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지도는 IMF가 분류한 '발전된 경제(Advanced Economies)' 즉 선진국들 목록입니다. 경제적으로 잘 살며, 민주주의와 인권이 잘 보장되는 국가라는 통념상의 선진국에 제일 부합하는 것 같아 이걸로 가져왔습니다. (걸프 만 도시국가들이 생활수준은 높아도 선진국이라 불리지 않는 이유죠.)
흔히 한국을 선진국이라고 합니다. 한 5년 전까지만 해도 넷상에서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말이 나오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지금은 한국이 (문제가 많긴 해도) 일단은 선진국이다는 덴 합의가 된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가 그동안 발전하기도 했고, 최근 선진국들이 정치적으로든 경제사회적으로든 추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선진국이라는 게 별 거 없구나'는 인식이 생겨난 면도 있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한국은 선진국이면 그 중에서 어떤 선진국이냐는 질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질문이 현재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밝은 미래를 만드는 데 필수적이라 봅니다. 요즘 정치인들의 수준 저하, 경제 활력 저하, 극악의 인구구조 문제, 사회적 갈등 등으로 한국의 미래를 우려하는 글들을 정말 많이 봅니다. 사실 타국이라고 미래가 아주 밝아 보이지도 않지만.. 암튼 그런 불안함에서 벗어나려면 현재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필요하죠.
맨 위의 선진국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선진국들이 역사나 지리적으로 볼 때 세 부류로 딱 나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북미, 오세아니아, 브리튼 제도에 속한, 영국과 한때 영국에 속했던 선진국들. 즉 영미형.
두번째로는 유라시아 대륙 본토에 속하는 유럽과 그 영향권에 있는 선진국들, 즉 대륙유럽형.
세번째로는 태평양 서쪽에 위치한 동아시아 선진국들, 즉 동아시아형.
(홀로 떨어진 이스라엘은 애매하긴 하지만 일단 영미형에 속한다고 보죠. 한때 영국 식민지이기도 했고 국가 특성이 영미형과 많이 유사하니)
신기한 건, 이 세 유형은 서로 다른 유형과 구분되는 고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시스템과 가치관을 가진다는 겁니다.
지리와 역사가 나라들, 국가군의 운명을 결정한 걸까요?
물론 각 유형 안에서도 국가에 따라 무시못할 차이가 있습니다. 스웨덴과 이탈리아의 사회는 정말 다른 게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국가들을 한데묶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분류했습니다.
* 주의: 여기 나온 영미형, 대륙유럽형, 동아시아형이라는 용어는 학술적으로 쓰이는 단어는 아니며, 제가 임의로 만든 단어들입니다. 설사 학계에서 실제로 쓰이는 단어라 해도, 거기서 쓰이는 단어와는 정의나 용례가 다를 수 있습니다.
1. 영미형 - 미국,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국, 혹은 영국의 식민지었던 나라들의 모임, 즉 영미형 선진국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굉장히 친시장적입니다. 고용과 해고의 자유도가 매우 높으며, 비즈니스의 용이함 관련 지표에선 최상위권을 독식합니다.
- 복지 및 정부지출 수준은 중간 수준입니다.
- 세 유형 중 혁신이 제일 활발하게 벌어지며, 경제성장률이 높은 편입니다.
- 출산율이 비교적 높고, 이민 유입도 많아 그나마 괜찮은 인구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이민자를 제일 많이 받아들이는 유형이며, 넘어서 '이민국가'라는 정체성이 강합니다.
- 노동시간, 노조권과 같은 노동자들의 권리는 애매한 수준입니다. 대륙유럽형보다는 확실히 못합니다만, 동아시아형보다는 그래도 낫습니다.
- 상점의 영업시간, 주택의 냉난방 여부, 택배 가능여부, IT 인프라, 소비문화 등을 감안할 때 삶의 편의성은 중간 정도입니다. 동아시아형보다는 못하지만 대륙유럽형보다는 낫습니다.
2. 대륙유럽형 -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북유럽 복지국가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영국/아일랜드를 뺀 대륙유럽 선진국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사민주의적인 면모가 비교적 많이 보이는 편이라, 영미형보다는 덜 친시장적입니다.
- 복지 및 정부지출 수준이 꽤 높은 편입니다.
- 혁신이 상대적으로 덜 활발하며, 경제성장률이 낮은 정체된 경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 나라마다 편차가 크지만, 전반적으로 출산율이나 이민 유입률이 영미형보다 못해서 인구구조는 영미형보다는 나쁩니다. 물론 동아시아형보단 낫습니다만.
- 이민자는 세 유형 중 중간 수준으로 받아들였지만, 아직 이민국가라는 정체성은 갖춰지지 않은 듯 합니다.
- 노동시간, 노조권 등 노동자들 입장에서 제일 살기 좋은 국가군들입니다.
- 삶의 편의성은 사실 좀 떨어집니다. 밤이 되면 상점들은 죄다 문을 닫고, IT인프라나 택배 문화 등은 부실하고, 에어컨도 없는데다 옛날에 지어진 집이 많고...
(경제적인 면만 보면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노동유연성이 높고 상속세가 없는 등 영미형과 비슷한 면모를 많이 보이지만... 밑의 면모들 때문에 그냥 대륙유럽형과 묶었습니다)
3. 동아시아형 - 한국, 일본, 대만 등
유일한 비서구 선진국들의 모임인 동아시아형 선진국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세 유형 중 제일 최근에 발전한 국가군들로, 신흥적인 면모가 강합니다. 일본이 무슨 신흥국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일본이 셋 중 제일 근대화가 빠르긴 했지만 그래도 식민제국으로서는 후발주자이긴 합니다.
- 관료가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발전국가' 정책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사민주의, 반시장적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 차이가 있어 부적합합니다. 그냥 별도의 유형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혁신이나 경제성장은... 국가별 차이가 커서 애매하긴 한데 영미형보다는 나쁘지만 대륙유럽형보다는 비슷하거나 나은 정도인 듯 합니다.
- 출산율은 제일 낮은데다 이민 유입도 덜해 세 유형 중 최악의 인구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 대규모 이민 유입은 고사하고, 인구구성의 동질성이 높아 민족국가라는 정체성이 강해 이민자를 유입하기 힘든 성향입니다.
- 노동시간은 매우 길며, 권위적이며 집단주의적인 노동문화가 많이 남아있으며, 노조하기 힘들어서 노동자들 입장에선 살기 힘든 유형입니다.
- 밤문화, IT인프라, 택배 문화, 전자 정부, 최신식 첨단 주택 등 삶의 편의성은 높은 편입니다.
- 부와 안정, 국가의 번영을 중시하는 물질주의 성향이 강합니다.
- 서구 사람들이 보기에 사회적으로 덜 진보했고, 전통적인 관념과 가치관이 많이 남은 편입니다.
이렇게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비약은 좀 있지만 대충 이 정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흔히 한국의 진보좌파들은 한국이 진보적이며, 노동자로 살기 좋고, 복지가 보장되는 대륙유럽같은 국가를 꿈꿔왔습니다. 한때 홍세화나 목수정이 톨레랑스의 나라라고 자기가 살았던 프랑스를 치켜세웠던 적이 있고, 지금은 좀 수그러들었지만 북유럽 복지국가 열풍도 한때 불었죠. 반대로 미국(더 나아가 영미권)은 보수정당때문에 불평등 심하고 나라꼴 개판놨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문화는 천박한 소비주의적 문화일 뿐이라고 깔보는 면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그런 소리가 많이 수그러든 것 같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대륙유럽의 사회문제들도 나름 심각하며 정체된 면이 많으며, 한국 특성상 대륙유럽과 같은 시스템이 도입되기 어렵다는 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아시아형 선진국인 한국은 대륙유럽형보다는 영미형의 시스템을 도입한 선진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에도 살짝 적었지만 영미형이 제일 잘 나가는 걸로 보이며(그 중에서도 미국이 돋보이지만), 삶의 편의성이나 노동자 권리, 경제성장률, 복지 및 재정지출 수준 등을 봤을 때 한국이 대륙유럽보다는 영미형에 더 상성이 맞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미국 벤치마킹을 해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관성과도 잘 맞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