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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12/01/20 21:16:55 |
Name |
happyend |
Subject |
천년왕국 신라의 심장마비史 |
천년 왕국 신라는 어떻게 망했을까
천년왕국 신라의 심장마비史
1.
서기 888년, 경주 시내 저자거리에 벽보 한 장이 나붙은 것은 봄바람이 살랑거리기 시작하는 음력 2월의 어느날 이었습니다. 벽보는 불경을 적는 다라니어로 되어있었습니다.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하"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干于三阿干 鳧伊娑婆詞)
언뜻 보기엔 불경처럼 보이는 이 25글자는 하루 아침에 경주시내를 벌컥 뒤집어 놨습니다. 왜냐하면 신라인들은 이 글 속에 숨겨진 은어가 의미하는 바를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찰니나제’는 진성여왕을,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우우삼아간’은 세명의 아간을, '부이'는 부호부인으로 여왕의 유모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원래 글의 의미는 이런 것이지요.
“ 여왕과 두명의 소판, 세명의 아간 그리고 부이가 망국의 장본인이다.”
사서에는 ‘진성여왕이 숙부인 위홍과 사랑에 빠져 나랏일을 위홍에게 맡겼고, 위홍이 죽자 몰래 젊은 미남 두세 명을 끌어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아울러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이들이 제멋대로 방자히 굴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나돌며 상과 벌이 공정하지 못하니,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고 합니다.
벽보는 바로 그런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며 ‘대통령이 두명의 측근, 세명의 교우 그리고 친인척 영*대군이 망국의 장본인이다’쯤 되는 셈이죠.
당연히 노발대발.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닌 여왕은 사람을 시켜 범인을 찾아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필적감정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증사진을 남긴 것도 아닌 마당에 범인을 찾을 수는 없었지요. 그러나 누군가 책임을지지 않으면 안되는 법이었고, 합천에 숨어지내던 왕거인이란 사람이 단지 글은 잘하나 벼슬을 얻지 못해 숨어지내니 사회불만이 많은 종북좌빨세력이 틀림없을 거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옥에 갇힌 왕거인은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벽에다 시한 수를 썼습니다.
“우공(于公)이 통곡하니 3년 동안 한재가 들고
추연(鄒衍)이 슬픔을 머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다
지금 나의 갇혀 있는 근심도 옛일과 다름이 없는데
하늘은 말이 없이 다만 창창할 뿐이로다"
왕거인의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요? <삼국유사>에는 곧 옥에 벼락에 떨어져 풀려났다하고, <삼국사기>에는 그날 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고 바람과 천둥이 쳐 우박이 쏟아지므로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왕거인을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옛날 사서를 가로지르는 은유를 풀어보자면 아마 비난여론이 들끓고 딱히 증거도 없자 풀어줬겠지요.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왕실이 그만큼 궁지에 몰렸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왕거인이 풀려났으니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이것은 새로운 사건의 압축점이기도 했습니다. 왕실 혹은 왕실을 지탱하는 경주귀족과 변방의 호족간에 놓인 깊은 심연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당나라 제도를 받아들이며 제도에 입각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릴 관직을 국학출신에서 시험을 통해 뽑기 위해 대대적으로 6두품을 받아들여 지배계급의 외연을 확장해왔습니다. 6두품들은 나라의 정책에 따라 한문을 배우고 <춘추좌전>과 <예기>를 읽고 <논어>와 <효경>을 암기하며 임금과 관리와 백성이 합리적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배워 왕국의 씨줄과 날줄노릇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신라하대에 이르러 경주에서 하나둘 쫓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834년 흥덕왕때에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른바 “골품제도에 관한 교서”를 발표한 것입니다.
교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람은 상하가 있고,지위는 존비가 있어 명례(법령에 있어서의 일반적 원칙)이 같지 않으며,의복도 다르다.”
왜, 신라왕실은 이런 카스트적 교서를 발표해야만 했을까요?
2.
(잠깐만 용어정리를 하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혹시 모르는 분들이 검색하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김부식은 신라를 상대중대하대로 나눴습니다.
신라 중대는 태종무열왕 즉 진골출신 첫 임금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시기입니다.그러니까 왕권이 장난아니게 큰 거죠. 이때는 dynasty 시대가 아니라 kingdom시대였거든요. 왕조국가와 같이 세습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아보였던 때입니다. 친족지배가, 다시말해 여러부족중에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지배하는 때였어요.
당연히 진골들에게 김춘추가문의 왕위독점은 용납되지 않았어요.그렇게 해서 왕위가 넘어간 것이 하대,진골귀족연합정권시대입니다. 이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것은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루겠습니다.
이때의 신라에 대해서도 통일신라와 후기신라 두가지 표현이 사용됩니다. 통일신라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고요, 후기신라는 그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남북국시대의 신라로 표현하려는 것이지요. 저는 두가지 표현을 혼동해서 쓰고 있습니다. 이문제는 나중에 얘기할 수 있으면 하고요,여기선 그냥 패스^^)
신라 중대 말부터 하대시대까지 동아시아에는 길고긴 평화가 찾아옵니다. 일본- 발해- 신라- 당,4국간에는 절묘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그 평화의 기운을 따라 ‘동아시아문화’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런 평화와 세계화의 시대의 최대 수혜자는 역시 신라 진골귀족들이었습니다.
최근 발굴된 통일신라 유물가운데 특이하게도 5소경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것이 바로 ‘호미’와 ‘볏’입니다. 이 농기구들은 이전시대와 다르게 뚜렷한 규격화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나라의 공장에서 만들어져 주요 거점도시에 보급된 것이지요.
볏은 닭의 볏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보기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이것이 보습과 만나는 순간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보습의 치명적인 단점은 흙이 앞에 쌓이기 때문에 무게 때문에 깊이 갈 수 없는데요, 볏은 이 쌓이는 흙이 빠지도록 유도해주는 장치입니다. 이로 인해 더 깊이 갈 수 있는데 땅은 깊이 갈면 갈수록 기름지게 됩니다.
호미의 발명은 가히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미가 얼마나 대단한가는 중국 당나라때 만들어진 책인 [유양잡조]에 기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해의 배고픔과 배부름이 호미질에 달렸으니 이를 어찌 게을리 하겠는가"
이런 농기구들이 다량 만들어지고 보급된 것이 통일신라, 문무왕이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라는 유언대로였습니다. 더 이상 무기를 만들필요가 없게 된 철기기술자들은 좋은 농기구를 다량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농기구는 농민들을 풍요롭게 했을까요?
역사적으로 새로운 발명은 아주 많은 경우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나가는 패턴을 가지오곤 합니다. 이 농기구들 역시 그랬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황폐해진 한반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습니다. 협동노동이 없이는 그 누구도 견딜 수 없었지요. 아무리 큰 농경지를 가진 부자라 해도 농민들의 협조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경작도구는 더 많은 땅을 더 적은 노동력으로 경작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농기구를 손에 넣지 못한 농민들은 부자들의 고리대금업에 희생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왕실에선 녹읍을 부활시켜 귀족들의 대토지겸병을 승인해줬습니다.
각종 사원은 귀족들의 조세피난처였고, 고리대금기관이었으며 사병의 은거지였습니다. 귀족과 사원의 재산이 커질수록 농민들은 극도로 가난해지는 이른바 빈익빈 부익부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난민들이 속출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때에도 부의 지도는 극단적인 부자와 빈자만 남겨놓는 것은 아닙니다. 중산층이 존재하는 법이지요.신라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바로 상인들입니다.
신라 하대는 평화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무역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8세기말 신라의 난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신라의 우수한 조선술이 일본인들에게 전수되자 일본의 사무역은 활기를 갖기 시작하며 사무역이 공무역을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중국도 중앙정권이 붕괴되어 지방정권시대를 맞이하였고, 이들은 스스로 황제급 생활을 영위할만한 능력을 갖고 주요한 동아시아 무역의 구매자이자 판매자로 등장합니다.
신라 서남해안의 주요 항구도시에 자리 잡은 촌주들은 새로운 돈벌이에 눈을 떴습니다. 게다가 시골에서 밀려난 난민들은 기꺼이 이 위험한 항해에 나섰습니다. 바다는 당-신라-일본 출신 상인들의 배와 해적선들로 들끓었습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인 법이듯이 이 위험한 항해는 많은 부를 안겨줬습니다. 서남해안에는 새로운 부자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들은 새로운 첨단문물을 가장 먼저 손에 넣을 수 있게 됨으로써 과거 왕국을 유지해오던 중요한 지배수단 하나를 뺏어버립니다. 고대왕국은 중국과의 교역과 외교의 유일한 창구로서 인정받았고 그것이 주변부족국가위에 군림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남해안의 새로운 부자들은 경주 진골귀족들이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을 손에 넣었습니다. 진골귀족들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흥덕왕이 <골품제에 관한 교서>를 내린 것은 이렇게 치고 올라오는 새로운 중산층에 대한 견제였습니다. 사치품을 가질 권리에 대한 교서, 그것이 바로 골품제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신라왕실에 비극을 가져온 첫걸음이기도 했습니다.
3.
(신라 하대, 진성여왕까지 왕계도:
선덕왕(뺏음) →원성왕(비정상적왕위등극) →소성왕→ 애장왕→ 헌덕왕(뺏음)→ 흥덕왕(헌덕왕동생)→ 희강왕 (뺏은것과 다름없음) →민애왕(뺏음) →신무왕(뺏음)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일본의 한 역사학자는 신라가 고립되어 고사하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흥덕왕의 <골품제에 관한 교서>를 들었습니다.
왕은 안정을 바랐을 것입니다. 중대 신라처럼 누가 그다음 왕이 될지 정해지면 정치적 분쟁의 요소는 줄어들고 그만큼 사회는 평온해진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중대 신라의 껍질 뿐이었습니다. 중대신라가 얻은 안정은 오히려 중산층에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즉 6두품에게 권력을 나눠주고 얻은 평화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흥덕왕은 6두품이 권력으로 들어오는 마지막 관문을 차단해버렸습니다. 경주지배계급은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에게도 마지막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기회의 문을 열 열쇠를 쥔 인물이 장보고였습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돌연 귀국합니다. 그가 귀국한 이유는 당나라에서 거래되는 신라인 노예들을 본 충격때문이었습니다. 신라사회에서 유리된 난민들은 바다를 떠돌고 그들은 해적들에게 잡혀 당나라에 팔아넘겨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귀국후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허락을 얻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합니다. 해적소탕이라는 공개된 목적 외에 그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바다를 떠도는 신라유민들을 자신의 상선단에 넣어 노예의 길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장보고의 뛰어난 지도력과 신라유민들의 헌신으로 서남해안의 해적선은 소탕되었고, 장보고는 해상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얻었습니다. 그의 날개 안으로 속속들이 자진해서 들어오는 신라유민들은 그에게 가공할 군사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도망쳐온 신라인과 더 이상 배를 탈 수 없게 된 선원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주변사찰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통해 신라유민들이 지역사회에 스며들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 장보고의 꿈은 어쩌면 아주 소박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신라인과 신라를 위해 헌신한 그에게 그에 걸맞는 신분, 즉 귀족의 자리를 얻는 것이었던 듯합니다.
흥덕왕이 죽은 뒤 극심한 권력투쟁과정에서 장보고는 김우징을 도와 그를 신무왕에 올렸습니다. 신무왕이 죽자 그 아들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고, 장보고는 신무왕과 자신사이에 이뤄졌던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권력투쟁에서 패하여 혈혈단신 청해진에 몸을 숨긴 김우징은 그곳에서 장보고와 끈끈한 정을 쌓았습니다. 둘은 김우징의 아들 즉 문성왕과 장보고의 딸이 서로 결혼하여 그 우정을 이어가려 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장보고에겐 신라사회를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주고 신라왕실에겐 새로운 발전의 동력이 되어줄 중산층(호족) 포용정책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장보고는 6두품. 진골귀족에게만 주어지는 왕비의 길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카스트안에 6두품이 들어올 바늘구멍만큼의 틈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장보고는 피살당했고 청해진은 철거되었으며 청해진의 뱃사람들은 벽골제로 옮겨져 농사일에 투입되었습니다.
이후 신라왕실에 더 이상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하지만 그것이 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4.
문성왕 이후 왕실의 평화. 이것은 전쟁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아마 장보고의 힘을 본 경주의 진골귀족들은 비로소 거대한 무엇인가가 자신들 앞에 다가왔음을 알았겠지요. 그들의 단결, 그것은 정말 무서운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평화 속에서 그들이 집착했던 것은 고급스럽고 사치스런 귀족문화였습니다. 처용무와 포석정으로 널리 알려진 이시대는 시를 읊고 춤추고 인간적 욕망과 허무의 끝자락을 섭렵하는 퇴폐문화에 취한 시대였습니다. 적어도 이것만은 새로운 호족들이 감히 꿈꿀 수 없는 경지였던 셈이지요.
이것은 신라만의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인구팽창에 이은 느닷없는 기근 그리고 페스트를 거친 유럽사회도 이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십자군전쟁과 페스트를 거치면서 서양에선 신흥부르조아 계급이 탄생했습니다. 전쟁의 수혜자는 단연 상인들, 그들은 군수품을 팔거나 군납품의 제조를 위한 공장에 대부를 해주거나 하면서 거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십자군들의 이동경로에서 부를 축적한 메디치가의 이야기는 실화이고 각종 고리대금업을 통해 부를 챙긴 유태인 샤일록의 이야기는 이시대를 무대로 한 소설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어찌되었든 새로운 부르조아계층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통 귀족들을 압박합니다. 당연히 귀족들로서는 두려운 일.그들의 대응은 어떤 것일까요? 놀랍게도 골품제도와 비슷하였습니다. 서양중세의 귀족들은 사치금지법을 제정했고, 연회에 대한 규제를 담당하는 공무원을 따로 두었으며 칙령으로 이를 엄격히 다스렸습니다. 그들은 신분의 문을 막고 자기이외에는 세련된 식탁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지요.
이전까지 귀족의 식탁과 귀족의 품위는 산더미같이 쌓인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신체적인 힘이나 전투기술이 귀족의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전쟁이 끝난 뒤 ‘능력’의 잣대는 ‘행정’과 ‘외교능력’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맞춰 귀족은 더 이상 폭식이 아니라 세련된 식탁을 추구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신분적으로 구분 짓기 위해 땅에서 나는 식물인 감자를 먹는 사람들과 높은 곳에 열린 포도를 먹는 자신을 구분지었고, 더럽게 킁킁대는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들과 높이 나는 자고새를 먹는 자신을 구분지었습니다. 조미료나 향신료의 품목에도 귀족과 다른 사람의 범위를 정하였고, 식당에는 이 규정을 지키는지 보기 위한 관리들이 파견되었습니다.
이런 구분, 이런 폐쇄성. 신라의 흥덕왕의 교서는 그것을 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문성왕이후 진골귀족은 이 교서의 폐쇄성을 지키기 위해 일치단결합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친 진골귀족들에 의해 정치는 안정이 되었고, 왕실이 무슨 일을 하든 알바 아니었습니다. 제몫만 챙기면 되는 것이지요. 언론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문성왕이 죽은 뒤 그의 자식이 연달아 세명이 왕위에 올랐고, 그 마지막이 진성여왕이었습니다. 진성여왕은 비록 여자였지만 이렇게 진골귀족들이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는 상황에서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운명의 888년. 문제의 벽보가 붙었습니다.
5.
진성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신기하게도 정적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당했던 상황에 비교해보면 정말 천지차이였습니다. 왕위계승에 태클을 걸 수 있는 진골귀족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녀를 선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귀족연합의 수장인 상대등 위홍은 진성여왕의 연인이었습니다. 이걸 은유로 받아들인다면, 국회의장인 위홍과 대통령 진성여왕의 밀월, 다시말해 기득권층의 일치단결이었습니다.
그녀가 아마 역사에 나온 인물평대로 그냥 정치는 잊고 음주가무와 미소년의 향락만을 즐겼다면 신라의 운명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것도 지극히. 그녀는 그만 즉위하자마자 서민코스프레를 즐기고 맙니다. 이전 그 어떤 왕도 하지 않았던 통큰정치!
보통 왕들은 즉위하면 죄수를 방면하고 자기 즉위에 공이 있던 인물들의 관직을 높여주고 맙니다. 왕실이야 손안대고 코푸는 정치적 요식행위일 뿐이지요.이 돈한푼 안들이는 정치행위가 성에 안찼던 것일까요?진성여왕은 모든 주,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해줍니다! 와우!
좋습니다. 그녀의 호연지기. 비즈니스 프렌들리. 하지만 모자란 세수는 누가 메꿉니까? 세금을 면제해줬는데도 왜 그녀를 비꼬는 벽보가 붙은 것일까요? 그녀가 정말 방탕했기 때문일까요? 방탕함이라면 선대왕들도 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지 3년째가 되는 889년. 국고는 텅비었습니다. 진골들을 일치단결시키기위해 표방했던 감세정책의 결말은 허무했습니다. 그해 지독한 흉년이 나라를 휩쓸었습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이와중에 다른 임금들처럼 국고를 열어 구휼하기는커녕 관리를 보내 조세를 징발하려 한 왕에게 민심이 남아있을리 없었습니다.왕이 보낸 조세징발을 위한 관리는 퇴박을 맞았고 그나마도 상주에서 원종과 애노는 이에 반발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관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퇴각하였고, 귀족들은 그런 그들을 무능하다고 목베었습니다. 신라는 그날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889년은 신라의 마지막날이고 후삼국의 첫날이되었습니다. 이날 이후 신라는 한반도 동쪽에 있는 작은 국가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장보고를 진골귀족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신라의 골품제. 왕거정에게 누명을 씌웠던 신라의 폐쇄적 골품제는 결국 동맥경화에 걸린 채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뇌졸중처럼 끝인 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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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게 소심하게, 가입인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복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변함없이 아니 올해부터 계속 행복한 날들이 거듭되길 바랍니다......m(-_-)(__)(-_-)m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1-2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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