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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11/09 13:09:49
Name 이순
Subject [일반] 예비고사의 추억(2) (수정됨)




1,  
방 앞 복도를 오가는 발소리에 잠을 깨니... 그 때까지 나만 자고 있었다.  썅.
창 밖은 이미 어스름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우리방 꼬맹이들은 벌써 (저녁시간에 복잡할 것을 예상하여) 씻기를 마치고, 요약 노트를 돌려보는 중이었다.
여튼 조그만 것들이 야무져요.
영미는 생활복 대신, 바둑이무늬 융잠옷을 입고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수학여행 왔냐..크크)

그제서야 부랴부랴 씻으러 가니 세면실은 북새통이었다.
대체.. 오늘같은 날, 머리 감는 애들은 뭐냐고오.
나는 씻기를 포기하고  부리나케 방으로 돌아왔다.
저녁밥상이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한 눈에 척~ 봐도... 맛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어 보이는,
암흑요리들이 상을 간신히 메우고 있었다.

이런   슈~~발...

내 비록 ...평소 , 없어서  못 먹는 拜食주의자이긴 하지만,
이 땡기지 않는 색상과 모양 앞에서 ..어찌 침샘인들 제 구실을 하고 위액인들 분비되리요.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맥아더) ㅡ 김치는 썩지 않는다. 다만 시어갈 뿐. ㅡ 김치는 너무 시었고,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 ㅡ  상한 갈치도 갈치이다. ㅡ  갈치는 꼬롬한 냄새를 풍겼다.
 
그래도..우리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파스칼) ㅡ   인간은 밥을 먹는 동물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  ㅡ  나는 밥을 먹는다. 고로 존재하니,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마자,
선생님들은 방방이 다니며 오늘은 일찍 취침해야함을 강조하셨다. 
(제길... 우리는 오후잠 푹, 잤잖아.  우리 재워 놓고 뭐... 어디 방석집이나 색시집에라도 가실려구 그러나..)
 
유곽의 특성상,  고객들의 원활한 작업(?)을 위해서,
유선여관은 밤 9시가 되자 완전히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가  아니라,
수학여행 온 걸로 착각하는 소수의 철부지 친구들과
뒤늦게 공부 못해 안달하는 친구들 때문에 ..
선생님들이 두꺼비집을  강제로 내려 버렸던 것이다.
 
우리 꼬맹이들은 억지로 이불을 덮고 누웠으나
잘려고 애쓸수록 눈은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더구나 자리가 비좁아 몸을 마음대로 뒤척일 수도 없어..거의 차렷 자세로 누워 있으니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방 앞 복도에는 막판에 형설의 공을 쌓으려는 듯..
대여섯명이 손전등을 켜놓고 공부에 열중해 있었고,
화장실을 오가는 발소리는 끊임없이 머리맡을 지나갔다.
 
 

 
2,
겨우 4시간이나 잤을래나..
어지러운 꿈에 시달리다 잠을 깨어 세수하러 가니,
세면실은 어제 저녁보다 더 혼잡스러웠다.
또 씻기를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오자... 꼬맹이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쳐다 보았다.
(내가 평소 세수하고 등교하는 날보다, 세수 안하고 학교 가는 날이 더 많은 줄 모르는 모냥이네.. )
 
아침 밥상의 판도는 어제와 다름 없고,
잠은 잤으나 잔 것 같지 않고,
얼굴은 만 하루 물 구경을 못 했고,
배변은 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 때문에  찝찝함만을 남겼고,
머리는 다리보다 더 무거웠다.
 
쓰~~ 발..

전 날 10시에 잠들어 꿈없이 푸~욱 숙면을 취하다가..
가만히 흔들어 깨우는 어머니의 손길에 6시쯤 깨어..
따뜻한 물로 개운하게 세수하고
가장 먼저 담은 밥, 씨락국 시금치나물 계란찜으로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몸안의 노폐물을 남김없이 시원하게 내보낸 후,
보리차 보온병과 도시락을 싸들고
식구들의 응원 속에  가장 먼저 대문의 빗장을 열어
찬바람 상쾌하게 맞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시험 치러 가야하는 것 아니냐고.

그래줄 집을 놔두고 이 무슨 ... 짜증나고 서러운 처지인가 말이다.
확--  그냥 고사장에 불을 싸질르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3,
어제 고사장을 다 확인했건만,
남으 학교다 보이.. 교실을 못 찾아 우왕좌왕하는 친구들이 눈에 띄었다.
허 ~ 참.. 저래갖고 아는 것도 다 까묵겠네..

어제보다 바람은 더 사납게 불어대는 가운데, 어쨌거나  1교시 시험은 시작되었다.
아,,, 그런데....
뽄없이 큰 유리창은 어지간히도 덜컹거리쌌고,
도끼다시 교실바닥은 얼음판이 따로 없다 싶게 차가워,
도무지 시험문제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아는 문제도 놓치는 둥, 정신없는 가운데  오전 시험이 끝났다.
잘 쳤는지 못 쳤는지 어려웠는지 쉬웠는지 .. 感이 오지 않는 시험은 처음이었다.
 
 
M여고 애들을 비롯한 그 도시 애들은 집에서 싸갖고온 도시락을 교실에서 먹는데,
우리는 여관에 단체로 주문한 도시락을 먹기 위해  운동장으로 나갔다.
운동장엔 모랫바람이 일고 있었지만,
우리는 화단 언저리나 현관앞 양지 바른 곳에 옹기종기 쪼그리고 앉아,
배달되어온 도시락을 곱은 손으로 받아 펼쳤는데. .. 

이런!!    쉐 ~ 발...
 
밥은, 너무 떡져서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리고야 겨우 한 덩이 뜰 수 있었으며,
그나마도 얼기 직전인 듯 ..이가 시리고 목젖이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아마도 어젯밤에 미리 쪄서 퍼놨겠지.)
 
반찬쪽은.. 애들 용어로 더욱 레알캐안습이었는데...
 
단무지 3쪽 + 오뎅볶음 3조각 + 볶은멸치 3~5마리 + 깍두기 3~4개가  전부였다.
 
선생님, 이걸로 밥 5숟갈인들 넘기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루저들이긴해도,  어머니의 음식솜씨로 미각이 나름 단련된 규수들이다...말임돠.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도시락을 거의 먹지 못하자,
급히 뜨거운 물을 공수해 와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부어주셨다.
물 한잔으로 겨우 속을 풀고 있는데... 참.. 속 뒤집어지는 장면이 시야에 잡혔다.
어머니들이 교문앞에까지 진출하여 갓 지어온 따뜻한 도시락을 넘겨준다, 
커피포터를 개구멍으로 넣어준다,  사과를 던져준다, 등....법석을 떨고 있었다.
 
 

4,
추위와 배고픔 속에 어찌 어찌 오후시험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마음이 납덩이보다 더 무거웠다.
난이도가 높지도 않았다는데 대부분 평소 모의고사보다 훨씬 못 친 듯했다.
그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또 다시 D역까지의 십리 행군....
 
어제는 적어도... 다리는 아팠을망정 절망과 허탈과 울분은 없이 걸었었는데..
이제는 그냥 울고 싶은 심정으로 터덜터덜 걸어갈 뿐이었다.
순진한 영미와 숙희가 도덕 답을 맞추느라 시끄러웠지만,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두려워서 답을 맞추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D역에 도착하자 어둠은 완전히 내려 앉았다.
우리는 역 광장 바닥에 앉아.. 머리를 무릎에 묻고 기차를 기다렸다.
그 때 누군가 외쳤다.
 
답안지 박스에 확-- 불을 질러삐릿시모 좋것네 !!
 
우리는 다들 허허롭게 웃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저 멀리 통일호 기차가 플랫홈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5,
어쨌거나 우리는 그 받은 점수를 기준으로 학교를 선택하고 본고사를 치렀다.
원하는 대학에 가기도 하고,  떨어져서 원하지 않는 대학엘 가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하여 각자의 길을 나름대로 걸어갔다.
그 때 10~20점을 덜 받아서 오히려 더 적성에 맞는 길을 찾아간 친구들도 있고,
그 때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여 평소대로 점수를 받았더라면, 아예 다른 길을 걸어갔을 친구도 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문제를, 같은 시간에, 같이 주어진 시간 안에  치렀다고해서,
과연 ,,,그 시험제도가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조건이 공정하지 않으면 결과는 공평하지 못하다.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서 똑같이 출발만했다고 해서 공정한 경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약, 최소 무게의 런닝화와 운동복 차림으로 뛰는 선수와,  청바지 등산화 차림으로 뛰는 선수가 섞여있다면 말이다.



6, 
그나마 예비고사는 우리 사회의 몇 안되는 기회균등의 제도에 속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차피  ` 기회의 평등 `이나  ` 공정한 룰 `은 원칙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불평등한 기회 속에서 공정한 경쟁을 말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공정한 룰은 다만,  불평등적 요인에 대한 보완장치 정도랄까..

살아오면서 더욱 공고해지는 생각은, 
인생은 뭐...그냥 출생빨이고 유전빨이고 운빨이라는 것.

유전적 환경적 경제적 외모적 상속자본에다,
성장하면서 차후에 획득한 문화자본의 차이는,  불평등한 기회의 출발이다.

우리는 다만 그저 노력할 뿐이다.
그 주어진 불평등한 기회와 조건일망정.. 그 환경에서 최적을 추구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적어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노력.
그것만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었다......
노력 또한  온전히 본인만의 영역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래서 문통의 취임사 중 그 유명한 문장,
듣기에 멋지고 좋은 말이지만  실상은  `흰소리 `에 불과한 주장,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를 접했을 때,

문통,  나보다 두서너살 더 먹었을텐데.... 인생이건 사회건 뭘 모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좀 ...위험한 사람 아냐....?  
이 정부, 혹...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것  아냐...? 

라는,  일말의 의심이 스쳐가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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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30세(무직)
19/11/10 00:55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tannenbaum
19/11/10 01:21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19/11/10 08:15
수정 아이콘
두 분, 고맙습니다.
` 잘 `에 포함된 복합적 의미를 역시 잘 아니까요.
마지막 글의 댓글로 만족스럽습니다.

지난 1년간 스무편 남짓 글을 올렸는데, `재미있게 ` 읽었다는 댓글이 가장 많았습니다.
제가 남들보다 쵸큼 더 가진 게 있다면, 개그본능이지 싶어요.
재미있게 읽어주신 여러 님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댓글로 간간히 마주치겠네요...
사악군
19/11/10 18:12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19/11/12 11:51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19/11/11 13:34
수정 아이콘
좋네요. 옛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게.
또 뵙겠습니다.
19/11/12 11:51
수정 아이콘
글곰 님, 이후 글로써 또 뵐 일은 없지 ..싶습니다.
사실.. <예비고사의 추억 1>을 쓰면서 내심 기대했었더랬죠.

그 시절의 대입시제도에 대해 관심가지는 회원님이 적어도 두어 분은 계시리라.
그리고 주고받는 댓글은 아니어도, 세상에나.... 타도시에 가서 1박까지 하면서 시험쳤군요.. 정도의 관심.

근데....아무리 제 나이에 놀라자빠졌다 한들,
아이고 행님 아이고 어르신 이순이 그 이순.... 의 반응들. (회원저격댓글로 신고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글을 단 20초라도 읽고 단 댓글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이리 가벼이, 이리 우습게 취급당할 글을, 시간내어 쓰는 제 스스로가 민망하고 참담하더군요.
이 무슨 미친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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