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9일. 김성근 前 SK 와이번즈 감독이 한화의 신임 감독으로 그라운드에 복귀합니다. SK에서 보여준 능력은 둘째 치고, 과거 OB - 태평양 - 쌍방울 - LG 등에서 보여준 그의 팀 운용 능력에 많은 야구팬들의 기대가 컸음은 물론이었죠. 번번히 그가 이끌던 비룡 군단 때문에 가을마다 눈물을 삼켰던 모태 곰팅이 팬인 저 역시 그가 보여 줄 야구에 설레임이 컸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 관심을 끌었던 것은 새로 합류 하게된 코칭스태프 중 한 명인 일본인이었습니다.
니시모토 타카시(西本聖).
제가 일본 야구를 보기 시작했을 땐 이미 은퇴를 앞둔 선수였고 코나미의 유명 야구게임인 '파워풀 프로야구'에서도 다뤄지지 않을 정도의 역량을 보일 때라 잘 몰랐어요. 흥미 있는 분야의 과거 여행을 떠나다 보니 우연치 않게 저의 레이다망에 걸린 선수 중 한 명이 되긴 합니다만.
일본 최고 명문 구단의 에이스 - 역사에 남을 주요 부문 수상자 - 에이스 라이벌리 등 각종 이야기를 남긴 그가 한국에 코치로 온다고 하니 반갑기도 했고 어떤 역량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이미 김성근 감독은, SK 시절 카토 하지메(加藤初, 2016년 작고)라는 일본인 코치와 좋은 호흡을 보여준 바 있기에 김성근 - 니시모토라는 새로운 조합이 다시금 90년대 이글스 영광의 시대의 도래를 알릴 수 있을런지 지켜 보고 싶었어요.
모두가 아시듯 결론은 '불행한 동행'이었습니다. 감독의 커뮤니케이션 일방통행에 지친 니시모토가 쓴 소리만 내뱉고는 1년 만에 결별을 알렸기 때문이지요. 언론과 일부 야구팬들은 시대와 맞지 않는 김성근 감독의 낡은 지도론에 비난을 집중시켰지만, 과거 어떤 문서를 읽고 니시모토 또한 상당한 외곬임을 느꼈던 저는 그가 가진 '특유의 고집'이 발동한 측면도 없지 않았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던 바 있습니다.
구정에 집안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과거에 복사해둔, 그의 외곬 성격을 느끼게 된 ‘그 문서’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제목은 표제와 같고(嫌われた男), 출처는 일본의 스포츠 잡지 'NUMBER' , 작가는 일본 내 저명 작가이자 야구팬인 에비사와 야스히사(海老沢泰久, 한국에는 '야구감독'이라는 소설이 발간되었음)입니다. 시점은 1990년.
과거 안국역에 있는 주일대사관에서 복사했다가 잊고 있던 내용을 찾고는 한번 번역해서 여러분들과 내용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덕분에 요 며칠 재미있게 작업을 해보았네요.
전문 번역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조잡하기 그지 없는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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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ologue
필자가(에비사와 야스히사* 주), “‘니시모토 타카시(西本聖)’라는 선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팀에 어울리지 않는 선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1983년 요미우리의 미야자키 캠프를 보러 갔을 때인 것 같다. 당시의 그라운드 풍경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 쬐던 그 날, 나는 스탠드에 앉아 선수들이 연습 전 어깨를 풀기 위해 가볍게 캐치볼 하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라운드에는 사십 여명의 선수가 있었고, 레귤러 클래스의 선수들은 각자 동료 선수들과 조를 짜 몸을 풀고 있었다. 대부분 맘이 맞는 친구들끼리 한 조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으로, 그 구성은 대개 전년도와 비슷했다. 예를 들어 에가와 스구루(江川卓)는 입단 동기인 카토리 요시타카(鹿取義隆)와 언제나 한 조를 이루었는데, 그 날도 어김없이 두 선수는 함께 캐치볼을 했다.
나는 니시모토를 찾아 보았다. 그러던 중, 구장 내 가장 구석진 1루 측 펜스 근처에서 등번호가 54인 신인 선수와 함께 캐치볼 중인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체격이 꽤나 듬직한 니시모토의 상대는, 입단 2년째로 처음 1군 캠프에 참가한 마키하라 히로미(槙原寛己)였다.
다른 레귤러 클래스의 선수들이 각자 맘에 맞는 친구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캐치볼을 하는 와중에, 니시모토 만이 그라운드 구석에서 2군에서 막 올라온 선수를 상대하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느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전년도인 1982년도 캠프 당시 그의 캐치볼 상대를 기억해 보았다. 분명히 그는 전년도에도 2군에서 올라온 다른 선수를 상대로 몸을 풀었다. 그리고 그 전해에도.
이에 대해 니시모토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2군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선수는, 대부분 1군에 동료가 없으니까, 뭔가를 하려 해도 상대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먼저 다가가서 그들과 함께 해주었던 거죠.”
하지만 나는, 매년 바뀌는 그의 캐치볼 상대를 보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니시모토가 그들에게 친절함만 가지고 그리 대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사실 난 그 즈음, 니시모토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팀에서 혼자 겉도는 존재라는 평판을 몇 번이고 들었던 상태였다. 그 말은 사실로 느껴졌다. 그에게는 정해진 캐치볼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니시모토는 당시, 에가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요미우리 투수진의 에이스 중 하나였다. 매년 훌륭한 성적을 올렸으나 에가와에게는 조금씩 못 미쳤다. 매 시즌 비슷한 승수를 기록했고, 연봉도 비슷하게 받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1981년, 18승 12패의 성적을 올리며 센트럴리그 최고의 선발투수에게 수여되는 사와무라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요미우리 팀 내에서 니시모토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넨 동료는 한 명도 없었다. 정작 팀 동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니치 드래곤즈에 트레이드 되는 1988년 겨울까지 요미우리에서 14년 동안이나 묵묵히 활동하였다. 특히 주니치 이적 전 4년 간은 매년 타 팀과의 트레이드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할 정도의 관계였음에도 끝끝내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팀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따른 그의 마음 속 균열은 계속 될 수 밖에 없었다.
주니치로 트레이드 된 뒤인 1990년 3월.
취재를 위해 처음으로 나고야 구장에 가보니, 2군의 젊은 선수들이 아침 10시부터 연습을 하고 있었고, 니시모토 또한 그 안에 섞여 땀을 흘리고 있었다. 주니치의 1군은 바로 전날 캠프를 종료하고 나고야로 돌아간 상황으로, 그 날은 1군의 공식적인 휴식일이기도 했다.
니시모토는 10시부터 시작된 연습 초반부터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고, 2군 선수와 함께 유연성 강화를 위한 체조와 캐치볼, 번트 처리를 위한 내야 연계 연습 등을 했다. 1군 선수로는, 니시모토 외에 투수인 카쿠 겐지(郭源治), 외야수 오토 시게키 등이 참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몸을 풀기 위한 가벼운 연습이 끝나자 2군 선수들을 그라운드에 남긴 채 그대로 구장을 떠났다. 몸을 풀어 두는 것은 그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시모토는 그대로 그라운드에 남았고 잠시 후 2군 선수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외야 펜스를 따라 러닝을 시작 하였다. 2군 선수들은 코치가 붙어 각자 타격 훈련을 시작 하였고 그 사이 니시모토는 1시간 가량 러닝 훈련을 지속 하였다. 러닝은 모든 야구선수가 하체 단련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걸 알지만 동시에 가장 지루해 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훈련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처럼 묵묵히 외야 펜스를 따라 계속 왕복하였다.
내가 1루 측 벤치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이, 한가해 보이는 신문기자 2명이 내 근처로 와서는 니시모토의 러닝 하는 모습에 대해 빈정대듯 한마디 씩 하였다.
“저 양반은 항상 혼자서 열심히네.”
“그러게, 매번 저렇게 혼자 달리는 구만…”
나는 두 사람을 쳐다 보지도 않았다. 대개 기자들이란, 선수들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별도의 연습을 하는 선수를 발견하면 마치 정해진 대사를 읊듯 저런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니시모토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팀에서 섞이지 못하는 선수로 부각된 것도, 이러한 취재 기사가 누적된 결과인 셈이다. 니시모토는 본래 신인 시절부터 동료들과 동일한 연습 메뉴를 소화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선수였다. 그 방식 만이 자신의 실력을 타인에 비해 향상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러닝 훈련을 끝마치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니시모토는 말했다. 그의 표정에선 요미우리에 있을 당시 보이던 초조하고 답답한 표정이 아닌, 매우 밝은 느낌이 있었다.
“주니치에 오고 나서 모두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저야 뭐, 요미우리에 있을 때랑 비교해서 변한 건 거의 없다고 보는데... 하하” 라고 대답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 하지만, 주니치에서는 기분 좋게 야구 할 수 있죠.”
본인이야 어찌 느끼든, 주니치로 온 니시모토에게 뭔가 변화가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이적 첫 해(1989년)의 성적이 무엇보다 이를 증명한다.
20승 6패.
이것은 15년간 활약한 그의 프로 생활에서도 최고의 성적이고, 커리어 최고인 방어율 2.44라는 수치를 찍는 등 훌륭함 그 자체였다. 20승 투수와 그렇지 못한 투수를 나누는 최대의 요소는, 구사할 수 있는 구질의 다양함이나 볼의 스피드는 물론이고, 볼을 던지는 순간의 집중력과 거기에서 발생되는 컴퓨터와 같은 정밀한 제구력이다. 150킬로대의 빠른 공을 가지고 있다 해도, 50센치나 떨어지는 포크볼을 가지고 있다 해도, 위에 언급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결코 20승을 달성할 수 없다. 지난 시즌의 니시모토는 조건을 충족시킨 투수였다. 주니치 이적 후 그는,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였다.
마치, 혜성과 같이 등장하여 던지고 또 던져도 마운드에 오르는 것 자체가 행복하던 그 때, 설레는 맘으로 매일 같이 그라운드에 나서던 요미우리에서의 루키 시절과 같이 말이다.
2. 프로 1군에 자리 잡다
니시모토가 요미우리 마운드에 본격적으로 데뷔한 것은, 에히메 현에 있는 마츠야마 상업고교를 졸업하여 프로에 입단한 지 3년째인 1977년이었다. 그 전년도인 76년에 딱 한번 한신 타이거즈 전에 출전하였으나, 마이크 라인백(Mike Reinbach)에게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특대 스리런 홈런을 얻어 맞고는 곧바로 2군행을 지시 받았다. 해당 시즌, 이스턴 리그(2군)에서 12승을 올린 니시모토는 그 실력을 인정 받아 이듬해인 77년부터 1군에 정착하게 된다.
77년의 첫 등판은, 4월 7일 타이요 훼일즈(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전이었다. 4대9로 지고 있던 8회말 마운드에 올라 상대 타선을 3명 만으로 정리하였다. 니시모토의 피칭이 괜찮다고 느낀, 당시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는 그로부터 10일 뒤 야쿠르트 스왈로우즈 전에, 그의 프로 데뷔 첫 선발 등판을 지시했다. 니시모토는 4 1/3이닝을 던지며 3실점을 하고 마운드에서 내려 왔다. 이 전까지 1군의 마운드에서 겨우 2이닝에 그친 젊은 투수의 미숙한 운영 치고는 나름 괜찮은 결과로 볼 수 있었다.
5월 1일에는 7대11로 리드 당하고 있던 야쿠르트 전에 패전처리로 등판, 마지막 1이닝을 0점으로 막았다. 그런 뒤 5월 4일, 니시모토는 타이요 전에서 데뷔 후 2번째 선발 등판의 기회를 얻는다. 매우 참혹했던 피칭 내용으로, 1회말 상대 3번 마츠바라 마코토(松原誠)에게 3점 홈런을 얻어 맞는 등 원 아웃 조차 잡지 못하고 강판. 그리고 이것이 니시모토의 프로 데뷔 첫 패전투수 경험이 되었다. 이 후 선발로 나선 것은 5월 11일의 타이요 전이었다. 이 날은 니시모토의 컨디션이 좋아 6회까지 상대 타선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미우리 타선은 1회와 3회 각각 1점씩 득점을 하여 2대0을 리드, 승리가 목전이었다. 그러나 7회말, 니시모토는 상대 투수였던 사이토 아키오(斉藤明夫)의 대타로 나온 이토 이사오에게 역전 3점 홈런을 얻어 맞아, 그걸로 데뷔 첫 승이 날아간 것은 물론 2번째 패전의 경험을 안고 만다.
하지만 그런 걸로 니시모토의 입지가 줄어 드는 일은 없었다. 물론 다음 선발 등판의 찬스가 6월 23일 한신 전까지 한 달 넘게 돌아오진 못했지만, 오히려 그 사이 등판 수 자체는 늘었다. 4월에는 2경기였던 것이, 5월에는 6경기로, 6월에는 더 늘어나 총 11경기가 되었다. 맡은 임무라곤, 리드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중간 계투나 누구라도 던지기 꺼려하는, 승패가 확정되어 버린 경기 후반의 패전 처리 였을 뿐이었지만 니시모토는 맡은 역할이 싫지 않았다. 연투에도 불평 불만이 없었다.
데뷔 첫 승은 그런 가운데 탄생했다.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6월 23일의 타이요 전이었다. 그 날도 그는, 선발 투수였던 호리우치 츠네오(堀内恒夫)가 난타 당해 4대5로 리드 당하고 있던 6회 중간부터 마운드를 이어 받았다. 8회까지 상대 타선을 무난히 막아 냈고 9회초 벤치로 내려왔다. 니시모토가 9회 첫 타자였기 때문에 덕아웃에서 대타 멤버인 아와구치 켄지를 교체 멤버로 낸 것이다. 언더셔츠를 갈아 입고 난 후 벤치로 돌아오니 갑자기 팀 타선이 터지기 시작했다. 대타였던 아와구치가 안타를 치고 나간 것을 시작으로 안타가 계속 이어지며, 결국 아와구치의 대주자로 나갔던 마츠모토 타다시가 만루홈런을 치는 것으로 시합이 완전 정리되어 버린 것.
최종 13대 5의 대승으로, 니시모토의 프로 첫 승리는 운 좋게 굴러 들어 온 셈 이었다. 이 경기에 대한 질문을 하면, 그는 자신의 피칭 보다도 9회에 타자 13명이 나와 9점을 따낸 팀 타선의 폭발력이 더 기억이 남았다고 말한다. 하긴 누가 승리 투수가 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경기였다. 이 후, 니시모토는 벤치에 앉아 있을 틈도 없을 정도의 페이스로 등판을 계속했다. 선발, 중간계투, 패전처리에, 여름부터는 마무리 투수의 역할도 더해졌다. 시즌이 끝나자 그의 등판 수는 모두 47경기에 달했다. 최종 성적은 8승 5패 4세이브.
니시모토는 당시 프로 입단 3년째였으나 아직 신인왕의 자격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해 신인왕에는, 오사카 상업 과학 대학 출신으로 드래프트 1위로 타이요 훼일즈에 입단했던 사이토 아키오가 뽑혔다. 사이토의 성적은 8승 9패로, 니시모토가 사이토에게 밀리는 것은 투구 회수 밖에 없었다. 니시모토는 중간계투 혹은 패전 처리 등으로 짧은 이닝만을 던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규정투구 회수인 130이닝에 고작 12이닝이 모자랐다. 그는 자신이 아닌 사이토가 신인왕에 선정된 것을 알고, 평생에 단 한번 밖에 기회가 없는 상을 받지 못하여 분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해의 니시모토는 야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나이를 막론하고 신인의 활약이란 언제나 신선하고,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두근대는 일이긴 하지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투수가 프로세계에서 몇 년이고 활약해 온 강타자들을 한 명 한 명 요리하는 광경이야 말로 최고로 기분 좋은 모습 아닌가 한다. 필자 역시 연일 마운드에 올라 열심히 던졌던 젊은 시절 니시모토의 피칭에 마음을 빼앗겼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니시모토의 피칭폼은 와인드업 후 키킹하는 다리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스타일이었는데, 이 때문에 ‘사와무라 2세’라는 별칭도 얻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 나기 전,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대투수 사와무라 에이지(沢村栄治)의 폼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니시모토는 대투수를 닮은 멋진 폼에서 나오는 ‘슈트’라는 악몽 같은 구질로 타자의 인사이드를 공격했다. 그 외 포심의 구속은 평범한 편이었고, 커브는 아예 던지질 못했다.
“그 당시 제가 던졌던 커브는, 홈 플레이트에서 50센치 정도 앞에서 원 바운드 될 정도로 끔찍한 수준의 커브여서, 주자가 나가면 포수는 한번도 커브 사인을 내지 않았어요. 그러니 뭐 슈트 하나만으로 버텨야 했죠.”
그는 주자가 루에 나가면 슈트를 던져 내야 땅볼을 유도, 더블 플레이로 엮었다. 타자의 배트가 부러진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당시 요미우리 투수진의 중심은 코바야시 시게루(小林繁)와 니우라 히사오(新浦壽夫), 두 사람이었다. V9의 에이스였던 호리우치는 서서히 힘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였다. 하지만 필자는 호리우치를 대신할 요미우리의 에이스로써 코바야시나 니우라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특이한 자세의 사이드 스로우 투구폼을 가지고 있던 코바야시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정통파 투수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에이스로써의 품격이 다소 떨어진다고 봤고, 니우라의 경우는 엄청난 스피드의 포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걸 활용하려 들지 않고 커브만 주구장창 던져 대는 스타일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 니우라와 직접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이 부분에 대해 물어 보자 뭐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이 다 있냐, 하는 표정으로 필자를 바라 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심을 던지는 것이 제일 힘들어요. 편하게 커브를 던져 맞춰 잡을 수도 있는데, 뭐 하러 힘들게 바보 같이 직구로 승부를 본답니까.” 이걸로 필자는 니우라에 대해선 완전히 기대를 놓아 버렸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니시모토가 자이언츠 마운드에 등장한 시점에 나는 호리우치의 후계자로써 내심 그를 기대했었다. 왼 다리를 하늘 높이 쳐 올리는 것 빼면 투구폼 자체도 정통파에 가까웠고,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등판을 즐기고, 마운드에 오르면 최선을 다해 피칭을 하는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 때야 뭐… 마운드에 오르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워서… 던지는 게 재미있어서 어쩔 줄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니시모토는 이와 같이 당시를 술회하며 “거기에, 당시 제 연봉이 180만엔 정도로 1군 선수로써는 최저보증 수치인 360만엔에도 못 미쳤어요. 근데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구단에서 별도로 2만엔, 4만엔 정도를 지급해주더라고요. 그것도 또 마운드에 오르는 맛 중 하나였죠.” 하지만 니시모토는, 이미 요미우리 내에서 팀 메이트 특히 동 세대의 젊은 동료들에게는 외면 받는 존재가 되고 만다. 원인은, 동료들과 어울리기 보다 연습을 중요시 하던 그의 철저한 생활 태도 때문이었다.
3.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 선수가 되었으나…
니시모토는 쇼와 50년(1975년) 2월, 드래프트 외 입단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계약했다. 그 해 요미우리의 드래프트 1위는 가고시마실업고교의 에이스 사다오카 쇼지(定岡正二)였다. 그는 고시엔에서 활약한 고교 야구계의 스타였다. 니시모토 역시 마츠야마 상업고교의 에이스였으나, 1학년과 3학년 여름에 열린 현 대회 준준결승까지 오른 것이 최고 순위로, 고시엔의 흙은 한번도 밟아 보지 못한 채로 고교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래도 니시모토가 요미우리에 입단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구단 스카우트 부장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드래프트 이전, 요미우리의 스카우트 부장이 니시모토를 찾아 와서는 지명할 예정이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전언 하였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이 사실을 학교 친구들에게 전했다.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 왔던 팀이었으니 너무나 기뻤던 것이다. 하지만 드래프트 당일, 6명의 신인 선수를 지명한 요미우리의 영입 리스트에 니시모토의 이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드래프트가 끝난 후 요미우리 스카우트 부장이 니시모토를 찾아 와 “드래프트에서는 지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팀에 들어오고 싶다면 계약은 하도록 하지.”라는 제안을 하였다. 상대의 뻔뻔한 태도로 인해 배신 당했다, 는 생각이 들어 쇼크였지만 프로 야구 선수로 계속 야구를 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니시모토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만다. 계약금은 8백만엔이었다.
드래프트 1위였던 사다오카가 3천만엔에 계약한 것은 나중에 알았다.
니시모토는 딱히 억울해 하지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엔, 고시엔을 밟아 보지 못한 것이 이유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식으로 인정해 버린 것이다. 마츠야마 상업고교가 고시엔 진출에 실패한 것은 에이스이자 3번타자로 활약했던 자신의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으로, 좀 더 노력했으면 가능 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있었다.
도쿄에서 열린 입단 발표의 기자회견에서는, 이듬 해인 75년부터 감독 취임이 예정된 나가시마 시게오와 구단 대표, 그리고 그 옆에 사다오카가 앉아 진행 되었다. 니시모토는 나머지 9명의 다른 신인선수들과 함께 그 뒤에 나란히 섰다. 기자들의 질문은 사다오카에게 집중 되었고, 질문에 답변하는 사다오카를 곁에서 바라보며 나가시마는 미소 짓고 있었다. 니시모토를 포함한 신인들은 그러는 사이 마냥 뒤에 서있었을 뿐 단 한마디의 질문도 받지 못했다. 니시모토는 이런 바보 같은 상황도 견뎌 내려 했다. 이 모든 상황을, 나는 실력이 없어 고시엔 진출에 실패했으니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월이 되어 스프링 캠프가 시작되었다. 니시모토는 등번호 58번의 유니폼을 입고 미야자키의 2군 캠프에 참가하였다. 그를 대표하는 ‘26번’을 등에 새기는 것은 2년 후인 77년의 일이다. 드래프트 1위의 사다오카는 다른 선배의 등번호였던 ‘20번’을 물려 받고 캠프에 참가 하였다. 어느 날, 니시모토는 사다오카와 함께 2군 불펜에 나란히 서서 투구 연습을 하게 되었다. 주변에는 팬들로 가득 찼고, 피칭 코치 외 몇 명의 추가 스태프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루키의 피칭을 보기 위해 몰려 들었다. 니시모토는 자신의 볼을 어필할 수 있는 중대한 찬스로 여겼고 이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던지고 나서 곧장 깨달았다. 어느 누구 하나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의 관심은 사다오카에게 몰렸기 때문이다.
“나도 던지고 있다구! 누구 한 명쯤은 내게 시선을 주어도 괜찮잖아!”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니시모토는 누구의 눈에도 들지 못했다.
“당시에는 진심으로 누군가의 눈에 들고 싶었어요. 나도 코치한테 어느 정도는 인정 받고 있다고… 뭐 그런 식의 어필이 하고 싶었던 거죠.”
그제서야 니시모토는, 드래프트 1위로 주목 받던 동기 사다오카에게 질투심과 선망이라는 양면의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야자키에서의 캠프가 끝난 후, ‘나가시마 자이언츠’의 제2차 캠프는 미국 플로리다의 베로비치로 옮겨졌다. 니시모토는 기타 2군 선수들과 함께 미야자키에 남겨 졌지만 사다오카는 1군의 선수들과 함께 베로비치로 떠났다.
“제길.”
이런 이유로, ‘프로야구 선수’ 니시모토의 첫 목표는 당연 ‘사다오카 넘어서기’가 되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계속되는 고된 연습에도 견딜 수 있었다.
마츠야마 상업고교 3학년 때 출전한 여름 지역 대회의 준준결승에서 패배, 고시엔을 향한 꿈이 끊어진 뒤 니시모토는 다른 야구 부원들과 눈물을 흘리며 구장을 빠져 나왔다. 이튿날, 다른 3학년 동기들은 힘든 야구부의 연습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이 놓였는지 패배에 대한 분한 모습 조차 보이지 않고 각자 자유로이 유흥을 즐겼다. 하지만 니시모토는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어디서 야구를 하더라도 다시는 이런 분한 경험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바로 다음 날부터 홀로 훈련에 돌입했다. 매일같이 학교에서 집으로 오면 집 근처의 모래밭을 달렸고, 밤이 되면 집에서 약 300회의 복근 운동과 300회의 팔굽혀펴기를 소화해 냈다.
요미우리에 입단했을 즈음, 12살 위 형에게서 편지가 왔다. 니시모토 아키카즈(西本明和). 마츠야마 상업고교의 에이스로써 1966년 여름 고시엔에서 결승전까지 진출했던 선수로, 동생이 야구를 지속하는데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이다. 66년도 드래프트 1위로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한 형이지만, 당시엔 피로성 염좌 증세로 인해 병원을 오고 가며 재활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사실 입단 후 교통사고를 두 번이나 당해서 이 시기에는 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상황이었다.* 주). 힘든 재활 생활 중이었던 형은, 동생의 프로 입단을 기념하기 위해 선물 대신 프로야구 선수의 마음가짐에 대한 편지를 건네었다. 편지엔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프로세계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연습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상대의 2배, 3배 연습 하는 정도는 당연한 것이고, 그 정도로도 남보다 우위에 서긴 어렵다. 남들 놀러갈 때 조차 연습에 매진해야만 겨우 한 명의 프로야구 선수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니시모토는 자신이 닿지 못한 고시엔 출전을 경험하고, 프로 팀으로부터 드래프트 1위로까지 지명된 형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기에 편지 내용을 가슴 깊이 담아 두게 되었다. 이윽고, 프로에서의 첫 시즌이 시작 되었고 니시모토는 구단 기숙사에서의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입단 후 얼마 되지 않아 기숙사 내 동료들에게서 별난 녀석 취급을 받게 되어 버린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연습을 했다. 무조건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연습량을 소화하고자 했다. 그라운드에서 팀 전원이 러닝 훈련을 할 때에도, 그는 집단 내 가장 바깥쪽에서 뛰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안 쪽에서 뛴 선수들 보다 긴 거리를 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습이 종료된 후 숙소에 돌아 오면 방에서 복근 운동과 팔굽혀펴기를 반복했다. 팔굽혀펴기의 경우, 조금이라도 볼을 던지는 손가락을 강화하고 싶어서 손바닥을 대지 않고, 엄지-검지-중지 만으로 회수를 소화했다.
고된 2군 생활 중에도 가끔은 휴일이 주어진다. 휴일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선수들은 들떠서 기숙사로부터 가급적 떨어진 곳에서 놀기 위한 계획을 세우곤 했다. 처음엔 그들도 니시모토에게 같이 가자 했지만 그 때마다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녀 오세요.” 혹은 “다음엔 꼭 같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기숙사가 모두 외출하고 없는 상태가 되면, 니시모토는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 입고 근처의 요미우리 랜드의 언덕이나 숲 속을 뛰어 다녔다. 얼마 되지 않아 니시모토는 휴일이 되어도 누구에게도 초청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물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에히메(니시모토의 고향.* 주)에서 도쿄로 가게 된다면, 그것은 술 먹으러 가거나 여자랑 놀러 가는 것이 아닌, 야구를 하러 가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시모토의 꿈은 도쿄에서의 즐거운 생활이 아닌, 고라쿠엔 구장(당시 요미우리 홈 구장.* 주)의 스코어 보드에 자신의 이름을 거는 것이었다. 어떠한 상황에도 그는 꿈을 잊지 않았다.
당시 기숙사 관리 담당은, 스카우트 부장이었던 타케미야 토시아키였다. 타케이먀는 휴일에도 열심히 요미우리 랜드를 달리는 니시모토의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는지, 외출에서 돌아 온 다른 선수들을 향해 종종 이렇게 잔소리를 하곤 했다.
“니들, 니시모토를 좀 봐라. 아무리 휴일이라도 맨날 펑펑 놀고 그러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하지만 동료들도 연습 시간마저 제쳐 두고 외출한 것은 아니었다. 휴일이기 때문에 외출한 것 뿐이었다. 어느새 동료들은 니시모토를 차가운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시모토는 그들에게 동화되거나 친구가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더더욱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시즌 종료 후, 야구를 할 수 없는 환경이 되면 니시모토는 타카다노바바(高田馬場)에 위치한 스포츠 센터를 다녔다. 그 곳에서 그는 당시 야구계에서는 터부시 되고 있던 수영 트레이닝을 시도해 보았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그런 소리 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수영은 어깨와 팔꿈치를 차갑게 한다는 이유로 야구계에서는 누구도 시도하려 들지 않았던 운동이었다. 니시모토는 그 곳에서도 무작정 수영만 하기 보다는, 여러 고민을 하며 다양한 영법을 시도해 보았다.
또한 그는, 요미우리 랜드 → 타카다노바바로 이동하는 시간 조차 철저히 훈련을 위해 활용했다. 기숙사로부터 오다큐선(小田急線)의 요미우리 랜드 역전 까지는 발 끝으로만 걷고 전철 내에서는 손잡이를 잡지 않은 채 발 끝으로만 서있었다. 돌아 오는 길에도 같은 루틴이었다. 예전 인터뷰에서 니시모토는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발 끝으로만 서서 버티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양 다리의 내근력이 강화되면 하체 단련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했던 훈련이라고 강조했다.
니시모토는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다양하게 도전해보는 것을 좋아했다. 팀 레전드 사와무라 에이지 마냥, 왼쪽 다리를 높이 차 올리는 독특한 투구폼 또한 스스로의 고민과 다양한 시도 끝에 몸에 익힌 것이었다. 입단 당시 팀 에이스였던 호리우치의 불펜 투구를 본 니시모토는, 그의 불 같은 포심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호리우치는 이미 전성기를 지나던 시점이라 한창 때의 스피드에는 미치지 못했는데도 니시모토는 그의 투구를 통해 프로와 아마추어 간의 커다란 간극을 보게 되었다. 그는 호리우치 수준의 볼을 던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볼에 자신의 전 체중을 실어 던지면 그나마 비슷해 질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고민을 거듭하며 피칭폼의 연구를 하다 보니 왼쪽 다리를 자연스레 지면 직각으로 차 올리게 되었다. 그렇게 왼 다리를 차 올리자 상체가 뒤로 크게 젖혀지면서 볼에 체중을 싣기 용이해 졌다.
입단 2년째인 1976년, 니시모토는 개막전을 1군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사다오카는 2군 스타트. 입단 당시에는 스타 취급을 받았던 사다오카였으나 현실의 그는 1군에서 뛰기엔 역부족인 레벨이었다.
니시모토에게 1군 첫 등판 기회는, 개막으로부터 10경기째였던 4월 15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 8회말에 찾아 왔다. 경기는 선발 투수와 중간 계투 모두 한신 타선에 두들겨 맞으며 4대12라는 큰 점수차로 끌려 가던 형국이었다. 하지만 니시모토에게 있어 프로 1군에서의 첫 등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더군다나 데뷔 무대는 고교 시절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고시엔 이었다.
“마운드에 섰는데… 던지려고는 했는데… 이게… 포수 미트가 전혀 안 보이는 거에요. 과장된 이야기라 여기실 수도 있는데, 진짜 안 보여요. 여긴 어딘가. 난 무얼 해야 하는가… 멍한 채로 아무 것도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일단 마운드에 섰으니 던지기 시작했지만, 순식간에 안타 3개를 얻어 맞고 말았다. 그 중 마지막 안타는 라인백에게 얻어 맞은 우측 방향의 스리런 홈런이었다. 경기 후 니시모토는 그대로 1군에 동행한 채 히로시마 원정으로 떠났다. 히로시마 구장에서는 3일간 경기 전 배팅 투수 역할을 소화했다. 좀처럼 등판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 오자마자 2군행을 지시 받는다. 이것이 입단 2년차 니시모토 타카시가 경험한 1군 무대의 전부였다.
“그 땐 좀… 억울하더라고요. 2군으로 가는 건 상관없는데, 히로시마에서 3일간 배팅 투수를 한 거. 그렇게 억울한 마음을 안고 피칭했던 기억이 없어요.”
2군으로 내려간 뒤 다시 1군으로 올라 오지 못했던 니시모토는 남은 시즌 내내 이스턴 리그(NPB의 2군 리그)의 마운드에 등판했다. 2군 시합에서의 니시모토는 레벨이 다른 선수였다. 12승 4패의 성적으로 이스턴 리그 최다승 투수가 된 그는 다음 시즌, 다시 한번 1군행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4. 이단아
니시모토가 총 47경기에 등판, 8승 5패 4세이브의 성적을 올리며 1군 정착에 성공한 1977년 시즌. 라이벌 사다오카 또한 1군 데뷔를 달성했다. 하지만 9경기에 등판, 0승 1패의 성적으로 투구회수 또한 고작 15이닝에 그쳤다. 이제 야구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사다오카가 아닌, 니시모토인 것이다. 입단 발표 당시 사다오카 곁에서 방글방글 웃었던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 또한 지금은 니시모토에게 주목 하고 있다. 그 해 선발 – 중간 – 패전처리 – 마무리 할 것없이 주어진 업무는 뭐든 소화해낸 그를 향한 구단 측의 기대는 컸다.
“녀석은 장래성이 있어. 5년 뒤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대표하는 에이스가 될 꺼야.”
하지만 니시모토는 1군에 정착한 뒤 팀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들뜬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심 자신이 세워 둔 ‘프로야구 투수로 불리울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년 확실히 10승 이상은 해낸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죠. 그 정도는 해야 겨우 프로 선수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못 해내면 프로 세계에서 밥 벌어 먹긴 어렵겠다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목표로 한 수준에 닿을 때까지, 1군에 올라간 뒤 요미우리의 니시모토, 라 하면 누구나 다 아는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 사귀고 하는 것은 미뤄 두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인지 확실한 1군의 전력이 되었음에도, 그는 그 때까지의 연습 방법에 손 대지 않았다. 러닝 시에는 언제나 집단에서 가장 바깥으로 달려 누구보다도 많은 거리를 달렸고, 그래도 충분치 않다고 여겨지면 전체 연습이 끝난 뒤에도 홀로 외야를 달렸다. 그 외에도 니시모토는 본인에게 도움이 된다 싶은 건 무조건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어느 날, 투수조의 연습이 끝난 뒤 니시모토는 홀로 내야진의 펑고 연습에 참여하여 함께 훈련하고자 했다. 펑고를 받으면 하체 강화에도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 볼을 쫓다 보면 무릎을 충분히 활용하기 때문에 피칭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는 것 보다는 지루함이 덜했고 투수 땅볼 처리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연습이었다. 하지만 니시모토가 야수조에 섞여 펑고를 받으려 하자 연습을 지도하던 코치가 한 마디 했다.
“뭔 생각이야. 너, 내야수로도 뛸 참이냐?”
그는 니시모토가 동료들과 다른 연습 방법을 시도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니시모토는 본인이 결심한 것에 물러서지 않는 남자였기 때문에 그대로 남아 펑고 연습에 참여했다. 지금에 와서는 많은 투수들이 당연시 하는 연습이지만, 요미우리에서 처음으로 펑고 연습에 참여한 투수는 그가 처음이었고 이러한 모습이 일부 코치진에게는 이단아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투수 코치에게 프리 배팅 연습 시 종종 맡겨지던 배팅 투수의 역할을 완곡히 거부한 적도 있었다. 일반적으론 전문 배팅 투수가 연습에 참여했지만, 젊은 투수에게 맡겨지는 경우도 가끔은 있었고 특히 스프링 캠프 때는 빨리 어깨를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니시모토는 배팅 투수의 역할이 싫었다. 프리 배팅 연습을 위해 던질 경우, 맹렬한 라이너성 타구로부터 투수를 보호하기 위해 투구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낮은 네트를 투수 앞에 설치해 놓곤 하는데, 이로 인해 평소와 같은 투구를 하기가 어려웠던 니시모토는 본래의 피칭 리듬이 망가지는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배팅 투수의 역할 자체가 싫은 건 아니고요. 네트 없이 배팅 연습할 때는 얼마든지 던질 수 있습니다. 근데 네트가 있으면 뭔가 피칭에 방해 받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아무리 항변을 한 들, 피칭 코치는 니시모토가 너무 제멋대로라며 끝내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물론 그를 제외하면 팀에서 배팅 투수 건으로 코치진에 불평 하는 투수는 없었다. 니시모토는 팀원에게서 뿐만 아니라, 코치진에게서 조차 제멋대로인 캐릭터로 비추어 지기 시작했다.
한편, 니시모토는 선발 투수로만 활약하고 싶다든지, 패전처리로는 뛰고 싶지 않다든지 하는 류의 불평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기 중엔 감독이나 코치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존재였다. 1978년 시즌에는 전년도 활약으로 인해 연봉이 인상되어 1군 등록 선수에 대한 최저보증액수를 넘어섰고 이로 인해 경기가 끝난 뒤 종종 지급되던 ‘용돈’도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니시모토는 선발 – 중간 – 패전처리 – 마무리 등 맡겨 지는 역할을 담담히 소화해 냈다. 그 결과, 해당 시즌 니시모토의 출장 경기수는 총 56경기에 달했다. 거의 2경기에 1번 꼴인 셈이다. 하지만 성적은 4승 3패 2세이브로, 전년 대비 나빠졌다. 감독이나 코치가 얼마나 무계획적으로 그를 활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니시모토는 결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야구가 그저 좋았기 때문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 된다.
5. 에가와 스구루 입단
1979년, 에가와 스구루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역대 고시엔 No.1 투수로 불리우던 에가와는 요미우리의 입단을 원했으나 73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의 1위 지명을 받고는 거부하고 호세이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을 앞둔 1977년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現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았음에도 불구, 역시 입단을 거부하였다. 그리곤 이듬해인 1978년 드래프트 회의 전 날에 ‘공백의 1일’이라고 불리우는, 야구협약의 맹점을 이용하여 요미우리와 입단 계약을 맺어 버리고 만다. 결국 계약 자체는 센트럴 리그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였으나 리그 커미셔너의 중재에 의해 당시 드래프트에서 에가와를 1위로 지명한 한신 타이거즈와의 트레이드가 성립 되었고, 요미우리의 에이스 코바야시 시게루와의 교환 형태로 교진군 입단의 꿈을 이룬다.
에가와의 요미우리 입단은 너무도 이례적이었고, 심지어 코바야시가 이에 따른 희생자가 되는 바람에 요미우리 선수들은 ‘드래프트 제도를 무시한 처사’라며 연일 목소리 높이고 노골적으로 신인 투수의 영입에 환영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아직 현역이었던, 인정 많기로 유명한 오 사다하루(王貞治) 조차 “그 녀석과는 함께 뛰고 싶지 않다.”는 인터뷰를 주저하지 않고 할 정도였으며, 코바야시의 트레이드로 인해 홀로 요미우리 투수진을 이끌어야 했던 니우라 또한 한 동안 에가와의 뒤를 이어 릴리프로 마운드에 오를 때 마다 대놓고 싫은 기색을 표현했다. 니시모토 역시 굳이 에가와에게 말을 걸거나 친구가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가와가 어떤 식으로 팀의 일원이 되었든 간에, 결국 요미우리 에이스라는 간판을 가져갈 선수는 그가 되리라는 것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니시모토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니시모토는 마츠야마 상업고교 2학년 때 도치기 현 우츠노미야에 있던 사쿠신학원 고교와 연습 시합을 해본 경험이 있다. 사쿠신학원의 에이스가, 당시 ‘괴물’이라 불리우던 에가와 스구루였다. 에가와는 니시모토 보다 한살 연상으로 당시 3학년이었는데, 둘은 대결은 0대2, 니시모토의 패배로 끝이 났다. 에가와는 이 시합에서 27개의 아웃 카운트 중 16개를 삼진으로 잡아 냈다. 그는 특출난 선수였다.
“한 마디로, 차원이 다른 선수였죠. 에가와 씨가 직구와 커브 밖에 던지지 못하는 건 누구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아… 여기서 삼진이 꼭 필요한데…’ 싶으면 반드시 삼진을 잡아 냈어요. 프로야구에서 그렇게 직구와 커브만 던져서 원하는 피칭을 계속해 내려면 어지간한 능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데, 에가와 씨는 그걸 해냈던 거죠. 저희가 감히 흉내 낼 수준이 아니었어요.”
니시모토는 두 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에가와의 투구를 본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을 에가와 보다 낮은 레벨로 인식하거나, 그를 한 수 위의 선수로 대할 마음 또한 추호도 없었다. 대신 에가와를 본인 프로 생활에 있어 새로운 목표 상대로 결정했다.
“에가와 씨 보다는 반드시 1승이라도 더 해내고 만다.”고 결심한 것이다. 물론 이번 상대는, 사다오카 수준이 아닌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상대다.
79년 시즌, 에가와는 입단과 관련되어 협회로부터 받은 2개월 간의 출장 정지 처분이 풀리며 6월부터 마운드에 설 수 있었다. 총 27경기에 등판한 그는 9승 10패의 성적을 올렸다. 고교 시절, 고시엔에서 보여 준 그의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기대치에 모자란 수치였으나 라이온즈의 입단을 거부한 후, 1년 동안 드래프트 재수를 했던 점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가는 성적이었다. 반면, 니시모토는 8승 4패 6세이브로, 승리 숫자는 하나가 모자랐으나 전체적으로는 에가와 보단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니시모토의 쓰임새는 전년과 달라지지 않아 총 44경기나 등판하였다. 이 중 선발 등판은 총 17회로 나머지 27회는 감독이나 코치가 결정 짓기 애매할 때 활용된 릴리프 등판이었다. 에가와는 27경기 중 23경기가 선발이었고, 릴리프 등판은 겨우 4경기였다. 그는 입단과 동시에 선발투수로의 역할이 맡겨졌고 이에 따른 등판 간격이 유지되며 팀에 의해 보호 받았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성은, 이듬 해 1980년 시즌부터 두 선수 모두 선발 로테이션의 2개 축으로 확정 되고도 변하지 않았다. 감독이 나가시마에서 후지타 모토시(藤田元司) 로 바뀌고, 다시 오 사다하루로 바뀌어도 변치 않았다. 그들이 선발 로테이션을 조정할 때 항상 기준이 되는 건 에가와였고, 니시모토는 그 정도로 중히 여겨지지 않았다. 이는 니시모토의 마음 속에서 에가와에 대한 불만의 싹을 틔우는 이유가 된다.
1980년. 니시모토는 드디어 에가와와 함께 팀 선발 투수진의 주축이 된다. 이전까지 에이스로 군림했던 니우라는 눈에 띄게 힘에 부친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에, 나가시마 감독 입장에선 에가와 외에 또 한 명의 신뢰할 만한 선발 투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니시모토는 터프하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등판을 거부하지 않는 선수였기 때문에 감독 입장에선 적절한 선택이었다. 니시모토가 ‘드래프트 외’ 입단으로 요미우리의 일원이 된 지 6년째의 일이었다.
그 해 니시모토는 14승 14패 2세이브의 성적을 올렸다. 염원의 두 자릿수 승리를 실현하였다. 등판 내용은 선발이 30경기, 릴리프가 6경기. 반면 에가와는 니시모토 보다 다소 좋은 성적인 16승 12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센트럴 리그 투수 중 누구도 16승 보다 많이 거두지 못한 덕에 최다승 투수라는 타이틀도 손에 넣었다. 에가와는 총 34경기에 출전하였고 모두 선발이었다.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의 감독은 나가시마에서 후지타로 교체 되었다.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오-와 호리우치도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오-와 호리우치는, 각각 야수진과 투수진의 리더였던 선수로 이들의 은퇴가 확정된 후의 투수 쪽 리더는 에가와로 결정되었다.
“에가와 씨의 입단 경위가 아무래도 그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팀원들로부터는 좋은 시선으로 비추어 지기 어려웠죠. 그래서 그는 어떤 식으로든 팀에 녹아들고자 노력했고 주변 분위기에 꽤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다른 선수들이 5시간 정도 연습한다 치면, 에가와 씨는 1시간이나 2시간 정도로 연습을 끝내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팀원들과 친해지기 위해 투자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요. 이를 통해, ‘자, 봐라! 나는 세상이 이야기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어필하고자 했던 거죠.”
실제 에가와는 후배들과 종종 식사나 유흥을 즐기곤 했고, 동료의 생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깜짝 선물을 하는 등 관계 개선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이를 통해 그는 동료들과 짧은 시간 내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순수하게 ‘투수’ 에가와가 가진 능력 자체만 따져도, 니시모토 조차 두 손 두 발 다 든 것 처럼, 본래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별격의 존재이긴 했다. 그러나 니시모토는 여전히 그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에게 있어 에가와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은 그저 ‘친목 동호회’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프로라는 것은 자신 만의 실력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세계인 만큼, 저런 달콤한 인간관계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시모토는 그들을 뒤로 하고 담담히 훈련에 매진하였다. 상대적으로 에가와는 별로 연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가와는 사람들 앞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것이 촌스럽다고 여기는 쪽이라, 역으로 연습 중 장난으로 주변사람에게 재미를 주려 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모습은 이처럼 대조적이었고, 미디어는 이런 부분을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
러닝 때 마다 홀로 투수진으로부터 떨어져 외야 구석을 달리고 있는 니시모토의 모습은 미디어 측에서 볼 땐 ‘본인 어필’로만 비춰졌다. “눈에 띄고 싶어 환장했네. 또 혼자 뛰고 있어.” 니시모토의 훈련 모습을 보며 동료 선수들 조차 이렇게 수군대곤 하였다. 그는 답답했다. 본인의 연습 방식은 입단 당시부터 쭉 해왔던 습관이기 때문이다.
1981년은 니시모토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중 베스트 시즌이었다.
그 해, 요미우리는 팀 최초로 괌 전지 훈련을 열었다. 캠프 중, 전년도 오프 시즌 때 결혼한 니시모토의 와이프가 집에서 발생한 가스 폭발 사고로 인해 큰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아내의 벗겨진 그은 피부를 유니폼 주머니에 넣고 마운드에 올라 스스로의 파이팅을 촉발 시켰다. 니시모토는 이런 식으로 일종의 ‘미신’을 믿는 편이었는데, 이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 유체와 함께 태운 5엔짜리 동전을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피칭했던 적도 있었다. 그 덕택인지 그는 18승 12패의 호성적을 손에 넣는다.
새로 취임한 후지타 모토시는, 니시모토를 총 34경기 등판 시켰는데 이는 모두 선발 등판으로, 단 한번도 릴리프로는 출전하지 않았다. 갑작스런 등판 명령 없이, 본인의 등판 일정을 명확히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니시모토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편했다. 또한 후지타는 해당 시즌의 개막전에 니시모토를 선발 투수로 임명했다. 그는 에가와가 아닌 본인을 개막전 선발 투수로 임명한 후지타에게 감동 받아 그 시합에서 완투승을 거두며 감독의 신뢰에 보답하였다. 그의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요미우리는 그 해 센트럴 리그의 정규 시즌 우승을 달성하며 일본 시리즈에 진출하였다. 니시모토는 나가시마 감독 시절이던 1977년 시즌에도 리그 우승은 경험하였으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번도 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니시모토는 예전의 ‘애니콜’ 취급을 받는 선수가 아닌, 18승을 거둔 팀의 에이스 투수 중 한 명이다. 또 다른 에이스인 에가와가 일본 시리즈 1차전의 선발로 확정 되자, 니시모토는 그가 상대팀인 퍼시픽 리그 대표 ‘니혼햄 파이터즈’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패전 투수가 되길 바랬다. 그래야 본인이 선발로 등판할 2차전에서 똑같이 얻어 맞고 패하더라도 누구도 비난 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팀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면 ‘역시 니시모토야’라는 평가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시리즈 1차전, 니시모토의 바램대로 에가와는 니혼햄 타선에게 난타 당했고 팀도 완패했다. 니시모토는 이튿날 열린 2차전의 선발로 등판하여 에가와가 농락 당한 니혼햄 타선을 상대로 완투하며 팀의 2대1 승리를 이끌었다. 시리즈 5차전에 등판한 니시모토의 피칭은 한층 빛을 발하였고 9대0의 완봉승을 거뒀다. 결국 ‘한 지붕 아래’ 일본 시리즈(당시 홈구장은 코라쿠엔 구장을 요미우리와 니혼햄이 함께 썼음 *주) 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승리로 끝났고, 두 경기에 등판하여 2승을 거둔 니시모토는 시리즈 최우수 선수(MVP)에 선발 되었다. 에가와 역시 4차전과 6차전의 승리투수로 1차전의 패배를 되갚았지만, 시리즈의 행방을 결정 지은 것은 2차전(시리즈 1승 1패로 만듬)과 5차전(5할 승부에서 팀에게 1승을 더 안김)에서 보여진 니시모토의 역투였다.
“저는… 1983년도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에가와 씨가 패배하길 바랬어요.” 라고 회고하는 니시모토. 실제 1983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에가와가 1차전 패전 투수, 니시모토가 2차전 승리 투수가 되며 누가 요미우리에서 가장 믿음직한 투수인지를 만인 앞에 증명해 보인 바 있다.
시즌 종료 후, 니시모토는 일본 시리즈 MVP라는 훈장에 더해, 사와무라상 수상자로도 뽑혔다. 그는 사와무라상을 수상하는 것이야 말로, 센트럴 리그에서 활약하는 투수에겐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정 소식을 들었을 땐 뛸 듯이 기뻤다. 6년 전, 드래프트 외로 선발된 무명의 루키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그에게 꿈 속에서나 실현할 수 있었던 일이 눈 앞에 닥친 것이다. 팀 메이트들 또한 함께 기뻐해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니시모토의 기대는 곧 어긋난다. 동료 중 누구 하나 그의 사와무라상 소식을 축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들이 진정한 사와무라상 수상자로 여겼던 이는 다름 아닌 에가와였기 때문이다.
성적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태도도 무리는 아니다.
해당 시즌, 니시모토가 18승 12패의 성적을 거둔데 반해 에가와는 20승 6패를 올렸고, 완투 경기수 또한 14경기 대 20경기로 에가와 쪽이 우위였다. 무엇보다 동료들이 에가와가 더 적합한 수상자라고 여긴 것은 삼진 수였는데, 그가 221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당해년도 탈삼진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니시모토의 탈삼진수는 126개였다. 사와무라상의 주요 선정 기준 중 하나가 탈삼진이고, 애초 이 상의 제정 의의 중 하나가 삼진을 빼앗을 수 있는 정통파 속구 투수를 치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는 에가와가 아니라 어째서인지 니시모토를 선정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야구계에 혼란을 끼치며 요미우리에 입단한 에가와에게 사와무라상이라는 영예를 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충격적이었죠. 막말로 제가 사와무라상을 받게 해달라고 선정 위원들에게 로비한 것도 아니잖아요. 수상 자체로만 따지자면 저는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그저 ‘축하해’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니시모토 개인에게 있어 81년 시즌은 야구선수로써 최고의 한 해였지만 맘 속에 큰 상처를 입은 해이기도 했다. 사와무라상 선정 위원들의 정치적 판단으로 인해, 니시모토는 팀원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6. 좌절의 시기
니시모토는 에가와가 요미우리에 입단했을 때부터 그를 목표로 했고, 무조건 그보다는 시즌 1승이라도 더 올리겠다는 일념에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그 노력은 한번도 실현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언제나 조금씩은 에가와가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1984년 시즌에 딱 한번 이길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15승 동률 그대로 종료되고 말았다. 니시모토는 에가와와 함께한 요미우리에서의 9년 중 1984년 시즌이 가장 아쉬웠다고 말한다.
또한 니시모토는 성적 만이 아닌, 연봉에 있어서도 에가와를 목표로 했다. 물론 연봉 부분에서도 언제나 에가와가 조금씩은 더 받았다. 1984년 시즌 종료 후, 에가와와 똑같은 승수를 기록한 니시모토는 연봉 계약 갱신 때 에가와 보다는 더 많이 받고 싶다는 주장을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본인이 에가와 보다는 팀 공헌도가 더 크다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니시모토는 언제나 승수에서 에가와에 조금씩 떨어졌지만, 시즌별 등판 회수는 상대적으로 많았다. 선발 등판 외 불펜 등판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에가와도 종종 불펜으로 등판하곤 했지만, 그 때마다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냈기 때문에 니시모토에 비하면 그 회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나 코치에게 있어 언제나 ‘제1선택’은 에가와였다. 니시모토는 스스로의 평가만큼 스태프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82년 10월 9일의 다이요 훼일스 전. 당시 감독 후지타는 에가와에게 선발 출전을 명했다. 이 경기는 시즌 130번째 시합이자 최종전으로 요미우리가 승리할 경우, 2년 연속 센트럴 리그 우승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합이었다. 시합 전, 니시모토는 투수 코치에게 선발 투수 등판을 자청했다. 에가와는 그 해 여름 어깨 부상을 입었고 그 즈음에는 부상 부위의 통증이 악화 되어 한 구 한 구 던질 때마다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 질 정도였다. 요미우리 내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니시모토의 요청은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후지타가 에가와의 선발 등판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에가와 선배를 선발로 내고 경기에서 패배하더라도 비난 여론이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 아닐까.” 니시모토는 당시 감독의 선택을 그렇게 받아 들였다. 선발 등판한 에가와는 다이요 타선에 3개의 홈런을 얻어 맞으며 넉다운 되었고 결국 요미우리는 승리가 절실했던 시합에서 패배하고 만다. 이 덕택으로 주니치 드래곤즈가 8년 만의 리그 우승을 쟁취하고 만다.
니시모토가 에가와보다 더 많은 연봉을 요구했던 1984년 스토브리그. 어쩐 일인지 요미우리 프런트는 니시모토의 주장을 인정해 주었다. 이에 니시모토의 연봉은 5천만엔으로 인상 되었고, 드디어 에가와의 연봉인 4천8백만엔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이로써 니시모토는 요미우리 투수진 중 최고 연봉자가 되었다. 그가 투수진 연봉 No.1이 되자, 기자들은 이전의 일들과 묶어 니시모토와 에가와의 비교 글을 연이어 기사화 하였다. 어느 기사나 읽어줄 가치 조차 없었지만, 무엇을 읽든 니시모토가 요미우리 투수진으로부터 소외 당한 존재라는 내용 만큼은 항상 강조 되었다. 요미우리 최고의 투수가, 사실은 팀 투수진으로부터 고립 되어 있다, 라는 뉴스는 기자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센세이셔널한 이슈였기 때문이다.
새해가 밝은 뒤, 예년처럼 괌에서의 스프링캠프가 시작 되었다.
캠프 중, 모 신문사가 연습이 끝난 뒤 모래 사장 주변에서 휴식을 즐기는 동료들 사이로 혼자 러닝 중이던 니시모토의 사진을 게재하였다. 또한 거기엔 친절하게도 “니시모토가 구단 오너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오너 측이 묵고 있는 호텔 창가에서 훤히 보이는 방향의 모래 사장을 일부러 골라 뛰고 있다.”라는 설명까지 덧붙여 주었다. 그는 해당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다. 연습 후 니시모토가 홀로 모래 사장을 달리는 것은, 구단 최초의 괌 캠프가 열린 1982년 때부터 해왔던 일로, 이번에 처음 시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왔는지, 의도가 무엇인지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전에도 그런 식의 연습 방식이 신문에 기재된 바는 있었다. 꽤 오래 전인 신인 시절의 일로, 그 때는 니시모토의 끊임 없는 훈련과 노력에 감복한 기자들이 “요근래 정말 보기 드문 성실한 신인이 등장했다”고 절찬했기 때문이다. 전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발끝을 세워 하체 단련을 지속하려는 니시모토의 사진이 게재된 적도 있었다. 그저 그 때와 똑같은 방식과 마인드로 연습했을 뿐인데, 이제 와서는 더 이상 예전의 시선으로 비춰지지 않게 된 것이다. 역으로, 팀 전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협조성 부족한 선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85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모 주간지는 니시모토에게 여자 문제가 있다고 폭로했다. 매년 10승씩 지속해 나아갈 정도로 뛰어난 선수가 되기 전엔 결코 맘 편히 놀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그였지만 결국 그 마음 가짐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이 점은 지금도 후회가 막심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어쩔 방도가 없었다. 니시모토도 남들처럼 바에 들러 술 마시고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하는 등 유흥을 즐겼다. 에가와를 목표로 하고, 에가와보다 무조건 1승이라도 더 하겠다고 이를 악물던 그 때와 같은 집중력은 없어진 것이다.
그 해 8월엔 코치인 요시다 타카시* 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당시 니시모토는 타마가와 그라운드에서 다른 1군 투수들과 함께 번트 연습을 하고 있었다. 요시다는 피칭 머신을 다루었고 니시모토는 기계에서 나오는 볼을 번트로 하나 하나 굴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요시다가 갑자기 “근데, 너… 왜 그렇게 멀뚱히 서서 번트질을 하냐. 제대로 배트를 눈 가까이에 두고 기본에 충실하게 하라고.”하며 성을 냈다. 하지만 니시모토는 번트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고 고교생처럼 어색한 자세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원하는 방향과 스피드를 맞출 수 있었기에 요시다가 하는 말을 흘려 들었다. 실제 니시모토는 어지간한 2번 타순의 선수들보다 훨씬 번트를 잘했다. 연습을 마치자 요시다가 다가와서 다시 한번 같은 말로 지적하였다. 니시모토는 순간 화가 나서, 저에겐 저만의 방식이 있단 말입니다, 라며 대꾸하였다. 그러자 흥분한 요시다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말았다. 근처 코치들이 바로 말리면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지만 주변엔 신문 기자를 포함, 많은 팬들이 지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코치에 반항한 니시모토의 행동과 결과는 곧장 큰 이슈로 번졌다.
1985년, 니시모토는 10승 8패 2세이브의 성적을 올렸다. 팀 내 투수진 최고 연봉자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수치였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니시모토는 팀 내에서 다루기 어려운 선수 취급을 받기 시작하며, 시즌 오프가 되면 거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트레이드 소문의 메인으로 다뤄지게 되었다. 이 후 니시모토의 시즌 성적은 점점 떨어지게 되고, 요미우리 최후의 시즌이었던 1988년에는 4승 3패까지 수치가 내려갔다. 당시 그는 본인을 제대로 활용만 해준다면 반드시 10승 이상 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오-는 니시모토를 제대로 쓰려 하지 않았다. 원인은 86년부터 요미우리의 피칭 코치를 맡은 미나가와 무츠오* 와의 대립 때문으로, 그 탓인지 니시모토는 시즌 중 종종 투수 로테이션에서 빠지게 된다. 마지막 시즌인 88년에는 완전히 팀 마운드 운영에서 제외되고 만다.
1987년 겨울, 니시모토는 구단과의 계약 갱신에 앞서 전대미문의 굴욕을 맛보게 된다. 그는 시즌 중 자신에 대한 미나가와의 기용법이 맘에 안든 나머지 틈만 나면 이에 대한 불평불만을 터트렸는데, 이와 관련하여 구단 측이 다음 3건의 패널티를 부과한 것이다. 미나가와 코치와의 화해 / 벌금 2백만엔 / 앞으로 팀의 규율을 어기지 않는다는 서약서의 작성 및 제출. 서약서는 요미우리의 선수회 회장이던 나카하타 키요시(中畑清)가 구단과 니시모토 사이에서 조율하며 진행하기로 했지만 나머지 2개는 구단에 의해 거의 반강제로 확정되었다. 니시모토는 구단 측에 2백만엔의 벌금을 내었고, 미나가와와의 골프 모임을 하면서 신문 기자들에게 그 모습이 일부러 촬영되도록 연출도 하였다. 라운드 중 두 명 모두 서로에게 대화다운 대화 조차 나누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니시모토는 요미우리에 남고 싶었다. 벌금도 내고 위선적인 골프 라운드도 견뎌내면서 까지 말이다.
7. 주니치로 트레이드되다
1988년 시즌이 끝난 후, 결국 니시모토는 구단으로부터 트레이드 확정을 선고 받는다. 상대 구단은 주니치 드래곤즈, 선수는 포수인 나카오 타카요시(中尾孝義) 였다.
니시모토는 트레이드 소식에 쇼크를 받았다. 이에 오-에 이어 1989년부터 감독으로 재취임한 옛 은사 후지타 모토지에게 연락하여 팀에 남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 간청하였다. 후지타의 취임으로 오-와 함께 미나가와도 퇴단하게 되었으므로, 다시금 정신 무장을 하고 트레이닝에 집중하고자 마음 먹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구단의 결정은 철회되지 않았고, 니시모토는 주니치로 가게 되었다.
“불안감… 밖에 없었죠. 스물, 스물다섯, 뭐 젊었을 때의 이적이었다면 모를까, 서른 넘어 베테랑 취급 받는 시점에서의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생활 리듬, 컨디션 조절법 등이 확립 되어 있으니까요. 새로운 팀에 맞출 수 있을까, 당연히 불안하죠. 맞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갑자기 바꾸는 것도 어렵잖아요.”
하지만 이듬해 2월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열린 주니치의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뒤 니시모토의 불안감은 싹 씻겼다.
그는 지금까지 해왔듯 독자적으로 궁리해온 연습을 이래저래 해보았는데 이를 지켜보는 주니치의 선수 누구 하나 이상한 시선으로 보거나 비아냥 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리도 아니었다. 주니치에는 이미 오치아이 히로미츠(落合博満) 라는 위대한 4번타자 겸 이 분야 선구자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는 팀을 이끌어야 하는 베테랑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2군 선수들이랑 같이 오키나와 캠프에서 몸을 만드는 걸로.”라는 주장을 하고는 호주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또한 불펜 에이스였던 카쿠 겐지 또한 캠프의 시작부터 끝까지 팀의 합동 훈련에도 참가하지 않고 혼자 만의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와 ~ 여기는 나 보다 더한 놈 천지네(웃음). 아니, 그래도 저는 혼자서 연습도 많이 했지만, 최소한 전체 연습이 끝난 뒤 따로 시간을 내서 했던 거라고요.”라면서 웃어 보이는 니시모토.
요미우리 시절에는 절대 허락 받지 못한 프리 배팅 피칭을 하지 않는 것도, 주니치 코치진은 허락해주었다. 러닝 코치 또한 니시모토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허락과 동시에 모두들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니시, 너라면 잘 알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지만, 그 대신 결과도 보여 줘야 한다는 걸.”
이 말을 듣고 오히려 니시모토는 마음이 편해졌다. 구단이 자신에게 원하는 건 지금껏 본인이 추구해온 프로페셔널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연습이 끝난 뒤, 주니치의 선수회장 우노 마사루(宇野勝)가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선배, 마작이나 같이 하시죠? 골프는 치십니까?”하며 능글맞게 물어 보았다. 니시모토는 마작에 대해서 잘 몰랐고, 골프는 할 줄 알았지만 요미우리 시절엔 스프링캠프에서의 골프를 전면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토록 부담없이 함께 어울려 놀자는 이야기를 이전 소속팀에선 들었던 적이 없었기에 기쁜 나머지 마작도 배우고 골프 라운드에도 참가하였다. 마작하면서 꽤 많은 돈을 잃었지만 주니치라는 팀의 분위기는 좋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니시모토의 주니치 이적 후 첫 등판은, 4월 12일 개막으로부터 3번째 경기로 진구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즈 전이었다. 시합은 6회까지 서로 2점씩 주고 받는 공방전이었는데 이 후 점수가 나지 않는 고착상태가 되며 경기 후반에 접어 든다. 니시모토는 요미우리 시절 막판 몇 년 간 선발투수로 나서고도 완투까지 이르지 못한 채 강판 당하는 경우가 많아 ‘5회 보이’라는 비난 섞인 별명으로 까지 불리웠다. 그래서 이번 만큼은 마지막까지 마운드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버티었다. 찬스만 주어지면 반드시 멋진 피칭으로 보답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7회말의 야쿠르트 공격을 막아 낸 뒤, 언더셔츠를 갈아 입기 위해 벤치 뒤로 이동한 니시모토는 때마침 벤치 쪽에 몰려 있던 주변 동료들로부터 귀를 의심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어이 ~ 모두들! 니시모토 선배가 좋은 피칭을 해주고 계신데, 뭐든 해서 선배님을 꼭 승리투수로 만들어 드리자고!”
감격스러웠다. 니시모토는 요미우리 시절 야수진으로부터 그런 식의 응원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가 던질 때 뿐 아니라, 에가와가 던지고 있을 때에도 그랬다. 요미우리의 선수들은 누구든 앞장서서 승리를 이끌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날 연장 12회까지 홀로 던진 니시모토는 결국 패전 투수가 되었다. 1사 만루에서 유도한 땅볼 타구를 2루수가 실책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기쁨에 충만했다. 12회까지 완투를 해낸 것이 기뻤고, 이토록 멋진 팀 메이트들과 그라운드에서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다. 팀원들은 패배한 채 그라운드를 뒤로 했지만 그 얼굴에는 ‘선배님, 역시나 꽤 하시지 않습니까’ 하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니시모토가 첫 승리를 올린 이후, 이적 시점엔 상상치도 못한 ‘시즌 20승’이라는 위업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주 후인 4월 26일의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였다.
8. Epilogue
니시모토는 주니치로 트레이드 된 3년째 시즌인 1991년에 허리를 크게 다쳤다. 도미하여 성공률이 매우 낮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진행하였는데 다행이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완치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하다는 것이 의사의 진단이었지만 그는 특유의 근성으로 재활 훈련을 단기간에 소화하며 바로 이듬해인 92 시즌, 개막과 동시에 1군의 마운드로 복귀한다.
이듬해 퍼시픽 리그의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이적. 5승을 거두었지만 시즌 종료 후 전력 외 통보를 받았는데 마침 요미우리 측에서 영입 요청이 들어와 6년 만에 친정으로 복귀하였다. 1994년 감독으로 재취임한 나가시마 시게오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니시모토의 영입을 강하게 프런트 측에 요청한 덕이었다.
하지만 니시모토는 한번도 1군 마운드를 밟지 못하였고 결국 시즌 후반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선언 후 해를 넘긴 1995년 1월, 이제는 친구가 된 사다오카의 기획 하에 니시모토는 2군 마운드가 있는 타마가와 구장에서 나가시마의 시구와 후배들의 헹가레 속 조용히 선수 생활의 종지부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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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타카시(西本聖)]
- 1974년 드래프트 외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 통산 165승 128패 17세이브 / 평균자책점 3.20 / WHIP 1.23
- 최다승 1위(20승, 1989년)
- 사와무라상(1981년)
- 골든글러브상 8회(1979 ~ 1985, 1989년)
- 컴백상(1989년)
- 일본시리즈 MVP(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