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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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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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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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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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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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완이 사망하자 이제는 비의가 촉한을 이끌어가게 되었다,라고 섣부르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촉서 후주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장완 사후 유선이 직접 나랏일을 관장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이상하게 여길 일이 전혀 아닙니다. 유선의 나이가 이때에 이르러 무려 마흔 살이었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갈량과 장완의 시대 동안 국정을 재상들에게 일임한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한 일이었지요. 비의가 장완의 벼슬이었던 대사마를 이어받지 못하고 여전히 대장군에 머물러 있었던 것도, 물론 장완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지만 비의의 권한이 장완에게 미치지 못하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편 창졸간에 자신을 이끌고 받쳐 주던 두 사람을 잃은 비의는 다른 인재를 발굴해야 했습니다. 우선 과거 여러 군의 태수직을 역임하였던 여예가 상서령이 되어 내정 업무를 관할했습니다. 그리고 진지라는 자가 있었는데 비의는 그의 능력을 높게 보아서 죽은 동윤의 뒤를 이어 황제를 곁에서 모시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진지는 분명 능력이 있었지만 성격이 동윤과 사뭇 달랐습니다. 항상 강직한 태도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던 동윤과 달리 진지는 만사에 있어 유선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고, 또한 황호를 비롯한 소인배들과도 두루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유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지를 무척이나 총애하게 됩니다.
이듬해인 247년. 강유가 위장군(衛將軍)으로 승진하면서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됩니다. 녹상서사는 대신에게 내정 전반을 관할하는 상서대를 지휘할 권한을 맡김으로써 실질적으로 상서령의 상관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입니다. 제갈량과 장완 역시 녹상서사였습니다. 그런데 비의가 이미 녹상서사였는데 굳이 강유에게도 같은 권한을 준 것도 기묘하거니와, 강유는 이전의 다른 녹상서사들과는 달리 내정 업무와는 별다른 관련이 없는 순수한 무장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유선이 비의를 견제하기 위해 이런 조치를 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좀 부정적입니다. 유선은 자신의 아들이자 태자인 유선(한자가 다릅니다)을 비의의 딸과 혼인시켰는데, 비의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또 강유는 녹상서사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북쪽 최전선에 주둔해 있으면서 위나라의 변방을 공격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러니 비의와 강유가 서로 대립했다고 보는 건 옳지 않을 겁니다. 같은 녹상서사라고는 하나 대장군인 비의가 명백하게 강유의 상관이기도 했고요. 참고로 이때 강유와 함께 활약한 사람이 바로 음평태수 요화입니다.
(참고자료)
https://brunch.co.kr/@gorgom/53
강유가 전방에서 활약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자, 248년 여름에 비의는 출병하여 한중에 주둔했습니다. 재상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간다는 건 곧 예전의 제갈량이나 장완처럼 북벌을 준비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북벌이 즉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의는 강유의 출병을 허락하면서도 그가 이끌 수 있는 군사의 수를 일만 명 이하로 제한하는 등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요. 강유가 납득하지 못하자 비의는 이렇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돌아가신 승상에게 미치지 못하오. 승상께서도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셨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하겠소? 지금은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며 사직을 지킬 때요. 큰일을 이루려면 마땅히 능력 있는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지, 요행을 바라며 단숨에 성패를 가르려 해서는 아니 되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후회해도 이미 뒤늦은 일 아니겠소?” [촉서 강유전 주석 한진춘추]]
하지만 비의가 기다리던 때가 찾아오기까지는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249년. 위나라에서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 일파를 모조리 제거하고 정권을 잡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의 편에 서 있었던 정서장군 하후현이 제거당하자 그와 친했던 우장군 하후패가 불안감을 느끼고 촉한으로 귀순해 왔습니다. 250년. 수년간 오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이궁의 변이 끝내 손패의 죽음과 손화의 유폐로 마무리됩니다. 비록 끔찍한 결말이었지만 어쨌거나 길었던 내분이 끝나고 오나라는 안정을 찾게 되었지요. 251년. 위나라의 절대 권력자인 사마의가 노환으로 사망합니다. 한편 촉한에서는 상서령 여예가 죽고 진지가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비의는 잠시 성도로 갔다가 반년 만에 다시 한중으로 복귀했습니다. 252년. 손권이 죽은 후 오나라의 정권을 잡게 된 제갈각이 동흥에서 위나라를 상대로 그야말로 대승을 거둡니다. 그리고 이 해에 유선은 비의에게 부(府)를 열도록 명합니다. 다시금 북벌을 재개할 때였습니다.
비의는 한중에 군사를 모으고 대대적으로 위나라를 공격할 채비를 갖춥니다. 오나라 역시도 제갈각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재차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 나라가 연합작전을 펼치려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53년 정월 초하루. 비의는 새해를 맞이하여 큰 연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마시고 만취해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암습을 받아 쓰러지고 맙니다. 범인의 이름은 곽순(혹은 곽수). 몇 해 전에 강유와의 전투 끝에 사로잡혀 온 자였습니다. 이후 촉한에 투항하여 좌장군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지만 내심으로는 여전히 위나라에 충성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본래는 유선을 암살할 작정이었는데 여의치 못하자 대신 비의를 목표를 삼았다고 전합니다.
이로써 촉한사영 중 마지막까지 남은 비의도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는 촉한이라는 나무의 마지막 남은 뿌리가 뽑혀나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강유는 지속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위나라를 공격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비록 아첨꾼이었지만 능력은 있었던 진지마저 죽고 나자 유선의 총애를 등에 업은 환관 황호가 제멋대로 활개 치며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촉한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멸망을 향해 굴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추락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64년. 촉한은 마침내 멸망했습니다. 제갈량 사후 30년, 장완과 동윤 사후 18년, 비의 사후 11년 만이었습니다.
촉한은 실질적으로 제갈량의 나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황제 유비는 즉위한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눈을 감으면서 나라를 제갈량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제갈량은 충심을 다해 유선을 보좌하며 국가를 이끌어갔습니다. 무척이나 뛰어난 능력에다 유례없는 의무감과 한없는 치밀함이 더해져, 제갈량은 삼국 중 가장 작은 나라였던 촉한의 재상이었으면서도 오히려 영원불멸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거목이었던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촉한사영으로 꼽히는 장완, 비의, 동윤은 모두 제갈량이 직접 발탁하다시피 하여 손수 키운 이들입니다. 장완과 비위가 큰 권한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도 제갈량이 직접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정당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촉한에서 제갈량의 권위는 그토록 드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후계자들이 단지 전임자의 권위에만 의존한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제갈량의 눈에 들 수 있었을 만큼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인품을 겸비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장완과 비의, 동윤 모두 한 나라를 충분히 이끌어 갈 만한 영걸들이었습니다. 비록 서로 성향은 달랐지만 하나같이 존경받을 만했지요. 그런 이들이 국가를 경영하였기에 촉한은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촉한사영 중 천수를 누린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갈량과 장완은 병으로 사망했고 비의는 암살당했으며 동윤 역시 일찍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촉한은 필연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허망하지만은 않습니다. 뛰어난 인재를 발견하여 뒷일을 맡긴 제갈량과,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온몸을 바쳐 노력한 세 사람의 이야기가 저로 하여금 항상 낭만이 진하게 깃든 울림을 느끼게 하는 까닭입니다. 특히 제갈량으로부터 장완과 비의를 거쳐 이후 강유에게까지 일관되게 이어진 북벌에 대한 강력한 의지는, 끝내 그 누구도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오히려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한 감정이 바로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원동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