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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5/02/14 06:10:48 |
Name |
언뜻 유재석 |
Subject |
[일반] [잡담] 서울이야.. 맞아, 서울이야. |
그러니까 기억이 시작 되는 그 어디 쯤은 흑석동이었어.
엄마는 내 고향이 충북 보은이라고 했고 갓 난 아기 때 엄마가 날 안고 수안보온천에서 찍은 사진도 존재 하지만 내 기억이 시작 되는 곳은
흑석동이었어. 고향이 어디예요 물으면 충청도라고 항상 답했지만 세네 살때 서울에 와서 서울 사람이나 다름 없다고 말해 온 이유기도 해.
주인집이 가장 바깥쪽이고 우리집은 가장 안쪽에 있었는데 요즘 친구들은 모르는 곤로를 썼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
로터리식에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던 티비도 있었고... 프로야구 팀 1번타자 부터 9번타자까지 줄줄이 외워서 읊으면 꼬맹이가
똘똘하다며 용돈과 함께 본인들 한잔 하시던 막걸리를 나눠 주시던 마음 따뜻한 어르신들도 기억나(아마 난 네살인가 다섯살 이었을거야)
엄마랑 약국 다녀오는 길에 나던 메케하던 냄새는 아마 중앙대 다니던 형들이 주인공 이었을테고, 호돌이가 퍼레이드 온다고 해서
구경갔던 기억도 나. 호돌이랑 악수도 했으니까.
이사 가던 날, 주인집 아줌마가 날 꼭 껴안아 주며 만원 짜리 한 장을 쥐어줬어. 엄마는 안된다고 했지만 뭐 결국 엄마 손으로 갔지.
이사 간 곳은 구로동이었어. 구로5동. 동네 바로 옆에 동일제강인가 동국제강인가 커다란 공장이 있었어. 유년 시절은 여기서 다 보낸거 같아.
나중에는 백화점도 생기고 아파트도 막 지어지더라. 난 유치원을 가지 않았어. 형편도 어려웠고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가 잘 몰랐나봐.
그래서 그냥 집에서 책 읽다가 애들 유치원 끝날 시간에 유치원에 딸린 운동장에서 놀았어. 동네엔 비슷한 또래의 형이나 누나들, 친구들이
많아서 심심하게 하루를 보낸 날은 없던 것 같아. 부자인 친구, 나 처럼 가난한 친구, 부모님 없는 친구 등등.. 친구라서 매일 함께했어.
거의 10년 가까이 그 단칸방에서 살았을거야. 울기도 많이 울었고, 웃기도 많이 웃었고, 무서운 날도, 재밌는 날도...
내 추억이 가장 많은 곳이야. 한 번 보여주고 싶지만 이제는 너무 많이 바뀌어서 흔적도 없더라.
그러다 영등포로 이사오게 됐어. 엄마가 식당일을 하다 빚을 내서 식당을 하시게 됐는데 잘 되지는 않아서.. 그냥 식당안에 다락방 같은곳이
보금자리가 되었어. 영등포시장쪽 한강성심병원 있는 그 쪽이야. 여기서도 참 오래 살았어. 군대 갈 때까지 있었으니까...
한강 성심병원 1층에 있는 오류 있는 공중전화로(10원씩만 까졌어!!) 첫 여자친구랑 수화기가 뜨거워 질 때까지 통화하고
자전거 타고 여의도 공원 돌며 여기저기 큰 건물들에서 꼭 일해보고 싶다 부러워도 하고 그랬지. 중학교는 신도림에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는 만리동에 있는 학교를 다녔어. 만리동 하면 잘 모르니까 공덕이랑 충정로 사이 그 어디쯤이야. 친구들은 그 동네에 사는 애들이
많아서 노는 곳이 매번 이대, 신촌, 홍대 이랬던 기억이 난다.
대학은 좀 멀리 있는 곳에 합격했는데 오래 다니지는 못했어. 일해야 했거든.
그러다 군대를 가고 일병 때 쯤 휴가를 나왔을때 엄마는 옥수동으로 이사를 가 있었지. 아주 아주 많은 사연이 있었어. 그렇게 옥수동에서
이집, 저집 처음으로 짧게 짧게 살았던 시간이었어. 제대하고 구한 직장은 삼성동이었다가 방배동이었다가 내방역 쪽으로 갔고,
그러다 저기 거여동에서 한참을 일했었어. 20대 찬란한 시간을 보냈던 곳이야. 그 시절이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참 좋은 친구가 천호동에 살아서 천호동도 자주 갔었지.. 그 친구가 소개해 준 여자친구가 또 굽은다리역 그 쪽에 살아서 거기도
자주 갔었고, 여러 인연들과 술을 참 많이 도 마셔대느라 강남역, 홍대, 신천, 건대 내집 처럼 다녔었어.
마장동에 있는 회사로 옮겼을때 옥수동이 재개발 되서 임대아파트 신청하고 기다렸다가 행당동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나도 임대지만 아파트 살아보는구나 하고. 그렇게 행당동에서 12년을 살고 있어. 왕십리 CGV에 쓰레빠 신고 가고 이제 이 쪽은 뭐 눈감고도
다니지.. 회사는 또 개포동, 서초동, 하남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죽전으로 다녀.
12년간 참 많은 일이 있었어. 남한테 말 못할 바보 같은 실수도 많이 저지르고 실패하고 잘 안되고...
커가면서, 생각이 많아지면서, 기억이 추억이 되기엔 너무 가까워서 그런가.. 아쉬움만 가득해.
많은 인연을 새로 만나고 또 그만큼 잃기도 하고, 그래도 7년 가까이 곁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게 해 준 동네라서.. 참 고마운 동네야. 행당동.
서울 살 던 친구들은 점점 주는 느낌이야. 결혼 하면 경기도 어디로 가고, 직장에 맞춰 어디로 또 가고..
아파트가 조금 오래 되어서 새로 짓는 임대아파트로 갈 까 했지만 엄마는 여기가 좋은가봐. 그냥 여기 있겠대 죽을때까지..
이사가고 싶지 않대. 이 집이 엄마의 친구 같은 느낌도 들어 요즘은...
누가 그러더라고, 서울에 평생 살 곳이 있어 좋지 않냐고. 맞아. 조금 넓은 집, 새집에 가고 싶어도 서울과 이별하면 내가 다시 서울에
들어오긴 힘들것 같아서 결정을 내리기 참 어려워. 40년간 정 많이 들었거든.. 가장 오래된 친구야 이제..
여긴 서울이야. 맞아, 서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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