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1일. 한 명의 위대한 야구인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노무라 카츠야(野村克也, 1935 ~ 2020).
일본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저명인이기도 하지만,
야구를 잘 몰라도 스포츠 방송에 나와 툭툭 쓴 소리를 내뱉곤 하는, 그러나 신기하게 그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기 보다는 슬그머니 웃음이 지어지는 투덜거림(ボヤき)의 장인으로도 일본 내에선 꽤 유명하죠.
본 글은 개인적인 방식으로 그를 추모하고자 쓴 글이며,
노무라 감독이 취임 후 만년 하위 팀 야쿠르트를 어떻게 우승 가능한 팀으로 변모 시켰는지, 그리고 그의 수 많은 제자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후루타 아츠야(古田敦也)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 등 총 2개의 글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원작자는 모두 스포츠 전문 기고자인 이치세 히데토시(市瀬英俊)이며, 고인을 추억하며 존경의 마음을 담아 번역해 보았습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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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카츠야 : 이이다와 야나다의 기용으로 본 재생공장의 원점
80년대 후반의 야쿠르트 스왈로즈라는 팀은, 세키네* 감독의 지휘 아래 “무럭무럭(ノビノビ) 야구”를 실천해 온, 약하지만 인기가 있는 팀이었다.
“무럭무럭 야구”란 것을 잘 보여주는 심볼이,
시즌 30개의 홈런을 쳐내기 위해 100개의 삼진도 꺼려 않는 방만한 타격이 매력 포인트였던 두 선수, 이케야마 타카히로* 와 히로사와 카즈미*, 통칭 “이케토라 콤비(イケトラコンビ)”였다.
또한, 다이내믹한 외야 수비로 89년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 쿠리야마 히데키* 와 같은 해 리그 신인왕에 선정된 2루수 토마시노 켄지* 도 있었다. 둘은 모두 대학 출신의 선수들로 쿠리야마는 도쿄학예 대학을, 토마시노는 중앙대학을 졸업한 뒤 프로에서 활약하였는데 말 그대로 도회적인 세련됨이 물씬 풍긴 이들의 분위기는, 당시 버블기의 도쿄라는 시대 배경과 어우러져, 야쿠르트라는 팀에 있어 또 하나의 상징으로 비춰 졌다.
하지만 이듬 해인 90년.
지난 시즌 1, 2번 콤비로써 규정타석을 달성했던 쿠리야마와 토마시노의 출장 기회가 크게 줄어 들었다. 그 해부터 팀의 감독으로 취임한 노무라가 2루수는 토마시노 대신 이이다* 를, 중견수는 쿠리야마 대신 야나다* 를 각각 주전으로 발탁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야쿠르트의 평범한 팬으로써 진구구장의 우측 스탠드에서 야구를 관람한 적이 많았는데, 관중석 주변에서 종종 들리던 불만의 소리들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도대체 노무라는 쿠리야마랑 토마시노를 왜 안 쓰는 거야? 자기가 고졸이라고, 대졸 출신 선수들이 심지어 ‘멋쟁이’들이니까, 질투가 나서 그러는가 보지?!”
참고로, 이이다와 야나다는 노무라가 그랬듯 고교를 졸업한 뒤 프로에 입단한 선수들이다. 심지어, 이이다는 포수로 입단한 선수인데 갑자기 90년부터 야수로 위치가 변경되었고, 야나다는 89년 시즌에 아예 1군 출장 자체가 없었던 선수이다. 이런 이력의 2명의 선수가, 우리가 사랑해 마지 않은 쿠리야마와 토마시노를 벤치로 몰아 내고는, ‘新 1, 2번 콤비’로써 그 자리에 똬리를 튼 채 앉아 버린 것이다. 비난의 화살은 새로 취임한 감독 뿐 아니라, 이이다와 야나다에게까지 향했고, 이 때문인지 한 동안은 두 선수가 타석에 섰는데도 응원의 볼륨이 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아직, 노무라의 눈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90년도 시즌 후, 新 콤비 두 선수의 성적은 아래와 같다.
이이다 테츠야, 117 시합 출전, 타율 .279, 29도루.
야나다 코이치, 119 시합 출전, 타율 .237, 21도루, 골든 글러브 수상.
한편, 주전의 자리를 잃은 쿠리야마와 토마시노는 함께 70경기 전후로 출장하며 2할 2푼대의 저조한 기록을 남겼다. 물론, 주전 선수로서 전년도와 같은 출장 기회가 있었더라면 이이다와 야나다에 손색 없는 성적을 냈을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 답변은 아마도 신(神)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엄연히 현실로 남게 된 것은, 노무라가 가진 눈의 정확성이었고 우리의 보는 눈은 없었다는 것. 굳이 덧붙이자면, 토마시노는 11년간의 프로 생활 중 89년의 성적을 넘어선 적이 없었고, 쿠리야마는 지병인 메니에르병(귀 안의 장애에 기인하는 증세로 이명, 현기증 등을 동반. *주)의 발병으로 90년 시즌이 끝난 직후 유니폼을 벗었다.
노무라는, 감독 취임 3년째인 92년, 팀의 14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이듬 해인 93년부터는 2년에 한번 꼴로 총 3번, 일본 시리즈를 제패하며 야쿠르트 스왈로즈 구단 역사 중 최고의 황금기를 선물한다. 이 시기에 그를 대표하는 “ID 야구(Important Data의 약어. 약자는 머리를 써서 강자를 이긴다, 라는 노무라의 인생 모토가 담긴 워딩. 후루타 아츠야라는 출중한 포수가 있었기에 실행할 수 있었다. *주)”와 함께 종종 주목을 받아 온 단어가 “노무라 재생 공장”이다.
타 구단에서 전력 외 통고를 받은 선수, 이미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지났다고 여겨진 선수들이, 제비 둥지에 불려온 것만으로 점점 활력을 되찾으며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 승리라는 과실을 집어 오는 온순한 사자(使者)가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선수로, 95년 일본 시리즈 MVP로 선정된 오말리* 나, 97년 센트럴 리그 개막전에서 기적의 3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한 코바야카와* 등의 이름을 들 수 있겠으나, 가려진 인재가 발굴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90년의 이이다와 야나다 콤비야 말로, 90년대 야쿠르트 스왈로즈라는 팀에 있어 ‘재생 공장’의 원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일본 경제에 있어 평균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것이 1989년 말의 일. 어쩌면 노무라는 그 누구보다 빨리 버블 붕괴의 낌새를 눈치 챘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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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혁명가
노무라 카츠야가 난카이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이며 당시에는 오사카 프랜차이즈 팀이었음. *주)의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한 1977년. “릴리프 분야에서 혁명을 일으켜 보지 않겠나.”라는 말 한마디로, 한신에서 이적해 온지 2년째 되었던 에나츠 유타카*를 마무리 투수로 전업 시킨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지만, 노무라 자신 또한 평론가 시대이던 1980년대 중반, 하나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TV 아사히(채널 10번. *주)의 프로야구 중계 시 도입되었던 일명 ‘노무라 스코프(Scope)’였다. 이것은 센터 카메라가 비추고 있던 화면의 홈 베이스 위에, 스트라이크 존을 의미하는 백색의 선을 설정 한 뒤, 그 안을 가로/세로 전체 9등분으로 나누고는 투수가 던진 볼을 구종별로 ○, □, △ 등의 기호로 표기하는 것을 말한다.
해설자 석에 앉은 노무라는, 스코프를 설치한 뒤 배터리의 볼 배합을 해부해 나갔다. 일부 시청자들로부터는 “보는데 방해가 된다.”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야구 중계에 있어 그 영향력은 꽤 커져서 점차 타 방송국에서도 같은 시스템을 채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본가(本家)를 능가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해설가들의 코멘트가 분석의 영역 안에 갇혀 있던 것에 비해, 노무라는 분석을 넘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까지 명쾌히 예측하였기 때문인데, 실제 그 예측의 대부분은 수초 후 현실이 되는 놀라움을 보여주었다.
인상에 남는 장면이 있다.
진구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vs 요미우리의 경기. 타석에는 89 시즌 센트럴 리그 타율 1위를 차지한 요미우리의 워렌 크로마티* 가 들어섰다. 하얀색 선 약간 안 쪽이었는지 살짝 바깥 쪽이었는지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노무라가 어떤 부분을 짚으며 “이 쪽으로 던지면 크로마티가 아무리 잘 쳐봐야 파울이 될 거에요.”라고 발언하였다. 그리고 몇 구 후, 노무라가 이야기 한 그 곳으로 볼이 들어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크로마티의 배트가 날카롭게 돌았고, 타구는 점점 뻗어 나가며 폴 근처로 향했다. 커다란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좌측 스탠드. 하지만 어둠을 가로 지른 흰 공의 향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파울 존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야, 배터리가 운용하는 배구(配球)의 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적지 않지만, 당시의 감각으로서는 마치 극상의 마술쇼가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TV를 보고 있던 필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순간적으로 백지처럼 되어 버린 대뇌로, 야구가 얼마나 깊이 있는 스포츠인지, 엄연한 현실이 한꺼번에 몰아 닥쳤던 일을 기억한다.
혁명가이자 예언자. 마술사이기도 한 타격 3관왕(타율, 홈런, 타점의 타이틀을 한 시즌에 획득하는 일. *주) 출신의 대타자.
노무라 카츠야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에 취임한 것은 89년 가을이었다. 80년 시즌 2위를 마지막으로 9년 연속 B클래스, 그 중 4번은 리그 최하위에 그친 팀. 오랜 기간 저비행을 지속 중인 팀의 재건을 요청 받은 노무라는, 취임 기자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하였다.
“야쿠르트의 선수들은 천성의 소질 만으로 야구에 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들에게 이념을 전수하겠습니다. 프로란 한계에 도전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기술을 닦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머리를 씀으로써 처음으로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선수의 잠재능력을 끄집어 내는 것도 두뇌의 역할. 그런 부분을 지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승부의 철칙입니다. 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스프링캠프에서는 팀 미팅이 아닌, 연수회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매일 밤 연수회를 열어서 선수들로 하여금 철저히 야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겁니다. 야구는 약자가 강자를 넘어트려야 재미 있는 것이죠. 약자는 머리를 쓰지 않으면 강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팀을 만들어 가는 기본은 센터라인의 구축”이라 말한 신임 감독 하에, 새롭게 드래프트 2위로 선발되어 팀에 합류한 것이 후루타 아츠야* 였다. 포수에게 있어 안경이란 물건은 핸디캡이 된다. 이러한 야구계의 기존 인식을 깨 부순 점에서 후루타 또한 혁명의 기수로 불리울 만 하다.
후루타는 리츠메이칸 대학(立命大) 4학년인, 87년 가을 드래프트에서 모 구단으로부터 상위 지명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기자 회견 자리까지 마련해 두었으나, 결국 ‘안경’이라는 핸디캡이 문제가 되어 모 구단은 물론, 그 외 다른 구단에서 조차 연락이 오지 않았던 쓰라린 과거가 있다.
굴욕과 가슴 속 깊은 상처를 맛 본 후루타는, 데뷔 첫 해 세간의 저평가를 비웃듯 자신의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그 중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527을 기록한 도루 저지율(시도 회수 55회 – 저지 회수 29회). 89년 시즌에 팀 전체가 상대에게 허용한 도루 수는 112개였는데, 후루타가 주전 포수로 자리 잡은 90년 4월 이후로는 52개까지 격감하였다. 경이로운 루키 포수는 당해년도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는데, 이는 프로야구 역사에 있어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그 친구 어깨는 초일류. 다치면 큰일 난다구.”
노무라가 신인 포수의 어깨에 대한 손해보험 가입 검토를 구단에 요청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지만, 투수 리드 부분에 있어서 감독의 전폭적 신뢰를 받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요했다.
“포수는 투수 리드에서 성격이 나와. 후루타의 혈액형은 B형이지, 아마? B형의 성격은 뿌리부터 밝지만 뭐든 대충대충 해 버릇 한다고. 후루타의 리드에는 한발짝 더 가는 것이 필요해. 집요함이 부족한 거라고.”
이는, 발언자 자신도 B형의 혈액형을 가진 것에서 나온, 자학성 짙은 특유의 투덜거림(ボヤき)이었다.
언제나 후루타는 수비를 끝낸 뒤 덕아웃에 들어와서는 곧장 지휘관의 앞에 앉았고, 볼 배합에 대한 잔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때로는 직립부동 자세로 선 채 감독의 설교를 듣는 경우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야쿠르트의 명물이 되어 버린 즉석 반성의 시간. 앞서 언급한 ‘매직’을 연출한 것과 같은 문외불출(門外不出. 비장하다의 뜻. *주)한 두뇌를, 스승은 제자에게 아낌 없이 전수해 주었다.
취임 당시 노무라가 선언한 ‘머리 쓰는 야구’의 현장 책임자가 된 후루타. 팀의 과제였던 센터 라인 강화의 일익을 담당한 그의 활약 앞에, 드디어 팀은 92년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해 낸다. 93년 이후, 노무라가 팀을 떠난 98년까지 일본 시리즈 우승과 리그 4위를 교대로 오가는 상황을 반복하게 되는데, B클라스로 추락한 해는 어김 없이 후루타 또한 부진한 개인 성적을 기록한 해였다.
연동하는 운명.
05년 가을, 후루타는 과거 스승이 그랬듯이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한편, 스승이었던 노무라 또한, 제자의 도전에 응하듯, 토호쿠 라쿠텐 이글스의 재건을 위해 노구를 옮겼다(2006 ~ 09 시즌 감독 역임. *주). 지난 날 진구 구장의 덕아웃으로부터 파생된, 프로야구 역사에 새겨질 두 혁명가의 그림자는 앞으로도 반복되어 거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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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카츠야 : 이이다와 야나다의 기용으로 본 재생공장의 원점
• 세키네 쥰죠(関根潤三 / 1987 ~ 89, 야쿠르트 감독 역임) 킨테츠-요미우리를 거치며 투수로 65승, 타자로 1137개의 안타를 친 선수. 투수-야수 양쪽으로 올스타 투표 1위에 선정된 바 있음. 타이요-야쿠르트의 감독을 6년 역임하였으나 통산 4할4푼의 승률 기록. 야쿠르트 감독 시대에는 ‘무럭무럭(ノビノビ) 야구’라는 기치를 내세웠는데, 이는 고교 야구에 어울리는 지도 전략으로 당장의 성적 보다는 선수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의 야구를 추구하라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함.
• 이케야마 타카히로(池山隆寛 / 1984 ~ 2002, 선수 활약) 야쿠르트에서 19년간 유격수-3루수로 활약한 프랜차이즈 스타. 통산 5회의 유격수 베스트 나인을 기록하며 304개의 홈런을 쳐내었음. 1440개의 삼진으로 NPB 역대 14위에 위치.
• 히로사와 카즈미(広沢克己 / 1985 ~ 2003, 선수 활약) 야쿠르트-요미우리-한신에서 19년간 외야수 - 1루수로 활약한 선수. 2회의 타점왕 타이틀을 보유했으며 통산 4회의 베스트 나인을 수상. 1529개의 삼진으로 NPB 역대 11위에 위치.
• 쿠리야마 히데키(栗山英樹 / 1984 ~ 1990, 선수 활약) 항상 전력을 다하는 플레이로 인기가 높았던 선수. 지병으로 인해 일찍 은퇴 후 해설가를 거쳐, 2012년부터 홋카이도 니혼햄 파이터즈의 감독에 취임하였고 16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음.
• 토마시노 켄지(笘篠賢治 / 1989 ~ 1999, 선수 활약) 야쿠르트-히로시마에서 활약한 선수. 89년 센트럴 리그 신인왕 출신으로, 이 후로는 내/외야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써 활약.
• 이이다 테츠야(飯田哲也/ 1989 ~ 2006, 선수 활약) 센트럴 리그 외야수 골든 글러브 7회에 빛나는 명 수비수. 포수로 입단 – 내야수 변경 – 외야수 변경 등을 거치며 리그 굴지의 선수로 성장했음. 도루왕 1회 기록.
• 야나다 코이치(柳田浩一 / 1986 ~ 1995, 선수 활약) 야쿠르트-킨테츠에서 활약한 선수. 90년 센트럴 리그 외야수 골든 글러브 수상. 다만, 타격에 문제가 있어 90년 시즌 외에는 외야 대수비 요원으로 역할이 축소 되었음.
• 토마스 오말리(Thomas Patrick O'Malley / 1982 ~ 1996, 선수 활약) MLB 9년 – NPB 6년의 경력을 가진 선수. 한신에서 4년간 뛰며 타율 1위 1회를 비롯, 4년간 3할 - 20홈런을 쳤음. 하지만 장타력이 없다고 판단한 한신이 오말리를 해고했고, 곧장 야쿠르트는 그와 계약을 확정. 1995년 일본 시리즈를 제패에 기여함은 물론, 해당 시즌 MVP – 일본 시리즈 MVP까지 수상함.
• 코바야카와 타케히코(小早川毅彦 / 1984 ~ 1999, 선수 활약) 84년 히로시마에서 데뷔. 당해년도 리그 신인왕 선정. 90년대 중반 이후 저조한 성적 끝에 팀 퇴단. 야쿠르트에 입단 후 97년 개막전에서 당시 상대 팀 선발이자 리그 에이스였던 요미우리의 사이토 마사키로부터 3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 당초 우승 후보로 지목되지 않았던 야쿠르트의 연승 행진을 이끈 활약으로 꼽혔고, 실제로 팀이 97년도 일본 시리즈를 제패하며 노무라 재생공장의 대표격으로 자리 잡음. 99년 은퇴 후 현재 해설자.
두 혁명가
• 에나츠 유타카(江夏豊 / 1967 ~ 1984, 선수 활약) 한신 - 난카이 - 히로시마 - 니혼햄 등에서 활약한 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 난카이 시절부터 마무리로 돌아선 이래, 히로시마 – 니혼햄 등에서 대활약하며 ‘우승 청부사’로 불리웠음.
• 워렌 크로마티(Warren Livingston Cromartie / 1974 ~ 1991, 선수 활약) MLB 10년 – NPB 7년을 활약한 선수.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주전 외야수였으나 경쟁력이 떨어진 뒤 일본으로 건너와서는 슈퍼스타급 선수가 되었음. 89년 시즌 MVP.
• 후루타 아츠야(古田敦也 / 1990 ~ 2007, 선수 활약) 미스터 스왈로즈. 사회인야구를 거쳐 25살에 프로에 입문. 통산 .294의 타율에, 2097안타 - 217홈런 – 1009 타점을 올리는 대타자로 성장. 포수 수비 또한 대단하여 통산 9회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음. 캐칭 능력은 발군이며 도루 저지 기술 또한 매우 뛰어 났는데 1993 시즌에 기록한 .644라는 도루 저지율은 아마도 절대 깨지지 않을 대기록으로 남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