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을 회상하자면, 일년에 몇 없는 아주 짜증나는 날이었다. 동원 마지막해지만 여전히 지긋지긋한 예비군 불참 잔여시간 훈련을 받으러 가서, 다 아는 내용 10번도 넘는 내용은 무거운 군복을 입고 듣는둥 마는둥 하나, 몇만원 되지도 않는 돈을 받고 몇시간을 허비하고 와야 하는, 성평등이라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소홀히 하게 되는, 그런 날.
평소에는 예비군을 다녀 오는 날이면 조금이라도 낯선 시내 구경을 하러 이런 저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인데, 그날은 너무 몸과 마음이 지쳐 6천원 돈이나 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집에 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땀내나는 아저씨들끼리 타서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관광버스에 타고 집 근처에 내려, 평수에 비해 집값이 싼 대신 높디 높은 언덕에 위치한 내집을 향해 마음속으로 불평을 잔뜩 쏟아내며 언덕 아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블럭 거리 정도 옆에서 뭔가 재잘 재잘대는 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한명이, 꽤 무거워보이는 손수레? 끌고 계신 할머니 한분과 뭐라뭐라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시선이 끌리는 광경에 잠시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채 1분도 되지 않아 어느새 같은 교복을 입은 또래 남자 아이 셋이 붙어 4대1의 구도가 되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지만 세상이 워낙 뒤숭숭하니 혹시나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기우에, 어차피 집에 가도 드러누워 잠이나 때릴게 확실하니 버스를 기다리는 척하고, 그들을 슬쩍 엿보기로 했다.
남학생 넷은 중학교 고학년 정도의 나이대로 보였는데, 하나같이 화려한 꾸밈새를 하고 있었다. 처음 할머니와 대화하던 학생은 대칭 뱅헤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고 교복을 상당히 슬림핏으로 맞춰 입은 날쌩한 아이였는데, 그게 넷중에는 제일 평범하고 모범적인? 축에 드는 헤어스타일이었다. 나머지 아이중에는 아예 염색이 아닌 탈색을 한듯한 허여멀건한 머리를 한 친구도 있고, 셋 모두 무슨 고등래퍼에서나 볼 수 있는 교복을 바탕으로 한 개성적인 패션을 자랑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잘나가고 잘노는 요즘 학생들 같았다.
내가 서 있던 정류장과 그들 사이에 조금 거리가 있어, 대화 내용을 아주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보기에도 아이들이 말하는것이 유쾌하고 텐션이 높고, 할머니도 웃고 계시는게 분위기가 나쁘진 않아보였다. 에이, 별 일 아닌가보다. 그냥 친구 할머니라도 만나서 그런가보다 싶어 슬슬 눈을 떼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까 생각하는 그 순간, 넷이 갑자기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시작했다.
먼저 제일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자애 두명이 손카트를 말 그대로 무식하게 번쩍 하고 허리 위로 집어 들더니 좁은 언덕 골목위로 미친듯이 뛰기 시작하더니, 남은 아이 중 한명이 그들과 같은 길로 천천히 할머니를 모시고 따라 올라가고, 처음부터 할머니와 대화하던, 그나마 가장 내 눈에는 모범생처럼(?) 보이던 아이만 혼자서 버스정류장쪽으로 걸어왔다.
대충 사태파악이 끝나고, 짧은 시간동안 내 이성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내가 지금 억지로 오지랖부리지 않아도 저 친구들이 저런 훌륭한 행동에 대한 보답을 충분히 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인가?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래보였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거 같았다. 그렇다고 생각하려니 내가 하려는 행동이 너무 과잉 오지랖같았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비겁한 어른이 되는것 같아서 쉽사리 생각을 정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이성에 고민에 고민하는 사이 이미 충동제어가 전혀 되지 않는 본능이 이미 몸을 맘대로 행동해버린다.
"저기~ 혹시 너희 어느학교 학생이니?"
혼자 정류장에 온 아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이 위에 사는 아저씨다. 나는 이렇게 박살난것처럼(?) 생겼지만 아직 20대고, 니네가 어떤 할머니를 도와드리는걸 보고 말을 걸었다고 했다. 다행히 그 친구는 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줬고, 그 친구에게 전해들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넷은 같은 학은 같은 반 친구고, 학원도 같이 다니는데, 그날도 학교가 끝나고 학원에 가러 넷이 함꼐 학원 버스를 기다리러 이 곳에 모이기로 했단다. 넷중에 가장 성실한 자신이 먼저 왔더니 자기집 근처에 사시는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집에 가는 광경을 보았는데, 도와드릴까 하고 있었더니 마침 애들이 다 도착해서, 알아서 역할 분담을 한 결과 둘은 짐을 들어다 드리고 한명은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자기는 학원에 먼저 가서 애들이 늦으면 말을 해주기로 정했단다.
보통 사람이라면 듣고 나서 감동과 기특함의 기분을 먼저 느꼈겠지만, 참을 수 없는 몹쓸 호기심이라는 기벽을 가지고 있는 나는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보통은 집을 아는 니가 할머니를 모시고 갈텐데 어떻게 집도 모르는 애들이 행동파가 되고 니가 학원에 가게 된거야?'
그랬더니 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는데, 세상에 가위바위보에서 졌단다. 아이들의 천진함과 유쾌함, 인싸스러움에 나는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호기심이 풀리고 나니 아까 왔어야 할 감동과 기특함이 다시 밀려와서 잠깐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마침 다른 애들이 할머니를 다 모여다 드렸는지 언덕에서 내려왔고, 나는 그 아이들과도 이러이러 저러저러한 얘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내게 자기들이 한 일이 별거 아니라는 말을 했다. 그들의 정말로 길거리에서 휴지 하나를 주운듯한 무감각한 태도를 봤을때, 그 마음은 진심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이들의 행동이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에게 학교와 학급, 이름을 말해주면 이러이러한 일을 했으니 학교에 전화를 해주겠다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여태까지의 무감각한 태도에서 180도가 달라져서는, 엄청나게 진지한 태도로 자기들이 한 일은 정말로 별게 아니니,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말해왔다. 그 태도를 보고 나서 나는 내가 생전 처음보는 아이들을 붙잡고, 잔뜩 경직되고 올드한 사고방식으로 그들에게 '불편한 제안'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들에게 여전히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들에게 정말 뭔가 해줘야 되는것은 한심하게 나이만 먹었지 같은 시민 나부랭이인 내가 아니라, 이런 아이들로 인해 조금 더 살만한 곳이 된 사회, 국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 그날, 나는 사회와 국가가 그 대가를 아이들에게 지불하게 만들 방법과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인당 최소 만원은 주고 싶지만, 구질구질하게 ATM 가서 찾아오고 이런것도 할 짓이 아닌거 같아서 오늘 예비군 교통비 + 훈련비 + 지갑에 있던 정체불명의 돈 만원 - 셔틀버스비 6,000원을 을 합해서 28,000원 정도를 줄테니까, 치킨이라도 사먹어라,' 하고 말이다. 내 돈이 아니고 나랏돈으로.
아이들은 물론 그 돈도 그냥 받으려 하지 않았고, 개중 한 아이가 말했다. 형 군인이라 돈도 많이 못 받잖아요.
뭔소리야, 나 군인 아니야, 민간인이야... 근데 생각해보니까 지금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각은 전혀 잡히지 않았지만) 아, 중학생이라 예비군을 모르는구나. 근데 니들도 언젠가는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여튼 아이들은 내가 군인이 아님을 알게되자 두번째 제안은 그렇게 오래, 완강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사회적인 보상에는 겸손하고 신중하지만, 개인적인 보상은 크게 거절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고 챙길걸 챙길줄 아는, 이것이 진정한 인싸의 감성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한 아이가 그럼 넷이서 같이 학원 끝나고 맛있는걸 사먹겠다고 하고, 대표로 두 손으로 정중하게 돈을 받아간다.
그렇게 돈 몇푼을 주고 '안녕히가세요 형' 이라는 인사를 받으며 작은 의인들을 보내고 집에 오는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는데, 아마도 지갑이 좀 가벼워져서, 돈을 빌미로 중학생들에게 형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랬던것 같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7-20 15:42)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