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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12/01/03 01:02:20 |
Name |
nickyo |
Subject |
낡은 기억의 상자 |
'띠링'
하고 울리는 이메일 창을 보니 이럴수가. 무려 메일이 4418개나 있다. 44에 18이라니, 그것 참 걸쭉한 숫자가 나왔구먼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내어 읽어보니 왠지 불길해서 얼른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번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하고 생각한게 한 200통일때 부터 였는데 언제 이만큼 찼지 싶다. 이러니 맨날 내 방은 돼지우리마냥 어지럽혀져 있다고 타박받나? 오늘은 지워야지 하고 받은메일함 전체비우기로 마우스를 가져간다.
요상한 성격 탓인가? 꼭 이럴때면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대부분은 언제 가입했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오는 쓸데없는 스팸메일- 물론 보내는 사람들은 읽고 사줄거라 믿는 공들인 광고메일-들 뿐이지만서도 혹시라도 체크하지 못한 오늘밤 아가씨와 찐한 대화를 이런 메일을 남겨두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는 사람에게 왔지만 혹시 모르고 지나친 메일이 있을까 해서다. 참고로 내가 말한 찐한 대화란 젊은 아가씨와 가령 헌법에 명시된 국방의 의무를 남여가 어떻게 분담해야 하는가, 미국발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와 변형된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문제의 교차점이라거나, 한-미 FTA를 둘러싼 불명확한 사안들의 정보교환이라거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대안세미나 따위의 이야기일 것이다. 흠흠.
어쨌거나, 무슨 반가운 사람이 있을까 싶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4천통부터 스무통씩 모니터에 뜨는 목록들을 체크하고 지우고 체크하고 지운다. 단순한 클릭의 반복속에서 가뜩이나 작은 눈은 더 작아지고 턱을 괸 왼손은 저려온다. 4천통이 3천통이되고, 3천통이 2천통이 되어도 지인에게 온 메일따위는 없었다. 아- 빌어먹을 나의 인간관계. 내가 그렇지 뭐. 암담한 현실에 좌절하며 그 사이에 냉정히 휴지통으로 날린 야심한 밤의 야심찬 대화만 기십통은 되었겠다. 야심한 대화를 쏜살같이 피해가는 내가 조금 대견스러웠다. 어쨌거나, 그렇게 천통쯤 남아있을 때 드디어 한 통의 편지를 보았다. 그러나 그건 새로 발견한 반가운 소식이라기 보다는,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낡디 낡은 편지였다. 이 메일이 아마 종이로 된 것이라면, 닳고 닳아 조심스레 만지지 않으면 찢어질 것 같은 구김져 얇아진 종이였을.
때때로 기억이란 아주 깊게 잊혀진 곳에서부터 이런 식으로 과격하게 인양되고는 한다. 그저 우연히 그곳에 있던 조각이 낚시 바늘마냥 콱 하고 걸어 끌어올리는 것이다. 피할 새도, 돌아볼 새도 없이 아주 폭력적으로. 발신인과 제목만으로도 떠오르는 내용은 오래 잊혀진 이야기 치고는 너무나 생생히 머리속으로 흘러들어왔지만, 그걸 굳이 클릭한다. 그리고 한 소절 한 소절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시간이 이 때만큼은 느긋이 뒤를 돌아보게 하는데, 그것은 또 새로운 색으로 망막위에 흐르는 것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간을 넘어 또 다른 생명을 얻어 움직인다.
분명 지난번에 당신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흑백으로 가득찬 세상이었다. 당신은 유일한 백색이었고, 나는 그런 당신을 따라 추억여행을 하고는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당신은 까만색 밖에 남지 않은 그곳에서 조심스레 떠나갔다. 당신은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고, 그리고 지쳤다고 하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당신의 말을 듣기만 하였다. 난 한마디도 당신에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할 말이 많았다. 그저 염치없음이 어려운 일이었고, 뻔뻔함이 생소한 일이었으며, 그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흑백사진 속 새하얀 뒷모습만 남아있었다. 그것이 흑백사진인 이유는 그저, 내가 여전히 당신을 고이 보내지 못하는 까닭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에는 그래서 지우지 않았던 것 같다. 연인들이 괜히 지난 편지를 없애지 못하는 것도 이래서 그런걸까 싶었고, 사실 그 김에 조금 나도 연애좀 했다- 라는 것을 남기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사실은. 당신과 내 시간의 유일한 증언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이야기 해 줄 수 없는 우리만의 증언.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추운 겨울에 읽는 당신의 이야기는 되려 봄 마냥 풋풋한 느낌과,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흑백의 단조롭던 세상은 다양한 색깔을 뽐내었고, 당신과 맡았던 여러 향기가 코 끝을 맴도는 듯 했다. 생전 꽃 향기 한번 맡아보려 하지 않던 내 팔목을 잡아 당겨 맡아보라던 노오란 개나리와, 고개를 갸우뚱 하는 내 뒤통수를 딱 치며 이 무심한 녀석같으니! 하고 베시시 웃던 네 얼굴이 지금 살아있는것처럼 생생했다. 손님 한 명 없는 나무색 카페에 앉아, 60년대 미국의 올드팝을 틀어주는 수염난 아저씨의 원두커피를 마시며 왠지 우리 텍사스에 온 것 같지 않냐며 웃던 네게 너 텍사스 가봤냐고 타박하던 내가 떠오른다. 베실베실 웃는 네 모습이 참 환하였다. 여름의 숲 속에서 나무내음과 풀내음, 그리고 네게서 올라오던 향긋한 살내음이 섞여와 쿵쾅대는 심장을 들킬까 조마조마 했었던 기억도, 가을 낙엽을 줍다가 쿵 하고 이마를 받아버려 괜찮냐던 네게 키스하고 뺨 한대 더 맞았던. 그리고 또 한번 더 키스했던 주황색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 높은 하늘도 떠오른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썼을까 하니 새해 잘 보내라고 말이라도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읽고 또 읽었던 낡은 편지가 오랜 세월을 지나 널 다시 내 옆으로 살려놓아 버린것이다.
그 따뜻한 너의 말들의 끝에는 또 다시 안녕 하고 인사한다. 나도 안녕, 하고 잠시 읽고 또 읽은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몇 번 더 주저하다가 삭제를 누른다. 낡은 기억을 끄집어 준 네 편지는, 내 낡은 기억 상자속에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떠나가 버린 사랑을 누군가 때 지난 연극마냥 계속 살려서 보여주는 악취미를 즐길수는 없는거 아닌가. 그게 유일한 우리의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저 내 어린 젊음을 떠올리면 네가 없이는 아무것도 설명이 안될테니까. 그걸로 충분했는데 말이야 하며 괜시레 웃음지어본다. 뭐하러 난 너를 이렇게 남겨두고 싶어했을까? 참 쓸데없는 욕심이었다. 그러니 이제와서 또 이런 궁상을 떠는 게지. 하며 발꼬락을 꼼지락 꼼지락. 에이 궁상.
종종 우연히 들려오는 소식에 네가 더 바빠졌고, 네가 더 힘들어졌고, 네가 더 잘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네 옆에 누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 아직도 그 자리가 비어있냐고 묻고싶지만 애써 모른체 그러느냐고 넘긴다. 잘 살고 있느냐? 하고 에헴- 웃어보고 싶다. 잘 살고 있니? 잘 살고 있니? 그 한마디 전할 도리가 없다. 너는 참 감동적으로 내게 들어와 앉아서, 온 가슴을 다 조각내놓고 새초롬히 도망가더니 이럴 줄 알기라도 했는지 뜬금없이 튀어나와 무너진 가슴을 스카치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주고는 떠나는구나. 조그맣게 웃고 메일함 전체를 삭제시켜버렸다. 어쩌면 나는 이 오래된 편지를 읽고싶어서 굳이 수십페이지를 일일히 클릭한게 아닐까?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를 마음에만 간직하기로 했다. 또 살아 튀어나오면 약간 곤란할 것 같았으니까.
문득 그리워지는 날이다. 낡은 기억 상자에 남겨둘 네 따뜻한 체온이. 그 옛 기억들이. 그 옛 사랑이. 지나가 잡을 수 없는 오랜 시간들이. 멀어져 길 잃은 우리 둘이. 그래도 내일을 기대했던 우리가.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1-10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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