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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6/08 01:39:23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역사에 대한 잡상 - (14) 간도는 우리 땅일까
저번에 간도 얘기 살짝 하기도 했고, 써 놓은 글도 있으니 ( -  -); 간도 얘기나 해 봐야겠습니다.
조만간 연재 시작... 은 아니고 임진왜란에 대해 못 다 한 얘기로 북관대첩 같은 걸 다룰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지금은 임진왜란 때 참전한 일본 장수들에 대해서 써 보고 있습니다만 잘 안 되네요. 절대 신장의 야망 다시 시작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망할 -_- 내가 왜 이 악마의 게임을)

출처는 모두 슈타인호프님 블로그입니다. http://nestofpnix.egloos.com 간도라고 검색해 보세요. 실록 기사는 제가 찾았는데 보니까 저보다 더 많이 찾아놓은 게 있어서 뭔가 허무하네요 -_-;

시작해 보죠.

1. 백두산 정계비
우리 민족이 되찾아야 될 땅, 중국에게 뺏긴 땅이 있죠. 그 이름하야 간도. 지금은 조선족들이 자치구를 이루며 살고 있는 곳입니다. 독립투사들의 애환이 담겨 있으며 일본이 감히 멋대로 중국에게 팔아버렸죠. 통일되면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이 바로 이 곳 간도입니다.

... 과연 그럴까요?

실록에 월경이라고 검색하면 보통 여진족들이 강을 넘어서 조선을 약탈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하지만 숙종 대에 이르러 강을 넘어서 산삼을 캐는 걸로 바뀌죠. 청은 만주를 봉금지대로 정했고, 이런 일에 극히 민감했죠. 문제는 양국의 국경선이 확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디부터가 국경인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생겼죠.

이 중 압록강과 두만강은 확실한 양국의 국경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사이의 좁은 지역, 특히 백두산 주변이었죠. 여기에 제법 많은 강이 있는데 어느 것이 압록강으로 가고 어느 것이 두만강으로 가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자, 증거를 찾아봅시다.

[장차 내년 봄에 대신 대여섯 명을 차견(差遣)하여 장백산(長白山) 이남 지방의 지형을 둘러보려고 하므로, 조정의 의논이 바야흐로 압록강(鴨綠江) 동쪽 변방에 길을 내기를 장백산 남쪽을 거쳐 곧장 두만강(豆滿江)까지 이르게 하여, 그들의 행리(行李)7444) 가 닿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합니다.]
1692년, 숙종 18년 1월 18일의 기사입니다.
보면 청나라 관원들이 확인하는 길은 압록강 동쪽 -> 백두산 -> 두만강 순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이후 1712년 숙종 38년에 다시 변경을 심사하러 청에서 오겠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되죠.

[압록강(鴨綠江)과 토문강(土門江)의 두 강은 자연히 물로 한계(限界)를 지을 수 있지만, 두 강의 근원이 되는 첫머리에 여러 물이 뒤섞여 흐르는 곳은 확실하게 정하기 어려움이 있으니,]
3월 6일의 기사입니다. 보시면 압록, 토문 두 강은 확실히 국경이라고 했고, 그 강 사이의 근원을 찾는 게 확실해 보이죠.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5월 23일의 기사입니다. 압록강의 근원을 찾아냈고, 두만강의 근원도 토문강으로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비를 세워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말을 한 거죠.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목적은 두만강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토문강을 찾은 거였습니다. 실록에서도 그렇고 여러 다른 기록에서도 토문과 두만이 혼용되는데, 이건 당시 사람들이 두만=토문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리고 저렇게 비를 세우면서 확실하게 두만=토문이 되죠.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중략)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陸地)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境界)를 정한다.’고 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중략)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12월 7일, 겸문학 홍치중이 팻말이 세워진 곳에 가 보고 숙종에게 보고한 내용입니다. 결국 대~~~~충 둘러봐서 토문강이 두만강으로 흐르는구나 했는데 정작 그 토문강은 동북 쪽으로 갔다는 거였습니다. 이에 대책이 필요하다고 하고 숙종도 윤허하는데 그 뒤에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영조 때의 기사를 보면 추측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백두산 정계(定界)에 대해서는 혹 부족한 곳이 없던가?”
하니, 윤용이 말하기를,
“토문강(土門江)에 목극등(穆克登)의 비(碑)가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니, 모두 공활(空闊)하여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잃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
영조 21년, 1745년 8월 14일자 기사입니다.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양 쪽 다 딱히 신경을 안 쓴 이유가 이거일 겁니다. 별로 필요가 없는 땅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100년이 넘은 후 다시 양국의 분쟁으로 번지죠.

2. 감계회담
1870년, 청은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영고탑/훈춘 일대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흉년 때문에 넘어 온 함경도 주민들이었죠. 다음 해 3월 이 중454명이 송환됩니다. 하지만 이걸 막기가 어디 쉽나요. 조선은 결국 이들에게 함경도 관찰사 명의로 토지대장을 만들어 세금을 거둡니다. 청은 몰랐죠. 두만강 유역은 여전히 봉금지대고, 거리가 오죽 멀어야지요. 이런 상황은 81년에 바뀝니다. 청이 알게 됐거든요 -_-; 청은 이들을 청에 귀화시키려고 했고, 조선은 송환시킬테니 취소해 달라고 합니다. 야단난 건 거기에 살던 백성들이었습니다. 힘들게 땅을 일궜는데 다 뺏기고 돌아가게 생겼으니까요. 이들은 직접 토문강을 살펴보고 이게 두만강이 아니라는 걸 밝히죠. 이 때 어윤중이 서북경략사로 임명됐는데, 확인해보니 정말 다른 강이었던 겁니다.

백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입장에서도 좋죠. 조선은 청에 이렇게 알리고, 청은 조선인들을 축출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회담이 열리죠. 감계회담입니다.

(1) 1차 감계회담
조선은 비를 중심으로 자세히 조사하자고 주장합니다. 반면 청은 비가 옮겨졌을 수 있으니 원래 목적대로 두만강의 원류를 찾아가자고 하죠. 일단 여기서 막힙니다. 조선으로서는 토문강이 어디까지 가는지 "몰라도" 두만강 이북과 거기에 있는 조선인 거주구역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에 문제는 "어디까지 가는지 몰라도" 였죠. (...)

양국 대표들은 계속 싸웁니다. 결국 정해진 건 두만=토문이라 전제하고 강과 비를 모두 조사하되, 강부터 조사하겠다는 거였죠. 거기에 청이 먼저 조사하자고 한 건 서두수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슈타인호프님의 포스팅에 있는 지도를 보면서 얘기하도록 하죠.


보시면 참 복잡하죠? -_-; 오도백하(토문강)은 저렇게 북으로 흘러갑니다. 진짜 얼마나 대충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만 겨울에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긴 합니다. 아무튼 조선측의 반대로 3팀으로 나누어집니다. 홍단수, 서두수, 홍토수죠. 이 중 서두수는 험한 길과 눈 때문에 답사를 중단하고, 어윤중이 맡고 있던 홍토수 팀은 홍토수를 따라 정계비가 있는 곳까지 도달, 비문을 탁본합니다. 자, 이제 다시 싸워야죠.

청 측은 여전히 국경선은 두만강이고, 그 원류를 찾으면 된다고 합니다. 정계비 내용이 잘못 되었다는 거죠. 반면 조선 측은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가는 것은 맞지만, 지금 조사한 강들이 모두 정계비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들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죠.

문제는...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서 흑룡강까지 간다는 게 확실히 밝혀졌다는 거죠. 스케일이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조선이 준비한 것은 없었죠. 덕원 부사 이중하의 상소입니다.

옛날의 경계를 다시 밝히고 유민들을 찾아다 안착시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경계로 말한다면 수원(水源)이 일치하지 않고 목책(木柵)도 다 썩어서 실제의 장소가 옛 문헌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옳게 확인하기가 오늘날에는 난처합니다. 유민들로 말한다면 강에 대한 단속이 오랫동안 해이해져 넘어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쇄환할 길이 없으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전번에 청(淸)에서 온 자문(咨文)에 저들의 국적에 편입시키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토와 백성들에게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 묘당(廟堂)에서 충분히 의논하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의 경계에 대해서는 도지(圖誌)를 살펴 고증하고 유민들에 대해서는 사리를 잘 헤아려 표획(標劃)할 곳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이고, 안착시킬 곳은 이쪽 땅인가 저쪽 땅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토의하고 확정하여 다시 참작하여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감당할 만한 사람을 새로 차하(差下)하여 다시 분명히 통지하면 나라의 체면도 정중하게 되고 사리에도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

비와 두만강의 수원이 일치하지 않고, 단속이 해이해져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많으며, 어디까지가 국경인지 제대로 토의하여 확정해야 된다고 하고 있죠. 조선에서도 토문강 주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말로야 계속 토문강 토문강 거렸지만요. 2년 후, 이들은 다시 만납니다.

(2) 2차 감계회담
여기서 중점이 된 것은 정계비가 국경을 나누는 것이냐 그냥 기념으로 놔둔 것이냐는 거였죠. 청은 별 의미 없는 거라고 하지만 조선은 이게 확실히 국경을 가르는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싸우죠. -_-; 여기서 청은 홍단수를 내세웁니다. 반면 조선은 홍토수를 내세우죠. 비랑 제일 가깝죠. 그 근거로 조선과 청의 지도들을 내세웁니다. 청은 홍단수로 압박하다가 결국 석을수로 합의 봐고 하죠. 하지만 이 강 역시 백두산이 아닌 아래에 있는 소백산에서 나오는 지류였습니다. 이중하의 단호한 거부에 결국 감계회담은 끝납니다. 이렇게 국경에 대한 결정은 미제로 남은 채 시간은 흘러가죠.

3. 기회
1897년, 함경북도 관찰사 조존우는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에 대해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조사 후 보고합니다. 여기서 이주자가 이미 수만호에 달했고 모두 청인의 압제를 받고 있다고 하죠. 청은 이주민들을 강제로 청의 풍습에 따르게 했고, 조선인들은 가족 중 한 명을 귀화시킨 척 한 다음에 그 사람 명의로 토지를 소유했습니다. 조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조선의 방침은 어디까지나 "홍토수"였거든요. 그런데 몇 년 후,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1903년 8월 11일 김규홍이 보고한 내용입니다.
북간도(北間島)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淸) 나라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북쪽 변경의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 지역에 이주하여 경작하여 지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이제는 수만 호에 십 여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청인(淸人)들의 침어(侵漁)를 혹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중략)
나라의 경계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전에 분수령(分水嶺) 정계비(定界碑) 아래 토문강(土門江) 이남의 구역은 물론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으니 결수(結數)에 따라 세(稅)를 정해야 할 것인데, 수백 년 동안 비어 두었던 땅에 갑자기 온당하게 작정하는 것은 매우 크게 벌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보호할 관리를 특별히 두고 또한 해당 간도 백성들의 청원대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그대로 관리로 특별히 차임하여 해당 간도(間島)에 주재시켜 전적으로 사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하여 조정에서 간도 백성들을 보살펴 주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청인들의 학대가 심해지자 이범윤을 보내서 조사했고, 지들이 땅 비워놓은 거 우리 백성들이 들어간대다 우리 땅인 거 결정까지 됐는데 저러니 우리 백성 보호하자. 이런 거죠.

에? -_-; 감계회담은 제대로 결정되지도 않았고 조선 측의 주장은 홍토수였는데요? 자. 여기서부터 대한제국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감계회담이 결렬된 후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청은 청일전쟁과 의화단 사건 등으로 크게 위축돼 있었습니다. 곳곳을 조차지로 뺏기고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권리를 얻어 가고 있었죠. 이 상황에서 간도에 신경쓸 수 있었을까요? 조선은 이 기회를 노려서 간도를 먹으려 한 겁니다.


이범윤은 간도에서 세금을 걷어서 병력을 양성하고 치안을 유지하려 합니다. 이걸 청이 항의하려 합니다만... 이 때 러일전쟁이 터지죠. 이 때 일본은 청나라 편을 들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데 청과 척을 지면 안 되니까요. 청에서는 한국군 병력을 철수시키고 다시 합의를 보자고 하고, 일본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던 한국 역시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이제 국권을 조금씩 침탈해 가죠. 이 때 일본은 러시아에게서 남만주의 이권을 보장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마자 일본은 간도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하죠. 간도에 거주하는 10만여의 한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고, 청국 관리에게 적당한 훈령을 발하여 착오 없게 하라는 거였죠.

간도의 한국인들을 보호해 준다는 정말 고마운 -_- 말과는 별개로 간도가 한국 땅이었으면 청나라에 저걸 통보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때 청나라에 세금을 내지말고 청의 법도 따르지 말라고 확실히 방침을 정하죠. 이후에야 치를 떠는 간도 협약으로 간도가 넘어갑니다만... 이게 남의 땅이라서 중국이 사들인 걸까요? 중국은 이미 대만을 되찾기 위해 일본에 돈을 지불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철도운영권이 간도보다 더 중요했죠. 이후 일본이 이 철도를 정말 잘 이용해 먹죠.

이렇게 어떻게든 간도를 먹어보려 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은 끝을 맺습니다.

4. 간도는 우리 땅일까?
간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보통 이렇습니다.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다.
- 아 이건 넘어갈게요. 천 년 전 우리 땅이라고 되찾아야 되면 일본은 불과 60년 전 자기 땅이었으니 한반도를 회복해야 될까요.
일본이 팔았다.
- 그러니까 일본 핑계는 그만 -_-

청이 버려뒀다.
- 당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많이 나오는 말이죠. 물론 그 때의 국경의 개념이 애매하긴 했고, 봉금지대로 청이 신경을 안 쓰기도 했습니다. 근데... 봉금지대를 정한 건 신성하기 때문인데 그런 땅을 그냥 버려둔 게 말이 될까요. 더군다나 간도에 대한 얘기 곳곳에서 청과 충돌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청은 계속 이 땅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조선인들을 귀화시키거나 쫓아내려 했습니다.
- 가장 큰 문제는, 이 "버려뒀다"는 핑계는 독도에 그대로 써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비교해 볼까요.

청이 간도를 버려뒀다 백성들이 거기를 개간했다 vs 조선이 독도를 버려뒀다 일본 어민들이 거기서 고기잡이를 했다
당시 간도는 청과 조선의 분쟁지역이었다 vs 지금 독도는 한국과 일본의 분쟁지역이다
조선은 1900년대에 간도를 영토에 편입시키고 세금을 받고 행정관을 파견했다 vs 독도를 떠나서 60년 전에 한국을 자기 나라에 편입해서 세금을 받고 행정관을 파견한 나라가 있었죠. 거기다 계속 청이 반대했던 간도에 비해 이 나라는 참 쉽게 먹혔네요.

때로는 이런 주장이 일본의 모습과 너무 닮아서 무섭습니다.

정계비에 동위토문이 적혀 있다.
- 이중하는 2차 감계회담에서 홍토수가 경계라고 했습니다. 청이 계속 협박해도 거부했죠. 만약 이중하가 동위토문에 해당되는 그 넓은 땅을 포기했다면 수십리밖에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렇게 싸워댔을까요? 동위토문은 틀린 거였습니다.

5. 결론
이전 글에서 조선이 만주를 향한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인 것은 나라가 가장 약하고 힘들 때였다고 했었습니다. 그게 저런 거였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간도에 살던 조선인들은 십만여호에 달했다고 하니까요. 오히려 조선이 그냥 뜯기고만 있었던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기분이 신기하기도 했구요. 뭐 -_-; 나라 망하게 생긴 상황에서 욕심만 낸 거지만요. 이중하 등 조선의 관리들은 청의 영향력이 강력했던 감계회담 때도 단 한 치도 뺏기지 않으려고 강하게 맞섰습니다. 자랑스러워 해야 될 부분인 거죠. 하지만 1900년대에 대한제국이 보여 준 모습은 어디까지나 침략이었습니다. 우리 백성이 산다, 우리 고토다, 외교에서 말 바꿔서 우겨대기 등등...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와 별 다를 바 없었던 겁니다. 이 때문에 대한제국이 힘이 셌다면 일본이랑 같이 잘 놀았을 거라는 냉소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애초에 문제가 됐던 지역은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있는 일부 지역이었고, 백성들이 넘어가서 간도라 불린 지역은 두만강 상류의 일부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제대로 정해진 지역이 아니기에 간도의 범위는 들쭉날쭉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구만 1억이 넘는 거대한 범위를 잡기도 하죠.
그런데 간도의 뜻은 아주 초라해서, 사이(間) 섬(島)이라는 의미입니다. 강을 넘어 간 백성들이 잡히자 "우리는 만주로 간 게 아니라 강 사이에 있는 섬에 갔다 온 거다"고 변명한 데에서 나온 거죠. 실록에서 보면 고종 이전에는 간도라는 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간도의 범위 역시 조선인 거주 구역을 잡은 것일 뿐이죠. 이 단어 자체가 정치적인 목적, 즉 조선인 거주 구역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해서 나온 말인 겁니다.

글쎄요. 어차피 남의 땅 뺏기에 혈안이 돼 있던 시대, 백성들을 위해서 저렇게 행동해도 될 수도 있죠. 청인들이 거의 안 살기는 했으니까요. 관리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남들 다 하는 거 그리 나쁘게 볼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 때에 대한제국이 한 것은 영토 욕심보다는 조선인들의 거주지 보호라는 측면이 더 강하니까요. 회담에서 계속 토문강을 민 것도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구요. 이 점은 옹호를 넘어서 좋게 봐도 될 측면입니다. 나라가 망할 상황에서도 이렇게 욕심 낸 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니까요. 단순 영토 욕심이라면 말 그대로 그냥 병... 이지만요 -_-;
하지만 지금 그걸 되찾으려고 한다는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분명히 침략이며, 뺏긴 땅이라고 억울해 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선동입니다. 그리고 이건 곧 일본이 독도를 뺏으려 하는 명분입니다. 독도 주고 간도일까요. 일본에서 그런 말 하는 인간들이랑 똑같아지고 싶진 않은데요.

휴. 이상입니다. _-)/

+) 여담으로 간도 협약으로 정해진 국경선은 석을수였습니다. 한편 1962년 조중변계조약으로 정해진 국경선은 홍토수죠. 지금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은 이중하가 주장했던 바로 그 선입니다.

+) 그러고보니 백두산에 대해서 조중변계조약으로 북한이 백두산을 팔아먹었다는 말들이 참 많은데, 조선시대 때 과연 백두산이 우리 영토였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청에게 있어서도 신성한 산이었거든요. 나라의 영산이라 여긴 건 확실하지만요. 일단 대동여지도에서는 천지 남쪽으로 국경선이 있다는군요. 당시 조선의 주장대로 정계비가 국경을 의미했다면 천지 남쪽인 게 맞겠죠.
우습게도 백두산에 대한 영토의식을 공고히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친일파 최남선입니다. 불함문화론을 내세우며 고구려 고토 회복을 외쳤죠. 민족을 외치면서 백두산, 고구려 고토 회복을 숭배하다시피 하는 현대의 민족주의 흐름의 시작은 최남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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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다바오트
11/06/08 02:09
수정 아이콘
우리가 배운 혹은 익숙한 역사를 바탕으로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적인 역사 해석을 비판하는 태도를 가끔 봅니다. 그런데 남의 나라 해석 못지 않게 우리네 해석도 당연히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고 어떤 목적을 띠고 강조되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간도 문제에도 이런 사정이 이면에 있었네요.
아우쿠소
11/06/08 02:17
수정 아이콘
길고 정성스러운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합니다. ^^

독도는 한국땅 대마도는 일본땅 간도는 중국땅.. 끝 입니다.
Je ne sais quoi
11/06/08 02:28
수정 아이콘
오... 그렇군요. 정리가 됩니다. 대마도는 어떨까요? 제가 대학 시절에 한국의 고지도에 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 궁금해서 그러는데, 괜찮으시면 대마도에 대해서도... ^^ (굽신 굽신)
낭만토스
11/06/08 02:53
수정 아이콘
중학교때 처음 국사를 배우면서 간도의 존재를 알게되었고 그때야 뭣 모르고 '우리땅'이다. 점거 100년 지나기 전에 찾아야 된다 이런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점 알아보고 그러다보니 간도가 우리땅이란 소리는 조금은 허무맹랑하더라고요.

결론은 '독도나 잘 지키자' -_-;;

그리고 솔직하게 모든 증거가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중국 상대로 간도를 찾을 수도 없겠고요 =_=;;
11/06/08 03:08
수정 아이콘
힘 세다고 땅 뺏던 시대가 끝났으니, 국경선이 형성된 경위가 뭐든 간에, 문명국 사이에서는 현재 영토가 앞으로 영원할 것 같습니다..... 빙하기가 새로 도래한다던지 하는 헬오브지옥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면 또 모를까...
11/06/08 08:38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래도 너무 아쉬워서 원래 우리 땅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고조선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원래 우리민족 땅이었다.
따라서 잠깐 빼앗았던 일본과는 다르다. 일본은 빼앗은것을 돌려준 것 뿐이다.
우리는 우리 옛땅 간도를 돌려받아야.....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아! 그렇게 욕했던 이스라엘이랑 똑같네.
gg요.
벤카슬러
11/06/08 09:42
수정 아이콘
지금 간도 영유권 주장하는건...
독일이 구 프로이센 영토는 전부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억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 하긴 수천년전에 쫓겨난 사람들이 기어들어와 놓고 자기 땅이라고 그 땅에서 수천년간 살아온 사람들을 쫓아내는
'이스라엘'같은 나라도 있지만, 따라할 것을 따라해야죠. -_-;;;

독도는 한국땅, 대마도는 일본땅, 간도는 중국땅.. 끝 (2)
11/06/08 09:54
수정 아이콘
근데 한국과 일본은 입장이 다른게 일본은 패전국 즉,전범국가고 한국은 침략당한 국가입니다.
1,2차대전이후 독일은 패전의 책임으로 분명 독일의 땅이었고 독일인들이 많이 사는 곳들까지도 러시아나 폴란드 등에 엄청나게 떼어줬죠.
물론 중국이나 한국은 마찬가지 입장이지만 적어도 일본상대로 대마도정도는 우리가 보상받았어야 하는거였는데..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조금만 힘이 있었다면 말이죠..
작년이맘때
11/06/08 12:38
수정 아이콘
우선 역사에 해박하지 않아서 질문 위주로 의견을 개진할까 합니다.

지금 중국에 만주족이 남아있나요?
제가 알기로 크게 보아서 우리민족의 상당수도 만주족의 일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진, 말갈족과 함께 만주에서 살던 민족이었기에 크게 보아서 만주족에 속한다고 봅니다.
중국왕조에서 금나라, 청나라 등 많은 왕조가 만주에서 발호한 나라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만주를 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중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이 과연 만주족, 티벳족, 몽고족을 같은 동족으로 인정하느냐입니다.
80% 이상의 한족이 영토에 있어서 자신들이 지금 지배하고 있으니, 그 땅도 중국땅이라고 할 뿐이지,
그들은 만주족이나 몽고족이나 티벳족을 역사족으로 동족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징키스칸의 몽고족이 원나라를 세워서 수백년을 중국을 지배했다가 결국 몽고는 원래의 땅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는 패망후 만주족이 그들의 터전인 만주로 되돌아갔나요?
제가 알기로 지금 만주어도 사라지고, 만주족(청나라를 세운 협의의 만주족)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훈족의 이동이 고트족의 이동을 야기하고, 고트족의 이동은 게르만의 이동을 야기해서 유럽에 많은 나라가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훈족은 헝가리쪽까지 진출해서 거기에 나라를 세운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훈족의 나라가 멸망 후 훈족은 동아시아까지 되돌아 왔을까요?
그들은 동유럽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주족의 발원이 만주였지만, 그들은 중국과는 별개의 민족이었습니다.
중국인(한족)은 그들을 동족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죠.
그런데 그들에게 침략당한 후에 그들이 중국에 흡수되면, 그들의 역사까지도 중국인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와 땅 모두가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만주족이 백두산을 신성시 했기에, 오늘날 중국인의 80% 이상인 한족이 백두산을 신성시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논리입니다.
헝가리나 동유럽에 훈족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해서, 헝가리가 동아시아 북부의 영토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사라진 민족이고, 역사속에서 이미 그 존재를 찾기 힘듭니다.

반면에 우리는 여전히 백두산을 경계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의 뿌리가 어디인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백두산을 신성시 하는 것과,
사라진 만주족 청나라가 백두산을 신성시 했다는 이유로 오늘날 한족에게 백두산이 신성시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혼합국가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전세계의 모든 나라에 대해서 자국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일까요?
유럽에서 이주해 온 사람,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사람, 중국, 한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다 사는 곳이 미국입니다.
청나라는 정복이지만, 미국으로 이주한 것과 같이 이미 중원으로 이주를 한 것과 같습니다.
더우기 그들중 대부분은 이미 자신들이 만주족이란 것도 모르고, 만주어를 기억하지도 못하며,
만주족이란 청이 자신들의 뿌리라는 것도 모릅니다.

다른 논리를 다 떠나서, 지금 한국과 중국의 경계문제에 청나라가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니까,
만주족이 살았던 땅은 중국 한족의 땅이라는 논리는 문제점이 많습니다.
그런 논리가 성립되면, 티벳, 내몽고 및 수많은 중국내 소수민족에 보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무조건 한족의 땅이 되고, 한족의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구려의 옛영토를 회복해야 할 땅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오랜시간 중국의 여러민족에게 점령당했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도는 좀 다르다고 봅니다.
간도는 실질적으로 최근까지 우리민족이 살던 곳입니다.
위에도 기술되었듯이,
토문강에 대한 해석 등, 조선과 청나라 다 영토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협상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협상이 종결시킨 것도 우리가 아니라 일본이었습니다.
현재 중국은 그당시 청나라도 아니고,
중국인의 대다수인 한족은 청나라의 세운 만주족을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도 않던 사람들입니다.

독도에서 어업하는 일본선원때문에 독도와 간도와 같은 문제라고 한다면,
연평도에 와서 불법어업하는 중국인때문에, 연평도도 간도와 동일해 지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수천년동안 잃었던 땅을 지금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간도가 같은 것이라면,
지금의 한족이 팔레스타인처럼 만주에서 생활하던 사람일까요?
영토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힘에 따라 정복도 당하고, 정복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지금 힘으로 한국을 정복하면, 한국땅을 실질적으로 점령한 것이 미국이니, 후에 한국이 힘이 강해져도 한국땅에 정당성을 미국이 갖게 될까요?
중국이 간도를 대한 정당성이 있으려면, 거기에 살던 만주족이 남아있다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주족은 지금 사라진 민족이고, 그들은 지금의 중국의 80% 차지하는 한족과는 별개의 민족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만주족의 후예중 자신들의 뿌리를 알고 있고, 그 문화를 유지하는 민족은 우리민족말고는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 간도쪽에 조선족말고 다른 소수민족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문화와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뿌리를 증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티베트와 내몽고의 예에서 보듯이, 중국의 대다수인 한족과 다른 민족은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졌고,
그들은 동일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했다고 해서, 한족이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백두산을 자신들의 영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하는 논리는,
몽고가 중국을 지배했으니, 내몽고 및 몽고땅도 중국땅이라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백두산을 영산으로 생각하고, 그 땅을 신성시한 것은,
청나라의 지배계층이었던 만주족과 우리 민족이었지, 지금의 중국인 한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족이 청나라에게 지배를 당했다는 이유로, 만주족의 근거지도 자신의 근거지라고 우기는 것은,
동북공정처럼 고구려의 역사자체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봅니다.
위의 글에서 가장 논리적으로 동의하기 힘든 것이,
현재 중국의 영토안에 있는 모든 문화와 민족이 다 중국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논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처럼 자신들과 관계된 모든 문화와 역사, 영토가 다 한족의 역사이고, 문화이며 영토라는 인식과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조선시대의 대부분에서 세계 최강은 청나라였습니다.
그들의 시원이 만주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백두산을 신성시했고, 뿌리에서도 생활근거지에서도 우리민족과 겹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청나라시대이기에 우리가 우리 영토에 대한 주장을 더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국경부분은 영토개념이 희박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지금 없습니다.
그들이 중국에 흡수되었으니, 모든 것이 중국의 것이 된다는 논리는,
위에서 언급한 티베트와 내몽고처럼, 점령하면 모든 것이 점령자의 것이라는 제국주의 시대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11/06/08 13:55
수정 아이콘
혹시나,
출처가 인터넷 블로그라서 못믿겠다. 하시는 분들은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간행한
'만주 - 그 땅, 사람 그리고 역사'라는 책을 추천드립니다.

관련 내용과, 간도 떡밥에 대해 비판하는 요지의 글이 자세히 실려있습니다.
그루터기
11/06/08 19:37
수정 아이콘
추천하고 갑니다. 저도 한때 굉장히 민족주의적인 역사관이 웬지 멋져보이고 빠져있었던 적이있었는데,
나중에서야 그런 태도가 역사를 바로 알기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의적이게 되더군요.
사실 여기에는 어린 초중학생들에게 자기 생각 여과 없이 말하는 교사들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_-;;
11/06/10 12:14
수정 아이콘
만주의 지배권.."고구려-거란-금-원-청나라"
발해가 빠졌네요ㅠㅠ
DragonAttack
11/06/10 22:43
수정 아이콘
이런 저런 의견 재밌게 듣고 갑니다. 그냥 별 생각 없었는데.. 간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네요.
밀가리
12/09/10 22:58
수정 아이콘
질게 건너서 늦게봤네요. 지금 보실 분은 있겠느냐마는,

중국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한데요. 다만 한족의 역사에 끼어든 두개의 왕조가 있습니다. 원나라와 청나라 인데요. 이 두개의 왕조는 흔히 말하는 한족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현대 중국역사교과서에는 청나라 역시 중국의 역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가르치는 중국의 역사 맞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92%의 한족과 나머지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소수민족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대로 단일민족국가로 인식하고(사실 여부를 떠나서요) 있기 때문에 역사와 민족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이 있는데요. 중국의 역사관은 다르죠.
王天君
14/06/24 05:48
수정 아이콘
음. 간도 문제에 대해서 확실하게 하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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