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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1/03 13:20:05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지금 왕위 가지고 디펜스 게임 하자고? 좋아, 다 드루와! 다 드루와!"
File


영국 국왕 헨리 4세(Henry IV, 1366 ~ 1413.3.20)




정복왕 윌리엄 1세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를 장악한 이후, 그 후예들인 플랜태저넷 왕가(House of Plantagenet)는 '왕좌의 게임' 에서 나오는 정도는 대수롭지 않을 정도로 막장스러운 왕위계승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습니다.


(사실 이 '왕위 계승 분쟁' 이 전쟁의 스타일이 변한 '프랑스 혁명 전쟁' 이전까지 서유럽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전쟁의 원인이기도 하고)



헨리 4세 이전까지를 간략하게만 요약해도 아들 놈이 뒤통수를 친다거나(윌리엄 1세, 헨리 2세), 동생이 형을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거나(윌리엄 2세), 개기는 형을 포로로 잡아 감금시켜버리거나(헨리 1세), 친척인 남정네와 여자가 죽어라 싸운다던가(스티븐, 마틸다), 동생 놈이 뒤통수를 친다거나(리처드 1세), 마누라에게 당한다던가(에드워드 2세) 등등등....



여기에 영주들간의 대립 등도 생각해보면 왕이라는게 꽤나 피곤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왕권이라는게 좀 상황적인 측면이 있다면 영국에서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왕권이 커질 수도 있지만(이를테면 평생 죽어라 이동만 하고 다니면서 지방 순시하고 미친듯이 일한 헨리 2세) 걍 전쟁에서 개박살나고 미움 받을짓만 하다가 도전을 받으면 왕권이 약해지는등(부빈 전투에서 실패한 존, 대 프랑스 정책이 실패한 헨리 3세) 능력 빨이 상당했습니다.




이 가운데 이런 도전과 이를 막으려는 개인의 능력이 최고조에 달한 인물이 있는데...바로 헨리 4세 입니다.






리처드 2세(Richard Ⅱ, 1367.1.6 ~ 1400.2)




헨리 4세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선왕인 리처드 2세를 이야기 해야 합니다. 리처드 2세의 선왕은 그 유명한 에드워드 3세로, 에드워드 3세는 백년전쟁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면서(말년에 거의 다 까먹었지만) 잉글랜드 내부에 있는 음모가들은 감히 찍소리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리처드 2세는 즉위 당시에 나이가 어린데다, 초기에 런던까지 위협받았던 규모의 반란인 '와트 타일러의 난' 을 겪었습니다.



여기까진 그럴만도 싶은데....문제는 리처드 2세가 나이를 먹으면서 주위의 총신들만 감싸돌면서 대영주들이나 의회와 반목을 하며 그들을 탄압했습니다. 일단 초기에는 성공적으로 보이기는 했는데 그 덕분에 의회나 영주들의 지지는 형편없이 떨어졌고, 잠시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가 있는 틈을 타서 내부에서 반발이 터지나오며 프랑스로 망명가 있던  해리퍼드 공 헨리가 추대되어 헨리 4세가 되어버린 겁니다. 여기서부터 영국의 랭커스터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헨리 4세는 키도 크고 인상적인 용모를 지닌 정력적인 왕이었고,  용감하고유능하고 불굴의 군인이이었으며 인내심과 결단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가 였습니다. 무술 실력도 좋았습니다. 다만 앞으로 겪을 난관들 때문에 건강은 그리 좋지 못해 심지어 나병 걸렸다는 소문도 났지만...



이 헨리 4세는 즉위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헨리는 정당한 계승권에 의해 추대된 왕이 아니라 일종의 쿠데타를 거쳐 즉위한 군주였습니다. 진정한 상속권자를 찾아 본다면 마치 백인 에드먼드 모티어(Edmun Morrtimer) 쪽이 오히려 가까웠습니다.


게다가 인기 없던 리처드 2세를 가장 싫어한 사람들 조차, 정당한 왕위계승권자이며 하느님과 교회의 축복을 받고 왕위에 오른 리처드를 퇴위시킨 방식에 대해 상당한 의문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헨리는 의회의 선출을 통해 즉위했지만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적었기에 찬탈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반란의 구실을 만들었습니다. 헨리의 치세 가히 전부는 자신의 빈약한 권위와 랭커스터 왕조에 대한 도전을 막아내는 일이 되었는데.....



그런데 그걸 다 막았습니다. 그 '디펜스 게임' 은 이렇게 됩니다.







 Portrait of John Holland, Duke of Exeter and Earl of Huntingdon from British Library MS Harley 1319, f. 25.



1. 리처드 2세 일파의 도전 - "야이 반란군 노무 쉐리야. 내가 지금 탱크 몰고 가서 네 놈들을 다 밞아 버리겠어!"


당연히 헨리가 즉위한 후 아직 포기를 못한 리처드 2세 일파가 가장 먼저 움직였습니다. 리처드 2세 이부형제(異父兄弟)인 헌팅던 백 존 홀란드, 조카인 켄트 백 토머스 홀란드, 그리고 러틀런드 백과 솔즈베리 백 등 리처드를 지지한 몇몇이 헨리와 그의 아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들은 1400년 윈저 성을 포위하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런던의 지지를 등에 엎은 헨리는 군대를 보내 음모자들을 체포했고, 이후 재판을 떄려 이들 모두를 사형시켰습니다. 그 후 아직 목숨은 붙여 놓고 있던 리처드 2세도 이 시기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첫번 오펜스 방어 성공!




File




2. 웨일즈의 도전 ─ "축구도 못하는 잉글랜드 쉐리들아. 우리에게는 긱스와 베일의 왼발이 있다. 다시는 우리를 무시하지 마라."



당시 리처드 2세에 대해 유난히 동정심이 강하던 웨일즈 역시 오와인 글린두어(Owain Glyndŵr)의 지휘 아래 봉기 했습니다. 웨일즈 여러 지역들은 사실상 자치나 다름 없었는데, 웨일즈 공을 자처한 글린두어는 게릴라 작전을 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프랑스 왕과 스코틀랜드, 여러 잉글랜드 내부의 반란 세력을 끌어들여 헨리 4세를 압박했습니다. 잉글랜드군이 이를 잡으러 갈 즈음이면 동굴이나 산을 통해 마술 처럼 사라져 버려서 도저히 잡을 수도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미래의 헨리 5세였던 왕세자 헨리가 활약하며 정말 어찌어찌 진압하는데 성공합니다. 



두번째 오펜스 방어 성공!


File


3. 스코틀랜드의 도전 


에드워드 1세 이후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내내 적대관계를 유지했고, 로버트 1세의 활약 등으로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로버트 2세 시절의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싸움에 전력을 바쳤고, 이후에 즉위한 로버트 3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문에 헨리는 별 수 없이 스코틀랜드를 공격해야 했으나 별 성과도 없었고, 오히려 1402년 올버니 공이 이끄는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이 역습 해오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글린두어 등의 반란에 시달려야 했던 헨리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지만...


노섬벌랜드 백 헨리 퍼시(Henry Percy, 1st Earl of Northumberland)가 호밀던 힐 전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함으로써 어떻게든 버텨내게 됩니다.




세번쨰 오펜스 방어 성공!



File


4. 퍼시가의 도전


문제는 이 퍼시가가 이제 되려 헨리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겁니다. 사실 퍼시 가는 헨리 4세의 가장 큰 지지자였지만, 호밀던 힐 전투의 포로 배상금 처리 문제에서 양측이 대립한 끝에 결국 칼을 들었습니다. 퍼시 가는 북부에서 매우 유력한 가문이었기에 이는 엄청난 문제였고, 여기에 더해 퍼시가가 글린두어, 모티머가, 그리고 더글라스 백 등과 손을 잡고 헨리를 때려 잡고 잉글랜드를 나눠 먹을 계획을 꾸미면서 상황은 끝도 없이 커져 나갔습니다.



만일 퍼시가가 글린두어의 웨일즈 군과 합류하면 모든게 끝장이 나겠지만, 헨리는 그 직전 슈루즈베리 전투(Battle of Shrewsbury)에서 대승을 거두어 퍼시를 격파하고 노섬벌랜드 백 헨리 퍼시의 아들 '성급한 퍼시(Henry 'Hotspur' Percy)'를 살해하면서 이를 저지하는데 성공합니다.



네번째 오펜스 방어 성공!







5.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루프 등의 반란



퍼시가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북부에서는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1405년, 아직 살아남은 퍼시가의 노섬벌랜드 백,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루프(Richard le Scrope), 토머스 모우브 등이 에드먼드 모티머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는 진압당했고, 노섬벌랜드 공은 스코틀랜드로 달아나고 스크루프는 처형되었습니다.



다섯번째 오펜스 방어 성공!






6. 노섬벌랜드 백 헨리 퍼시의 최후 저항


퍼시가의 대구모 반란과 스쿠르프의 반란 등에서 실패하며 모든 기반을 잃고 스코틀랜드로 도주한 노섬벌랜드 백은, 1408년 다시 한번 군대를 일으켜 잉글랜드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이를 웨스트모얼랜드 백 랠프 네빌(Ralph Neville, 1st Earl of Westmorland)이 브래엄 무어 전투(Battle of Bramham Moor)에서 격파하고 노섬벌랜드 백을 피살함으로써 방어에 성공합니다.



여섯번째 오펜스 방어 성공!




File:Carlo VI di Francia, Maestro di Boucicaut, codice Ms. Français 165 della Biblioteca Universitaria di Ginevra.jpg


7. 프랑스의 압박


헨리가 내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떄, 최대의 적수인 프랑스도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침법하고 글린두어를 돕기 위해 웨일즈에 출병했습니다. 1403년 이들은 플리머스를 불지르고, 이듬 해에는 와이트 섬에 상륙하는가 하면, 1405년에는 펨브루크셔의 해버퍼드웨스트에 상륙하여 글린두어와 손을 잡고 카마든 성을 점거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칼레를 공격하고 영국인 해적들의 활동을 조장하여 플랑드르 및 한자 도시들과의의 해협무역을 교란했습니다.



그러나 헨리가 이들이 지원할만한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를 모두 격파한데다, 당시 프랑스의 군주였던 샤를 6세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통에 어찌어찌 넘어가는데 성공합니다.



일곱번째 오펜스 방어 성공!








8. 의회와의 문제 "예산 좀 올려 주라고"


헨리의 유일한 정통성은 의회를 지지를 받고 즉위했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의회를 무시하긴 어려웠으며, 여기에 더해 헨리의 일년 수입은 9만 파운드 가량에 불과했기에 끝도없이 국내외의 적들과 싸우고 있던 헨리로서는 의회에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헨리의 시대는 중세를 통틀어 영국에서 의회가 가장 강력한 시대 중 하나였습니다.


1404년 하원은 부가적 세금을 관리할 재무관을 지명한다는 조건부로 헨리에게 부가적인 과세를 인정했으며, 또한 의회 안에 왕에 대한 조언을 할 자무회의를 둘 것을 요구했습니다. 헨리는 마음 내키지 않으면서도 이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헨리는 하원의 회계감사 요구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의회의 입김이 강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잉글랜드 왕이 순순히 의회에 예속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헨리는 왕권에 대한 이 같은 제약을 없애려고 노력했으며, 기회가 오면 실제로 이를 시행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여덞번째 오펜스도 어떻게든 해결!




WestminsterCathedralFull.jpg


9. 교회와의 문제


헨리가 잘 보여야 하는것은 의회 뿐만이 아닌 교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와 같은 조직이 어느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치세가 결정될 수도 있었는데, 헨리는 대주교 애런들과 재빨리 쿵짝을 맞추고 교회가 당시에 이단으로 몰리던 롤라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펼 수 있게 도와주면서 교회의 지지를 얻어내는데도 성공합니다.



아홉번째 문제도 해결!








10. 랭커스터 왕가의 취약한 권위에 대한 도전


결국 앞선 부분을 다 종합한 문제 입니다. 초기의 랭커스터 왕조는 사방팔방에서 도전을 받으며 권위도 뭣도 약한 상태였지만, 헨리는 앞선 모든 문제를 격파하고 교회나 의회등 어떻게든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세력을 관대함과 아량, 타협심과 인내로 끌어 안으며 입지를 높였습니다.



그 결과 덴마크 - 노르웨이 왕과의 외교적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한자 도시들에 맞서 잉글랜드 상인들의 지위를 높이는데 성공 함으로써 랭커스터 왕가가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열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문제도 해결!










11. 왕세자 헨리, 훗날의 헨리 5세의 도전 격파


헨리가 죽을 힘을 다해 일을 해결하고 있을 무렵 아들인 왕세자 헨리는 골칫거리였습니다. 웨일즈와의 전쟁에서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수완을 보였으나, 이후 방탕하고 놀기 좋아했으며, 야심만 커지고 있는것처럼 보였습니다. 왕세자는 자문회의를 장악하려고 애를 썻으며, 대외정책에서도 아버지의 대프랑스 평화정책에 반발하여 전쟁을 재개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왕세자가 왕의 퇴위를 노린다는 소문마저 돌자 1412년 왕은 애런들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왕세자와 그 이복동생 토머스 보우퍼트를 자문회의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아들 놈아, 잠깐 쉬면서 머리나 식혀라! 마지막 문제도 해결!










 끝없는 전쟁, 왕권을 다지기 위한 여행으로 괴롭혀진 육체와 쇠진해진 정신을 가진 헨리는 1413년 3월 왕정에 관한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미해결로 남겨 놓은 채 지친 눈을 감았습니다. 헨리 4세가 성취한 것은 그가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끝내 왕으로 살아남았다는 점이고, 그래서 왕관을 유능한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랭커스터 가문을 하나의 왕조로 세웠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던 '대담하고 거창한 싸움' 을 수행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으나, 국내외의 끈질긴 도전을 무력화할 만큼의 군사적 능력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헨리는 그의 추진력과 끈기, 그리고 말할 것도 없는 관대함과 타협을 이루어내는 능력으로 어떤 영국왕도 마주친 적이 없었던 압도적인 적들의 연합세력을 극복해낼 수 있었습니다. 끈기와 단호함, 그리고 기꺼이 말 위에서 살아가려는 왕의 굳센 마음은 잉글랜드와 웨일즈를 가로질러 그리고 애든버러 너머로까지 그의 적들을 뒤쫓아 몰애냄으로써, 그 모든 위험을 극복해 내었던 것입니다. 그는 타협을 통해서 왕권의 '가장 중요한 부분' 들을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의회의 지지를 얻었으며, 그의 왕조는 동맹관계를 통해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그 외 서유럽의 여러 모든 나라들에게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위기를 돌파한 영국은 이후...










프랑스 

"영국 놈들이 섬에 처박혀 있다 보니 돌았나? 어딜 감히 흐흐흐...."














영국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해질 것이다.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성 크리스핀의 날,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오늘부터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우리는 이 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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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3/11/03 13:28
수정 아이콘
고단했겠네요 ^^; 잘 읽었습니다~
anic4685
13/11/03 13:32
수정 아이콘
디펜스 열심히 하다보니 끝났네...
저 신경쓰여요
13/11/03 13:53
수정 아이콘
내레 영국 장궁의 뜨거운 참맛을 불란서 기사 나부랭이들에게 보여주갓서!

화살 맞고 떨어져서 기어다니는 프랑스 기사들의 머리를 메이스로 두더지 잡기 놀이 하듯 두들겼다는 게 사실입니까
담배피는씨
13/11/03 15:14
수정 아이콘
한 13~15년간 디펜스만 하셨군요..
내일은
13/11/03 19:41
수정 아이콘
하아... 왕 안할란다. 저런거 안해도 귀족인데
루크레티아
13/11/03 22:03
수정 아이콘
아쟁쿠르 전투를 준비하라우!
휴전 제의도 무시하고 닥돌하는 프랑스 아사키들에게 장궁의 쓴 맛을 보여주라우!
설탕가루인형형
13/11/04 10:10
수정 아이콘
서양의 중세시대나 일본의 전국시대는 정말 한수 잘못 생각하면 영혼까지 털리는 세상인데 정말 대단하네요.
게임처럼 세이브 로드 할수도 없고..-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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