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6/04/02 10:59:57
Name 마스터충달
Subject [일반] 조제, 백수 그리고 이별
"영화 맨 마지막에 조제가 의자에 앉아 요리하다가 바닥에 '철푸덕'하고 떨어지잖아. 사실 앞에도 똑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어. 당연하다는 기분이었지. 조제는 장애인이잖아? 장애인이니깐 그런 이상한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나 봐. 그런데 마지막에 다시 '철푸덕'하는 순간 저어어엉말 깜짝 놀랐다.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잊고 있었던 거야. 조제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나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장면에서 살짝 뜨끔했다. 나도 처음에는 인간 조제가 아니라 장애인 조제만 보고 있었던 거지. 영화가 끝날 때가 돼서야 장애라는 편견 없이 조제라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었달까?"

나는 영화를 좋아했고, 그녀는 언제나 내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줬다. 오늘도 나는 그녀 앞에서 영화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만이 있어. 연출적인 면은 아니고, 조제라는 캐릭터한테 불만이 있어. 솔직히 나는 츠네오가 진심 개자식이라고 생각해. 나는 후반에 집안의 반대 같은 전개가 나올 줄 알았는데, 웬걸? 부모님께 보여드리지도 않더라고. 츠네오는 조제가 부끄러웠던 거야.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 차라리 바람을 피우는 게 덜 잔인한 일이야. 뭐 나중에 진짜 바람나서 떠나기도 했지. 그런데 조제는 그런 츠네오를 미워하지 않아. 이게 너무 화가 나는 거 있지. 조제가 여자라서 이렇게 그려냈을까? 버림받는 일을 너무 묵묵히 수긍하잖아. 장애와 상관없이 당당했던 조제가 그 순간 고리타분한 옛날 여자가 된 것 같았어. 그나마 마지막에 여전히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 다행이었지. 그래도 나는 조제가 츠네오에게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줬으면 좋겠다 싶어."

오늘따라 나는 유난히 말이 많았다. 좋아하는 영화라서 그런 걸까? 아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가 말이 없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유리구슬처럼 맑고 반짝인다. 언제나 그랬듯이. 다만 여느 때와 달리 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재미없는 걸까? 그녀는 내 이야기를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카페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문득 불안이 차갑게 뒷목을 쓸어내렸다.

"얘기가 별로 재미없나 봐?"
"아니야. 재밌어. 자기가 영화 얘기 해주면 얼마나 좋은데."
"그런데 별로 집중하는 것 같진 않은데?"
"...우리 저쪽에 가서 앉을까?"

그녀는 카페의 야외 테라스를 가리켰다. 봄이라지만, 해가 지면 날이 차다. 테라스는 텅 비어있었다... 나는 자리를 옮기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좀 쌀쌀하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
"자기야. 자기한테 할 말이 있어. 정말 중요한 얘기야."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시선이 떨어지는 곳에 무릎이 있다. 청바지가 닳아서 툭 튀어나온 무릎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 우리 그만 만났으면 해."

이런 건 눈치채지 않아도 좋으련만. 불안한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다.

"혹시 다른 사람 생긴 거야?"
"아니야. 절대 그럴 일은 없어."
"그럼 이유가 뭐야?"
"예전처럼 자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안 생겨. 좋아하지도 않는데 거짓으로 사랑하는 건 자기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왜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졌는데?"
"솔직히 그동안 자기가 뭔가 이루는 걸 못 본 것 같아. 취업도, 공부도, 다이어트도 뭐 하나 이룬 게 없어서."
"내가 비전이 없다는 말이구나."
"응... 미래가 없는 사람은 좋아할 수 없어."

이럴 땐 정말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눈물이 흐를 줄 알았는데, 전혀 슬프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가 울고 있었다.

"꼭 지금 헤어지자고 말해야 했어?"
"거짓으로 사랑하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래."

그녀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아줄 수도,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다. 이제는 남이니깐. 다만 너무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내 모습이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차인 건 난데 왜 네가 울고 그래."
"미안해서 그렇지. 미안해서..."

그녀는 계속 울먹거리고 있었다. 찬 사람이 우는 걸 보니 츠네오가 생각났다. 츠네오도 미안해서 그렇게 울었을까? 그러고 보니 조제와 나는 차인 이유가 닮은 것 같다. 츠네오도 조제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지 못했다. 부모님께 보여드리지 못하는 여자친구. 비전이 없는 남자친구.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다. 츠네오는 그렇게 흉봤으면서, 조제가 화내지 않는다고 답답해했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녀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나에게 화를 낼 자격이 있을까? 내가 도리를 안다면 그녀와 헤어져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붙잡으려는 집착도 자격이 필요했다. 조제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마치 내가 '백수'라는 불구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긴 불구자가 맞을지도... 이에 씁쓸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내가 장애에 편견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 찰 거면 찻값 정도는 네가 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야 하나?"
"웃으라고 한 소리야. 그러니깐 그만 울어."

나는 애써 짜내듯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녀도 눈물을 훔치며 억지로 웃어 주었다.

"그만 일어나자. 가만히 앉아있으니깐 춥다."

카페를 나서자 이제는 마주 잡을 수 없는 손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아무 말도,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를 버스에 태운 뒤 떠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허전한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넣고 집으로 향했다. 골목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마지막 가는 길에 살갑지 않았던 나의 태도가 후회됐다. 그래도 남은 것은 고마움 뿐인데... 그녀는 이미 충분히 고마운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모지리라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마음에는 미움도, 집착도 없었다. 남은 것은 정말로 고마움 뿐이었다. 조제도 나도 화를 내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후회가 턱 밑가지 밀려와 집으로 가는 언덕길이 힘겨웠다. 한숨을 내뱉느라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 하지만 끊을 수 없을 것 같다.





Written by 충달 http://headbomb.tistory.com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음란파괴왕
16/04/02 11:09
수정 아이콘
좋네요.
미메시스
16/04/02 11:29
수정 아이콘
좋네요. (2)
커피보다홍차
16/04/02 13:28
수정 아이콘
좋네요. (3)
할러퀸
16/04/02 13:38
수정 아이콘
실화인가요...설마 아니겠죠..진짜라면 마음이 너무 아픈데요.
마스터충달
16/04/02 15:03
수정 아이콘
실화입니다.
마사미
16/04/02 14:12
수정 아이콘
좋네요.(4)
16/04/02 17:19
수정 아이콘
똑같은건 아니라도 예전에 비슷한 이별을 해서 그런지 맘이 아리네요. 충달님도 그분도 더 아프지 말고 앞으로 좋은일 생겼으면 하고 두손 모아 기원해봅니다.
마스터충달
16/04/02 18:12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바야바
16/04/02 18:23
수정 아이콘
좋네요. (5)
카멜로
16/04/02 20:02
수정 아이콘
영화도, 제 이별도 생생해지네요. 좋아요
빵pro점쟁이
16/04/02 20:09
수정 아이콘
힘내세요
candymove
16/04/02 21:01
수정 아이콘
사람마다 서로 가지고 있는 힘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직시하는 순간이 오는 것 같습니다. 평상시에는 잠재적으로만 느낄 뿐이죠.

영화의 엔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수긍을 하는 것은 힘의 현격한 차이를 인정한 것이죠. 그리고 그 영화를 여러번 보다보면 힘의 차이가 영화 내내
숨김없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처음볼 땐 외견상의 순수함, 달달함에 살짝 가려져 있었던 것일 뿐이죠.

특히 사귐과 이별이라는 확실한 지표가 있는 남녀간의 연애에 있어서 이런 부분들이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글쓴 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이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제가 가지고 있던 장애는 남녀관계에서의 힘의 열세에 대한 상징 같은 거죠. 영화를 보면서
너무나 슬프지만 츠네오의 선택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더 슬프더라구요.
무릎부상자
16/04/03 17:49
수정 아이콘
제가 너무 냉소적인걸까요

전 저렇게 이별통보를 하며 눈물흘리는 행동은

'난 끝까지 나쁜여자는 되지 않을거야 나도 마음이아프다구 , 그러니까 날 너무 미워하지말아줘'

같이 느껴지며 자신을 보호하고 합리화하려는 행동으로 정말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물론 궁예질이며 저만의 생각이고 위의 여자분을 비난하려고 쓰는 댓글은 아닙니다

그저 여자의 눈물에 질려서 몇자 써놓고 갑니다..
마스터충달
16/04/03 18:19
수정 아이콘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죠. 그래서 츠네오는 개자식이라고 생각했었고요. 근데 츠네오가 아니라 조제 입장이 되어보니깐, 그 눈물이 이해되기도 하고 눈물과 미움은 별 상관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4426 [일반] 그녀를 떠나보내며 [4] 노엘갤러거3111 16/04/02 3111 1
64425 [일반] [WWE/펌] 3/28 RAW 레슬링옵저버/WINC 팟캐스트 번역 [10] 피아니시모5576 16/04/02 5576 0
64424 [일반] batman v superman 을 두번째 봤습니다(스포유) [30] 로랑보두앵5275 16/04/02 5275 0
64423 [일반] [NBA] 드디어 골든스테이트의 홈연승 기록이 깨졌습니다 [19] PG137368 16/04/02 7368 0
64422 [일반] [프로듀스] 항상웃기만했던 두 연습생의 눈물 [52] naruto05110011 16/04/02 10011 1
64421 [일반] '프로듀스 101' 종영의 아쉬움을 달래줄 '식스틴' 추천 [22] evene7677 16/04/02 7677 2
64420 [일반] 드디어 CF에서도 완성형을 이룩한 삼성 갤럭시 S7 [21] Alan_Baxter8745 16/04/02 8745 1
64418 [일반] [프로듀스101] 각종 지표 1~3위 최종 정리 [9] Leeka5200 16/04/02 5200 0
64417 [일반] [나눔] 잡다한 DVD 나눔하려고 합니다.(마감됐습니다) [12] Mighty Friend3380 16/04/02 3380 1
64416 [일반] 조제, 백수 그리고 이별 [14] 마스터충달4757 16/04/02 4757 21
64415 [일반] 푸에르토 리코 이야기: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행복할까? 2 [7] santacroce4400 16/04/02 4400 19
64414 [일반] 푸에르토 리코 이야기: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행복할까? 1 [4] santacroce7339 16/04/02 7339 11
64413 [일반] [나눔] 잡다한 책 나눔하려고 합니다. (1차 마감) [28] Mighty Friend3447 16/04/02 3447 7
64411 [일반] [프로듀스101] 야권분열은 패배의 지름길. 텃밭을 지키는 자가 승리한다. [29] _zzz6707 16/04/02 6707 0
64410 [일반] 인생이 덕질에 방해된다(2) [2] 좋아요4132 16/04/02 4132 1
64409 [일반] [프로듀스101] 아이오아이 데뷔멤버확정 [172] naruto05112209 16/04/02 12209 0
64408 [일반] [영화감상 강 스포] 아노말리사 - 인생이 키치가 되어가는 과정 [4] 마나통이밴댕이2739 16/04/01 2739 1
64407 [일반] 관위에서 춤추는 사나이의 이야기 [6] 삭제됨3768 16/04/01 3768 1
64405 [일반] 인터넷뱅킹 OTP로 말아 먹은 하루 [18] 지니팅커벨여행9054 16/04/01 9054 0
64404 [일반] WWE 레슬매니아 32, 최종 대진표와 프로모 공개 [24] 삭제됨6766 16/04/01 6766 0
64403 [일반] [프로듀스101] 현장 입구 후기 [21] 하니5962 16/04/01 5962 0
64402 [일반] 1 [149] 삭제됨11799 16/04/01 11799 5
64401 [일반] [프로듀스101]은 진보세력의 비수 [22] 사악군6877 16/04/01 6877 2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