들도 청에 항복하고 명은 멸망했죠. 그 역시 포로가 됩니다. 청 역시 그의 재능이 아까워서 딱히 처벌하지 않고 귀순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터집니다. 심기원이 모반을 일으킨 거였죠. 모반 자체야 거사 직전 탄로나서 실패합니다. 명분이 "청에 무릎 끓은 조정을 없애고 다시 명을 섬기자"였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인조 정권의 약점을 아주 제대로 찌른 거였죠. 정작 심기원은 김자점과 함께 병력을 움직이지 않아 병자호란 패전의 큰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별로 안 중요합니다. (그저 명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이 때 나온 이름이 바로 임경업이었습니다. 심기원이 그를 명으로 보내서 호응하게 했다는 거였죠. 조정은 발칵 뒤집힙니다.

마침 명이 멸망하고 임경업 역시 청에 포로가 된 게 확인된 상황이었습니다. 비변사에서는 정명수와 연계해서 그를 입국시키려 했죠. 45년에 청에 사은사로 간 김자점은 다음에 청의 사신이 올 때 이런 말을 하라며 조언을 해 줍니다. 인조는 이를 따라 청의 사신에게 "임경업은 청에게도 역적이다. 우리에게 돌려보내 시시비비를 가리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청은 어린 순치제가 있었고 구왕 도르곤이 섭정하고 있었습니다. 도르곤은 선선히 허락합니다.

그의 친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임경업은 심기원에게 돈과 승복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역모 사실은 몰랐다고 하며 낙안 군수였을 때 심기원과 사이가 크게 나빠졌다고 진술했습니다. 그가 명으로 떠나는 날을 심기원이 어떻게 알았냐고 심문하자 김자점의 아들 김식에게 알렸다고 진술했죠. 이 때문에 논의가 시작됩니다. 그 때 김자점은 죄를 받지 않고 오히려 친청파의 거두로 인조 정권에서 활약했습니다. 애초에 김자점은 임경업을 후원하는 입장이었습니다만... 여기서는 계속 까기만 했죠. 인조도 "죄인이 권세 있는 자를 끌어들이려 한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그는 임경업이 무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내가 헤아려 보건대 경업은 보통 무사가 아니다. 기원이 스스로 반역을 도모하면서 꾀어 들여보낸 것은 일이 이루어진 뒤에 불러다 등용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만일 그와 함께 일을 벌였다면 심복 대장을 어찌 멀리 보낼 수 있겠는가."

"(설사 그렇다 해도 역적이라는 원두표의 말에) 경업이 역모인 줄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적 심기원 단독으로 구실을 삼은 것이라면 그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때 실록의 상황이 참 신기합니다. 임경업의 진술을 듣고 회의를 하는 중에 갑자기 그가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인조의 반응입니다.

"경업이 죽었단 말인가. 그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가 그에게 알려주려 하였는데 틀렸구나. 그가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이렇게도 빨리 죽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담력이 커 국가가 믿고 의지할 만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꾀임에 빠져 헛되이 죽고 말았으니, 애석할 뿐이다"

김자점이 엮이자 바로 죽었다는 점을 통해서 그가 책임회피를 위해 임경업의 고문을 가혹하게 해서 죽였다는 설이 퍼져 있습니다. 그리 틀린 건 아닌 듯 하네요. 이후 그와 관련된 자들은 유배하거나 석방했습니다. 그 때 김자점이 한 말을 보면 조정의 분위기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죠.

"사대(事大)는 반드시 성의껏 해야 합니다. 이번에 청나라가 경업을 보내주고 또 선량(船糧)을 감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에 일이 많지만 만일 절사(節使)를 통해 그 은혜에 사례한다면 소홀하게 될 듯하니 별도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가 청에서 무얼 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흔히 알려진대로 명에 대한 의리를 잊을 수 없어서 청에 굴복하지 않고 다른 걸 준비했을 수도 있고, 오히려 청에 귀순하려 했을 수도 있죠. 정명수가 여기에 참가한 이유를 임경업이 청에 귀순할 경우 자기 입지가 낮아져서 그런 거라고 추측한다면, 후자가 맞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설령 귀순하더라도 임경업의 탓을 하기는 힘들죠.

임경업은 조명청 삼국에서 그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한 쪽에 인정받으면 다른 쪽에 미움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에서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죠. 하지만, 그의 능력을 제대로 펴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습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응당 신격화가 따르기 마련이죠. 그건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 모두 마찬가지여서 송시열, 이제 등 후대의 산당들은 그를 친명배금의 대표로 크게 추켜세웁니다. 여기서 현재의 그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소설 임경업전에서는 그가 애초에 명으로 가서 가달을 쳐부쉈다는 설정까지 가미되었죠.

+) 위키백과에서 이걸 사실인 것처럼 써 놨더군요 -_-; 수정했습니다.

그의 전설도 여기저기 남아 있습니다. 뜬금 없이 연평도의 조기잡이의 신으로도 나타나죠. 명으로 도망칠 때의 전설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 아쉽고도 안타까운 장수입니다. 가장 중요한 그 지역에 있었고 그 능력을 많이 보여줬지만, 정작 나라를 지킬 기회가 없었던 장수... 그가 임경업이었습니다.

2. 정명수
정명수는 평안도 은산의 관노였다고 합니다. 심하 전투 때 만주로 갔다가 포로가 되었죠. 안 그래도 암담한 노비의 운명 앞에 더 큰 절망이 다가온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는 게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 합니다. 그는 만주어를 배우고 청인들의 눈에 들며 청 태종의 신임까지 받게 됩니다. 이후 통사로 계속 조선에 오게 되죠.

조정에서는 정명수 같은 조선인 출신들이 오히려 청인들의 횡포를 부추긴다며 비난하지만, 그에게 직접 항의하거나 하지는 못 합니다. 오히려 그에게 최대한 뇌물을 주고 다독이며 포섭하려 했죠. 그의 아내의 아우에게는 벼슬이 내려졌고 그 자신도 청에서 벼슬이 오를수록 조선에서도 벼슬이 더해졌으며, 그의 어미에겐 정부인의 첩지가 내려졌습니다. 그의 횡포도 심해져서 그를 수발들던 기생이 소란을 일으켜 병조 좌랑이 그녀를 나무라자 폭행했다고 합니다.

단지 그런 횡포만 부린 건 아니어서 세폐의 수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조선을 욕 하는 익명서를 받자 두어 줄 읽고 태워버리기도 했습니다. 위의 임경업의 예에서 알 수 있듯 나중에 가면 조선과는 거의 협력하는 관계까지 가게 되었죠.

글쎄요. 그의 출신을 생각하면 매국노라는 욕을 바로 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나라가 그를 버린 거고, 그런 상황에서 자기 능력으로 일어난 거니까요. 그 시대의 비극 중 하나이겠습니다만, 역시 하는 짓이 꼴 뵈기 싫긴 하네요 ^^;

사실 이건 조선 초기에도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명의 요구에 의해 성 관계를 할 수 없게 된 후 끌려간 아이들이 환관이 되어 조선에 사신으로 왔었고, 그들은 정명수와 참 비슷한 일을 했죠. 역사는 반복되는 걸까요.

3. 최명길과 김상헌

"남송의 화친을 주장한 자(진회)는 화가 나라에 돌아가고 이익이 일신에 돌아갔지만, 오늘날 화친을 주장하는 자(자신)는 화가 일신에 돌아오고 이익이 국가로 돌아갈 것이다."

호란 기간 내내 보여 준 최명길의 활약을 보면, 그냥 주인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척화파에 맞서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그러면서도 명에 대해서도 계속 연락을 했죠. 외교만으로 모든 걸 막을 순 없겠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의 편이 정말 얼마나 있었을까 할 정도로요. 지금까지의 글에서 그의 모습을 보였으니, 여기서는 그가 심양에 붙잡혀 가는 과정을 다뤄 볼까 합니다.

명나라 정벌에 군사를 동원하라는 것을 계속 거부한 최명길이었지만, 청에서는 여전히 그를 신뢰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겨버렸죠. 청에 항복한 홍승주(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조대수라 나와 있지만 오류입니다) 이를 청에 고발하면서 조선을 신나게 욕했고, 기타 병부 상서 등 명의 고위층이 그 문서들을 바치면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가죠. 그 일을 주도한 최명길 역시 붙잡혀 가게 됩니다.

이 때 용골대가 누가 이 일과 관련됐냐고 따져 물으니, 이렇게 답 했습니다.
"내가 영의정으로서 크고 작은 일이 모두 나에게 관계된다. 이 일은 나 혼자 주장하였고, 임경업은 평안 병사였으므로 배를 마련하여 보내도록 시켰다. 우리 임금께서도 모르는 일이고 여러 신하 중에도 아는 이가 없소"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는 말이었죠. 또 그 이유를 캐 물으니 "청에 항복한 후 명과 적이 되어서 간첩을 보낸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이 때 관계되었던 정태화 역시 "모두 내가 한 것이다"고 하고 "인정 때문에 한선에 쌀을 주었으니 이게 내 죄다"고 대답했죠.

청은 최명길을 계속 심문해서 다른 이들을 끌어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간장이 철석과 같다면서 감탄했다고 합니다. 이후 같이 끌려간 이들은 대부분 그와 소현세자의 노력으로 풀려납니다만, 최명길은 심양의 감옥에 계속 갇히게 되죠.

흥미로운 점은 그 바로 옆 방에 김상헌이 갇혔다는 점입니다. 그의 죄목은 척화 상소를 올렸다는 거였죠. 청에서 이를 따져 물었지만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몇 가지 옮겨 보죠.

"임금과 신하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으니, 모든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내가 한 말이 있었으나 채용되지 않았으니, 너의 나라 일이 내 말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죄는 자기에게 돌리면서 당당함은 당당함대로 유지하는 말이었죠. 용골대가 왜 청과 조선을 다른 나라라고 하냐고 화를 내니 "경계가 있으니 어찌 다른 나라가 아니냐"면서 오히려 반문하죠. 이에 감탄한 정명수도 좋게 좋게 통역해 줬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이 같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때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는 병자호란의 후일담으로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얘기죠.

최명길은 김상헌이 명예에만 치중했다고 생각해서 정승 천거 때도 깎아 버렸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에서 자살을 시도할 때도 "가족 앞에서 했는데 어찌 진심이었겠느냐"고 일축했죠. 한편 김상헌은 최명길을 진회와 다름 없이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심양에서의 서로의 태도를 보고 감복했다고 하죠. 이 때 김상헌은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양대의 우정을 찾고 백 년의 의심을 푼다"

이 때 두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담아 지은 시가 있는데, 서로 다른 방법이지만 나라를 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경여는 이에 대해 시를 지어 두 사람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두 어른 경ㆍ권이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인데 / 二老經權各爲公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김상현) 한때를 건져낸 큰 공적일세(최명길) / 擎天大節濟時功
이제야 원만히 함께 돌아간 곳 / 如今爛熳同歸地
모두가 남관의 백발 늙은이일세 / 俱是南館白首翁

다만 이전 편에서 썼듯 김상헌에 대해서는 과대평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자신의 절개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병자호란 후 화친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크게 찾아볼 수 없죠. 화친을 얘기할 때 역시 그도 참가했고, 나중에 왕의 출성 문제와 臣을 일컫는 문제에 이르러서야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모습이 대단하긴 합니다. 그는 60리 길을 걸어서 스스로 남한산성에 들어갔고, 후에 인조가 이에 대해 포상하려 하자 자기는 공이 아무것도 없다면서 오히려 인조에게 정신 차릴 것을 상소합니다.
"신하는 임금의 뜻을 쫓아야지 명을 따르는 게 아니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명만을 따르는 것은 환관이나 아녀자들의 충성이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그의 말이었습니다.

심양에서 용골대가 그들의 죄를 용서한다면서 황제에게 감사의 예를 올리라고 하자 최명길은 그에 따라 절을 했지만 김상헌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끝내 거부했습니다. 최명길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황제에게 감사한다느니 하는 미사여구로 그들을 달랬습니다. 김상헌 역시 그 자신의 말일 뿐이었다면서 당당한 모습을 유지하죠. 둘의 방식이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최명길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택당 이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음(淸陰 김상헌)이 남한산성에서 나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비록 지조가 높으나 또한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이 열어놓은 남한산성의 문으로 나왔다"

둘은 45년에 풀려나 조선에 오게 됩니다. 김상헌은 그 후에도 좌의정에 임명되기도 하다가 효종 3년에 죽습니다. 후에 효종의 북벌 때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고 하네요.

최명길은 청에서의 고생이 심했는지 2년 후인 47년 죽습니다. 그야말로 가루가 되게 까이는 모습만 볼 수 있었던 최명길이었지만, 그의 졸기에 사관은 특별히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이후 반청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면서 최명길은 김상헌과 대비되어 많이 까이게 됩니다.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묘정에 배향하게 되는데, 이마저도 반대를 받았었죠.

따지고 보면 그가 한 것은 모두 굴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말대로 욕만 심하게 먹은 거죠. 하지만 역시 그 자신의 말대로 국가에는 이익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최명길이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하늘이 조선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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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_-; 많군요. 최명길처럼 현실주의 노선을 탄 사람도 있고, 한영처럼 김상헌의 노선을 탄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그 대표주자였을 뿐이었죠. 이들 모두는 죄를 자기에게 돌리며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선천 부사 이규처럼 무서워서 이것저것 다 불어버린 사람도 있지만요.

아무튼... 병자호란 얘기하면서 최명길을 얘기할 때는 안타까우면서도 그나마 웃음이 지어지네요.

다음 편은 인조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합니다. 제목은 "이건 내 역사니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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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디 사라비아
11/08/01 18:56
수정 아이콘
휴우.... 나라가 망하고 인걸은 사라져도 금수강산은 여전합니다

게을러서 댓글은 달았다 말다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11/08/01 19:02
수정 아이콘
수고하셨습니다. 글 잘 봤습니다. 최명길은 정말 눈물겹죠.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한 가장 최선의 활약을 해놓고 욕은 욕대로 먹고 후대에까지 까이고....그나마 지금이라도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11/08/01 19:33
수정 아이콘
요즘 모아서 보고 있습니다. 연재를 기다리기엔 너무 감질나서 -_-;;
이런 퀄리티의 글을 계속해서 써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ㅠㅠ
11/08/01 21:57
수정 아이콘
그런데 정말 임란이후에 조선에 장수, 장군이라 부를사람이 정말 없지 않나요..

병자, 정묘 맞고도 그 이후 변변한 장수, 장군조차 안떠오르는거 보면 정말 조선의 국방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케합니다

대륙의 의한 보호,간섭에 의해 국방력을 키울수조차 없었을까요

역사가 정말 중요한게 그때의 상황이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거같아서...

보호,간섭의 대상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뀐거 빼고는요 대상만 바꼈네요

정말 한(恨)스러운 역사네요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치욕스럽고 힘없고

역사관이 이런쪽으로 가면 안되겠지만 정말 힘..이 제일 중요한거같습니다

그래서 현대에도 핵을 비롯한 무기개발이 계속되는거겠죠 역사가 증명해주니까요 힘이 첫번째라는걸
Je ne sais quoi
11/08/01 22:27
수정 아이콘
임경업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능력이 있어도 그에 걸맞는 사회 여건이 되지 않아 오히려 과소평가받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무리수마자용
11/08/02 02:01
수정 아이콘
최명길과 김상헌이 감옥에 나란이 갇혀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극과 극에 있으면서도 같은 처지의 서로를 돌아보며 참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눈을 감고 떠올려보면 참 멋지다라는 단어로 표현 못하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네요. 임경업도 그렇고.. 잘 읽었습니다. 이번 편은 제 머리속에 그려지는 장면들이 재미가 있네요.
youngwon
11/08/02 11:2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박시백 화백의 만화에서 읽는 내용과 자연스레 오버랩되며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되었습니다. 글 내용이 머리 속에 그려진달까요? 눈시BB님의 깊이있는 내공과 치우치지 않은 시각에 다시한번 감탄하고 갑니다. 그리고 다음 '인조' 편 특히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제가 조선 왕들의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하는지라.. 하하.. 얼른 보고 싶네요.

P.S 혹시 되신다면 야사의 내용도 약간 버무려서 다뤄주실 수 있나요? 제가알기론 야사에 보면 인조가 소현세자를 맞이하러 나갈때, 커다란 삿갓을 쓰고 나갔다고 하더군요. 병자호란이후로 햇빛을 보지 않으려고 커다란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데 뭔가 인상깊더라구요.. 이런 야사도 살짝 살짝 다뤄주실 수 있을까요..^^;
호떡집
11/08/0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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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경업이형님이 나왔네요. 재능을 지녀도 때를 잘 맞는 것은 참 중요하죠. 운이라고 해야할지. 뭐, 하늘의 때, 땅의 이로움, 인간의 화합이라는 말도 있으니깐요.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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