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1년의 복역을 마친 알비주 캄포스는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채 푸에르토 리코로 돌아옵니다.
귀국 당일 푸에르토 리코 대학 캠퍼스에는 푸에르토 리코의 금지된 깃발이 다시 게양되며 알비주 캄포스를 환영했습니다.
알비주 캄포스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미국이 푸에르토 리코의 법적 지위를 자치령(commonwealth)으로 전환하려는 계획(일종의 영구 식민지화?)에 맞선 투쟁을 준비합니다.
한편 당시 푸에르토 리코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PPD의 무노즈 마린은 독립파를 제압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을 마련합니다. 바로 1948년 Gag Law라고 불리는 보안법의 제정입니다.
이 법으로 인해 독립 관련 어떤 토론도 불법화되었고, 기존 푸에르토 리코의 깃발과 애국가의 전시 및 사용도 완전히 불법화되었으며, 사소한 수준이라도 반정부 활동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길 시 최장 10년 또는 미화 1만 달러의 벌금형(징역과 벌금 모두 구형 가능)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이 법은 미국 헌법 수정 1조인 표현의 자유 조항에 명백히 상충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법이라고 할 수 있는 Smith Act의 전례를 따라 단 2표의 반대(그중 한 표는 미국편입을 지지하는 의원이 던진 것으로 미국 시민의 기본 권리에 상충된다는 것이 반대 사유였습니다.) 로 통과되었습니다.
무노즈 마린은 이에 앞선 1949년 최초의 민선 자치장관(Governor)에 선출되었는데, 미 트루만 정부와 협의하여 푸에르토 리코의 법적지위를 보다 명확히하는 P.L. 600 법을 제정하여 1950년 10월 30일 발효됩니다.
이 법에 따르면 총투표를 통해 푸에르토 리것코의 법적 지위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자치권의 확대를 통한 자치령(commonwealth)의 전환이 목표였으며 미국은 이 법을 국제사회에 푸에르토 리코가 식민지가 아님을 주장할 근거로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민족당은 발효 시점에 맞춰 푸에르토 리코 곳곳에서 3일간 전면적인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수도 산후안에 있던 자치장관 무노즈 마린의 저택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주요 거점 도시 방어를 위해 무노즈 마린은 주방위군을 소집하여 폭격기와 전투기까지 동원해서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비록 해외 영토지만 미군이 자국 영토에 공습을 가한 몇 안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 주 방위군의 시가지 진주 모습
* 주 방위군에 의해 철거되는 푸에르토 리코 깃발
세계를 놀라게한 미 대통령에 대한 암살 공격과 두번째 수감
독립파의 3일간 봉기는 푸에르토 리코 내로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 11월 1일 오스카 콜라조와 그리셀리오 토레솔라, 두명의 푸에르토 리코 청년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비밀 임무를 가지고 워싱턴 DC의 블레어 하우스(Blair House)로 향했습니다.
블레어 하우스는 원래 영빈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최근에도 누가 머물렀죠.)인데 당시에는 백악관이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중에 있다 보니 트루먼 대통령이 머물던 장소였습니다.
이들은 트루먼 대통령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며 푸에르토 리코가 처한 식민지 상태를 세계적 이슈로 만듦으로써 UN에서 미국에 망신을 주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대통령 암살 시도는 경호원에 막혀 총격전으로 막을 내립니다. 결국 토레솔라가 총격으로 사망하고 콜라조는 부상을 입고 붙잡혔습니다.
* 워싱턴 DC의 블레어 하우스 사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라는 초대형 사건이 벌어지자 푸에르토 리코 당국은 알비주 캄포스를 다시 체포하였고 이어 푸에르토 리코 전역에 걸쳐 수천 명의 독립파를 구속(상당수는 봉기 및 암살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수감된 알비주 캄포스는 무려 80년 형을 언도받았습니다.
한편 트루먼 저격 사건의 범인인 콜라조는 이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트루먼 대통령은 종신형으로 감형을 명하였습니다. 아마도 트루먼은 작은 섬의 문제가 이렇게나 곪아 터질 때까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에 대한 자책과 식민지 독립이라는 이들의 대의명분에 많은 부담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본격적으로 냉전이 시작되고 사회주의 블럭과 신생 독립국들이 미국의 식민지배를 지적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푸에르토 리코의 법적 지위에 대해 더욱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트루면의 지지로 1952년 3월에 실시된 투표에서 82%가 새로운 형태의 자치령(Commonwealth)을 공식적으로 추인합니다.
하지만 민족당은 이 투표를 보이콧하는데 그 이유는 자치정부가 미국 법과 의회의 제한을 여전히 받고 있으며 각종 제도적 기구의 통제도 지속되는 점을 볼 때, 기만적 투표라고 판단했습니다.
실제 P.L. 600법과 총 투표는 미국이 더 이상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1953년 UN 회의에서 인정받는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사면과 미하원 공격 그리고 재수감
1950년 말 알비주 캄포스가 두 번째로 수감된 지 2년이 넘게 지나자 자치장관 무노즈 마린은 1953년 알비주 캄포스를 사면하여 풀어 줍니다.
그러나 1년 후인 1954년 3월 1일 4명의 민족당 소속 젊은이들은 미국 워싱턴 DC의 캐피톨 힐(의사당 건물)에 잠입하여 푸에르토 리코 깃발을 흔들고 국가를 부르면서 회기 중에 있던 미 하원의원들에게 권총을 난사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5명의 현역 하원의원들이 부상을 입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 하원 공격을 이끌었던 르브론(여성 민족당원)의 체포 후 모습
사건 직후 푸에르토 리코 경찰은 알비주 캄포스 집에 총을 쏘며 침입해 반 혼수상태에 빠진 알비주 캄포스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런데 1차 석방 이후 CIA, FBI 등의 요주의 인물로 전화 도청 등 감시를 받아 오던 알비주 캄포스가 하원 공격을 지시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26년의 수감생활 그리고 의문의 빛
알비주 캄포스는 이미 63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앞선 16년의 수감생활로 건강이 매우 상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기약 없는 수감생활이 지속되며 캄포스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감생활에는 예전에 없던 이상한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상한 불빛을 주기적으로 바라봐야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점에 알비주 캄포스의 판단력은 점점 흐려져 갔습니다.
나중에 알비주 캄포스와 다른 일부 민족당원들이 이상한 빛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결국 인근 쿠바의 방사선 의사가 이들을 검진하러 푸에르토 리코 감옥을 방문합니다.(본래 사회주의적 경향이 크지 않았던 민족당 및 독립파가 점차 미국의 전투적 흑인 해방세력 및 쿠바 카스트로와 연대를 하기 시작합니다.)
쿠바 의사이다 보니 정치적 편견에서 온 발언일 수 있으나 이 의사는 알비주 캄포스가 방사선에 노출되어 온 것 같다고 증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나중에 비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일단의 죄수와 환자들을 대상으로 방사선 실험이 자행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물론 그 대상 중에 알비주 캄포스가 포함되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993년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면 1950~60년대 연방원자력에너지 프로그램에 의해 인체에 방사선을 투사하는 실험이 자행되었으며 주요 대상은 자원자들도 있었으나 병원 환자, 전과자, 죄수 등도 포함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랜 수감생활로 알비주 캄포스의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젊은 시절 한 때나마 알비주 캄포스를 추앙하였으나 결국 독립만은 절대 안 된다는 신념(하지만 미국 병합도 반대하는 모호한 전략을 취함) 속에 가혹한 탄압을 선두에서 지휘했던 무노즈 마린 자치장관은 1964년 11월 알비주 캄포스를 2번째로 사면합니다.
알비주 캄포스가 거의 26년을 감옥에서 보낸 시점이며 무노즈 마린이 16년째 자치장관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알비주 캄포스는 사면 5개월 만인 1965년 4월 21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푸에르토 리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더 이상의 무장봉기가 사라지고 푸에르토 리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공동체로 자리 잡던 시절이었습니다.
경제적 풍요와 함께 냉전의 엄혹함은 극단파를 솎아내는 기제를 작동시킵니다. 결국 알비주 캄포스의 뒤를 이은 독립파의 위세는 더 초라해졌습니다.
외면적 안정은 사실 더 은밀한 형태의 폭력을 은폐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독립파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푸에르토 리코를 지구 상 마지막 식민지라고 부르며 UN 등 국제사회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식민지에서 벗어난 제3세계 국가와 미국의 전투적 흑인 해방 세력과 연대를 넓히려고 애썼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목소리가 갖는 대중성은 미미할 정도지만 독립파들이 던지는 푸에르토 리코의 내재적 식민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전히 고민해 볼 주제(물론 원론적이고 점점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해갔지만)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공동체가 갖는 비극의 한 면을 푸에르토 리코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알비주 캄포스를 이어 독립파의 아이콘이 된 마리 브라스(Juan Mari Bras)는 1993년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미국 시민권을 철회하고 임시 신분증을 발급받는 데 성공합니다.
2010년 82세의 삶을 마감할 때 마리 브라스는 미국 시민이 아닌 푸에르토 리코인으로 죽을 수 있게 된 것에 작은 만족을 느꼈다고 합니다.
근데 < 주요 거점 도시 방어를 위해 무노즈 마린은 주방위군을 소집하여 폭격기와 전투기까지 동원해서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 부분이 정말 궁금한데,
저 주 방위군은 어느 주의 방위군인가요? 푸에르토 리코가 주가 아닌데 다른 주 방위군을 푸에리토 리코 Governor가 소집할 수 있는 것 같지도 않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