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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0 21:28
대체로는 갑신정변 실패 시점이 기점이었다고 기억이 나네요. 조선이 강해지게 북돋아주고 우방으로 삼을 것인가 우리가 접수하여 방파제로 운영할 것인가의 논쟁에서 후자쪽으로 무게추가 쏠린
19/11/10 21:37
그놈의 유교탈레반 흐흐.. 원래 알고 보는 역사는 분석이 참 쉽고 해결책도 쉽게 내놓을 수 있을 거 같은 착각이 들지만 현실은 미중무역 협상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죠.
19/11/10 22:01
전 저때쯤이면 유교 이전에 관리들 기강이 망가질때로 망가진 게 우선이라고 봐서...
그나마 척화파 소리 듣는 산골 사림들이나 애국심이 있었고 개항에 호의적이었던 경화거족들은 죄다 썩어문드러져서 국익보다 사익을 우선으로 여기는 놈들 투성이었죠. 그리고 그나마 애국심과 깨인 눈을 함께 겸비했던 소수 급진개화파들은 너무 서두르다 갑신정변 뙇! ...답이 없음.
19/11/10 23:05
첫줄에 김기수가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이라고 적혀 있는데, 일본 측에서 쓴 기록이 아니라 조선 측에서 보고서로 올리려고 작성한 기록이라면 일본의 조작이 들어갈 부분이 없지 않나요?
19/11/10 22:29
양명학은 사실 명에서도 유행하는 분파 정도 위치까지는 올라갔지만 성리학을 완전히 대체했다고까지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고증학같은 경우는 사실 의외로(?) 세도정치기가 조선에 고증학이 도입된 시기이기도 했는데 특성상 우리같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큰 관심은 못받고 있죠...
19/11/10 22:44
명청도 조선만큼의 지위가 아니었다뿐이지 결국에는 관학이 성리학이었고, 당시 지식인 계층이었던 향신들도 거진 성리학자들이었죠. 명청 시기에 양명학, 고증학 등이 성리학 헤게모니를 대체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물론 왕부지, 고염무, 대진 이런 클라스 있는 비성리학 계열 유학자들이 꽤 많이 나왔고 이름을 떨쳤다는 점에서는 조선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이 사람들도 결국에는 재야를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왜 조선 유학만 이 모양이냐 비판할 것까지는 없다 봅니다.
19/11/10 23:13
실학, 하곡 허균이 수용한 양명학이 있기는 있었으나 배척당하였고 결국 큰 발전없이 한말유학은 종교화 되었고 공자교 운동이 발생하는 아주 후퇴를 많이 하였죠. 망국의 끝이 다 그렇겠지만 그래도 비슷한 시기 중국 지식인 양계초 모종삼 등에 비해서 최고 엘리트 지식인들이 당시 상황을 너무 몰랐다는게 안타깝습니다.
19/11/10 23:29
다시 말하면 외부세력이 아니라면 아직 망할 시기가 아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부적 문제로 뒤집어졌던 신라나 고려와는 상황이 달랐죠. 내부적인 개혁이라면 사실 흥선군이 상당히 하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양계초 모종삼을 이야기 하기엔 저 시기와 시대적으로 맞지도 않죠. 솔직히 모종삼은 그냥 20세기 인물 아닙니까..
19/11/10 23:46
'외부세력이 아니라면'이라는 가정이 말이 됩니까; 중국이 분열되어있던 통일신라->고려 건국시기정도를 제외하면 한반도 국가정세의 대변혁이 일어날땐 외부세력(이라고 하지만 중국세력)의 영향이 항상 크게 작용했는데 중국이 개털린 아편전쟁을 보고도 대비하지 못한건 핑계가 되지 않죠.
19/11/11 00:12
아편전쟁 대비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조선이 왜 성리학 이후로 넘어가지 못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요?
기존 사상을 버리는 건 옆나라 상황을 보고 하는 게 아니라 내부적으로 기존 체제로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판단될 때 일어나는 거죠. 고려말 신진사대부처럼요. 중국도 양명학이나 고증학이 나왔다고 하나 그래도 근간은 성리학이었고, 이후 공양학의 경우도 아편전쟁 이후에나 나옵니다. 조선의 경우 성리학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위협이 내부적인 시스템붕괴로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후 외세에 의해 조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렇게 수백년간 고수했던 성리학을 그냥 한순간에 버려버리죠. 이는 다시 말하면 교조화 때문에 성리학을 버리지 못했다라는 게 얼마나 환상같은 말인지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교조화가 되었다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현대세대에 이르도록 세속화되지 못하고 교리를 문자그대로 따라야 하는데 조선은 성리학을 너무나도 쉽게 버려 버리죠. 그 이전 성리학을 버리지 못한 건 교조화되서가 아니라 버릴 이유가 없어서라 판단하는 게 맞다고 전 봅니다.
19/11/10 23:56
외부세력의 영향이 없는 때가 어딨다고요... 거기에 대처하는게 항상 문젠거죠 고려도 왜구 홍건적이라는 외부 문제가 있었고 신라는 뭐 당 없었나요? 통일이전엔 고구려, 백제라는 외부 문제가 존재했고요
19/11/10 23:53
아편전쟁 이후 시점을 기준으로 보자면 말씀하시는 바에는 대체로 공감합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건 명청대 대부분은 중국이나 우리나 유학의 발전상 면에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는거죠. 애초에 중국에서 양명학이 메이져였던 시기는 엄청나게 짧고(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년 전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고증학은 문자의 옥 이후로 지식인들이 사상범 안 되려고 도피성으로 택했던 노선이지, 구체성이나 대안 제시 면에서 성리학보다 월등히 발전된 형태라 보기 힘듭니다.
19/11/10 22:50
너무 바깥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명확한 실책이고, 여기에 더해 당대 기준으로도 수신사가 일본 방문했을 시점이 이미 아편 전쟁 터진지 수십 년 뒤임에도 불구하고 위기의식 하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에서 지적인 나태함이 보여 화도 조금 나고 그렇습니다. 제가 저 한심한 꼬락서니 안 보이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만의 가치관, 세계관에 갇히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19/11/11 00:49
사실 일본조차 10년 전만 해도 양이의 멱을 따자고 부들대던게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쓰마 쵸슈라서.....
개인적으로는 고종에게 제일 욕을 하는 편입니다. 놀랍게도 조선이라는 나라의 싸이즈가 작은게 아니라서요. 당시 인구수면 프랑스, 독일, 영국중에 조선보다 인구가 두배가 되는 나라가 없었거든요. 할려면 못하는건 아니었지요.
19/11/11 01:02
뭐 기본적으로는 재정능력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실 근대화 좀 해보려다 돈문제때문에 좌초하는 페이스는 당시 비서구 국가들의 일반적인 페이스였으니까요. 조선처럼 재정적 한계 안에서만 하느라 제대로 판 벌려보지도 못한 경우냐 이집트처럼 판은 거하게 벌려봤는데 대신 그러느라 진 빚때문에 망하느냐 차이는 있지만... 일본같은 경우는 에도막부 시절부터 원체 국내적으로 쥐어짜본 또 쥐어짜여본 경험이 있으니만큼 오히려 이런 재정조달력 측면에선 나은면이 있었고, 청일전쟁이란 도박에서 이기면서 '따서 갚으면 되지'가 운좋게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19/11/11 01:09
그것때문에 고종 욕하는 거거든요.
사실 명성황후가 욕먹는게 그 재정낭비인데 저는 주범은 고종이라 봅니다. 조선왕조에서 임금의 묵인하에 중전이 사치를 한다? 말도 안되는 거거든요. 놀랍게도 자본이 없는게 아니었어요. 워낙 소국과민의 사상에 찌들어서 왕조시대때는 잘 안드러나기도 했었고 할려면 할 수도 있었습니다. 중요한건 안한거죠. 72년 부터 갑신정변까지 12년이 지난 시깁니다. 대원군 집권이 겨우 10년이었어요.
19/11/11 01:19
고종이 자기 주머니 중요시하고 사치스런 사람이었던 것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긴 하겠지요. 이용익 심복으로 끼고 내장원으로 자기 주머니 관리한거야 뭐 워낙 유명한 일이긴 합니다만...
다만 저는 이너 서클 한줌이 soso하게 쓰는데 들어가는 재원과 본격적 근대화 사업에 들어가는 재원은 규모상 차원이 다르다고 봅니다. 특히 군대양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요. 그리고 애초에 긁어모을 재원 규모 자체도 미미했던 베이스는 변하지 않을거구요. 당장 대원군이 숙원사업 할 돈이 없어서 당백전 발행하던 나라고, 중국의 관세처럼 새로 짭짤한 돈줄이 생기는 상황도 아니었지요.
19/11/11 01:28
저는 주머니 관리 문제는 그냥 당시 조선이 아직 왕조국가라서 그 이상의 발상을 한다는게 힘들었던 시절이라고 봐야 한다는 쪽입니다. 전근대 국가에서 정부 재정, 왕실 자금 둘 중 어느 하나가 대단히 더 중요하다고 보기는 힘들죠. 잘 돌아갈지 어떨지 모르는 입헌군주제라면 모를까 일단 절대왕권에 가깝던 군주제 국가에서 왕의 사재를 털어서 개혁을 시도한다는 거 자체가 왕가 입장에서는 도박에 가까운 것이죠.
19/11/11 01:24
화폐경제 조차도 제대로 안돌아가던 나라에서 얼마나 돈을 쥐어 짜내봐야 짜낼수 있다는 말입니까.
조선에서 열심히 농민들이 농사 지어서 나오는 쌀이나 길쌈해서 나오는 직물이 국제시장에서 대단한 가치가 있기라도 했나요? 상품작물이라 할만한 것도 인삼 정도가 끝이었죠. 내다 팔게 없는데 어디에 돈이 있습니까. 외국에서 장비 사오고 무기 사오고 신식 군대 설립하고 젊은애들 유학시켜서 제도와 기술을 배워오는게 죄다 돈이 필요하고 특히 외국에서 통용이 되는 돈이 필요한데 조선이 외화벌이를 뭘 팔아서 합니까.
19/11/11 01:39
쌀은 뭐 최소한 일본시장(?) 정도는 있었으니까...직물도 사실 조선 전기까지는 일본에서 무명을 거의 자체생산 못해서 주요 교역품 중에 하나였는데, 에도막부 거치면서 자체수급을 완료해버린게 아쉬운 품목이긴 하지요
19/11/11 13:23
그건 최소한 하려는 시도라도 있었을 때나 할 수 있는 변명이라고 봅니다. 조선이 뭔가를 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시기는 이미 때를 한참이나 넘겼을 때란 게 문제죠. 당장 본문 내용만 봐도 조선의 윗대가리들에게서 느껴지는 무한한 꼰대력과 유교 탈레반 사상은 근대화를 못한다가 아니라 할 필요가 없다에 가까웠단 걸 알 수 있습니다.
19/11/11 15:28
나라국가운영은 개인적인 사치를 줄인다고 해결 할수없습니다
조선은 조세 제도도 그 시점에 맞지 않았죠 조선의 주요 세금 수단은 전세이죠. 토지에 세금을 붙이는 거죠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이게 통하지만 근대로 넘어가는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제정부족 현상이됩니다. 그리고 조선후기부터 소작농이 늘어나서 농사짓는사람 칠할이 소작농인 상태가 되면서 그나마 전세로 걷는세금도 줄여벌였죠 이런 세금 부족을 메울려고 택한것이 군역세이죠 군역은 땅을 가지던 못가지던 장사를 하던 수공업자이던 모든 성인남자들이 내던 세금이였죠 다만 이것이 소득에 비례한 세금이 아니고 전세의 부족분을 매우기 위해서 나라에서 정한 군역의 한도를 넘어서 걷기도하고 어린아이한테도 군역을 매기고 심지어 죽은사람에게 까지도 군역세를 매기기도 합니다. 이런 황구첨정, 백골징포의 대상은 항상 힘없는 일반 백성이였죠 이런 군역새의 부담은 조세저항으로 이어지고 진주민란으로 시작해 전국적인 민란으로 이어지죠 더욱이 그나마 근근히 이어 가던 조세 시스템을 완전히 박살내건 흥선대원군 입니다. 당백전 발행으로 경제체제가 무너지고 제정수입이 더악화 되었죠 당백전 발행초기는 당장제정 수입이 급증했지만 곧바로 당백전 가치가 뚝뚝 떨어지면서 제정수입이 예전보다 더 악화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상평통보 백개를 내야 하는 세금에 당백전 하나만 내면 됐거는요 실제로 당백전의 가치는 상평통보의 10개도 안됐으니까요 아무튼 고종때 제정난의 주요 원인은 민비의 사치가 아니라 전근대적인 조세제도랑 흥선대원군의 뻘짓으로 개화기 근대화에 필요한 국가기반 사업을 할 돈이 없었죠
19/11/11 01:50
할려고 해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산업화에 필요한 물적 토대가 처참한 상태였고, 주변국과의 국력은 따라잡기 불가능한 수준이었는데, 그 주변국들이 침탈을 해오고 있었지요. 고2때까지 초등 산수수준만 띈 학생이 반 1~2등 하는 친구처럼 한글로 써진 책 읽을수 있다고 말해봐야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름 일제가 산업화 수십년 시켜놓고 독립한 대한민국도 미국과 일본이 돈 퍼부어주기 전까지는 변변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산업화란게 인구수좀 있다고 초파리마냥 발생하는게 아닙니다.
19/11/11 13:26
우리나라는 지금 출산율이 낮다는 게 엄청난 문제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고 높이려고 머리라도 싸매고 있는데 저때 조선은 어떤 기록을 봐도 그런 다급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차이점이죠. 나중에야 뭔가를 해보려고는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죠. 더 빠르게 뭘 해보려고 했어도 전혀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일본시찰하러 간 외교관의 저 기록만 봐도 조선은 저 때 발등에 이미 불이 떨어졌다는 자각 자체가 별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게 가장 문제죠.
19/11/11 14:48
글쎄요, 사실 지금의 한국 출산율 문제도 "[나중에야 뭔가를 해보려고는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죠.]" 의 전형으로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높죠.
19/11/11 15:24
뭐, 양이가 위험하니 대비해아한다는 말도 아편전쟁-병인양요-신미양요 때부터 많이 나왔습니다.
"대비해야한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것" 과 이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기 위한 국가차원의 노력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19/11/11 15:16
아닙니다. 저출산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관료들이 정확히 인식하고 있고, 정책적으로도 많은 고민들이 있습니다. 정부 차원의 대책위원회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언론과 방송이 이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는 것. 언론도 너무 자극적인것만 좋아해서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단신처리해버리죠.
19/11/11 15:32
조선과 대한민국의 사례는 엄연히 차이가 있지요. 하지만 "정책적 고민"으로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닙니다.
조선도 두차례의 양요를 시작으로 나름 서양을 배우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1880년대면 "대부분의 관료들이 이를 인식하고, 정책적으로 많은 고민을 하던" 시기이죠. 하지만. 나라의 근대화라는건 말 그대로 [국가의 뼈가 뒤틀릴 각오]가 필요한거고, 그 와중에 내전 몇번 치를 각오정도는 해야하는 일이지, 관료들이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수준에서 해결될 성질이 아니죠. 조선도 근대화를 위해 나름 노력을 했습니다. 1860~1870년대면 서양에서 선교사도 좀 밀항시켜 데려오고, 서양 무기도 좀 복제해보고, 밀수할 수 있는 서양의 신기한 물건들도 좀 밀수해보고, 서양 책도 암암리에 구해서 돌려보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들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역사적으로 별 의미가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십몇년째 다루어지고 있는데, 아직 대한민국이 "뼈가 뒤틀릴 각오"를 하고 문제의 본질에 부딫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웨덴은 전체 인구의 17%가 난민을 포함한 해외 이민자라고 하더군요. 만약 한국이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민자 인구를 900만까지 늘린다면, 한국 사회가 이러한 변화를 감내할 수 있습니까? 프랑스는 전체 출생자 중 혼외 자녀의 비율이 거의 60%라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전체 출생자의 60%가 혼외자녀라고 하면, 한국 사회가 이런 사회구조를 감내할 수 있습니까? 북서부 유럽국가들은 동성부부(파트너)도 자녀를 입양하여 키울 수 있도록 제도적 마련을 해놓았고, 이성 부부와 같은 혜택을 줍니다. 이걸 한국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런 본질적인 해결책에 도달하지 못하면, 기껏해야 서양식 무기좀 구해서 별기군이니 뭐니 만들어본 다음 "우리는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라고 자위하는 조선 꼴이나 똑같은거죠. 그리고 150년뒤에 우리 후손들은 "2020년대의 우리 선조들은, 출산율 문제에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고, [나중에야 뭔가를 해보려고는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죠.]" 라고 일침놓겠죠
19/11/11 18:20
사대부가 유교적인 사상을 버리고 해외의 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것은,
본인들의 양반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모든 사회구성을 뒤집어 엎자라는것 입니다. 후대의 우리가 보면 안타까운 꼰대로 보일순 있지만, 당시 지도층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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