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제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이 근본적으로는 주류 한국인보다는 서구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이라면 으레 가지는 집단주의적 사고라든지, 나이와 서열문화, 입신양명 등의 유교적 가치 등과는 꽤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사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회 자체가 대부분의 것들이 서구의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바탕의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는 전통적 가치에 기반했다고 느껴집니다. 뭐랄까, 한국어의 어휘는 대부분 한자어로 대체 돼 있지만 그래도 그 바탕 자체는 한국어인 느낌?
마치 조선인이 백마고 서구인이 흑마라면, 현대 한국인은 흰 바탕에 검은 줄무니를 가진 얼룩말 같다고나 할까요. 저도 똑같은 얼룩말이기는 한데, 검은 바탕에 흰 줄무니 얼룩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구분이 안되고 대부분의 경우에도 별 차이 없는데, 가끔 특이한 상황에서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지요. 가끔은 부모님과 대화할 때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나랑 사고방식이 다르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꼭 윗 세대가 아니더라도, 가끔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다보면 핀트가 안맞는 부분이 느껴집니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생각의 전제가 다르다는 측면에서요.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고, 자라오면서 점점 탈피한 것에 가깝긴 합니다.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은 서구 문명에서 유래한 것이니까요. 태어나서부터 서구 문명에 둘러쌓여 거기에 맞춰 생각하고, 또 계속해서 배워나가다보니 어느 순간 서구식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인간이 돼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얼룩말이긴 한데, 딛고 선 방향이 달라졌달까요.
아무튼 뭐랄까 콕 찝어 말하기 애매한 한국의 '전통'이랄지 '세계관'이랄지는 저에게 남일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개화기 지식인들처럼 적극적으로 부정하려들지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이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무관심합니다. 마치 역사책에서 '조선시대에는 쌀과 베로 물물교환을 했다' 같은 느낌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 그랬구나' 이상의 감흥은 더 들기가 어렵겠죠. 내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서구인의 정체성을 가졌고, 조선 시대 등 이전 시대의 사상과 관념은 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
취직을 하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늦깎이 자아 찾기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평생을 '생존'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공유할 '뒤처짐에 대한 공포'이지요.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좋은 직장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등. 거기서 밀려나면 미래가 암울해지는, 생존 경쟁에서 탈락한다는 그런 압박 말입니다. 당장 내가 살만해도 미래에 생존하기 위해선 계속 달려야한다는 그런 것.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을 아시나요? 인간의 욕구는 단계적으로 이뤄지고, 아랫 단계가 충족 되면 윗 단계의 욕구가 생긴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저는 평생을 2단계의 '안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위해 분투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정작 돈을 좀 벌고 보니 어느 순간 허무함이 밀려 왔습니다. 돈, 생존을 지상과제로 삼고 달려왔는데 이제 안정적인 직장도, 나쁘지 않은 봉급도 얻어내면서 그 과제가 완료됐거든요. 그 다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막연히 '돈 많이 벌면 행복하겠지'라고 생각했을 따름이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여태 몰랐는데 돈은 저에게 비타민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부족하면 큰 문제가 생기지만, 일정 수준 이상만 충족되면 그 이상 있어도 별 소용 없는 것. 저는 돈만 보고 살 수는 없는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뭘 해도 재미가 없고, 인생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마치 평생 일만 보고 살다 은퇴하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런 노인네 같은 마인드를 이 나이에 벌써 겪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다보니 생긴 휴식 기회를 활용해 꽤나 오래 스스로를 관조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사실 인간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지요. '일단 대학 가서 생각해!', '취직부터 하자' 같은 분위기 속에 자신의 선호란 일단 뒤로 미뤄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서야 비로소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더군요.
3.
저는 세상을 알아가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른 나라 이야기, 역사를 아는 것이 좋았고 항상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국제정세, 산업의 변화 등 다양한 세상의 흐름에 가슴이 뜁니다. 꼭 사회 문화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양자역학과 미시 세계의 심오함에 매료되고, 우주의 멸망에 몸서리치며, AI나 로봇 등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감탄합니다.
그리고 이걸 단순히 알고 넘어가는 것을 넘어, 내가 즐거워 하는 것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일종의 ['츄라이'] 심리죠. 사실 게임할 때도 뉴들박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뉴비한테 최대한 많은 걸 알려주려 하고, 나름대로 공략도 써보고, 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봐서라도 알려주고. 그렇게 내가 아는 것이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혹은 즐거움이 되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PGR에 계속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의 심리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너무 재밌는 걸 남들에게도 알려주고싶어 안달이 난 것이죠. ['헤이, 츄라이 츄라이~ 먹어봤는데 이거 개맛있음!'] 딱히 제가 뭔가를 잘 알고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츄라이하고 공유하는 게 좋은 거에요.
그런 측면에서 지식이 지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쓸모의 영역은 제가 애착을 가진 고향, 지역, 나라 단위까지더군요. 나름 코스모폴리탄을 자처하긴 했는데, 진실한 감정이입은 결국 국가까지가 한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나누고 싶지요.
그렇다고 제가 막 제 지식을 이용해서 나라를 이끌고, 이러한 욕망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연구하고, 세상에 도움되는 수준까지면 족합니다. 권력욕? 그런 귀찮은 건 사절이에요. 전술했듯이 돈에 대한 욕망도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필요치가 낮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를 정리하자면
1) 학문에 힘쓰고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는 것에 즐거워함
2) 나라를 올바른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열정을 쏟음
3) 직접 관직에 나서기 보다는 학문을 닦고 논설하고, 때때로 상소문을 올림
4) 중심보다는 지방에서 깨달음을 전파하고 후학을 양성함
5) 권력과 부보다는 자신의 소신이 더 중요한 안빈낙도의 삶을 지향
무슨 전형적인 조선시대 지방 유생이 돼 버린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낙향하여 저기 산골에서 서원을 세워서 공부하고, 동료들과 나라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토론하며, 후학과 동네 마을 사람들에게 신념과 가치를 퍼트리고, 정치가 잘못되면 분노하여 상소문을 올려도 이상하지 않은, 꼬장꼬장한 선비 그 자체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공맹의 도는 저 어딘가로 날아가고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MZ선비라니... 제가 다른 한국 사회를 두고 '여러 제도나 가치가 서구의 것으로 대체되었을 뿐 본 바탕은 그대로다'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저조차도 그랬던 것입니다. 웃긴 게 정작 세계관이나 사고방식은 전혀 이어받지 않았으면서도 어째 개인의 선호를 종합해보니 선비가 튀어나온 게 참...
뭐랄까, 반대편으로 무작정 달리다보니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입니다. 굉장히 기묘하고 어이가 없습니다. 물려받은 문화나 사고방식은 이다지도 복잡한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봐야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니... 사실 원래 '정반대'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방향 빼고 나머지는 다 똑같은 것들이지요. 남자 여자, 좌우, 위 아래 등.
4.
그래서 뭐, 좀 늦긴 했는데 제 행복을 찾아가려 합니다. 봉급수준만 생각하다 정작 전혀 관심 없는 분야에 담근 발을 빼고, 전부터 가고싶었던, 그렇지만 포기했던 대학원이나 가야지요. 돈도 모아뒀겠다, 내게 필요한 돈도 적겠다 막연한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비록 시간이 들고, 졸업해도 지금보다 낮은 봉급을 받겠지만 뭐 어때요. 그게 내가 하고싶은 건데. 일론 머스크였나요? 하루 1달러로 살아보고 생각보다 살만해서 망해도 별 상관 없겠다고 확신을 얻고 창업했다는 거. 딱 그 느낌입니다. 하다 안 돼 봐야 죽기야 할까요. 오히려 지금 생활하고 크게 차이도 안날 거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계신가요? 평생 고생만 하다 은퇴하고 텅 빈 사람이 되어 죽음만 기다리는 삶이라니, 그건 싫잖아요? 여러분도 꼭 하고싶은 것을 찾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셨으면 좋겠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