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으로 유명한
체코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94세를 일기로 프랑스에서 별세했다고 합니다.
--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였기에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쿤데라와 그의 소설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바를 글줄이나마 적어보자 합니다.
밀란 쿤데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때는 빡빡머리 일병 시절, 스마트폰 반입이 안 되던 때라 개인정비 시간에 할 일이 없는 까닭에
무엇을 할 까 생각하다가. 입대한 김에 그동안 건설적인 일을 해보자 마음먹고 진중문고 탐독을 결정하게 된 때였습니다
그런데 뭘 읽을까 하니 또 막막해서, 그래 노벨 문학상이 대단한 상이니 그 상 받았다는 작품부터 읽어보자 하고
한 영국 소설가의 노벨상 수상작을 펼쳤습니다만. 소설이 끝날 때까지 단 하나의 감흥도 얻을 수 없었고, 노벨 문학상 수상작 치고는
너무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끌리는 책이나 읽어보자 하고 집어 든 것이 바로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었는데, 쿤데라는 몰랐어도 저 심오하고 멋있어 보이는 책의 제목은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꽤나 흥미를 느낄 준비가 된 자세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저 책이, 지금까지도 제가 읽은 책들 중 저에게 가장 강한 충격을 주었던 책이 되었습니다
제게 충격을 준 것은 존재의 무거움이나 가벼움, 니체의 영원회귀 같은 저로서는 도통 알쏭달쏭한 말이 아니라.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치' 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쿤데라는 키치라는 개념을 일반적으로 미학에서 쓰이는 키치와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싸구려라는 뜻이나 요즘 노랫말에도 들어가 다소 쿨한 것, 힙한 것을 가리키는 키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소설 내에서 사용된 설명이라면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라는 역시나 어려워 보이는 말이지만
소설을 읽고 제가 느낀 것은 키치란 "하찮은 것, 생각하기 싫은 것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가 어떤면에서는 미학적 정의와도 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에서 복잡한 것, 생각하기 싫은 것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작품을 만든다면 그 작품은 싸구려가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이 소설을 통틀어, 조금 더 과장해서 쿤데라의 일생을 통틀어 맞서 싸우고자 하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쿤데라의 키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소설 내 상황적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의 침입에 따른 체코의 공산주의 확장이라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서방으로 망명한 미술가 '사비나'는
작품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미술작품 전시회에 온 사람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아 그렇다면 이 작품은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작품이군요?"
라는 다소 그녀의 배경에 의존한, 불성실한 평을 남기자 자신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종류의 획일화, 즉 키치와 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생각할 공간을 용납하지 않는 공산주의적 전체주의, 그 존재에 대한 의심 없는 동의와 싸우다가 망명한 사비나지만
결국 키치는 어떠한 면에서 인간의 본성이기에 본인이 망명해 온 곳에서도 키치를 마주하게 됩니다.
키치가 인간의 본성인 까닭은, 키치는 상당히 편리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좀 광범위한 의미의 키치적 상황으로는 소설 내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도 나옵니다.
사비나가 기자의 차를 타고 이동 중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을 발견한 기자가 저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이상점이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식입니다. 저 아이들이 집에 가서 가정불화를 겪는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는지 알 수도 없으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당연히 사람이 그러한 배경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매번 위와 같은 점을 생각하며 대화할 수도 없기 때문에
키치는 인간의 삶과 떼놓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쿤데라 본인도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데라가 소설에서 계속 키치와 싸우려 하는 것을 보면 또 쿤데라 본인의 배경을 봤을 때,
사비나와 같이 체코의 공산화로 사상적 탄압을 받고 프랑스로 망명한 소설가인 그에게 키치란 '참을 수 없는 것'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등을 읽은 군 시절 이후 한동안 키치는 근현대사회의 병증이며
이 현대사회의 병증을 핀셋으로 집어낸 밀란 쿤데라는 저 중국의 루쉰과 같이 문학으로 의학을 하는 천재이며
키치가 거의 모든 세상 문제의 원인이라고 믿었습니다.
복잡한 것을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생각하기 싫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어렵게 풀어내야 하는 어려운 문제들을 쉽게, 단순하게 풀려 하고
그것이 정치적 문제이건, 성별 문제이건,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이건 사회갈등 심화는 서로에 대한 키치적 이해- 그런 싸구려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믿었죠. (지금 와서 보면 다소 키치에 대한 제 제멋대로의 정의가 뒤로 갈수록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겨울마다는 쿤데라가 노벨상을 받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쿤데라가 84년에 발견한 이 키치라는 질병이 분명히 지금까지도 세계를 병들게 하고 있고, 오히려 파편화된 소통매체들은 서로에 대한
불성실한 이해를 가속시키고 있는데, 이 병증을 발견한 근대문학의 천재에게 노벨상을 안 주는게 말이 되냐! 라고 화도 났었죠.
하지만 쿤데라가 별세한 오늘 이후로는 이제 그런 화를 내는 것도 의미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에서 멀리 떨어진 저 한국 구석탱이에 있는 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소설가보다 위대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배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12-11 07:5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