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하루가 끝나고, 우리들은 고개를 숙인채 스마트폰을 본다. 하루는 지루하기만 하다. 무언가 신나는 일도 없고
어쩌다 보니 지나간 시간은 그저 차갑다.
고개를 잠시 들고, 지하철 창가 너머 불빛들을 바라보면서
나약한 우리들은 드라마를 꿈꾼다.
그런데, 드라마를 꿈꾸는 건 생각보다 힘들다.
어려운 서민가족의 큰아들은 의사에, 작은아들은 변호사
거기에 기적같은 확률로 어쩌다보니 재벌집 며느리를 맞이한다. 거기에 알고보니 이 둘, 어린시절 극적으로 헤어진 남매였데.
꿈조차 꾸기에도 벅찬 설정을 앞에두고, 화면을 닫아버린다.
언제부터 소시민들은 그리도 능력이 좋고
하루에 일어나는 기적같은 일들은 왜그리도 많은지
동화속에 왕자님처럼 되는건 불가능하다.
이미 알고있는데, 너무나도 부푼꿈들을 힘내라고 안겨주니까, 도리어 버겁다.
어째서 내 마음을 달래주는 드라마는 이리도 없는가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이라도 남아있는데,
얇디얆은 지갑으로는 태울만한 무언가도 없다.
그러니 별 수 있나, 야구라도 보러가야지.
당신이 야구를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간에, 야구의 존재를 모를리가 없다. 어린시절 지나가면서 마주했던 꼬마들은 전봇대를 1루 삼아서 고무공을 던지고 슈퍼가게 아저씨는 지루하기 짝이없는 야구중계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혀를 찬다.
160을 넘기고, 교복이 조금 익숙해지려니까
두근거리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가 어쩌다 보니 조금 땡기고, 치킨을 맛있게 먹는법을 물어보니 좋아했던 대학교 그 선배는 야구장을 추천한다.
경기장는 넓고도 넓은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는지, 후끈한 열기가 땅을 울리고 큰 소리의 응원가가 하늘을 채운다.
..그러니까 저쪽이 1루고 이쪽이 3루고,
높이떴다가 저기로 가면 홈런이고, 이쪽으로 오면 파울이고
가위바위보 같은 투수들의 심리는 아리송하기만 하고, 처음 보는 규칙들은 왜그리 많은지. 해메는 그 모습은 어린애가 따로없다.
그러나 괜찬다.
매점에서 사먹는 음식들은 맛있고, 처음듣는 응원가는 듣기만 해도 신이난다.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표정은 보기만 해도 재미있고 치어리더들과 마스코트들의 응원은 흥이나고 마무리가 등판할때 쯤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린다.
그러니 드라마가 나온다고 하니 얼마나 기대가 되는가.
그런데 "스토브리그"라니, 조금은 생소한 제목을 듣자니 걱정부터 앞선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재미있을거라던 한국시리즈, 레전드 선수들 영화론가 몇번이가 나온거 같은데, 망하지 않았던가.
결승전도 없고 경기 중계도 없을 잠잠한 겨울시즌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든다니
익숙했던 드라마의 문법과 공식들이, 머리속에서 떠오르며 불길한 느낌이 스멸스멸 떠오른다.
설마하니, 또다른 공포의 외인구단이 나오는게 아닐까?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것은 야구 이야기가 아니니깐,
4연속 꼴찌인 드림즈는 그야말로 암흑기나 다름없다.
경기는 못하는데, 코치진들 사이는 나쁘고, 감독은 무기력하다.
윗선에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장은 관심이 있냐 싶은건지 모를정도의 낙하산이고 한때 열정적이었던 상사는 어느샌가, 탱자탱자 시간이나 보내자면서 나태한거 같다.
고인물들은 썩은 물들이 되어 가고, 얼마남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협력은 커녕 한심한 정치질이 기승을 부린다. 뿌리부터 썩어나가고 있는데 무력한 우리는 힘이 없고 어디서부터 건드려야할지도 모르겠다. 희망이 사라져버린 자리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열심히 한다고 해봐야 누군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일처리만 늘어나는게 뻔하니,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똑같이 고이고 고인다. 불꽃같은 초심은 어느샌가 식어버린채. 이것이 사회생활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여기,
모든것이 어색하기 그지 없는 남자가 있다. 사교성이 있는 것도 인사성이 좋은것도 아닌데, 무엇을 하는건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는다. 조직에 융화되려는 의지도 없는 사람이 생존하기에는 어려운 사회다.
첫인상도 나쁜데, 보이는 행보는 파괴에 가깝다.
그것이 모든것을 살리는 방법이라면서.
이해가 갈리가 없다.
그런데 이 남자, 거침없이 고인물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누구보다도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능력을 증명하면서
ㅡ그것도 가장 뿌리깊게 박힌 어려움들을
깊숙하게 박혀있던 적폐의 뿌리가 얼마나 단단했는지
뽑아내는 쾌감은 홈런포를 몇 개씩 터트리는 느낌이다.
어느샌가 야구팬들을 위한 이야기가 야구를 몰라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야기가 되기 시작한다.
우리 회사는 분명 야구단이 아닐텐데.
그러나 생각해보라,
불편한 상사의 퇴근후의 카톡질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하게 일거리를 넘기는 직장동료들
이래저래 시간을 허비하면서 단결을 도모한다지만,
실제론 의미없이 반복되는 회식의 나날들
어느샌가 상사의 싫은말에도 눈한번 쳐다보지 못한채
고개를 수그리고 안들리게 쌍욕을 하는 법만 배웠다.
아닌건 아닌건데, 그 한마디를 하는 것은 왜그리 어렵고 초조한지
내 한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여기서 짤리면 다음에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글러브에 공만 들어가게 던지면 될텐데
고이고 고인 입스는 해결될 줄도 모른채
글러브는 커녕 엉뚱한 곳에만 공을 투척해버린다.
몇번이고 홈런을 맞아보면 잘 할거 같은데
아무도 응원해주지도 않고 성과만 내라고 닦달하는 세상이니 그럴수가 있나.
탄탄하게 구축된 세계관과 설정들 사이로,
백승수가 보이는 모습은, 그렇기에 판타지..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가능할 리 없을텐데, 이런게 가능할리가 없을텐데
머리로는 냉철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마력에 빠진것처럼 나도 모르게 응원을 하게 된다.
야구를 모를지라도, 우리는 안다.
해왔던 것들을 하면서 안했던 것들을 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이길수 있을때까지 싸우는게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알고 있다.
능력이 된다고 할지라도, 가까운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까지 쓸쓸하고 외로운 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을테니까.
모든것들이 한심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쩌면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도 당신이 하는 노력을 알아주지도 못하고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도,
어렵게 내딫은 발걸음도,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
미친놈들이 발목을 잡지만 않았으면,
천 번이라도 할 수 있을텐데 생각보다 환경은 혹독하고 어렵다. 매번 발목을 잡고, 어렵게 한다.
말을 들으면 잘듣는다고 칭찬받는것도 아니다.
부당한 일들은 자꾸만 늘어난다.
원했던 모습은 이게 아닌거 같은데.
어느샌가 꼴찌라는 타이틀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라
당신의 가치는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던 것뿐이니까.
모든 것은 변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대결속에서, 미소 짓는것은 분명 정상일것이다. 아랫사람을 치고 누르는 데 익숙한 조직은 인재를 써먹지 못해 망할것이다. 약물로 도핑한 선수는 결국 걸리고 징계를 받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안보는 당신의 노력을,
누군가는 봐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 당신을 위해 힘을 보태주고
같이 싸워줄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저 불의에 맞서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사실, 당신이 나쁘게 생각했던 그 사람도
실제로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조그만한 우연과 계기가 이어진다면, 당신을 괴롭히던 모든것들이 든든한 우군으로 되돌아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열심히 하자.
팀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냥 우리는 우리 일을 하는 거다.
겨울을 뜨겁게 만들었던 드라마가 끝났다.
기나긴 여운과 아쉬움을 남긴채
16부작이란건 이렇게도 짧은 횟수였던 걸까.
1부를 3번 쪼개서 광고가 나올때마다 나왔던 탄식의 숨소리가 멈출 줄을 모른다.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차가운 겨울 바람 만큼이나
안고있는 고민은 깊고, 걱정은 무겁기 그지없다.
그러나 겨울은 지나기 마련이다.
초록빛 유니폼이 단풍에 물든것처럼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결승의 시기가 다가올때쯤이면
모든게 변해있을지 모른다.
'그때 그런걸 가지고 고민했었나? '
하고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봄이 온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우리가 해야될 경기는 많이도 남았다.
조금만 지나면 갑갑하게 느껴지던 마스크도 벗어버리고
둔하게 느껴지던 패딩도 벗어버리는 계절이 오겠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좋은 날이다.
꼴찌였던 과거를 버리고, 우리는 이제 막 결승전에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러니 힘을 내자.
너, 나, 모두
해 봐야 알겠지만 뭐...
열심히 할 거니까.
다들 그럴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