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서
목차)
4) 선발명단을 둘러싼 갈등
5) 본선에서의 쾌거
6)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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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발대회를 둘러싼 갈등
경성축구단은 베를린올림픽 1차선발전이였던 전일본 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바로 2차 선발전인 8회 메이지 신궁대회를 준비했죠. 대회가 10월에 개최하기에 당시 조선축구협회는 예선전을 개최하기에 빠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이지신궁대회 경기장)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자기네 본토팀이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 시트질에서 장난질을 하는데, 조선,중국,대만,홋카이도 팀들은 한번 더 경기를 하게 대진표를 짠 것이죠.
어쨌든 경성팀은 중국팀을 꺾고, 그다음에는 홋카이도팀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승리를 하며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당시 결승상대는 게이오 BRB라는 팀이였습니다. 그때당시에는 게이오 대학 재학생과 OB가 섞인 팀으로
현재는 게이오 대학팀으로만 남아있는 이팀은 당시 전일본선수권대회 (현 천황배)를 총 6회나 우승한 일본 최강팀이였습니다.
그러나 2:0으로 가볍게 누르며 승리했고 경성 축구단은 그대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일본내 대회에 2연패였고 정말 쾌거였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도 꽤나 파장이 컸습니다.
아사히신문 계열 화보 잡지인 <아사히그라프>엔 이혜봉 골키퍼와 정용수가 주인공인 그림이 실릴 정도였죠.
(당시 우승했을때 경성축구단 사진과 아사히 그래프의 그림이 그려져있는 잡지 월간축구)
6)뒷이야기
이렇게 총 3번의 선발전중 조선팀이 두번이나 우승했으니 많은 조선선수들이 베를린 올림픽 축구팀에 선발될꺼라고 기대감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3번의 선발전중 마지막 선발전은 동서학생 선발전으로 일본인들만 출전하는 대회였고, 일본은 조선인들이 올림픽에 많이 나가는 것이 보기싫어서 3차선발전을 중심으로 대표를 구성했습니다.
그래서 대표선수들중 조선 선수들은 김용식,김영근 이 두분만 뽑히게 되었고 김영근 선수는 이러한 사실에 꽤나 충격을 받아서 자진 불참을 했습니.
거기다가 일본 내부에서도 관서지역에 대한 차별로 관서 지방 선수는 두명 뽑히고 대부분이 관동선수였던 상황이였죠.
이렇게 아쉬운 마지막으로 끝을 내렸지만 당시 조선축구팀이 일본 수도에서 두번이나 보여준 쾌거는 당시 일제강점기시절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크나큰 위안과 통쾌함을 안겨주었던 속시원한 일이였습니다.
또한 그때의 고생은 헛수고가 아니였습니다. 김용식 선생님은 베를린 올림픽에 결국 따라가서 일본이 8강까지 올라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양의 축구책들을 사와서 한국에 고급 축구기술을 열심히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해방이후 런던올림픽에
한국대표로 출전했고 최초의 한국 월드컵 진출이였던 1954년때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참여하면서 한국의 축구 기틀을 닦아냈습니다.
일제시대때 일본마크를 달고 뛰었던 한을 결국은 태극마크달면서 그 한을 해소했던 것이죠.
이러한 축구영웅들의 모습들이 있었기에 현재 한국축구도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싶습니다.
이상 칼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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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용으로 3.1절 대본만든건데, 영 조회수가 안나와서 칼럼만들고 여기저기 옮기고다녔네요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