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34년~249년: 옹주자사-토촉호군 양두체제.[(220년) 문제는 그(곽회)의 말을 듣고 칭찬하고 발탁하여 옹주자사를 겸임하도록 임명했다.
-『위서』 「곽회전」]
[정시 원년(240년) 촉나라 장수 강유가 농서로 진격해 나왔다. 곽회는 곧 진군하여 강중까지 추격하였다. 강유는 곧 물러났다. 곽회는 곧 강인 미당 등을 토벌하고, 저인 3천 부락을 순찰하여, 위로하고, 그들을 옮겨 관중을 충실하게 하였다.
-『위서』 「곽회전」]
[정시 8년 (247) 농서, 남안, 금성, 서평의 각 강족들인 아하, 소과, 벌동, 아차새 등이 서로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그들에게 호응했다. 토촉호군의 하후패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위시에 주둔했다. 곽회의 군대가 막 적도에 이르렀을 때, 논의하는 자들은 먼저 포한을 공격하여 평정한 후에야 내부의 흉악한 강인을 평정 할 수 있고, 외부의 적의 음모를 꺾을 수 있다고 했다. 곽회는 강유가 반드시 하후패를 공격해 올 것이므로 풍중으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하후패를 맞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강유는 과연 위시를 공격해 왔는데, 마침 곽회의 군대를 만나자, 강유는 점차 퇴각했다. 곽회는 모반한 강족 사람들을 토벌하여 아하와 소과를 베어버렸는데 이때, 항복한 자가 1만여 부락이나 되었다.
-『위서』 「곽회전」]
[곽회가 말했다.
'지금 가서 요화를 취하고, 적이 생각지도 못했는데 출동하면 강유는 반드시 낭패할 것이요. 그리고 강유로 하여금 명령에 따라 분주히 돌아다녀 피곤하게 하는 것이오. 군대는 멀리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호인과 촉나라의 연합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될 것이오. 이것은 하나를 들어 둘을 온전하게 하는 계략이요.'
곧 따로 하후패 등을 파견하여 답중까지 강유를 추격하게 했다. 곽회는 직접 군사들을 인솔하여 요화들을 공격하였다. 강유는 과연 달려 돌아와 요화를 구하였으니 모두 곽회가 계산한 것처럼 되었다. 나아가 도향후로 봉해졌다.
-『위서』 「곽회전」]
제갈량 사후 이 체제가 곧바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238년부터 다시 시작된 장완, 비의와 강유에 의한 산발적인 북벌과 진압이 247~248년에 이르는 대규모 강족반란 획책에 대응하는 체재이다. 촉한은 물론이고 위조차도 기록이 부족한 시기로 굉장히 듬성듬성하게 서술된게 특징이다.
그나마 자세히 서술한 「곽회전」의 기록을 보면 옹주자사 곽회를 주축으로 그리며 토촉호군 하후패 또한 자주 언급하지만 그의 명령에 휘둘리는 듯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하후패는 독자열전이 부재함을 고려해야 하며 그나마 하후패에 대한 독자적인 내용을 담은 『위략』에 의하면 토촉호군은 정서장군 직속으로 당시 정서장군은 하후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후현은 당시 중앙정계에서 조상 일파와 함께 하고 있었으며 「하후현전」에서도 촉한의 북벌에 대한 내용이 전무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상 시대의 정서장군은 후일 대촉방위체제에 주축을 맡는 정서장군과 차이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히 토촉호군은 옹주자사 직속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249년까지 지속된 곽회와 하후패의 방위체제는 "옹주자사-토촉호군 양두체제"로 서술한다.
2. 249년~ 255년: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 체제, 옹주자사-토촉호군-안서장군 보좌.
[가평원년 (249)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로 승진했다. 이해 옹주자사 진태와 함께 계책을 정하여, 촉나라 아문장군 구안 등을 시 옆에서 항복시켰다.
-『위서』 「곽회전」]
[가평 초년, 곽회를 대신하여 옹주자사가 되었으며, 분위장군을 더하였다. 촉나라 대장 강유가 병사들을 이끌고 국산에 의지하여 두 개의 성을 쌓고, 아문장 구안과 이흠 등을 보내 그 성을 지키도록 했으며, 또 강호의 인질을 모아 위나라의 여러 군을 침범했다. 정서장군 곽회는 진태와 더불어 적을 제어할 방법을 상의했는데, 진태가 말했다.
-『위서』 「진태전」]
[곽회는 진태의 계책을 따라서 진태에게 토촉호군 서질과 남안 태수 등애 등을 인솔하고 병사를 나아가게 하여 그들을 포위하여 그 운송로와 성 밖의 물의 흐름을 끊도록 했다.
-『위서』 「진태전」]
[가평 원년(249)에 등애는 정서장군 곽회와 함께 촉나라의 편장군 강유를 막아냈다.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서쪽으로 강인을 공격하려는데, 등애가 말했다.
-『위서』 「등애전」]
[다시 농서(隴西)로 출병하자 수적도장(守狄道長)(→농서군 적도현의 守(임시의 뜻) 현장縣長)(※) 이간(李簡)이 성(城)을 들어 항복하였다. 진군하여 양무(襄武)를 포위하고는 위장(魏將) 서질(徐質)과 교봉(交鋒,교전)하여 (적군의) 수급을 베고 적을 격파하니 위군(魏軍)이 패퇴(敗退)하였다. (강)유가 승세를 타 항복시킨 곳이 많았고 하관(河關), 적도(狄道), 임조(臨洮) 세 현(縣)의 백성들을 뽑아 (데리고) 돌아왔다.
-『촉서』 「강유전」]
[정 원 2년에 곽회가 세상을 떠나자, 진태가 곽회를 대신하여 정서장군이 되었고, 가절도독옹양제군사가 되었다. 후년, 옹주자사 왕경이 진태에게 말하기를 강유와 하후태가 세갈래 길, 즉 기산, 석영, 금성으로 향하여 병사를 위시로 나아가게 하고, 양주의 군사로 하여금 포한에 이르게 하여 토촉호군을 기산으로 향하도록 하려고 한다고 했다. 진태는 적의 세력으로는 세 갈래 길로 나눌 수 없으며, 아울러 병사의 세력을 분산시키는 것은 피하기 어려우므로 양주의 경계를 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헤아렸다.
-『위서』 「진태전」]
249년의 고평릉 사변을 기점으로 대촉방위체제는 크게 바뀐다. 249년 이전, 조상 정권 시절에는 옹주자사 곽회와 토촉호군 하후패가 독자적으로 촉한과 강족을 막아낸다는 인상이 강했지만 사마의 정권은 친 사마의파로 유명한 곽회를 아예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를 임명하고 옹주자사와 토촉호군을 그의 휘하로 두면서 본격적으로 촉한의 침공을 대처한다.
참고로 「조엄전」에서는 조엄이 조방이 즉위할 즈음(239년)해서 정서장군 옹양주제군사로 임명되었으며 243년에 노령과 질병을 이유로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즉, 고평릉 사변을 기점으로 창설된 직책이 아니다. 그러나 249년 이후로 정서장군을 맡은 인물은 거의 반드시 적군으로 『촉서』에서 언급하거나 주요 지휘관으로 『위서』에서 언급하는데 옹양주 전선에서의 조엄은 타열전에서 서술된 바가 없다. 그후 정서장군을 맡은 하후현 또한 참전한게 분명한 낙곡 대전 외에는 대촉방위체제에 참여한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249년부터 시작된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 체제는 조엄과 하후현과 달리 대촉방위체제의 주축을 맡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점점 거세지는 촉한의 북벌을 경계해서 실권이 강화된 것인지는 불명이지만 244년의 낙곡 대전에서 대패함으로 만만찮은 병력과 수많은 물자를 잃은데다가 247~248년에 지속된 대규모 강족 반란과 강유의 끈질긴 호응을 겪고 고평릉 사변으로 인한 불안정과 중신 하후패의 배신 등 안보불안까지 고려하면 하나의 총사령관에 의한 조직적 대처를 지향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행보가 아니라 할 수 있다.
고평릉 사변과 맞물려서 249년에 발발한 강유의 2차 북벌에서 이 체제가 처음 출범한다. 이때 전술한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 곽회와 그를 보좌하는 옹주자사 진태, 남안태수 등애, 토촉호군 서질 등이 참전한다. 이전까지 곽회가 독자적으로 전략을 꾸미며 강유를 대적했던 것에 비해 정서장군으로써의 곽회는 옹주자사 진태와 등애 등의 계책을 받아들이고 시행하는 등 총사령관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254년의 강유의 4차 북벌에 토촉호군 서질은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이끌고 강유의 기습을 맞서는 모습을 보이는데 옹주자사-토촉호군 양두체제 시절에 비하면 약할지언정 그래도 나름의 독자지휘권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강유와의 전투에서 서질은 참살당하고 토촉호군은 격퇴당하는 큰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독자지휘권을 행사하는 모습은 다시는 보이지 않고 정서장군과 옹주자사에게 종속된 듯한 인상을 준다.
255년에 곽회가 사망하고 옹주자사 진태가 정서장군 가절옹양제군사로써 곽회의 자리를 승계받는다. 승진한 진태는 옹주자사 왕경과 함께 다시 재개된 강유의 4차 북벌을 막으려 하지만 왕경은 도수 전투에서 수만이 참살당하는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고 요충지 적도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다. 이때 양주전선으로부터 복귀한 行안서장군 등애는 아예 농서일대를 포기하고자 건의한다. 진태는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강유를 급습해서 물리게 종용하는데 성공하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하여 상서우복야로 임명된다.
진태 이후로 대촉방위체계는 굉장히 난잡해진다.
3. 256년: 진서장군 도독농우제군사 임시체제?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 등애는 이치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충절과 용기를 떨쳐 일어나 적장 20여명을 죽였고, 죽인 적군의 병사는 많다. 국가의 위엄을 파와 촉에 떨치고, 무용의 명성을 장강과 민강에 흐르게 했다. 지금 등애를 진서장군, 도독농우제군사로 삼고, 나아가 등후로 봉한다. 그의 식읍 5백 호를 떼어 아들 등충에게 주어서 정후로 삼으라.>
-『위서』 「등애전」]
255년에 진태가 옹양주 전선을 떠난 직후 대촉방위체제를 누가 승계했는지 굉장히 불분명하다. 255년에 진태와 함께 왕경의 포위를 풀어낸 등애는 공을 인정받아 行안서장군에서 안서장군으로 승진한다. 그후 256년에 또 다시 재개된 강유의 4차 북벌에 대한 전략수립과 군사지휘 등을 모두 도맡아서 끝내 단곡 전투에서 강유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이 공을 인정받아 「등애전」에 의하면 등애는 진서장군으로 승진하고 도독농우제군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굉장히 이상한 점은 1년 직후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 체제로 다시 복귀한다. 등애에 의한 임시체제인지 아니면 도독옹양제군사 휘하의 또 하나의 도독직인 알 수 없다. 참고로 『진서』 「석감전」에서 도독농우제군사를 다시 한번 언급한다.
4. 257년~262년?: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 체제로의 복귀?
[한나라의 강유는 위나라가 관중 지역에 있는 병사를 나누어서 회남 지역으로 갓다는 소식을 듣고, 빈틈을 이용하여 진천을 공격하려고 수만 명을 인솔하고 낙곡을 나와서 침령에 도착하였다.
이때 장성에는 곡식을 쌓아놓은 것이 아주 많았는데, 지키는 병사는 적어서 정서장군이며 도독옹량제군사인 사마망과 안서장군 등애가 병사를 데리고 나아가서 이곳을 점거하여 강유를 막았다.
-『자치통감』 77권]
[2년(257), 등애가 장성에서 강유를 방어하자 강유는 물러나 돌아갔다. 등애는 정서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앞뒤로 증가한 식읍은 총 6천 6백 호나 되었다.
-『위서』 「등애전」]
「등애전」에서 256년의 군공으로 등애가 도독농우제군사에 진서장군으로 임명되었다고 서술된 것이 무색하게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굉장히 다른 내용을 서술한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257년에 이르어서는 사마망이 진태를 최종적으로 승계해서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를 맡았으며 안서장군에서 진서장군으로 승진했다던 등애는 도로 안서장군으로 강등당했다.
중요한 점은 사진장군과 사정장군은 직관지상 사정>사진으로 서열이 정해져있다 한들 서로 한 전선을 총괄한다는 역할은 동일해서 진동장군이 존재한다면 정동장군을 임명하지 않는게 관례였다. 요상하게도 250년대의 위나라는 이 관례를 박살내다 싶이 대오전선에 정동장군 호준과 진동장군 호준, 정남장군 왕창과 진남장군 관구검을 배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만약에 『자치통감』의 기록이 오기이며 257년의 등애가 안서장군이 아닌 진서장군이 맞다면 대촉전선에서도 정서장군 하후망과 진서장군 등애라는 괴상한 인사배치가 단행된 셈이다.
더욱 자세한 기록은 『진서』 「사마망전」에서 서술하리라 여겨지지만 현재 미번역된 상태임으로 깊이 통찰할 수 없는 상태이다.
257년에 강유를 막아낸 공로를 인정받은 등애는 정서장군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도독옹양제군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후 262년의 6차 북벌 이전까지는 제대로된 북벌이 조직된 적이 없고, 그 6차 북벌 조차도 단순히 짤막하게 '등애가 강유를 격파했다' 수준의 기록으로 마무리된다.
5. 263년: 진서장군 가절도독관중제군사 체제? 정서장군-옹주자사 보좌?
[경원 3년(262) 겨울, 종회를 진서장군, 가절도독관중제군사로 임명하였다. 사마문왕이 청주, 서주, 연주, 예주, 형주, 양주 모든 주에 명령을 내려서 함께 배를 만들도록 했으며, 또 당자에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큰 배를 만들도록 명령했는데 외무에서는 오나라를 토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원 4년(263) 가을, 조서를 내려 등애와 제갈서에게 각기 3만여 명의 병사를 통솔하도록 명령을 했으며, 등애는 감송과 답중 일대로 곧장 가서 강유와 교전하며 견제하였고, 제갈서는 무가와 교두로 가서 강유의 돌아갈 길을 끊어 노았다.
-『위서』 「종회전」]
[4년 가을, 조서를 내려 각 군대가 촉나라를 정벌하도록 명령했고, 대장군 사마문왕이 모든 지휘를 하고, 등애로 하여금 강유와 전선에서 대치하도록 하였고, 옹주자사 제갈서에게 강유의 퇴로를 끊어 강유가 돌아갈 길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위서』 「등애전」]
정서장군 등애가 대촉방어체제의 마지막 실무자가 된 것은 확실해 보이나 괴상하게도 263년에 단행한 촉정벌에서 총사령관은 서열상 정서장군 등애보다 낮고, 실무적인 경험도 등애에 비해 부족하며, 대촉전선에서의 공헌도 자체가 없는 종회가 역임하게 된다. 이 정벌에 옹주자사 제갈서 또한 독자적인 군사력을 이끌고 참전한다.
대촉방위체계와 별개로 조직된 체제이지만 결국 대촉전선을 맡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면이 존재하기에 서술한다.
대오전선에서의 사정장군/사진장군 남발도 그렇고 진서장군 종회에게 총사령관을 맡게 한 것도 결국에는 지휘체계를 꼬아놓아서 지방관의 반란획책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추측도 일각에 존재한다. 이런 의도성을 갖고 출범된 체제인지는 불명이나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결성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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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점: 이 글은 어디까지나 제가 근 1년동안 강유에 대한 기록을 들춰보면서 받은 인상에 대한 정리이지 완벽히 정리된 내용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계속해서 보완해 나아가야 하는 글인만큼 "이럴 수 있겠구나"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