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건록"은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쓴 회고록입니다. 그는
청일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하고 그 후속 협상을 총괄했던 인물로,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긴 인물이나 그가 쓴 회고록은 "외교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일본 외교관들의 필독서라고도 하죠.
그는 회고록에서 그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또 각국과의 신경전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때문에 어려웠고, 자신의 입장은 무엇이었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각국을 상대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건건록"은 절뚝 거리면서 걷다는 뜻인데,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으로 인해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도 얻고 싶은 바를 충분히 얻지 못하였고 그 과정에서 열강들과 협상하는 과정이 지난했기 때문에 절뚝절뚝 걸었다는 뜻입니다.
건건록이 무척 재미있는 이유는 그 당시 열강들이 어떻게 서로 서신을 주고 받았고, 이를 통해 각국의 당국자들은 어떻게 문맥을 해석하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보통 외교적 언어는 아주 세심히 읽어봐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건건록은 그 사례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여기서는 청일전쟁 개전 과정에서 발생했던 신경전을 잠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청일전쟁을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의 (그리고 그 중간 조선) 일로만 기억하는데, 사실 여기에 러시아, 영국, 그리고 미국도 다소 관여했기 때문에 이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러시아의 개입
청일전쟁 전야 중국은 전쟁을 피하고 일본을 견제하고 러시아와 접촉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홍장은 당시 주베이징러시아 공사 가시니와 접촉하여 그에게 중재를 요청합니다. 이에 가니시 공사는 본국과 전보를 주고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러시아의 입장을 일본에게 전달합니다.
"러시아 정부는 일청 양국의 분쟁이 하루 속히 해결되어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될 수 있기를 원한다. 만약에 청국정부가 조선에 출병한 군대를 철수하면 일본정부도 같이 그 군대를 조선을 철수해야 할 것"
이에 일본은 다음과 같이 화답합니다.
"일청양국은 서로 대치하고 있고, 서로 시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이를 해결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일은 유럽에서도 빈번히 일어났던 바이다. 그리고 청국은 음흉한 수단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조선과 일본 양국을 기만하였다. 따라서 청국정부가 조선의 내정개혁을 완결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동의하든지, 아니면 일본과 협조할 마음이 없으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일본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조를 한 후에라야 군대를 철수할 수 있을 것."
아울러
"첫째.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평화를 확립하려는 희망 외에 다른 뜻은 없다. 둘째. 장차 청국정부의 어떠한 거동이 있더라도 일본정부는 전쟁을 도발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에 불행하게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은 방어적인 위치에 있을 것"
이와 같은 회신을 받은 러시아는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조선은 조선의 내란이 진정되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조선주재 각국 사신에게 알렸다. 또 일청 양국의 군대를 함께 철수시키는 것을 원하고, 이를 위해 각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일본이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권고한다. 만약 일본정부가 청국정부와 동시에 군대를 철수하기 거절한다면, 일본저부는 스스로 중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충고한다."
이렇게 보면 러시아는 일본에게 분명한 경고를 보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답장을 받은 일본으로서는 대단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러시아가 청국의 편을 들어 개입하게 된다면, 일본으로서는 전혀 승산이 없었을테니까요. 그래서 무쓰는 다음과 같이 러시아에 전보를 보내 러시아의 입장을 다시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의 사변을 일으킨 근본 원인이 아직 제거되고 있지 않다. 처음 우리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던 것은 현실적 상황에서 부득이했던 것으로 결코 영토침략의 뜻이 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조선의 내란이 완전히 평온해져 장차 어떠한 걱정도 없어지게 된다면 우리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함이 당연함을 러시아에 확실히 언급하는 바이다. 여기에 우리는 러시아정부의 우의어린 권고에 대해 뜨거운 사의를 표함과 동시에, 다행히 양국 정부간에 현존하고 있는 신의와 교의로써 확실한 우리의 뜻을 전하는 바이니, 러시아정부도 충분히 믿어주기를 희망한다."
무쓰 무네미쓰는 이렇게 회신한 후 회고록에서 솔직히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할 의도로 쓴 회신문이었고 외형적으로 모가 나지 않은 형식을 갖추었다고 말이죠.
이에 대해 러시아는 다음과 같이 회신합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침략의 뜻이 없고, 또 그 나라의 내란이 완전히 평정되어 내란이 재발될 위협이 없게 되면 바로 그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한다는 뜻을 인정하며 크게 만족한다. 다만 그렇다면 일청 양국은 속히 협의를 하여 평화적 국면을 하루 속히 이루게 되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러시아는 조선국이 이웃나라인 까닭에 조선국의 사변을 방관할 수 없는 것이며, 오늘날의 경우도 전적으로 일청 양국의 갈등을 예방하려는 희망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회신을 받은 무쓰는, 러시아가 처음과는 달리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러시아가 처음과는 달리 한보 물러난 것으로, 이와 같은 회신에 대해 만족을 표했습니다.
영국의 중재
한편 청나라는 영국에도 중재를 요청하면서 일본을 견제하길 원했습니다. 동아시아 무역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당사자는 역시 영국이었기 때문에, 영국을 최대한 연루시키는 게 청국 입장에서도 당연한 조치였겠죠. 그런데 여기서 청국은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러시아와 영국의 중재를 요청하면서 양국에게 서로 다른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일본을 이를 기민하게 포착했고, 무쓰는 이를 두고 식견이 있는 이홍장조차 이런 실수를 저지르냐라며 비웃습니다. 무쓰는 영국과 러시아가 라이벌 국가라는 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에 무쓰는 영국 또한 중재안을 가볍게 무시해버립니다. 그러자 영국은 다음과 같이 회신했습니다.
"일본이 청국에 대해 요청한 것은 일청 양국간의 담판을 기초로 했다는 것과는 모순되며 그리고 담판의 범주 밖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일본이 이미 단독으로 착수한 것이라 할지라도 청국에 간섭하는 일이 되니 협의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실로 천진조약의 정신을 도외시 하는 조치이므로, 만약 일본정부가 이런 정략을 고집하여 개전하게 된다면 그 결과에 대해 일본 정부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얼핏보면 꽤나 강경한 회신인 것처럼 보이나, 무쓰는 이를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엄격한 듯했지만 실은 러시아 정부의 공문과 별 차이가 없다." 즉, 영국은 개전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영국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놓게 됩니다.
"일청 양국 사이에 개전하게 되면 청국의 상해는 영국 이익의 중심지이므로 일본정부는 상해항 및 그 부근에서 전쟁이나 이에 버금가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야 한다"
영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아주 명쾌하게 표현한 것으로, 일본은 영국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합니다.
미국의 입장
일본은 당시 미국의 입장 또한 고려해야 했습니다. 미국 또한 조선과 수교한 국가로, 이해관계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선정부는 미국의 중재 또한 요청하였기에 미국은 대통령 명의로 다음과 같이 공문을 보내옵니다.
"조선의 변란이 이미 진정되었음에도 일본정부가 청국과 같이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는 것을 거부하고, 더욱이 그 나라의 내정에 대해 급격한 개혁을 하려고 함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미국 정부는 일본과 조선 양국에 대해 깊은 우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일본정부가 조선의 독립 및 주권을 중요시해줄 것을 희망하며, 만약 일본이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켜 미약하여 방어할 수 없는 이웃나라를 병화의 수라장으로 만들려는 것은 합중국의 대통령으로서 매우 통탄할 일이다."
이 공문 또한 얼핏보면 조선에 대단히 우호적인 문서처럼 보이지만, 무쓰는 이와 같은 공문을 접수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판단합니다.
"미국은 아무런 의사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 영국, 미국 그 어느나라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외교적 수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사실 맥락과 상황에 따라 같은 단어도 아주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고, 복잡한 상황일수록 더욱 그러한데,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해석하고 기민하게 판단하는 것이 외교관 입장에서는 무척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에 건건록이 일본외교관들의 필독서이겠죠.
PS. 지난 글에도 일본의 인물을 소개한 것에 반감을 품은 분들이 몇분 계시던데, 우리가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그들의 악덕함을 배우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병법과 전략을, 어떤 전술과 계략으로 "성과"를 내었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19세기 일본은 정말 특이점이 온것 마냥 뛰어난 (이는 도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물들이 대거 나타났기에 이 시기의 인물들을 깊이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