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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0/14 14:59:59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열 일곱살 부잣집 딸을 데리고 야반도주한 사마상여




역사 속에서 사랑 이야기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남녀관계에 있어 상하를 나눠본다면, 이런 이야기의 많은 수는 신분적 -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성과 이로 인해 팔자 고치는 여성들에 대한 레파토리가 꽤 많을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전한 시대의 예를 들어보자면, 전한 개국 초기 단 일곱명의 이성왕 중에 한명이자 후에 선평후(宣平侯)가 된 장오(張敖)의 아버지, 상산왕 장이의 경우가 그렇다. 죄를 짓고 도망치던 장이는 위나라 땅에서 돈 많은 과부를 만나 팔자를 고치며 당대에 가장 유명한 명사 중 하나가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고조 유방도 혼인 당시에는 외가인 여씨 쪽이 훨씬 영향력이 있었다.


좀 더 소소한 종류의 이야기라면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마상여가 있다. 사마상여는 어떤 인물인가? 소위 '전한 시대에 문장으로 두 사마가 있다' 라고 하면 바로 그 위대한 사마천과 더불어 사마상여의 이름이다. 당 시대의 이한(李漢)은 창려문집서(昌黎文集序)에서 한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인들로 사마천과 사마상여, 동중서, 양웅, 유향을 꼽았다. 그는 “글은 도(道)를 꿰는 그릇이다.” 라고까지 말했으니 보통 칭찬은 아닐 것이다. (덤으로 그는 진 - 전한 시대의 기상이 후한 - 조위 - 사마씨를 이어가며 기를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문인은 스타일이 있는 법이다. 도연명과 사령운을 같은 부류에 놓을 정신나간 사람은 없다. 전자는 소박함의 극치이고, 후자는 음울할 정도로 화려한 미가 있다. 사마상여의 글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평가했다.


"춘추(春秋)는 드러난 사실을 추론하여 은밀한 것까지 이르렀고, 역경(易經)은 은밀한 것을 바탕으로 명백한 사실에 이르고 있으며, 대아(大雅)는 먼저 왕공(王公)과 대인(大人)의 덕을 말하여 백성들에게 이르렀고, 소아(小雅)는 비천한 사람의 행위를 말함으로써 정치의 선악을 풍자하여 그 영향이 왕공대인에까지 미쳤다. 때문에 춘추ㆍ역경ㆍ대아ㆍ소아에서 말하는 것은 겉으로는 서로 다르지만, 그것이 모두 덕에 합치된다는 점에서는 같다. 상여의 글은 공허한 문사와 함부로 하는 말이 많으나, 그 주가 되는 뜻은 절약과 검소함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시경에서 말하는 풍간(諷諫)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양웅(揚雄)은 ‘ 사치스럽고 화려한 상여의 부는 백 가지를 칭찬하고 한 가지를 풍유하였는데, 마치 정(鄭)ㆍ위(衛)의 음란한 음악으로 치닫다가 끝에 아악(雅樂)을 연주하는 것과 같으니,〔본래의 취지를〕훼손시킨 것이 아닐까?’ 라고 말했다."


사마천의 말에 요지를 보자면 사마상여의 글이란 쓸데 없는 미사여구가 많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그 주에 있어서는 절약과 검소함을 말하는 간언이 있다 하여 그럭저럭 괜찮은 평가를 하고 있다. 사마상여는 기존의 초사에서 한부(漢賦)라는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이는 과거 애국시인 굴원의 시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세, 즉 개성이나 개인의 폭발적인 감정이 사라지고 일정한 일이나 물건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일 자체에 더욱 중점이 놓여지게 되었다


문인에게 있어 글이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사마상여의 인생도 그의 글 만큼이나 허허실실의 관능이 있다.


뭐, 이런 이야기는 일단 넘어가자. 딱딱한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다만 사마상여가 그렇게 유명한 문인이라는 점만 말하려는 것이다.


사마상여의 본명은 상여가 아니다. 사실 그의 본명은 조금 황당한 이름인데, 다름 아닌 견자(犬子) 였다. 말 그대로 하면 사마개새끼가 되고, 일반적으로 보자면야 어린 아이들을 '강아지' 라고 부르는 어감일 것이다. 아무튼 정상적인 이름은 아니다. 이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렇다. '사마견자' 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잘 읽고 또 격검에 능했다. 그래서 사마견자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김영수는 '견자는 격검의 격(劍)자와 발음이 비슷하다.' 는 이유로 설명했다. 헌데 중국의 사기 연구자인 왕리쥔은 여기엔 부모가 사주팔자를 생각한 뜻이 있다고 말한다.


여하간 이 사마견자는 대략적인 학문을 마칠 때까지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지만, '개새끼' 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을 어른이 되어서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인상여에게 큰 영감을 얻은 그는 자신의 이름을 상여로 고쳤고, 여기서부터 사마상여의 이름이 되었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본래 사마상여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했던 모양이다. 한나라 경제 시절, 그는 돈을 내고 벼슬을 얻어 무기상시(武騎常侍)가 되었다. 돈으로 자리를 얻는다면 우리는 매관매직을 떠올리지만, 예전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애시당초 그 시절에 글을 읽고 학문을 배울만한 인물이라면 보통 돈이 있을 것이다. 관복 등도 돈이 없는 사람이라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이 무기상시는 무슨 자리일까? 이것은 일종의 기병 시위로, 황제를 수행하는 직책이다. 말을 타고 다닐 정도니 그 자신의 풍채가 상당히 당당한 편이 유리할 것이다. 호랑이를 잡아 죽이고 흉노와 싸운 맹장 이광 역시 한문제 시절 무기상시였다. 헌데 이광과 사마상여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관능의 부(賦)를 작성하는 인물이 맹수와 격전하는 순박한 무인과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사마상여는 자신의 자리에 금세 실증을 내었다.


하지만 당시의 황제, 즉 한경제는 사부(辭賦)를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 일이긴 하지만, 격분을 이기지 못해 오왕 유비의 아들을 바둑판으로 때려 죽인 인물이 아닌가? 그런 괄괄한 성품의 소유자는 사마상여와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때 황족이자 세력가인 양효왕(梁孝王)이 중앙에 올라왔다. 양효왕은 한나라를 뒤흔들었던 오초칠국의 난에서 주아부와 함께 반군을 진압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으며, 두태후의 총애를 바탕으로 황태자 자리마저 노리는 야심가였다.


그런 권세가의 입조이니, 마땅히 그 행렬이 천하에 위풍당당 했을 것이라는 점은 당연하다. 과연 제나라의 추양(鄒陽), 회음의 매승(枚乘), 오현의 엄부자(嚴夫子) 등 천하에 이름이 높은 유세객들이 양효왕의 뒤를 따르며 장관을 펼치고 있었다. 본래 현란함을 좋아하는 천성적인 엔터테이너, 사마상여가 이를 보고 마음을 뺏기지 않을 리 없었다. 양효왕의 유세객들을 만난 그는 크게 기뻐하며 벼슬을 그만두고 양효왕을 따라갔다. 여기서 그들과 지내며 만든 것이 바로 이름 높은 자허부(子虛賦)다.  


허나 문제는 이때부터다. 믿고 있던 양효왕이 사망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유세객들도 뿔뿔히 흩어졌고, 사마상여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조금 이상한 것은, 본래 돈으로 벼슬을 얻었던 사마상여의 집안이 이때쯤이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사마상여는 대단히 궁핍하게 되었다.


그런 그를 보다 못해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평소에 친분이 있던 임공(臨邛 쓰촨성 층라이) 현령 왕길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던 사마상여는 친구를 따라 임공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이때의 이동이다. 앞서 말했듯, 본래 부유하던 사마상여의 집안은 이때쯤이면 몰락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공으로 향하는 사마상여는 수레에 타서 온갖 위세란 위세는 다 부리고 있었다. 사마상여가 재산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그야말로 있는대로 쥐어짜 마련한 자금이거나, 왕길이 편의를 봐준 것이리라.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단 말이가?


말하자면 이것은 '떡밥' 이었다. 사마상여와 왕길은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낚시대를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마상여가 향하는 임공 땅에는 두 부자가 있었다. 바로 탁왕손과 정정(程鄭)이었다. 그들은 수백명이 넘는 사람을 집에 부리는 대단한 부자였는데, 이들이 가진 재력의 정확한 출처는 바로 사기 화식열전에서 나타난다. 탁왕손의 집안은 본래 조나라 땅의 부자였다. 선조 탁씨는 제철업을 크게 벌여 대단한 재력을 모았건만, 진나라의 막강한 힘이 조나라를 휩쓸면서 재산을 뺏기고 촉 땅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헌데 다른 사람들이 뇌물을 바쳐 최대한 좋은 자리를 알아보려고 한 반면에, 이 탁씨는 일부러 척박한 곳으로 와 철광산을 개발하여 엄청난 자금을 모았다. 정정 역시 포로로 끌려왔다. 그는 산동에서 끌려왔는데, 그렇다면 제나라 출신이지만 연도를 고려하면 제나라가 멸망할 당시에는 아직 무사했지만 이후에 끌려온 것으로 보인다. 그도 제철업에 손을 대 큰 부자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 부자는 한나라의 철강왕, 철강 재벌이었다. 그리고 철광 재벌이 있다면, 재벌 2세 역시 당연히 있을 것이다.


사마상여와 왕길, 이 불한당들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탁왕손의 딸, 탁문군(卓文君) 이었다. 철광왕의 딸인만큼, 그녀와 결혼하는 사람은 막강한 재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녀는 남자들이 눈독을 흘릴 만 했다. 그런데 미모는 어땠을까?


사마천의 사기나 한서의 반고는 모두 탁문군의 미모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기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서경잡기(西京雜記)라는 책이 있는데, 전한 말기의 인물 유흠이 지었다는 이야기와, 포박자로 유명한 갈홍(葛洪)이 썻다는 이야기, 유흠이 만들고 갈홍이 엮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책이다. 갈홍이라는 인물 자체는 동진 시대 인물로서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시대에서부터 거의 200년 가까이 뒤의 인물이지만, 유흠은 대략 백여년 안쪽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 신뢰성을 말하자면, 서경잡기는 비록 필기체 소설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일정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전부 신뢰할 순 없지만, 어차피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서는 아무것도 없다.


말이 길어졌지만, 그 서경잡기에서는 탁문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군은 미인이었다. 눈썹은 멀리서 보면 산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며, 얼굴은 마치 부용(芙蓉)과 같았다. 피부 역시 기름처럼 부드럽고 매끈거렸다. 열 일곱 살에 과부가 되었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해 풍류 즐기기를 좋아했다……장경(사마상여)는 본래 소갈(당뇨)가 있었지만, 문군의 미색에 너무 빠지다 보니 병이 발작을 했다. 장경은 미인부를 지어 자제하려 했으나 고치지 못했고, 결국 병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서경잡기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탁문군은 가히 천하일색이었다. 기름 같은 피부를 지닌 육감적인 이 여인은 미망인이었지만 아직 열 일곱 살에 불과했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말광량이였다. 그녀가 말괄량이 였다는 점은 이후 벌어진 실제 행적으로 보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좀 뒤의 일이지만, 어찌나 미색과 매력이 대단한지 사마상여는 그녀에 빠져 허우적대었고, 스스로 자제를 하려고도 했으나 결국 고치지 못해 죽을 지경이었다. 사마상여가 소갈을 앓았다는 것은 사기에도 있는 언급이다.


자, 사마상여와 그의 친구 현령 왕길의 목표는 탁문군을 얻는 것이다. 사마상여는 팔자를 고치기 위해, 왕길은 친구를 돕기 위해서 움직였다. 임공에 도착한 사마상여는 도정(都亭), 즉 일종의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기서 왕길은 모든것을 알고 있음에도 시치미를 떼고 사마상여를 만나러 다녔고, 처음에는 왕길을 만나던 사마상여는 이후 병을 핑계로 만나주질 않았다. 물론 둘은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으므로 왕길은 사마상여의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더욱 행동거지를 공손하게 했다.


이렇게 되면 소문이 퍼지는것은 금방이다. 그리고 이런 소문에는 유력자라는 사람들 일수록 민감할 편이다.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 있는데, 고을의 현령이 그를 대단히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다? 이는 필시 보통 사람이 아니다! 임공의 두 철강왕 탁왕손과 정정 역시 그런 결론을 내렸고, 연회를 열어 현령과 사마상여 두 사람을 모두 초대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되어 고을 최고의 부자 두명이 주최하는 환영 파티가 열렸다. 집에 부리는 사람만 서로 수백명이 넘는 부자들이 치루는 연회니 그 빈객들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겠는가? 현령 왕길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빈객 수백명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사마상여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오지 않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다면서 공손하게 거절한 것이다. 본래 두 사람을 환영하기 위한 연회였으므로 분위기가 머쓱해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문제는, 이번에는 현령이 강짜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사마상여가 오지 않는다면 자신도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당연히 연회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는것은 물론이다. 상상을 해 보라, 얼마나 어색한 광경일까? 그때 현령 왕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마상여를 데리고 오겠다는 것이다. 현령이 직접 와서 설득을 하니, 결국 사마상여는 못 이기는 척 하고 연회에 나섰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재밌는 부분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사마상여열전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상여는 부득이 하게 가야 했다. (相如不得已,彊往)"


더하고 뺄것도 없이 원문 그대로 사마상여는 부득이(不得已) 하게 간 것이다. 그런데 반고의 한서에서는 조금 언급이 다르다.


"상여는 위(爲) 부득이 하게 가야 했다. (相如爲不得已而強往)"


접속사(而)를 제외하면, 사기의 언급과 달라진 것은 딱 하나 밖에 없다. 문장 중에 위(爲) 자가 들어갔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 위에는 '가장' 즉 '트릭' 을 의미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 단어 하나로, 사마상여는 부득이 하게 연회에 나선 것이 아닌 '부득이 하게 나가는 것 마냥' 사기를 친게 된다. 즉 이것은 한편의 공갈 쇼였다.


이러한 쇼가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사마상여에게 엔터테이너의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용모나 풍채가 훌륭했기에 연회에 나선 모습을 본 빈객들은 모두 감탄해 마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그런 시선에는 현령이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면서 모시는 인물이라는 최면 효과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분위기를 잡아 놓고 술이 들어가던 차에, 한 패인 왕길은 갑자기 사마상여에게 거문고를 권한다. 소문을 듣자하니 거문고 실력이 일품이라며 말이다. 사마상여의 언변에 대해서, 사기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상여는 말을 어눌하였으나 글을 잘 지었다.' 말이 어눌한 사마상여를 그대로 두면 기껏 잡은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질 수 있다. 사마상여는 잔말을 하는 대신에 거문고를 타며 분위기를 잡았다. 그렇지만 이 거문고에는 다른 의미도 있었다.


바로 그러한 때, 이 열 일곱살의 아가씨는 문 틈으로 그를 엿보고 있었다. 본래 풍류를 좋아하던 그녀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다면 자연히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녀가 음악을 좋아하는 면모를 생각한다면 사마상여가 갑자기 거문고를 튼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녀로서도 현령이 저 남자에게 쩔쩔 맨다는 사실은 들었을 테고, 여기에 더해 사람들이 감탄한 풍채도 보았을 것이다.


본래 어린 나이의 사랑이라는 것은 순식간에 타오르는 것이다. 말 한마디 나눠본적 없지만 탁문근은 벌써 사마상여에게 흠뻑 빠졌고, 그저 서로 이어이지 못할 까봐를 걱정할 정도로 애닮파졌다. (恐不得當也) 연회가 끝날 무렵, 사마상여는 사람을 시켜 자신의 마음을 몰래 탁문군에게 전했고, 탁문군은 그날 밤으로 집에서 도망쳐 사마상여의 품으로 날아오게 되었다.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그 사이에 두 사람은 제대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야기 조차 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이야기고, 사마상여도 사마상여지만 탁문군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이제 탁문군은 단꿈에 젖어 사마상여를 따르고 있다. 아버지가 유력자로 있는 임공에서는 더 있을 수가 없으니 두 사람은 길을 떠나 성도로 향했다. 헌데, 성도에서 탁문군은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된다. 그 완벽해 보였던 백마 탄 왕자 사마상여가 완전히 빈털터리의 날백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사마천의 표현은 가히 걸작이라고 할만하다.


"그 집에는 네 벽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家居徒四壁立)"


이러한 상황을 탁문군의 아버지 탁왕손이 몰랐을까? 대단한 부자였던 탁왕손으로서는 사람을 조금 풀기만 하면 그깟 '연놈' 들의 행로야 충분히 파악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아버지들도 그러겠지만 탁왕손 역시 딸의 야반도주에 충격을 받아, 절교를 하겠다는 듯이 아우성을 쳐댔다. "딸년이란 것들은 변변치 못하단 말이야. 내가 차마 죽일 수야 없지만, 재산은 한 푼도 나눠 주지 않을 테다!"


옆에서는 이런 탁왕손을 말리고 설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리 밉다고 해도 딸이 아닌가. 대놓고 도와주진 못해도 약간이나마 뒤에서 도와줄 만은 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열이 날 대로 난 탁왕손은 이를 듣지도 않았다.


형편없는 사마상여의 집안 상황에도 불구하고, 탁문군이 이 때문에 사마상여에게 실망을 했다거나 진저리를 쳤다는 늬앙스의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탁문군은 거의 사기를 친 사마상여에 대한 애정이 식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빈곤한 생활이 오래되자 이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녀가 철이 없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화식열전에서는 이 탁씨 집안의 부유함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집안의 사람만 해도 천 명이 넘었고 광대한 전야나 호수에서 수렵을 즐기며 임금 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녀의 집안은 보통 부잣집이 아니었다. 엄청난 땅을 가지고 마음껏 강이나 산에서 사냥을 하며 놀 수 있을만한 정도의 집이었고, 부유한 점에 있어서야 황제가 부럽지 않았던 집이다. 그런 집의 귀한 열 일곱살의 딸이 놈팽이의 오두막에서 지낸다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 없는 행위였다. 결국 견디다 못한 탁문군은 사마상여를 설득했다.


"장경, 그대는 나와 함께 임공으로 돌아갑시다. 형제들에게 돈을 빌리면 어떻게든 생계를 꾸릴 수는 있을 겁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겠습니까?"


서경잡기에 나오는 묘사는 더욱 처절하다.


"성도로 돌아온 다음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다. 탁문군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고급 가죽옷을 팔아 술을 샀다. 두 사람은 그걸 나누어 마셨고, 술을 마신 다음 탁문군은 사마상여의 목을 붙잡고 울음를 터뜨렸다. '나는 지금껏 호화롭게 살기만 했습니다. 헌데 이제는 가죽옷을 팔아 술을 사서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라고 한탄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상여가 탁문군의 부탁을 거절한다면 완전히 오만 정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과는 별개로, 사마상여도 이렇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탁문군을 훔쳤지만, 그것이 오직 그녀의 미색을 노렸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필시 임금도 부럽지 탁씨 집안의 재물도 관심이 있었을 테다.


사마상여는 여기서 계략을 꾸몄다. 임공으로 돌아온 후 그들이 한 것은 휜 옷 입고 탁왕손의 앞으로 가 벌벌 떨며 비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아직까지 가진 말과 수레, 여타 재산을 모조리 팔아 술집을 하나 사버린 것이다. 그 둘은 이제 술집을 경영하게 되었다.









임공에 연 술집에서, 탁문군은 술을 데우는 화로 앞에 앉아 있다 술을 손님들에게 팔았다. 술을 내오는 서빙이나 카운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사마상여로 말하자면 독비곤(犢鼻褌), 즉 일꾼들이 쓰는 앞치마를 두르고 여타 잡일을 하며 저잣거리 앞에 앉아 술잔을 닦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탁왕손에게 보내는 심리전이었다. 탁왕손으로서는 그들이 어디 성도나 객지에서 술집을 하건 객사를 하건 눈 질끈 감아버리면 그만이었겠지만, 임공만은 달랐다. 임공에서 탁씨는 엄청난 유력자였고, 그 집안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왕년의 풍류 좋아하는 아가씨가 술집 서빙을 맡으며 행인들 농이나 받아주고 있고, 그 남편되는 사람이 시장 바닥에서 술잔이나 닦고 있는다면 탁씨 집안의 명망에 있어 엄청난 망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사람을 풀어서 두들겨 패고 쫒아내거나 거적데기에 말아 버린다고 해도 그건 그것나름대로 망신일 것이다. 탁왕손은 너무나 부끄러워 아예 문을 걸어 잠구고 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하지만 탁왕손이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고 속만 부글거린다 해도, 탁씨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십중팔구 탁문군이 일하는 술집으로 가서 호들갑스럽게 손을 부여잡고 그 고생에 탄식을 하기도 했으리라. 곧 탁문군의 형제와 여타 사람들은 계속해서 탁왕손을 설득했다.


"아들 하나에 딸을 둘 둔 당신이 재산이 부족하겠습니까? 지금 문군은 이미 사마장경에게 몸을 허락했습니다. 또 장경 또한 비록 가난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됨과 재주는 믿어도 될만큼 충분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현령의 손님입니다. 어찌하여 상여가 저리 욕을 당하게 놔두시는 것입니까?"


결국 한숨만 쉬던 탁왕손은 항복 선언을 하고 노복 100명, 100만 전(錢)에 달하는 엄청난 돈과 시집갈 때 필요한 옷ㆍ이불ㆍ재물 등의 혼수품을 마련해 주었다. 마침내 바라던 것을 얻었지만, 이렇게 난리를 치고 탁왕손의 집에 기어들어가 살수는 없는 법이다. 두 사람은 성도로 돌아갔고, 거기서 집과 땅을 사서 부유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사마상여는 계략을 써서 절세 미녀 탁문군과 그 집안의 부유한 재물도 얻었다. 다만 장인과 거리가 멀게 되었다는 사실이 좀 걸릴 뿐인데, 그것도 곧 해결이 되었다. 한경제 이후 즉위한 한무제는 사마상여가 일전에 쓴 자허부를 보고 감탄하여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곧 사마상여는 한무제의 신임을 받아 존귀해졌고, 다름 아닌 위풍당당한 황제의 측근이 되자 탁왕손도 언제 그렇게 이를 갈아느냐는 식으로 사마상여에게 더 재물을 주었다.


그럼, 이대로 두 남녀는 백년해로하여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살았을까?


서경잡기의 기록에 따르자면, 그렇지도 않다.


"상여는 무릉 출신 여자를 첩으로 삼으려고 했다. 탁문군은 백두음을 지어 헤어지겠다는 생각을 밝혔고, 상여는 이에 첩을 얻으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사마상여는 거듭된 행복으로 얼이 나갔던 것일까? 그와 탁문군의 관계가 평범한 유력자들끼리의 혼인이었다면 모르되, 탁문군은 순전히 사랑 하나 때문에 집안을 피해 달아나서 경우에도 없는 고생을 하며 같이 지냈고, 결국 그 집안의 재산으로 팔자를 피게 만들어 주었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사마상여는 남쪽 출신 미녀를 새로 첩으로 들이려고 하니 탁문군은 이에 헤어지자는 의사를 표시했고, 정신을 차린 사마상여는 이를 물렀다는 이야기다. 그로서는 탁문군과 헤어지면 재산에 있어서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물론 탁문군에 빠져 허우적대다 죽었다는 이야기처럼 애정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현재 남아있는 '백두음' 이라 전해지는 것은 송나라 문인 곽무천의 '악부시집' 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 백두음은 서경잡기의 일화의 진실성과는 별개로 99%도 아니고 100% 위작이라고 봐도 좋다. 하지만 내용만은 다른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듯 하다.




내 사람은 산 위의 눈처럼 순결하고 구름 사이의 달처럼 빛났으나,

내 듣기로는 당신이 두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니 이제 이별을 해야겠네요.

오늘 차린 술자리는 마지막이 되겠으니, 내일 아침이면 해자의 상류에서 이별해야겠지요.

나는 천천히 해자를 따라 걸음을 옮기니, 당신과 나는 해자의 물결을 따라 영원히 서로 헤어지겠지요.

쓸쓸하고도 처량하지 않을까요. 여자가 출가를 하면 울지 말아야 할 것을.

오직 나만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백발이 되도록 이별 없이 살고자 했건만.

대나무의 대는 어찌 그다지도 하늘거리고

물고기의 꼬리는 어찌 그토록 날렵한가요.

남아란 의리를 중히 여기건만, 진정한 사랑을 잃으면 어찌 돈으로 보상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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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
13/10/14 15:06
수정 아이콘
결론 : 잘 생기고 키 크고 음악 잘 하면 생깁니다.
jjohny=쿠마
13/10/14 15:07
수정 아이콘
쩝...
13/10/14 15:18
수정 아이콘
+ 인맥까지. 현령 친구가 없었으면 못했을 사기극(?)일테니까요.
치탄다 에루
13/10/14 15:21
수정 아이콘
웬지 어느 분이 갑자기 떠올라요. 조금 신경쓰이시는, 그분이요.
13/10/14 15:26
수정 아이콘
제가 떠오른 그분은 잘생긴건 아닌듯... 키크고 음악하는건 맞지만...
jjohny=쿠마
13/10/14 15:33
수정 아이콘
돈나 가따오 오까베루다따노가, 와따시 기니나리마스!
낭만.로망.갈망
13/10/14 15:25
수정 아이콘
돈 주고 읽어야 될 퀄리티네요 잘 읽었습니다
Grow랜서
13/10/14 15:27
수정 아이콘
일단 추천하고 리플달고 정독할게요 잘읽겠습니다
Je ne sais quoi
13/10/14 15:3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황금사과
13/10/14 15:43
수정 아이콘
메인에서 보고 이건 또 어떤 천하의 개...라고 외쳤지만 들어와 보니 진짜 이름이 개자식(...)이었군요
13/10/14 15:48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크크크크.
ODYSSEIA
13/10/14 15:58
수정 아이콘
역시 사람은 이름을 잘 지어야....
재밌는 글 감사드립니다^^
HealingRain
13/10/14 16:10
수정 아이콘
캬~ 정신없이 스크롤 내리면서 읽어버렸네요. 필력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람간에 벌어지는 일들이란 그 먼 과거나 현재나 크게 차이가 없는거 같아요. 능력있고 멋진 놈팽이가 돈많은집 어린 미인 아내를 얻으며
성공한다는 스토리는 참 드라마로 치면 뻔한 얘기같은데... 그게 또 실제 있었던 일이라니.
13/10/14 17:14
수정 아이콘
탁문군 좋아요. 사족으로 과부였다능..
anic4685
13/10/14 18:06
수정 아이콘
역시 대륙입니다...온갖일이 다 일어나는군요...
나루호도 류이
13/10/14 18:18
수정 아이콘
역시 부모님이 이름을 '견자' 로 지어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군요..
13/10/15 07:30
수정 아이콘
이야 글 정말 잘 쓰셨네요. 저도 보고 배워야 겠습니다.(뭘 보고 뭘 배운다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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