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0/01/13 12:34:00
Name 수부왘
Subject [일반] [역사]밑글과 동시기 조선의 유럽에 대한 지식 (수정됨)
19세기 조선 순조 32년에 영국의 선박이 조선에 정박한 일이 있었습니다.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애란국(愛蘭國)·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아사라(我斯羅)·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선재(船材)는 이목(桋木)047) 을 썼고 배의 형체는 외[瓜]를 쪼개 놓은 것같이 생겼으며, 머리와 꼬리 부분은 뾰족한데 길이는 30파(把)이고 넓이는 6파이며 삼(杉)나무 폭을 붙인 대목은 쇠못으로 박았고, 상층(上層)과 중층(中層)은 큰 것이 10칸[間]이고 작은 것이 20칸이었으며,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는 각각 건영귀(乾靈龜)를 설치했고, 배 안에는 흑백의 염소[羔]를 키우며 오리와 닭의 홰[塒]를 설치하고 돼지 우리도 갖추고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에는 각색의 기(旗)를 꽂고 작위(爵位)가 있는 자의 문전에 있는 한 사람은 갑옷 모양의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종일토록 꼿꼿이 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제지하였으며, 급수선(汲水船) 4척을 항상 좌우에 매달아 놓고 필요할 때에는 물에 띄워 놓았습니다. 전(前)·중(中)·후(後)의 범죽(帆竹)은 각각 3층을 이루고 있고 흰 삼승범(三升帆)도 3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사용하는 그릇은 화기(畵器)이고 동이[樽]와 병(甁)은 유리였으며 숟가락은 은(銀)으로 만들었고, 배 안에 실은 병기(兵器)는 환도(環刀) 30자루,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大火砲) 8좌(座)이었습니다.

또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총 67인이었는데, 선주(船主)는 4품(品) 자작(子爵) 호하미(胡夏米)이고, 6품 거인(擧人)은 수생갑리(隨生甲利) 출해리사(出海李士)이며, 제1과장(第一夥長)은 파록(波菉)이고, 제2과장은 심손(心遜)이고, 제3과장은 약한(若翰)이고, 화사(畵士)는 제문(弟文)이며, 사자(寫字)는 노도고(老濤高)이고, 시종자(侍從者)는 미사필도로(米士必都盧)이며, 과계(夥計)는 벽다라마(辟多羅馬)·행림이(行林爾)·임홍파(林紅把)·가파지(加巴地)이고, 수수(水手)는 가타(嘉他)·랍니(拉尼)·야만(耶熳)·주한(周翰)·명하(明夏) 및 마흥(馬興) 6인이며, 진주(陳舟)에 10인, 손해(遜海)에 20인이고, 주자(廚子)는 모의(慕義)와 무리(無理)이며. 지범(止帆)은 오장만(吳長萬)이요, 근반(跟班)은 시오(施五)·시만(施慢)·시난(施難)·시환(施環)·시섬(施譫)·시니(施尼)·시팔(施八)이었습니다.

용모(容貌)는 더러는 분(粉)을 발라 놓는 것처럼 희기도 하고 더러는 먹물을 들인 것처럼 검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머리를 박박 깎기도 하였고 혹자는 백회(百會)048) 이전까지는 깎고 정상(頂上)에서 조그만 머리카락 한 가닥을 따서 드리운 자도 있었으며, 입고 있는 의복은 혹은 양포(洋布)를 혹은 성성전(猩猩氈)을 혹은 3승(升)의 각색 비단을 입고 있었는데 웃도리는 혹 두루마기 같은 것을 입기도 하였으며 혹 소매가 좁은 모양을 입기도 하고 혹 붉은 비단으로 띠를 두르기도 하고, 적삼은 단령(團領)을 우임(右袵)049) 하고 옷섶이 맞닿은 여러 곳에 금단추(金團錘)를 달았으며 소매는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였는데 작위(爵位)가 있는 사람이 입는 문단(紋緞)은 빛깔이 선명하였습니다. 머리에 쓴 것은 호하미(胡夏米)는 푸른 비단으로 족두리처럼 만들었는데 앞쪽은 흑각(黑角)으로 장식하였고, 그 외의 사람은 붉은 전(氈)이나 흑삼승(黑三升)으로 더러는 감투 모양으로 더러는 두엄달이(頭掩達伊) 모양으로 만들었고 혹 풀[草]로 전골냄비 모양으로 엮기도 하였습니다. 버선[襪子]은 흰 비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백삼승(白三升)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등에 꿰맨 흔적이 없었고, 신[鞋]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은 발막(發莫)050) 과 같았습니다.

배에 실은 물품은 파리기(玻璃器) 5백 개, 초(硝) 1천 담(担), 화석(火石) 20담, 화포(花布) 50필, 도자(刀子) 1백 개, 전자(剪子) 1백 개, 납촉(蠟燭) 20담, 등대(燈臺) 30개, 등롱(燈籠) 40개, 뉴(鈕) 1만여 개, 요도(腰刀) 60개인데, 아울러서 값으로 따지면 은화(銀貨) 8만 냥(兩)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풍속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를 신봉해 왔으며, 중국과의 교역은 유래(由來)가 2백 년이나 되었는데 청국(淸國)과 크기가 같고 권세가 비등하였으므로 조공(朝貢)도 바치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하(階下)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하였으며, 대청 황제(大淸皇帝)는 먼 나라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 주려 하였으나 요사이는 관리들이 황제의 뜻을 잘 받들지 않으므로 황은(皇恩)이 외국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외국 상인은 관리의 횡포로 인하여 많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역하고 있는 나라는 우라파국(友羅巴國)·법란서국(法蘭西國)·아임민랍국(阿壬民拉國)·자이마미국(者耳馬尾國)·대여송국(大呂宋國)·파이도사국(波耳都斯國)·아비리가국(亞非利加國)·식력국(寔力國)·영정도국(伶仃都國)·대청국(大淸國)이며, 교린(交隣)하는 나라는 아라사국(我羅斯國)·법란치국(法蘭治國)·하란국(荷蘭國)·파려사국(波呂斯國)이라 하고,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 또 서흔경(西忻慶)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영국으로 소속된 미개한 지방으로는 익능부(榏能埠) 마지반부(馬地班埠) 마랍가부(馬拉加埠)·선가파부두(先嘉陂埠頭)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금년 2월 20일 서남풍을 만나 이곳에 와서 국왕의 명으로 문서와 예물을 귀국의 천세 계하(千歲階下)에 올리고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으며 공무역(公貿易)을 체결하여 양포(洋布)·대니(大呢)·우모초(羽毛綃)·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 등의 물건으로 귀국의 금·은·동과 대황(大黃) 등의 약재(藥材)를 사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바칠 예물은 대니(大呢) 홍색 1필, 청색 1필, 흑색 1필, 포도색 1필과 우모(羽毛) 홍색 1필, 청색 1필, 포도색 1필, 종려색(棕櫚色) 1필, 황색 1필, 양포(洋布) 14필, 천리경(千里鏡) 2개, 유리기 6건(件), 화금뉴(花金紐) 6배(排)와 본국의 도리서(道理書) 26종이라 하였습니다.

또 7월 12일에 모양이 이상한 작은 배 한 척이 서산(瑞山)의 간월도(看月島) 앞 바다로부터 태안(泰安)의 주사창리(舟師倉里) 앞 포구(浦口)에 와서 이 마을 백성들을 향하여 지껄이듯 말을 하면서 물가에 책자(冊子)를 던지고는 바로 배를 돌려 가버렸는데, 던진 책자는 도합 4권 중에서 2권은 갑(匣)까지 합하여 각각 7장이고 또 한 권은 갑까지 합하여 12장이었으며 또 한 권은 갑도 없이 겨우 4장뿐이었다 하기에, 고대도(古代島)의 문정관(問情官)이 이 일로 저들 배에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금월 12일 묘시(卯時)에 종선(從船)을 타고 북쪽으로 갔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밤을 새우고 13일 미명(未明)에 돌아왔는데 같이 간 사람은 7인이고 책자 4권을 주었으나 받은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저들이 식량·반찬·채소·닭·돼지 등의 물목 단자(物目單子) 한 장을 써서 내면서 요청하였기 때문에, 소 2두, 돼지 4구(口), 닭 80척(隻), 절인 물고기 4담(担), 갖가지 채소 20근(斤), 생강(生薑) 20근, 파부리 20근, 마늘뿌리 20근, 고추 10근, 백지(白紙) 50권, 곡물 4담(担), 맥면(麥麵) 1담, 밀당(蜜糖) 50근, 술 1백 근, 입담배 50근을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저들이 주문(奏文) 1봉(封)과 예물 3봉을 전상(轉上)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굳이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니, 저들이 마침내 물가에 던져버리고 또 작은 책자 3권과 예물의 물명 도록(物名都錄) 2건(件)을 주었다고 하기에, 서울에서 내려온 별정 역관(別定譯官) 오계순(吳繼淳)이 달려가서 문정(問情)하였는데, 그의 수본(手本)에 의하면 문서와 예물을 저들이 끝내 되돌려 받지 않으려 하여 여러 날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17일 유시(酉時)에 이르러 조수(潮水)가 물러가기 시작하자 저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우리 배와 매 놓은 밧줄을 잘라 버린 뒤에 닻을 올리고 돛을 달고 서남쪽을 향하여 곧장 가버려 황급히 쫓아갔으나 저들 배는 빠르고 우리 배는 느리어 추급(追及)하지 못하고 문서와 예물은 결국 돌려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이 배는 필시 바다 가운데에 있는 나라들의 행상(行商)하는 배일텐데, 우연히 우리 나라 지경에 이르러 주문(奏文)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교역을 시도해보려 하다가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자 저들도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다만 그 주문과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간 것은 자못 의아롭습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의 속셈을 비록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처리에 있어서는 의당 신중히 해야 하겠으므로, 문정관(問情官)과 역관 등으로 하여금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櫃)에 봉해 두게 하고 우리들에게 준 책자를 빠짐없이 모아 함께 봉(封)하여 본주(本州)의 관고(官庫)에 보관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충 수사(公忠水使) 이재형(李載亨), 우후(虞候) 김형수(金瑩綬), 지방관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가 문정할 때에 거행이 지연되고 처리가 전착(顚錯)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이 논감(論勘)한 대로 파직의 율로 시행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영길리국은 비록 대국(大國)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열에 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친 책자로 보면 민월(閩越)과 광주(廣州) 등지로 왕래하는 상선(商船)이 1년이면 6, 70척에 밑돌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번에 우리 나라에 와서 정박한 사실이 혹 대국에 전해질 염려도 없지 않으니 우리 나라에서 먼저 발설(發說)하여 후환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槐院)051) 으로 하여금 사실을 매거(枚擧)하여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형편에 따라 예부(禮部)에 들여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사실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대비도 되지 않아있던 조선 후기의 모습입니다.
일개 상선과 나눈 짧은 필담이 당시 세계 질서를 정립하고 있던 유럽에 대해 조선이 알고있는 전부였던 셈입니다.

그와중에 상세히 보고한 지방관들은 오랑캐 배를 정박하게 했다고 이후 파직당합니다;

흔히 순조 직전의 영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고 하는데 요즘은 오히려 영정조시기야말로 한반도가 결정적으로 세계사의 흐름에서 낙오된 시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네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0/01/13 12:40
수정 아이콘
중국은 그 사이즈와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라도

일본은 어쨋건 바닷길을 많이 활용했으니까

우리나라는 위치가 나빳던거죠..
수부왘
20/01/13 12:41
수정 아이콘
(수정됨) 위치가 나빴다기엔 고려 심지어 신라때만 해도 해외교역이 활발했습니다. 세계사를 살펴봐도 반도지형이 교역에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일은 없죠. 고대부터 중개무역으로 융성해진게 한반도구요. 별로 변명거리가 못 되죠... 오히려 한국사를 통틀어볼 떄 조선의 폐쇄적 성향이 유달리 특이한겁니다
차라리꽉눌러붙을
20/01/13 13:01
수정 아이콘
사실 조선은 말기에는 망할 나라였다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及時雨
20/01/13 13:05
수정 아이콘
칠담으로 알아낸거 치고는 양도 많고 정확하네요.
청나라 선원이라도 탑승 했었나?
롯데올해는다르다
20/01/13 13:1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조선의 행정력은 충분하고 다만 바로 옆의 중국이 명-청 기간에 강력한 통일왕조를 구축하고서 조선을 강하게 견제하는 상황에서 조선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걸로도 보이네요. 중국 외의 타국과 몰래 교역하여 부국강병을 이룬다? 말은 쉽지만 중국 입장에서 바로 옆에 붙어있는 조선이 그러고 있는걸 가만히 두고 볼까요..?

"이번의 영길리국은 비록 대국(大國)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열에 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친 책자로 보면 민월(閩越)과 광주(廣州) 등지로 왕래하는 상선(商船)이 1년이면 6, 70척에 밑돌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번에 우리 나라에 와서 정박한 사실이 혹 대국에 전해질 염려도 없지 않으니 우리 나라에서 먼저 발설(發說)하여 후환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槐院)051) 으로 하여금 사실을 매거(枚擧)하여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형편에 따라 예부(禮部)에 들여보내야 하겠습니다."
수부왘
20/01/13 13:52
수정 아이콘
(수정됨) 가만히 두고 볼까 아닐까 추측해야 할 정도로 시도조차 없었다는게 맞겠죠. 놀랍게도 정작 명 청은 딱히 조선에 외국과 교역을 금한 적이 없습니다; 조선사에서 아시아 외 문화권과 접촉에 대해 조선의 대처와 중국의 반응을 대조해보면 정작 중국에선 그다지 관심도 없는데 실로 '지레 겁먹었다'는 말밖에 할 수 없죠. 아니, 사실 조선에서 주체적으로 폐쇄적 기조를 유지했다고 봐야 하는게, 정부에서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중국 눈치고 자시고 그런거 없습니다. 명이 물소뿔 교역량을 줄이자 그냥 일본에서 물소를 사오죠.
수부왘
20/01/13 14:25
수정 아이콘
(수정됨) 흔히 '명나라가 물소뿔 거래 금해서 몰래 밀수를 해왔다'고 소개되는 에피소드인데, 실록의 기록을 보면 "만약 각(角)을 외람(猥濫)되게 무역하여서 중국에서 금방(禁防)함이 있으면 작은 일이 아닌 까닭으로 금법(禁法)을 만든 적이 있었다." 정작 명나라에선 자국산 물소뿔의 거래에 쿼터를 뒀을 뿐 별 관심도 없었는데 조선에서 '이거 외부와 교역하다 명이 교역하지 말라고 하면 어쩌지? 그러기 전에 우리가 알아서 먼저 금지하는 법을 만들자.' 는 극한의 쫄보논리로 이뤄졌습니다; 이 물소 번식도 처음엔 꽤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소위 '전략물자인 물소뿔을 무기로 조선을 견제'했다던 명에선 전략물자를 자가생산하려 하는 조선에 대해 어떠한 코멘트도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중요한 전략물자'라던 이 물소들도 나중엔 키우는데 수지타산이 안맞자 '이거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중요한거 같지도 않은데 농사나 짓게 하죠' 하고 끝냅니다.
20/01/29 22:31
수정 아이콘
근데 또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고구려가 망한 것도

별로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타국과 사신 보내고 놀던 게 중국에 걸려서 "야 너네 짜고 우리랑 싸우려고?" 이렇게 시비 거는 게 발단이었고

또 중국이 대체적으로는 그러지 않는다 해도 때때로 또라이 황제들이 났을 때는 별 희한한 핑계를 잡거나 말 안 듣는다고 갑자기 화내서 옆나라 침공하기도 했으니까

지레 겁먹고 눈치 보는 건 분명 맞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럴 근거가 아예 없었다고도 못하지 않나 싶어요
그리스인 조르바
20/01/13 13:16
수정 아이콘
지정학적 위치상 중국과 가까워 중국에 줄만 대면 세계와 통하고 있다고 자부할만 했다는게 가장 컸다고 봅니다.
실제로 중국이 곧 세계였던 시기가 몇천년이었는데 단 몇 십년만에 이러한 태도를 바꾸는 건 어려웠겠죠.

지난번 출산율 관련 글에도 말했었는데 그 때가 골든타임이었던걸 그 당시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 시대의 공과를 평가할만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시기가 역사의 분기점이라는 걸 알게되죠.
겨울삼각형
20/01/13 13:19
수정 아이콘
조선이 뒤쳐진것인데, 이게 조선의 잘못이라고 할수는 없지요.

이미 이전에 하멜이나 박연일행등이 조난되어 들어와서 바깥세상은 어떤지 알고는 있었을겁니다.

다만 우리랑 관계가없다고 생각했고, 역사적으로 대부분 정답이었습니다만,

당시 시기는 대항해시대 말기로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고.
아프리카를 놓고 프랑스와 전쟁하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들어왔고, 필리핀까지 장악했던.. 그야말로 제국주의로 들어가는 문턱이었다는것 이지요.

동북3국는 대부분 비슷한쇄국을 했습니다.

청나라는 남부일부항구(광저우)개방했는데, 이걸 더 늘리려는 열강들이 전쟁을걸어서 나라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고,

일본도 나가사키정도만 개항했는데, 아시아로 영역을 넖히려는 미국에 강제 개항당한후 망할뻔하죠.
(일본에겐 천운으로 그 미국이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진 시점에 메이지유신이 터지면서 처음 의도와는 다른게 서양화가 가속이 된거죠)

조선은 우리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양열강이 보기에도 뜯어먹을게 없어보일정도로 가난해서 끝까지 독립국 유지한거죠.

그러다 청과 일본의 싸움에 끼인거구요.
수부왘
20/01/13 13:33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하멜을)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실록의 기록입니다. 조선은 하멜과 박연에 대해 기원이나 문물에 대한 조사는 커녕 별다른 호기심조차 없었습니다. 하루빨리 송환시키는데만 신경썼죠.
겨울삼각형
20/01/13 13:58
수정 아이콘
조선이 박연이랑 하멜에 관심은 없었지만 송환은.

박연은 결국 귀화해서 조선에 정착했고(동료들은 여러전쟁터에서 사망했다고)
하멜은 억류되어있다가 탈출한것입니다.
수부왘
20/01/13 14:00
수정 아이콘
조선은 박연이든 하멜이든 청이나 일본을 통해 시급히 송환시키고자 했습니다. 단지 일본이 거부하고 하멜 일행이 청 사신 앞에서 읍소하는 등 돌발적인 상황으로 틀어진것 뿐이구요.
20/01/13 13:21
수정 아이콘
이정도 기록이 남을정도면 조사하나는 정말 빠짐없이 철저하게 했는데 왜 거기까지였니ㅠ
GREYPLUTO
20/01/13 13:54
수정 아이콘
나라를 뿌리채 엎어야 하는데 열강되려면 순조때도 사실 간당간당하죠
개항'준비'체질 만들고 중앙정부의 총자본부터 늘려야 개항때도 휘청이기만 하고 쓰러지진 않죠
수부왘
20/01/13 13:58
수정 아이콘
그래서 영정조 100년이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골든타임이었고, 실제로 청을 매개로 민간에서 해외문물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던 시긴데 오히려 정부가 복고적 태도로 돌아서죠.
20/01/13 14:11
수정 아이콘
아무 무슨 조선시대에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100 년에 세 명씩 오는 백인들한테 필담으로 듣는게 전부인데 저 정도면 용하지 뭘 더 바라나요. 옆에 일본이 좀 더 잘했다고 너무 조선에 대한 요구조건이 높아지는 거 아닌가요? 지금 우리나라가 힘들다고 하는 것도 200 년 뒤의 후세가 보면 부국강병의 길이 뻔한데 못 찾는 것일 뿐이지 말입니다.
시나브로
20/01/13 14:23
수정 아이콘
임팩트 있는 마지막 문장 너무 좋은 댓글 써 주셨네요.
수부왘
20/01/13 14:32
수정 아이콘
신라시대 고려시대엔 인터넷이 있어서 서방과 교역을 했나요?;
담배상품권
20/01/13 14:34
수정 아이콘
삼-고시대의 서방과 제국주의 서방이 같나요?
수부왘
20/01/13 14:37
수정 아이콘
조선이 스스로 귀를 막고 문을 닫은거지 '어쩔수없이'닫힌게 아니란 소립니다.
담배상품권
20/01/13 14:44
수정 아이콘
그 당시 동아시아 3국 다 닫았습니다. 일본만 해도 항구 하나 열어놓고 에도시대 200년을 닫았고,청은 뭐 그럴 필요가 없어서 교역만 깔짝 했었죠. 그러다가 제국주의 국가들에 '열렸'죠. 조선은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강제로 기름부어진 일본과 청에게 '열린'거구요. 열린 다음의 상황과 태도가 명운을 가른거지, 그 이전의 조선을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부왘
20/01/13 14:49
수정 아이콘
과연 그럴까요? 일본이 '항구 하나'열어놓은것을 굉장히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은데 일본은 최소한 문물이 오고갈 창구는 열어두었다는 의미이고 이 때문에 포함외교에 굴복하기 전에도 해외의 시세에 조선보다는 훨씬 밝았습니다.
수부왘
20/01/13 14:53
수정 아이콘
조선과 일본의 문물 격차는 말씀하신 에도시대때 이미 겉잡을수 없이 벌어졌습니다.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죠. '1764년 일본에서 출판된 필담집에는 인체 해부를 둘러싼 논란이 나온다. 일본 의원 기타야마 쇼우가 조선 의원 남두민에게 인체해부에 대해 물었다. 쇼우는 “우리나라 어떤 의원이 죽은 사람의 배를 갈라 장기의 배치 등을 자세히 살피고 책도 지었다”고 했다. 그러자 남두민은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며 상대를 타박했다.'
20/01/13 15:21
수정 아이콘
중세 유럽과 제국주의 유럽을 대충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저로서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수부왘
20/01/13 15:27
수정 아이콘
대외 교류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 차이를 말하는데 중세 유럽과 제국주의 유럽의 차이를 말씀하시는게 더 할말이 없네요
20/01/13 15:31
수정 아이콘
신라 고려 이야기를 님이 먼저 꺼내셨습니다 19세기에 망한 조선하고 신라를 비교하신 것은 님이 먼저죠. 혹시 말장난으로 어케 좀 점수 좀 따는 게 특기시면 상대를 잘못 만나셨는데요.
수부왘
20/01/13 15:56
수정 아이콘
'신라 고려는 조선처럼 대외교류에 폐쇄적이지 않았다. 조선이 대외정보가 부족한게 인터넷이 없어서라면 신라 고려는 인터넷이라도 있었나?'라는 얘기가 말장난으로 들리신다면 평소 말장난의 형태로 대화를 많이 하시나보네요
20/01/13 15:19
수정 아이콘
쇄국으로 틀어막고 척화비 세우며 국가발전을 생각지도 않고내치 왜치 뭐하나 잘한게 없는데 평가가 너무 후하신데요
20/01/13 15:25
수정 아이콘
200 년 지난 뒤에는 모든 것이 쉽지요. 정답이 이미 다 알려져있으니까요. 동시대인에게도 그랬을까요?
수부왘
20/01/13 15:29
수정 아이콘
그렇다면 고금에 존재했던 모든 정치인들의 선택에 면죄부가 가능하겠네요
20/01/13 15:33
수정 아이콘
200 년 뒤를 예측하지 못하지 못한 조선의 사대부와 5년 뒤를 예측하지 못한 차지철을 퉁치자는 건가요?
수부왘
20/01/13 16:00
수정 아이콘
200년 뒤는 지금이고, 척화비 세우던 조선이 그 결과를 마주하게 된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20/01/13 16:02
수정 아이콘
아아, 말장난 정말 좋아하시네요. 그래서 본인이 승리했다고 느끼시면 뭐 축하드립니다.
수부왘
20/01/13 16:07
수정 아이콘
저는 말장난 한적 없는데요.. 제가 실제 일어난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 부분이 있나요?
20/01/13 16:16
수정 아이콘
200년 지난 뒤에 '난 다 알고 있었어' 라고 말하는게 사실 굉장히 비겁한 일인데, 그게 비겁한 일이지 인식하지 못하는 분한테 그게 왜 비겁한 일인지 설명하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라서 저는 안할랍니다.
수부왘
20/01/13 16:33
수정 아이콘
OrBef 님// 이상하잖아요? 조선의 사대부가 200년 후(지금의 평가)를 예측하지 못했다는게 잘못이 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왜 차지철은 40년 후 (지금의 평가)가 아니라 5년(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미래)이죠? 말장난은 이게 말장난이죠. 그래서 정정해드린건데 왜 제가 말장난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20/01/13 15:42
수정 아이콘
100,200년의 시간이 붕뜬것도 아니고 그 사이 연속적이고 충분한 기간이 있었는데 우리 조상은 미련한 선택을 했죠.
20/01/13 15:46
수정 아이콘
1%의 위선도 없이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skyline 님께서는 본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2020년에서 100년 빼면 1919년인데, 이게 3.1절 터지던 날이거든요. 유관순 여사가 고문당하는 날이란 이야기입니다. 인류가 100 년 사이에 발전하는 정도에 대해서 최소한의 이해만 있어도 이런 말씀은 하실 수가 없습니다.
플리트비체
20/01/13 19:57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저 정도면 용하다라.... 쉴드가 과하네요. 국가의 정보능력은 찾아오는 외국인을 통해서만 가능한가요? 동네 이장인가? 정상적인 국가라면 중국/일본 통해서라도 충분히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현대인이 이정도 잣대 들이미는건 정상입니다 왜냐면 일본은 해냈으니까요
1. 조선을 아무것도 안했다고 비난한다 : 정상
2. 조선이 일본보다 못했다고 비난한다 : 정상
3. 쳐들어오는 서양애들을 왜 못이겼나고 비난한다 : 비정상
4. 200년 뒤 후손이 2019년 대한민국을 비난한다 : 정상
20/01/13 14:17
수정 아이콘
애초에 일본도 자기가 나가서 서양이랑 교류한건 아니지 않나요? 그냥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인이 자꾸 찾아오니 마침 전국시대라 전쟁중인데 총도 팔겠다 개항장 차려서 무역한거 뿐이잖아요?

그렇게 유우럽이 조선보다 수백년 앞서 일본이랑 꾸준히 교류했는데 아예 유럽에서 찾아가질 않으니 당연히 조선도 유럽에 대해선 모르는거고 그런 격차를 단시간에 따라잡지 못하는건 당연하죠;;
수부왘
20/01/13 14:35
수정 아이콘
(수정됨) 그 바로 옆나라가 말씀하신대로 서양과 수백년동안 교류하고, 심지어 조선조차도 일본이 조선을 뛰어넘어 부강해졌다고 인식하고 있던 동안 알아볼 생각도 안하는게 당연한건 아니죠.
20/01/13 14:37
수정 아이콘
글쎄요. 당장 일본도 '서양화'한건 절대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고 봐서... 아예 수백년 유럽과 교류해왔던 일본 조차 근대화한건 기적의 연속이었는데 서양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던 조선이 느린 반응을 보였던건 어쩔 수 없었다고 봅니다.
수부왘
20/01/13 14:43
수정 아이콘
바로 옆나라, 조선도 조선보다 국력이 강성했다고 느끼는 일본이 그렇게 '강제로 서양화'되는 동안 아무 관심도 없는게 '어쩔수 없는 것' 이라면 사실 세상의 모든 정치적 과오에 대해 '어쩔수 없었다'라고 정당화할 수 있겠죠
20/01/13 14:49
수정 아이콘
네... 원래 근시안적인게 디폴트고 미래에 대해서 식견을 보이는게 대단한거죠. 그 반대로 생각하는건 너무 많은걸 바라는거라 봅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이 현재 살아가는 현대의 한국에서 딱 한가지 예만 찾아도 저출산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죠.

당장 저출산에 대해서 우려하는 시선은 2000년대에 이미 등장했지만 정작 20년이 지나가는 지금에 조차 실질적인 정책은 찾아보기도 힘든 실정이고 최근에는 아예 저출산 대책은 포기하고 대증요법이나 찾는 정도더군요.

그렇다고 이걸 정부 탓하기에도 뭐한게 정작 '이른'시기에 정부가 저출산 대책 마련하겠다고 예산을 써댔다면 절대 고운소리는 안나왔겠죠? 출산율 1명대 이하로 떨어진 지금도 좀 급진적 정책을 못할게 뻔한데 말이죠.
수부왘
20/01/13 14:56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부분 때문에 조선에 대한 운명론적 인식이 거북한겁니다. '저출산에 대한 문제 인식'은 있었지만 해결이 난망했다는 것이잖아요? 조선은 청조 개창 이래로 스스로 세계 유일의 문명국을 자부하면서 정작 세계의 흐름에 뒤쳐지고 있다는 그 문제 인식조차 없었다는게 문제라는겁니다.
20/01/13 15:03
수정 아이콘
음... 제 말뜻이 잘 전해지지 못한거 같은데... 여러가지 사회체제나 여건이 조선에 비해서 훨씬 좋은 현대 한국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도 대처 못하고 있잖아요 그쵸?

그런데 아예 정보 조차 지극히 부족했던 조선에서 뭘 보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해야한다는 거죠? 운명론적인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현대에서 모든 지식을 다 갖춘 현대인이 왕으로 앉아도 힘든 일을 그 시대의 인식에 얽매인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한다는 겁니까? 좀 의문스럽네요.
수부왘
20/01/13 15:08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정보가 지극히 부족했다-> X 조선에서 스스로 정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O 입니다. 영정조 시기 청나라를 통해 해외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임금의 강경한 복고정책으로 무산되었고, 일본에서도 통신사를 통해 계속 교류가 오고갔고 충분히 정세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었지만 조선 정부에서 이를 철저히 무시한거죠. 조선이 어디 무인지역에 혼자 박혀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정보가 부족했다'는건 너무도 관용적인 시선이 아닌가요? 정말 조선에서 외부세력과 접촉하고, 조사하고, 배울 기회가 없었나요? 아니면 조선이 스스로의 의지로 거부한건가요?
20/01/13 15:13
수정 아이콘
받아들이기 거부한건 조선 뿐만이 아닙니다... 중국 일본도 모두 해당되는 사안이고 하다못해 그 두 국가는 우럽이랑 직접 교역을 해서 문명의 힘을 충분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랬죠.

결국 직접 얻어터지고 나서야 겨우 깨닫고 근대화에 착수를 했는데 천운이 따라줘서 성공한 케이스가 일본이고 사실상 자력 근대화로는 유일하죠.

그걸 못했다고 까는건 별로 합리적이진 않은거 같아요.
20/01/13 15:10
수정 아이콘
일본은 알아서 유럽문명의 우월함을 깨달았는데 조선은 왜 그걸 못했냐?

아주 간단하죠. 일본은 유럽이랑 직접 교류를 했잖아요? 물론 교류한다고 다 되는건 아니죠. 당장 중국만 해도 그딴건 없었고

하지만 교류조차 하지않는데 뭔 수로 정보를 알아내느냐 이 말입니다. 교류를 왜 안했냐 이런건 조선의 지리적 위치, 교역물품이 없었음 등의 이유로 유럽에서 조선을 찾지도 않는데 이뤄질 수가 없는 사항이고요.
수부왘
20/01/13 15:13
수정 아이콘
중국이 유럽과 직접 교류하지 않았다는것부터가 사실이 아니고, 그 유럽과 교류한 일본,청이 바로 조선과 교류한 이웃나라라는걸 몇번을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조선이 그냥 오랑캐타령 하면서 어떤 정보도 받아들이길 거부한거죠. 그리고 유럽에서 조선과 교역을 청한 사례가 없는것도 아닙니다.
20/01/13 15:14
수정 아이콘
중국은 근대화에 성공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수부왘
20/01/13 15:16
수정 아이콘
ann309 님// '근대화에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와 '근대화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다'라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20/01/13 15:17
수정 아이콘
수부왘 님// 위 댓글에 있지만 일본도 쇄국정책이었습니다;; 페리제독이 개항 시키기전에는 딱히 조선 중국이랑 다를것도 없어요.
수부왘
20/01/13 15:24
수정 아이콘
ann309 님// 페리제독 이전엔 세계에 대한 인식이 조선과 다를게 없다는건 생전 처음 듣는 말이네요. 애초에 배 몇척 끌고 온 페리 제독에 일본이 왜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개항했을까요? 페리의 요구에 그렇게 쉽게 굴복한게 서구세력이 세계 패권을 장악했다는것, 청 역시 유럽 앞에 먹잇감이란걸 일본에선 이미 알고있었기 때문인데요?
수부왘
20/01/13 15:31
수정 아이콘
ann309 님// 마치 일본만 포함외교가 들어왔던것처럼 생각하시는것 같은데 동시기 조선도 신미양요가 벌어졌습니다. 한쪽은 바로 손들고 개항했고 다른쪽은 사실상 참패하고도 척화사대를 부르짖으며 변화를 거부했죠. 그 차이가 뭘까요?
20/01/13 15:32
수정 아이콘
수부왘 님// 당연히 쌓아둔 무형적 자산이야 조선이랑 다르죠;;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서구화'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 같다는 겁니다. 수백년에 걸친 교류를 했음에도 직접적인 힘의 우위가 증명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것을 버릴 생각을 안하는것. 그게 정상이에요.

수부왘님이 조선에게 바라는 그건 비현실적인 바램입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배울점은 배우는게 맞겠죠. 그렇게 배운 기준을 과거에 들이댈게 아니라 지금 현재에 써먹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네요;;
수부왘
20/01/13 15:39
수정 아이콘
ann309 님//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그 축적된 무형적 자산이 결국 결정적인 국면에서 근대화의 계기가 되느냐 마느냐를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형적 자산을 '쌓을 수 없었던'게 아니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떤 교류의 기회도 받아들이기를 '적극적으로'거부한게 조선의 실책이죠.
20/01/13 15:45
수정 아이콘
수부왘 님// 이건 생각의 다름이 문제가 아닌거 같은데요;; 이걸 세세히 따지고 들면 들수록 근대화가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닌걸 알텐데... 그냥 '국가'에서 마음만 먹으면 근대화를 할 수 있는게 절대 아니에요.

일본이 페리제독 개항 이후 바로 근대화를 했다? 이 견해부터가 별로 엄밀한 사실이 아니고 막부는 계속 서구화에 저항을 했어요. 그걸 뒤엎은게 유신지사들이고요.

그에 더해 '무형적 자산' 얘기까지 가면 더 복잡하죠. 일단 조선의 지리적 위치나 부존된 천연자원이나 유럽에게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게 사실이고 교역의 중요성이 떨어지죠. 또한 조선이 성립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나 사상, 조선의 상국인 명나라의 경향 등등등... 따져야 될 사안은 정말 셀 수 없이 많고 그 중 대다수는 서구화에 별로 우호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이걸 다 뒤집고 조선이 근대화를 못한건 정신상태가 글러먹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간단한 결론이고 현실과 차이나는 생각이라고 밖에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네요.
수부왘
20/01/13 15:51
수정 아이콘
ann309 님// 저는 오히려 조선 체제에서 문제점을 찾지 않고 계속 외부요인들만 부각시키는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조선의 중요성이 떨어져서 교류할 생각도 안했다? 조선이 스스로 폐쇄국가로 나아가서 세계가 존재조차 몰랐다는게 맞는 말이죠. 막상 조선의 존재를 알게 된 후부터는 열강은 조선에게도 계속 교류의사를 던졌습니다. 한가지만 질문을 드리자면 '조선이 성리학 교조주의에 찌들어 오랑캐 타령하며 청과 일본을 통해 전파된 선진문물 수용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거부했다'라는 문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이 문장이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20/01/13 16:00
수정 아이콘
수부왘 님// 1차적으로 생각하면 틀린건 아닙니다만 그래서 그 성리학을 대체할 사상적 기반은 하늘에서 떨어지나요? 앞선 댓글에서 '현대인 국왕'이 떨어져도 조선의 근대화는 매우 어렵다고 했었죠 그런데 조선에는 그 조차도 없었어요.

그리고 계속 말합니다만 일본 중국은 서양하고 '직접적 교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직접적 교류를 조선은 못한 이유도 계속 언급을 했고요. 직접 교류를 해온 중국, 일본 조차도 서구화를 정부에서 자발적으로 할 생각은 못했습니다. 일본이 '성리학 교조주의에 찌들었'다고는 말 못하시겠죠? 그럼에도 자발적 서구화는 없었어요.

어디까지나 서양과의 교류에서 직접 이득을 얻어왔던 지방정부 군벌들이 서양 세력의 개항세력에 정부가 흔들린 틈을 타서 권력 탈취의 일환으로 서구화를 주도한거죠. 이런 조건이 조선에서 구현 가능한가요? 왜 이걸 외부조건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열등함'으로 인식해야하죠?
수부왘
20/01/13 16:24
수정 아이콘
ann309 님// 조선에서 성리학은 국가 주요 정책들의 기준점이며, 그 성리학을 대체할 사상적 기반을 건설하려는, 최소한 현실에 맞는 수정을 원하는 시도가 없었던게 아닙니다. 그 교조적 성리학에 대한 도전의 움직임을 배척하고 성리학 원리주의를 천명하며 학풍의 반동을 추구한게 정조였고, 그래서 영정조시기가 조선 몰락을 오히려 가속화시켰다고 생각하는것이며, 이러한 정부의 주도적인 폐쇄 반동적 정책이 조선의 정세 무지를 불러왔으며, 이 무지가 결국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는데 조선 체제에서 문제점을 찾지 않는게 이상하죠.
크레토스
20/01/13 14:56
수정 아이콘
일본이건 뭐건 당시 동아시아는 비서구 지역중에서도 유럽에 대해 잘 모르던 지방입니다. 오스만이나 이집트같은 나라가 일본보다 훨씬 유럽에 대해 잘 알았고 실제 서구화도 일본보다 더 일찍부터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만 보더라도 서구화가 그냥 서구에 대한 지식 좀 있는 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죠.
수부왘
20/01/13 15:04
수정 아이콘
애초에 말씀하신 이집트가 오스만에서 독립할수 있었던게 서구문물의 도입 때문이었는데 서구에 대한 지식이 있고 없고는 아주 큰 차이죠
크레토스
20/01/13 15:10
수정 아이콘
그 서구화 과정이 하도 가혹해서 당시 이집트인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지만 결국 이후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니까요. 비서구 국가의 서구화는 서구에 대한 지식만으로 퉁치기엔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수부왘
20/01/13 15:19
수정 아이콘
또한 오스만을 조선과 비교하는것도 이상합니다. 오스만은 엄연히 세계 질서의 성립 과정에서 구열강들과의 경쟁에 패배한거고 조선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것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 두 케이스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나요?
11년째도피중
20/01/13 15:40
수정 아이콘
그런 식이면 청과의 비교도 안됩니다. 청도 대제국인데요? 모두가 다 특수케이스에요. 역사에서 하나도 배울것 없습니다.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중점을 둬야해요. 역사적 특수성에만 중점을 두면 자존감과 열등감 사이의 롤러코스터만 반복될 뿐입니다.
오스만은 교조주의적 전제국가였고 전통적 집권층에 의해 사회개혁이 계속해서 실패한 케이스입니다. 유럽열강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던 시점에서도 눈감고 귀닫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왜 실패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수부왘
20/01/13 15:44
수정 아이콘
오스만이 제국이고 조선이 소국임을 비교하는것이 아니라, 오스만은 서구와의 경쟁과정에서 패배한것이라면 조선은 세계 정세에 대한 어떤 인식조차 없었다는것을 말하는겁니다. 이 두 케이스를 그냥 '둘다 근대화에 실패했다'라는 결론으로 같이 묶을 수 있나요?
11년째도피중
20/01/13 21:25
수정 아이콘
(수정됨) 관점이 달랐군요. 오스만을 서구문명권과 동등한 하나의 제국으로 보고 결국 경쟁에서 도태된 나라로 보시는 거로군요. 음... 그러니까 러시아 정도로 생각하시는걸까요? 하지만 러시아는 반쪽짜리 서구라고 해도 일단은 서구 문명권입니다. 반복되는 전쟁과 교류를 통해 어떻게든 덩치를 키워나갔던 반면 오스만은 그런 전쟁도 교류도 빈약했지요. 실은 최전성기라는 레판토 해전이나 빈포위 당시도 결국은 여러모로 '떨어지는' 나라라는걸 당대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신민들을 정복전쟁에 우르르 끌고 올 수 있는 그 체제 자체가 사실 후진성이라면 후진성이었으니까요.

말씀은 이해하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은 '비서구'문명권으로서의 특징이 더 컸던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암만 정보가 들어오고 여러번의 군제개혁을 시행했어도 결국 그 한계점을 보인 측면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비서구'국가의 전형이니까요. 압둘하미드2세의 개혁과정을 보면 결국 고종이 광무개혁을 통해 하려던 것과 무슨 차이인가 싶거든요.
20/01/13 14:59
수정 아이콘
소중화 사상이 모든걸 ...

임란이랑 호란때문에 더 경계한 것도 있겠네요
하루아빠
20/01/13 15:28
수정 아이콘
유럽의 중세가 흑사병으로 무너졌다면 우리나라는 1900년대까지 이어진거죠. 성리학 이외는 모두 사문난적으로 배척받았습니다. 양명학책을 봤다는 의심만 받아도 목이 달아날판인데 양학은 어림도 없는 소리죠. 실학이 대두되었다는 것도 현재로 따지면 민주노동당에도 못미칠 철저한 비주류의 얘기일뿐 결국 양난으로 무너진 체제를 바로잡기 위해 더욱 교조화되고 강력해진 성리학의 영향력 아래에서 몇백년을 외딴섬처럼 보낸거죠.
수부왘
20/01/13 15:35
수정 아이콘
그렇죠. 사실상 조선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폐쇄국가의 길로 나아간건데 마치 외부의 자극이 없어서, 혹은 중국의 강요로 인해 조선의 능력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불가피한 흐름이었다고 생각하는게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크레토스
20/01/13 15:37
수정 아이콘
양명학책을 봤다는 의심만 받아도 목이 달아나요? 누가요?
갈색이야기
20/01/13 18:51
수정 아이콘
양명학이 아니라 서학(천주교) 아닙니까?
20/01/13 15:32
수정 아이콘
걍 뭐 임란때 조선 망해서 일본 따까리 되는 거 말고 일본처럼 서구화 하는 시나리오가 있기는 하나요.
11년째도피중
20/01/13 15:36
수정 아이콘
(수정됨) 현대인의 눈으로 갑갑한게 맞기는한데 조선사회를 탓하기에는 환경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것도 맞다고 봐요.
중국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바뀌면서 외국과 교류하지 않는것이 조선의 정체성이 되어버렸죠. 전통적으로 좋게 생각하면 그것이 곧 국가에서 말하는 소위 [애국심]이란 것으로 치환되기 좋으나, 실상은 약간 다르다 봐야겠죠.

본문의 내용에는 동의합니다. [조선문화의 황금기]라는 측면에서는 정조시기가 찬란한 시기겠으나 다가올 시대를 생각하면 꼭 그렇지많은 않았다는 것이요.
밤의멜로디
20/01/13 15:36
수정 아이콘
지방 호족들이 득세하던 고려를 지나 조선에 와서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반면 일본은 번-막부 체제의 구시대적 봉건체제가 오래 유지되었죠.
그런데 이 봉건 체제 덕분에 사쓰마는 서양과 꾸준히 교류할 수 있었고, 쇄국에도 류큐 간접교류 등의 수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800년대 와서는 지방 번들이 막부를 무너트리고 체제를 뒤엎으면서 근대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반면 중앙집권 체제의 조선은 그런 레짐 체인지를 이뤄낼 에너지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방 정권을 누르고 중앙집권 체제를 선택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을까요?
수부왘
20/01/13 15:55
수정 아이콘
정확히 말하면 중앙집권 체제를 선택했는데 정작 중앙정부로 집중된 재정과 권력을 통해 국가주도 정책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다는 중앙집권 체제의 장점은 발휘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는게 조선의 한계죠
수부왘
20/01/13 17:06
수정 아이콘
정교한 제도를 통해 중앙집권 체제를 만들었지만 조세정책의 실패로 정부에 부가 축적되지 않아 정부주도 사업이 동력부족으로 좌초하고,
합리적인 엘리트 선발 시스템으로 능력을 갖춘 관료제를 완비했으나 그 엘리트계층이 현실 정치와 유리되어 교조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당대에 보기 드물게 애민을 기치로 만백성을 존중하려 했으나 또한 당대에 보기 드물게 천민 노비의 비율은 점점 높아가고
문치의 확립으로 세계 유일 문명국임을 자부했으나 그 자부심이 불러온 배타성으로 인해 문명의 대열에서 낙오되기 시작했죠

조선은 정말 모순적인 국가입니다.
20/01/13 17:37
수정 아이콘
중앙집권제가 봉건제보다 우월하다는 관점 역시 지나치게 서구중심적 관점 아닌가 싶습니다.
푸른등선
20/01/14 11:1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저도 테크니컬하게는 중앙집권 vs 지방분권 시스템 차이가 매우 컸다고 봅니다. 결과가 조선의 실패와 일본의 성공으로 귀결된 것인데 이건 어떤 특정인이 미래를 예측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제도가 아니죠. 태종 이방원이 자기 처남들에 사돈(세종 장인)까지 다 죽여가며 중앙집권화를 한 것은 당대로는 나름의 시대정신이었을 겁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세종보다 태종이 훨씬 더 엄청난 업적을 이룬 군주라고 보고요)

일본도 모든 권력자들이 미친듯이 권력을 확장하고 중앙집권이란 걸 해서 혼자 다 해먹고 싶었던 건 똑같은데 죽어도 각이 안나오는 뿌리 깊은 봉건적 역사가 늘 발목을 잡지요. 그런데 이런 아무도 의도치 않은 봉건제가 19세기에 국제질서가 바뀌면서 반전의 결과를 야기한 거죠. 도쿠가와 가문에겐 지옥같은 결과지만 현대의 일본에게는 천운으로 작용하는 것이구요.

조선은 19세기쯤 되면 아무런 이념적 정치적 경쟁이 없는 획일화된 ‘서울’왕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나라가 되었구요. 물론 이방원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라고 봅니다. 정조를 높게 평가하는 대중들의 인식이 강한데 솔직히 정조는 문체반정만 봐도 그렇고 그냥 보수반동을 강화시킨 전제군주일 뿐 현실을 바꿀 역량이 전혀 없었어요. 수백년간 이어져온 뿌리깊은 정치지형을 흔들 깜냥이 전혀 아니었다고 봅니다.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새로운 사상에 관심이 없고 경쟁보다는 무기력하게 순응하는 쪽으로 진화한 상황이었고요. 실학자 띄우는 우리 문화도 그냥 절반의 뻥튀기에 환상 버무림에 불과하고요.

아무튼 중앙집권이냐 봉건체제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경쟁이 있는 사회냐 아니냐가 중요한 겁니다. 조선이 수백년간 중앙집권화로 내전이 거의 없이 나름 꿀빨면서 평화(?)를 누린만큼 망할땐 망하는 게 이치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조선이 망하니 대한민국이 들어선거 아닙니까...단지 우리 손으로 무너뜨리지 못하고 일본이 대신 하는 바람에 아직도 역사적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부작용이 있지만요.
시나브로
20/01/13 16:01
수정 아이콘
좋은 댓글들 많이 달리네요. 유익해요
밤의멜로디
20/01/13 16:04
수정 아이콘
그리고 생각해보는데 일본이랑 중국도 결국 지배체제가 바뀌면서 근대화 된 것이고 우리 나라도 좀 더 오래걸리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결국 근대화 된 것 아닌가요? 서구권에서도 지금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 널렸는데 말이죠.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금 와서 어떻게 되었을지는 또 모르는 일입니다.
그 때 근대화를 이루고서도 근본적인 국력의 차이로 똑같이 되었을 수도 있고, (이집트의 사례 or 인구 일본이 1.5배 이상 많음 등)
그 때 전제군주정 하의 개혁이 이루어져서 사회적으로는 현재까지도 전제군주정이 이어지고,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있으며, 경제적으로는 현재와 같은 GDP 10위권의 국가가 되지 못해있을 수도 있습니다.
수부왘
20/01/13 16:46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은 정부체제가 변경되었을 뿐 조선처럼 연속적인 '국체'가 소멸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우리와 무관한 서구열강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이뤄졌을 것이라는것이 한국민의 역사관에 깊이 자리잡은 트라우마죠. 그리고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결국 조선으로 상징되는 근세의 선택에 대한 무자비할정도로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었죠.
20/01/13 16:2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지금 세대도 미래 후손으로부터 저출산에 대해 어떠한 해결책도 찾지 못한/않은 점으로 비난받겠죠. 비난해줄 후손이 있다면요.
플리트비체
20/01/13 16:3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쇄국이 옳냐 그르냐를 떠나서 당시 조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려고조차 하지 않았죠. 당시 조선은 그저 무능하고 가난한 국가였네요. 평가가 박하다느니 어쩔 수 없었다느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무능한 국가 맞습니다

이게 원인을 따져봤을때 너무 전쟁이 없는 반도국가여서 그런것 같기도 합니다. 바로 옆에 적대국을 항상 마주하고 있다면 그런 외교능력이나 국가 시스템이 더 발달했을텐데 절대자 중국 바로 옆에서 긴장없이 너무 안일하게 살아온 거 아닐까요. 유럽은 항상 내부전쟁중이었으니까 실력향상이 잘 된거구요. 그래도 일반 서민입장에서는 전쟁없는 조선이 유럽보다 나았을지도.
the hive
20/01/13 16:49
수정 아이콘
당시 중국과 전쟁했으면 우리는 한글이 아닌 중국 동북성 한반도에서 조선족으로 한자를 쓰며 살고 있겠죠...
플리트비체
20/01/13 17:38
수정 아이콘
제 내용을 오해하셨네요. 제가 언급한 비교군은 중국과의 전쟁이 아니라 조선과 비슷한 여러 국가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입니다. 유럽처럼요. 실제로는 중국이 워낙 막강했기때문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구요
the hive
20/01/13 19:46
수정 아이콘
뭐 그래도 실력의 결과가 지금같은 상황이면 그때는 전쟁이 실력향상(?)에 도움이 되도 지금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분석학 차이도 클것이고;;
하늘을보면
20/01/14 02:23
수정 아이콘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늘을보면
20/01/13 17:00
수정 아이콘
+1 전쟁없는 조선이 나았을지도 모른다에 한표드립니다.
20/01/13 19:49
수정 아이콘
그래서 오래간거겠죠.
20/01/13 17:47
수정 아이콘
결과적으로 멍청한 선택을 하게 된건 맞는데... 사실 그래서 뭐 어쩌란건지 싶습니다. 본문은 말고 댓글 대댓글이요. 본문 자체는 그냥 그렇다는 건데 뭔가 댓글들은 조상욕 들은 느낌이고 대댓글들은 니조상 멍청한 건 사실 이런느낌이네요.
조선이 후진데도 오래간건 유럽 지하철 같은 느낌인데... 나름 잘만들어놓은 체제라서 오래간거 아닌가 싶습니다. 작게먹고 작게싸는(?) 국가가 된거야 중국 떄문이고 뭐... 크게 먹고 크게 쌀수가 없으니까요.
사실 역잘알 분들한테 물어보고 싶은 건 이건데, 조선조가 꼬인게 세조가 조져놓은 스노우볼이 제일 크다는 주장을 한번씩 보는데 pgr 역잘알 분들 생각은 어떤신지 궁금하네요.
Birdwall
20/01/13 19:38
수정 아이콘
세조 집권은 15세기고 조선 망한건 20세기 일인데 세조가 망쳐서 망할 나라였으면 그것보다 빨리 망한 나라는 다 뭐가 될지...
세조 만악설은 수많은 요인들을 무시하고 '전부 이것 하나 때문이야!' 라는 유치한 선악 이분법적인 논리로 보여서 몹시 싫어하는 의견입니다.
20/01/13 21:21
수정 아이콘
본문과 댓글에 양란 얘기도 나오고 영정조 얘기도 나오는데 세조 얘기 못할 이유는 뭔가 싶네요.
20/01/29 22:34
수정 아이콘
세조가 조져놓은 스노우볼 때문에 화내는 건

조선이 그 때 이후로 흔히 생각하는 니나노세월을 보내는 기조가 강해진 것도 사실이라서요.

만약 조선이 세종 때 주장했던 것처럼 꾸준히 친여진 흡수여진 북진 기조를 보였으면 누르하치가 아무리 잘 나도 성공을 못했을 것도 사실이라 그 스노우볼도 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20/01/13 18:30
수정 아이콘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요즘 토전사 보면서 인조를 좀 동정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너무 역클(월드가 아니라 역사...)이었던거 같아요.
11년째도피중
20/01/13 21:29
수정 아이콘
진짜 인조도 동정의 여지 정도는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왕들이 홍타이지 식으로 밀고 들어와서 그렇게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뭐 별달랐을까 싶고. 그래도 토전사 덕에 이제 마녀사냥의 빈도는 좀 줄지않을까 기대를 해봅니다.
별개로 다들 고구마 고구마 하지만 이번 토전사의 [사르후 - 병자호란 - 이자성의 난]의 흐름은 정말 배울 점, 시사하는 점이 많은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유익합니다.
antidote
20/01/14 01:01
수정 아이콘
이괄의 난만 안나게 막았어도 그정도 참사는 안갔을 가능성도 꽤 있습니다.
결국 그꼴나게 만든게 인조의 정치력이죠. 아마 선조 정도 되는 정치력이었으면 이괄의 난 같은건 나지도 않았을겁니다.
고양이왕
20/01/13 19:12
수정 아이콘
일본과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집권 세력의 차이입니다. 순조시기는 그 유명한 세도정치 시기였습니다.

어떤 권력자인들 안 그렇겠습니까만은 저 시대의 집권자들은 특히 더 파렴치하고 자신들만의 안위를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권력을 자신들의 가문에 집중시키고 공고히 하는 것에만 힘을 썼던 사람들이죠. 권력자들에게 외세의 유입은 자신의 권력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요소입니다.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외세의 차단이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죠. 마치 김정은이나 시진핑처럼 당시 세도정치 가문의 리더들도 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청나라, 일본도 마찬가지였고, 일본도 외세에 완전히 개항하게 된 것은 미국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정치판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역동의 시기였고 권력의 교체가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권력 교체의 명분으로 문명개화론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깔린 일본과 우리나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20/01/13 19:48
수정 아이콘
아이폰 만들어질때 그 변화를 못따라간 기업이 현대에도 수두룩한데 조선시대에야..
20/01/13 20:14
수정 아이콘
님들 비트코인은 시대의 흐름인데 왜 아직도 안사고 있나요 정말 답답하네요! 안사는데 님들만의 논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죠, 아에 알아보려고 코인 관련사이트들에 들어가 교류보려는 의지도 없네요! 달러는 지는 해고 비트코인이라는 새로운 시류가 닥치고 있는데 어쩜 이리도 꽉막혀있나요!
20/01/13 21:05
수정 아이콘
댓글 쓰신분이 눈 깜짝해서 조선시대 왕으로 전생한다고 해도 역사의 흐름을 바꿀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상황상 근대화 하기 힘든 처지였고, 어려움을 뚫고 기적적으로 이만큼이나마 발전한 거니까요.
긴 하루의 끝에서
20/01/13 21:29
수정 아이콘
"역사는 인과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우연의 산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 움직이기 마련이다."라는 말도 있죠.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아쉬움을 느끼고 교훈을 새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이를 선천적인 우열의 개념으로 확대하여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역사는 늘 흥망성쇠의 반복이고, 현재가 곧 역사의 전부는 아닙니다.
-안군-
20/01/13 21:49
수정 아이콘
사실 뭘해도 우리나라가 그 상황에서 열강의 반열에 오를 방법은 없었다는게 거의 정설 아닌가요? 심지어 산업혁명 직전까지 넘사벽 급의 최강국이었던 중국도 결국은 개털렸잖아요.
역사든 정치든 기대치가 너무 높으면 매사가 불만족스럽죠. 그때 개항했어봐야 잘 해야 일본의 마이너카피 정도 수준이었을걸요? 아, 잘하면 연합국 측에 붙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건 면할 수 있었을 수도 있었겠군요. 그랬으면 한...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정도는 될 수 있었겠네요.
20/01/13 23:01
수정 아이콘
뭔 일을 해도 한국이 열강이 될 방법은 없다시피하고, 조선이 제일 잘 풀려봤자 지금 폴란드 위치 정도 자리잡으면 성공이겠죠.
한반도가 절반만이나마 해양세력에 편입된건 진짜 운빨에 운빨이 겹친거고 지금 수준의 부를 이루는 것도 중국 자폭+미국+일본의 서폿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걸요.
번개맞은씨앗
20/01/14 00:18
수정 아이콘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좋았겠죠?
antidote
20/01/14 00:59
수정 아이콘
영조 정조 시기가 태평성대 같아 보일지는 몰라도 붕당이 갈등끝에 점점 붕괴하고 왕에게 그 갈등을 해결할 권력을 몰아주면서 왕이 똑똑하던 시기에는 그나마 버티던 정부가 세도정치로 이행하게 되는 수순에 있었던 시기라고 보기는 합니다만

산업화에 실패한건 그냥 조선이 그럴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외 견학과 문물 수입 말이 좋지요. 그럴 돈이 가난한 조선에 어딨습니까?

그리고 중국의 전략물자 무역 금지가 조선의 상업에 큰 타격이 된게 아니라 명, 청 시기 해금령으로 해안의 고을들이 쇠퇴하거나 하면서 어지간한 민간 자본들은 무역으로 이득을 남기기 어려웠던게 큽니다. 민간 자본이란 자연적으로 이득이 발생하는 시장경제의 이득을 먹고 자라날 수밖에 없는데 수지 안맞게 해적은 날뛰는데 해금령까지 내려져서 무역으로 이득을 보기 어렵기 때문에 상업이 발전해봐야 결국 매점매석과 고리대 등으로 이어져 농민의 생활을 위협할 수밖에 없고 농본주의적 정부에서는 조세만 잘 걷힌다면 딱히 상업을 육성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죠. 한국에는 세리라는 단어가 생소한데 다른나라들은 세금을 거둘 행정력조차도 미비해서 세리라는 특유의 제도가 팽배했고 이게 결국 혁명으로 왕 목따게 만드는데 기여까지 했던걸 보면 조선의 관료제와 중앙집권은 당시 명나라 외의 다른 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들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던게 맞습니다.

르네상스 시기 -> 제국주의 시기로 가는 역사관련 전략게임을 하면 할수록 당시에 조선은 어떻게 하더라도 열강이 될 방법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겁니다. 유로파유니버셜리스4, 빅토리아2 추천드립니다.
하늘을보면
20/01/14 02:20
수정 아이콘
공감됩니다.
포프의대모험
20/01/14 05:51
수정 아이콘
한국이 이만큼 사는건 소련이랑 중국옆에 있는덕으로 미국이 돈부어서 그런게 크죠.. 아프리키 어디 붙어있었으면 휴전은 커녕 아직까지 내전하고 있었을듯
Liberalist
20/01/14 09:23
수정 아이콘
역사에서 사람들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인자가 지리적 요건에 따른 운빨지읒... 뭐시기인데, 이거 무시하고 모든 걸 개인 혹은 개별 체제의 역량 문제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참 많네요.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4030 [일반] 애플페이, 카드사와 협상 추가 결렬 [92] Leeka16133 20/01/14 16133 4
84029 [일반] [여행후기] 이스탄불,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19] aurelius9552 20/01/14 9552 14
84027 [일반] 왜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곳은 네덜란드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쓸까? - 콩고민주공화국을 중심으로 [18] 삭제됨8639 20/01/14 8639 17
84026 [정치] 이제는 경찰개혁만 남은거 같습니다. [83] 마빠이12510 20/01/14 12510 0
84025 [일반]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돼지 (데이터주의) [57] 차기백수9711 20/01/14 9711 17
84024 [일반] 간만에 들고온 자작 비즈들 [8] 及時雨8433 20/01/14 8433 5
84022 [정치] 현재 한국정치와 신속히 전달되는 팩트체킹이 없이 뿌려지는 언론과 과정없이 정의로워지는 사람들의 문제점 [23] noname1112054 20/01/14 12054 0
84021 [정치] 이제 사학법까지 갔으면 합니다 [136] 퀘이샤12665 20/01/14 12665 0
84020 [일반] 2020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발표 [21] Rorschach11658 20/01/13 11658 5
84019 [일반] "때려쳐, 이 XX야"…욕설을 당한 이국종 교수 [193] kurt23188 20/01/13 23188 0
84018 [정치] 여당과 문대통령 대단하네요. [385] Friday23325 20/01/13 23325 0
84017 [일반] [역사] 19세기 일본의 세계일주 미구회람실기의 서문 [4] aurelius7830 20/01/13 7830 5
84016 [정치] 역대대통령 지지율 추세[~20년1월까지] [119] 김홍기22101 20/01/13 22101 0
84015 [일반] [역사]밑글과 동시기 조선의 유럽에 대한 지식 [111] 수부왘9687 20/01/13 9687 5
84014 [일반] [역사] 1873년 어느 일본인의 러시아 인상 [12] aurelius9358 20/01/13 9358 5
84013 [일반] 11회차 글쓰기 이벤트 결과(수상자분들의 정보를 보내주세요!) [3] clover5829 20/01/08 5829 1
84012 [정치] 정봉주 전의원 금태섭 지역구 출마 검토 [98] 맥스훼인13339 20/01/13 13339 0
84011 [정치] 주광덕의 이성윤 문자조롱 폭로가 이상하게 흘러가는군요 [50] 마빠이14334 20/01/13 14334 0
84010 [일반] [역사] 1873년 어느 일본인의 로마여행 후기 [10] aurelius11434 20/01/12 11434 8
84009 [정치] 대만에서 당선된 최연소 여성 국회의원 라이핀유 [59] 나디아 연대기16852 20/01/12 16852 0
84008 [일반] Elfenlied의 오프닝 테마 송 - LILIUM [6] 아난5299 20/01/12 5299 0
84006 [일반] 출산률 [27] Aimyon10095 20/01/12 10095 8
84004 [일반] 특이한 오만의 월경지(오만 국왕 서거 특집) [17] 삭제됨9545 20/01/12 9545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