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삼국지 글을 쉬고 있었습니다. 글쓰기와 관련해서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문제가 있었고. 그게 아직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데다, 심지어 언제 해결될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속상한 나머지 키보드에서 아예 손을 놓은 지가 이럭저럭 한 달쯤 되었네요. 그래도 개가 똥을 끊을 수는 없는 법이니 오랜만에 글을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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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사영(蜀漢四英)이란 촉한의 네 영준이라는 뜻입니다. 제갈량을 비롯하여 장완, 비의, 동윤 등 네 명의 재상을 총칭하는 말이지요. 후세 사람이 꾸며내어 붙인 호칭인 ‘오호대장군’과는 달리, 사영(四英)이라는 말은 당대에도 이미 쓰이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당시 촉 사람들이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을 사상(四相. 네 재상)으로 꼽고 사영(四英)이라고 불렀다. [촉서 동윤전 주석 화양국지]]
네 사람은 재상으로서 황제를 대리하여 촉한을 이끌어간 이들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능력이 뛰어났으며, 비록 성격은 저마다 달랐지만 인격적으로도 존경받을 만했습니다. 물론 굳이 급을 따지자면 제갈량이 까마득한 위쪽에 위치해 있고 장완과 비의는 그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그리고 동윤은 지위가 낮아서 상대적으로 좀 처지는 편입니다. 사실 재상이라고 부르기도 뭣하지요. 하지만 그럴지라도 분명 뛰어난 인물이었고 또 존경받았기에 당시 사람들이 사상의 반열에 넣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필두에 선 인물은 물론 제갈량입니다. 촉한의 건국과정에 있어 제갈량의 역할은 실로 지대합니다. 그리고 건국 후 유비-유선 두 황제로부터 그가 위임받은 권한과 거기에 수반되는 권위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울 정도입니다. 유비 사후 촉한의 황제는 유선이었지만 통치자는 제갈량이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요. 그는 내정과 군사를 비롯하여 국정의 모든 방면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고 그를 통해 촉한을 강성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왕망이나 조조 같은 권신(權臣)이 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충성스러운 모습만을 보여 후세의 귀감이 된 바 있지요.
물론 제갈량을 칭찬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대해 다루려면 책 한 권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제갈량의 생애 전반을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제갈량의 사망시점으로 함께 가 보시죠.
234년. 제갈량은 다섯 번째 북벌을 진두지휘하던 도중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됩니다. 당시 54세로 적은 나이가 아니었던 데다, 그간 홀로 나라를 지탱하다시피하면서 지독한 과로로 몸을 혹사시킨 까닭이었지요. 자신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깨달은 제갈량은 후계자를 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았던 제갈량의 자리를 탐내던 자들은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개중에서도 무장으로는 위연을, 문관 중에서는 양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북벌에서 항상 제갈량과 함께하며 아낌을 받았기에 내심 자신이 후계자가 되리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지위나 권한 또한 그런 꿈을 꾸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높았지요. 두 사람의 사이가 지독하리만큼 나빴던 데는 그런 라이벌 관계에서 비롯된 적대감도 있었던 걸로 짐작됩니다. 위연과 양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https://brunch.co.kr/@gorgom/59
https://brunch.co.kr/@gorgom/60
제갈량이 마침내 눈을 감자 촉한의 군대는 퇴각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결국 위연과 양의는 충돌했고 급기야 나라 전체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뻔 했지요. 하지만 다행히도 사태는 그럭저럭 수습되었고 승자는 바로 양의였습니다. 아마도 양의는 자신했을 겁니다. 유일한 라이벌인 위연을 제거한 이상, 자신이 제갈량의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그러나 제갈량은 능력은 출중할지언정 인격적인 결함이 큰 양의나 위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내심 염두에 두고 있었던 자는 제3의 인물이었지요. 성도에 남아서 승상의 업무를 대리하며 군수물자와 병력을 공급해 주던 장완이 바로 그가 점찍은 후계자였습니다. 제갈량은 은밀히 유선에게 표문을 바쳐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만약 신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뒷일은 응당 장완에게 맡기십시오. [촉서 장완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한고제 유방이 전선에서 항우와 싸울 때, 그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소하에게 후방을 맡겨 보급을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유비 또한 한중에서 조조와 격돌할 때 제갈량을 성도에 남겨 보급을 담당하도록 했지요. 가장 믿음직한 수하는 오히려 내 곁에 두지 않습니다. 대신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나를 대신하도록 하는 법이지요. 그러니만큼 제갈량에게 있어 장완은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오장원에서 제갈량의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유선은 이복이라는 자를 보내어 제갈량에게 나랏일을 묻게 했습니다. 그때 이복이 국가의 일을 맡겨야 할 사람을 묻자 제갈량은 장완이 적임이고 그 다음에는 비의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를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제갈량은 오래 전부터 장완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걸로 보입니다.
한편 삼국지연의의 영향인지 강유를 제갈량의 후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강유의 위상이 결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또 본래 위나라에 있었다는 출신 문제도 있었고요. 병법 24편을 넘겨주었다는 묘사도 연의의 창작입니다. 물론 제갈량이 강유를 무척이나 아꼈던 건 사실이며, 제갈량 자신과는 달리 군사적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장완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겼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제갈량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지요.
자. 그러면 제갈량이 지목한 장완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리고 다음 글은 과연 언제 올라오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