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나디 골로프킨과 사울 알바레스의 타이틀전 성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일단 골로프킨이 알바레스와의 일전 이전에 시합을 한 번 한다면 그 상대로 유력하게 부상하고 있는 선수가 바로 영국 출신의 크리스 유뱅크 주니어입니다. 현재 영국 미들급 챔피언이지요. 유뱅크 본인 역시 자신은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골로프킨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친구는 우리 시간으로 당장 내일 본인의 미들급 타이틀 1차 방어전을 치릅니다. 만약 내일 경기에서 유뱅크 주니어가 허무하게 지기라도 한다면 골로프킨하고의 일전은 "없던 일"이 되겠지만 이긴다면 두 선수와의 일전은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이 친구의 아버지, 크리스 유뱅크 시니어 역시 복싱 세계 챔피언 출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1990년대 WBO라는 복싱기구의 미들급과 슈퍼미들급 두 체급을 석권했던 선수였습니다. 비록 1990년대의 WBO는 전통을 자랑하는 기구들인 WBA나 WBC에 비해서는 권위가 좀 떨어졌던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세계챔피언은 세계챔피언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니까 이 집안은 아버지의 재능을 아들이 물려받아서 대를 이어 복싱을 하고 있는 복싱 집안이 되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런데 묘한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아버지와 아들이 링 위에서 큰 사고들을 경험합니다. 둘 다 자신과 대결했던 상대편 선수들이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던 상황들이 발생했던 것이지요. 우선 아버지의 경우부터 보겠습니다. 1991년 6월 22일, 당시 WBO 미들급 세계챔피언이었던 크리스 유뱅크 시니어는 도전자로 같은 영국 출신이었던 마이클 왓슨을 맞이하게 됩니다. 경기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12라운드의 격전 끝에도 승부가 나지 않아서 시합의 결과는 판정으로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판정은 아버지 유뱅크 시니어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세 명의 심판들 가운데 두 명의 심판은 유뱅크 편을 들었지만 나머지 한명은 동점을 주었을 정도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긴 시합은 아니었습니다. 왓슨측은 즉시 재대결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같은 해 9월 21일 양 선수들 간에 재대결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이클 왓슨...
재대결 역시 만만치 않은 시합이었습니다. 특히 11라운드에서는 양 선수가 서로 다운을 한 번씩 주고받았을 정도로 거친 경기였습니다. 왓슨 선수가 먼저 강력한 어퍼컷으로 유뱅크 시니어를 다운 시켰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다시 시합이 재개되더라도 다운을 시킨 선수가 아직 정신을 다 차리지 못한 상대방을 더 거세게 몰아붙여서 경기를 마무리 짓게 마련인데 이 시합에서는 오히려 다운을 당했던 아버지 유뱅크가 어퍼컷을 왓슨의 턱에 적중시키면서 왓슨을 뒤로 벌렁 자빠지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때 왓슨은 넘어지면서 뒷머리가 링의 맨 아래쪽 줄에 강하게 걸리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라운드였던 12라운드에서 공이 울리자마자 아버지 유뱅크는 도전자 왓슨을 코너에 몰아넣고서 펀치세례를 퍼부었습니다. 심판은 경기를 말렸고 경기 결과는 아버지 유뱅크의 12라운드 TKO승이었습니다.
비극이 시작될 줄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도전자였던 왓슨이 다시 링에서 쓰러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경기장에는 앰뷸런스도 없었고 구급요원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의사도 없었지요. 왓슨은 그대로 링에 방치가 되었습니다. 쓰러지고 난 후 8분 정도가 지난 후에야 긴급호출을 받은 의사가 허겁지겁 경기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때까지 왓슨은 그 흔한 산소마스크조차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왓슨이 병원으로 후송되고 응급치료를 받기까지 약 28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왓슨은 그 이후로 약 40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었고 여섯 차례나 뇌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이 나중에 의식을 찾았지만 그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왓슨은 나중에 시합을 주관한 영국복싱기구에 선수의 안전을 위한 조치들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에서 승소하여 약 4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아버지 유뱅크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제 아들 유뱅크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아들의 사건은 아주 최근에 벌어진 일입니다. 바로 올해 3월 26일, 영국 미들급 타이틀을 놓고 아들 유뱅크 주니어와 닉 블랙웰이라는 선수가 맞붙습니다. 아버지때와는 달리 경기는 아들 유뱅크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닉 블랙웰 선수는 이미 많은 데미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7라운드가 종료되었을 때쯤에는 닉 블랙웰 선수의 코너 쪽에서도 이미 승부가 기울었음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닉 블랙웰 선수의 세컨들이 경기를 중단시키고자 했지만 정작 닉 선수는 계속해서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미 닉의 왼쪽 눈은 크게 부어올라서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시합은 그 뒤로도 3라운드나 더 진행이 되었고 결국 10라운드에 이르러서야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켰습니다. 이미 이때는 닉 블랙웰 선수의 눈뿐만 아니라 뇌 역시 부풀어 오른 상태였습니다. 시합 중단 후 닉 선수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닉 블랙웰 선수의 부어오른 눈...눈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시합 종료 후의 모습...유뱅크 주니어 선수의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 생생하다...
닉 블랙웰 선수는 역시 긴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병원에서는 닉 선수의 치료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를 혼수상태로 유도했습니다. 일주일 이상 의식이 없었던 닉 블랙웰 선수는 다행히 의식을 되찾았고 왓슨 선수와는 달리 장애를 안고 살아가지는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싱 선수로서의 커리어는 그 경기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지요. 그리고 시합 도중에 아버지 유뱅크는 아들에게 닉 블랙웰 선수의 머리를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링 사이드에서 그 경기를 지켜본 아버지는 직감적으로 아들의 상대 선수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들의 코너로 올라가서 아들에게 닉 선수의 머리는 때리지 말고 몸통만 공격하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지시가 실제 아들의 경기 스타일에 어느 정도나 반영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로서는 20여 년 전의 끔찍한 악몽이 다시 눈앞에서 펼쳐지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다행이 의식을 회복한 닉 블랙웰 선수와 그의 아버지...
복싱이란 경기는 요즘 핫한 종합격투기 보다도 더 위험한 스포츠인 것 같습니다. 종합격투기 같은 경우 일단 상대방이 정타를 맞고 쓰러지면 바로 경기를 중단시키는데 반해서 복싱은 쓰러진 상대가 일단 일어나기만 하면 다시 경기를 재개시키기 때문에 충격에 충격이 더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거지요. 앞으로 링에서 더 이상 링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더불어서 골로프킨 선수와 유뱅크 주니어 선수의 경기가 꼭 성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더 강자인지 가려봐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