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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1/04 15:04:43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일반] 모든 국민은 국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가진다.
http://www.law.go.kr/precInfoP.do?precSeq=166297#AJAX

위 링크는 일제 강제징용에 관한 대법원 판례입니다. 대법원 2012.5.24, 선고, 2009다22549, 판결입니다.


가끔씩 읽다 보면 감탄이 나오거나, 뭔가를 끓어오르게 하는 판례들, 판결문들이 있습니다. 법의 언어는 차갑고 정제되어서 감정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데도 종종 그렇습니다. 위 판례 또한 그러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위 사건의 피고는 미쓰비시중공업이고, 일제강점기 당시 국민징용령에 의해 강제징용된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원고는 5명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인데 그 중 원고1은 이미 망인이 되었습니다. 미쓰비시는 이 소제기에 대해 반박 논거를 여러가지 제시했습니다. 그 주장 내용은 대강 다음등과 같습니다.


가. 지금의 미쓰비시중공업은 일제 당시의 구미쓰비시중공업이 해산한 후 새로 설립된 법인으로써, 둘은 서로 다른 회사체이다.
나. 이 사건과 관련하여서 피해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소멸시효가 이미 지났으므로 소제기의 의미가 없다.
다. 강제징용 등과 관련하여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하여, 국가가 5억달러의 차관을 얻는 대신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
라. 일본 법정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이 승소하였고, 해당 외국법원 재판의 기판력이 한국법원에 미친다.


이 주장들이 고등법원 2심(부산고법 2009. 2. 3. 선고 2007나4288 판결)까지는 받아들여졌고, 해당 논리들은 이전 판례들을 통해 어느 정도 확립되어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대법원은 법리를 통해 위 논리들을 하나하나 논파해 나갑니다.


가. 구미쓰비시가 현재의 미쓰비시와 독립성을 가지게 된 것은 '전후처리 및 배상채무 해결을 위한 일본 국내의 특별한 목적 아래 제정된 기술적 입법에 불과한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 등 일본 국내법을 이유'로 하는데, 실제 현재의 미쓰비시는 구 미쓰비시의 재산, 임원, 종업원 등을 그대로 승계해서 두 회사체 사이의 차이를 인정할 이유가 없다. 또한 현재의 미쓰비시가 구미쓰비시를 자신들의 역사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이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

나.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1965년에야 수교가 이루어져, 그 사이에 청구권의 소멸시효는 진행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그 이후에도 청구권협정 내용이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고, 그 사이 사회 전체적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받아들여지던 것을 감안했을 때 1965년 이후에도 해당 청구권은 실질적으로 사용가능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멸시효는 진행하지 않았다. 이 소가 제기된 이후에야 이 문제가 부각되어 사회 전반의 인식이 변화하였다.

다. 해당 청구권협정에서 이루어진 내용은 식민지배 배상 청구에 관한 것보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에 근거해 양국 간의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때 식민지배의 불법성이나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다. 때문에 이 협정에서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보상청구권은 협정에 포함되는 적용대상이라고 볼 수 없다. 고로 개개인의 피해보상청구권 또한 소멸하였다고 볼 수 없다.


이렇게해서 미쓰비시가 내놓은 가,나,다 각 논리는 논파되었습니다.
문제는 4번 논리입니다. 민소법은 217조를 통해 외국 법원의 확정판결이 특정요건을 충족시킬 때 그 기판력을 한국법정에서 인정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조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대한민국의 법령 또는 조약에 따른 국제재판관할의 원칙상 그 외국법원의 국제재판관할권이 인정될 것
2. 패소한 피고가 소장 또는 이에 준하는 서면 및 기일통지서나 명령을 적법한 방식에 따라 방어에 필요한 시간여유를 두고 송달받았거나(공시송달이나 이와 비슷한 송달에 의한 경우를 제외한다) 송달받지 아니하였더라도 소송에 응하였을 것
3. 그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
4. 상호보증이 있을 것


고등법원까지는 일본법원에서 미쓰비시의 손을 들어준 것이 위 조건에 합당하여, 한국법원에서도 기판력을 인정해야 하는 판결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요건들에 부합하지 않다고 할 법적 근거를 딱히 찾지 못했다는 뜻일 겁니다. 때문에 일본법원의 판례에 따라 이 청구 또한 부정되어야 할 상황이었죠.
대법원은 여기서 카드를 한장 뽑아듭니다. [헌법]입니다. 이 부분은 판결문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强占)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고 보아야 하므로, [일본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것임이 분명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일본판결을 승인하여 효력을 인정할 수 없는데도, 이와 달리 본 원심판결에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고 한 사례.'


즉, 일본판결이 우리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가치들과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판결이며 그러한 판결은 민소법 217조 3호에서 말하는 '대한민국의 선량의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 질서'에 벗어난다고 보아 그 기판력의 적용을 부정한 겁니다. 이 판결을 처음보고 느꼈던 찌릿함은 정말 묘한 것이었습니다. 헌법은 현실과 동떨어진 채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는 촉감이라고 해야할까요.



우고 차베스를 독재자라고 보아야 할지 그렇지 않다 봐야 할지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차베스 사망 직후 특히 그랬죠. 우리가 어떤 스탠스를 가지고 대해야 할지 모호한 인물 중 하나였다 봅니다. 다만 차베스가 펼쳤던 정책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국민투표를 통해 베네수엘라 헌법을 개정하고(찬성률 72%), 헌법 소책자를 엄청내게 많이 찍어냈습니다. 그리고 이걸 국민들에게 나눠주고 읽게 한 뒤, 서로 모여 그에 대해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당신들이 국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 여기 다 들어있습니다. 잘 읽고 공부하십시오.'

학교를 다니고, 교육을 받고, 국민교육헌장을 위웠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조리면서 우리는 끝없이 한가지를 되뇌입니다. '우리가 국가에게 해야 하는 것, 해줄 수 있는 것, 해야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의무는 끝없이 반복학습되고, 우리가 어떤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는 뼛속 깊이 박힙니다.
헌법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국가와 국민 간의 기본 계약서일 겁니다. 거기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빼곡하게 적혀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국민으로서 국가에게 요구할 권리] 또한 가지고 있지요. 그 모든 것이 사실 헌법에 들어있습니다.
유명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시작하는 대한민국헌법에, ['모든 국민은']이라는 어절은 30번 반복됩니다. 이 중 26개는 모든 국민이 국가에 대해 가지는 권리를 말하고, 2개는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말하고, 나머지 둘은 자녀를 교육하고 근로할 의무를 말합니다. 교육은 근로는 의무이자 권리인 셈입니다.

사실 대한민국헌법은 48년 첫 제정되었을 때부터 지금 있는 대부분의 조문을 담고 있었습니다. 다만 언제고 지켜졌어야 마땅할, 그 기본적이고 가슴 떨리는 문장들의 적용은 무작정 연기되어 왔습니다.




대한민국헌법 제 12조 4호.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다만, 형사피고인이 스스로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가 변호인을 붙인다.


또 하나의 권리가 위험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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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04 15:12
수정 아이콘
소위 '말 안듣는 국민'의 목을 조르는 사회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 참 불편합니다. 기꺼이 지배의 대상이 되어 나라의 명령에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르나 전 아니거든요..
중용의맛
14/01/04 15:46
수정 아이콘
대통령 후보자들한테 트로피코 시리즈를 하게해서 결과를 국민들한테 공개하는건 어떨가 하는 망상을 해봅니다.

항상 쉬운 길은 어렵죠.
잉크부스
14/01/04 16:08
수정 아이콘
유시민 전장관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으며 느꼈던 감정들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언제 완불이 될까 늘 궁금합니다.
14/01/04 17:56
수정 아이콘
역사를 되돌아볼때 굉장히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해 -> 자유 -> 번영 -> 만족 -> 무관심 -> 박해
이 순환고리는 계속 반복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겠죠.
기아트윈스
14/01/04 23:42
수정 아이콘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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