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는 연말휴가때 집에도 못 돌아가고 하릴없이 집근처를 산책하다보니 눈에 띈 전시용 분재였습니다.
손바닥에 들어올까 말까한 피라칸타였는데 손톱 크기도 안되는 감처럼 생긴 열매가 한겨울에 다닥다닥 열린 모양을 보고 이쁜데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막상 살때는 "그냥 물만 제때 주면 됩니당" 소리만 듣고 일할때 옆에 두면서 계속 실내에만 두고 있었는데 일이주 지나고 나니까 이파리가 윤기를 잃어가더니 픽픽 떨어져 가더라고요. 옆에서 바람만 불어도 떨어져 나가면서 열매만 남은 기이한 형상아 되길래 이게 정상인가 싶어서 제작하는 회사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습니다.
알고 보니 기본적으로는 통풍이 되고 햇빛이 닿는 바깥에 두는 걸 기본으로 하고, 분재는 환경이 빡셀수록 예쁘게 난다고 해서 죽기전에 제대로 키워보자 하고 손질을 시작했습니다.
화분째로 물에 담궈서 흙이랑 뿌리 안쪽까지 물을 머금게 하는 식으로, 겨울에는 삼일에 한 번씩. 대개의 분재는 내한성이 있고 그렇게 키워야 하므로 한겨울에도 베란다 밖에 내놓아 키우기 시작하니 슬슬 새순이 돋는게 보이더군요. 혼자살면서 식물이고 동물이고 옆에 뭔가를 두고 키워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바이오로이드나 말딸은 열심히 키웁니다), 물만 주고 햇빛만 쬐여줘도 뭔가 눈에 보이는 변화가 내 근처에서 일어난다는 실감이 좋아서 좀 더 분재를 키워보기로 했습니다.

<출처: 세키복카(石木花) 홈페이지>
처음 피라칸타 분재를 봤을 때도 신기하게 여겼는데, 평소에 막연히 생각하던 소나무 분재만이 분재가 아니고 관엽식물이나 현화식물도 크기를 축소하여 나무처럼 보이는, 소위 분재같은 모양이 나오면 다 분재로 취급한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자연의 경치를 표현하기 위해 아름답게 가꾸어질 것, 그리고 그런 분재를 위한 자리(席)를 갖출 것이라고 하네요.
식물에 대해서는 철쭉이랑 아카시아도 구분 못하는 문외한인 탓에, 고르는 기준은 딱 두가지로 했습니다. 꽃이 필 것(변화를 즐길 수 있을 것), 기르는데 세심한 손길이 필요없을 것.
1월 경이었는데, 봄이 다가오기도 하고 그 시즌에 맞춰서 꽃이 맺힐 것 같은 식물을 두 개 골랐습니다.


<출처: 세키복카(石木花) 홈페이지>
하나(사진 위)는 야쿠시마 아세비라고 해서, 찾아보니 영문명으론 Japanese Andromeda, 한국어로는 마취목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나머지 하나(사진 아래)는 아사히야마 사쿠라라는 이름으로, 벚꽃의 일종이라네요.
둘 다 비수기때는 휑하기도 하고 무뚝뚝한 모습에서 꽃이 핀다는 부분이 맘에 들기도 하고, 세일이라서 구매했습니다.
무사히 택배로 도착한 이후에는 제때제때 영양제 섞은 물도 주고, 매번 옆에서 보고 싶은거 꾹 참고 찬바람 맞혀가고, 가끔씩 가지도 쳐 주면서 꽃이 피길 기다렸습니다.
<출처: 상동>
가지 치기도 일종의 방법론이 있는 모양이라, 기본적으로는 정방향으로 나는 가지를 남길 것/빗장처럼 나는 가지는 칠 것과 같은 가이드라인이 있었습니다. 사람 보고싶은 모양대로 틀에 맞춰가며 꺾고 깎는게 좋은 일이냐, 하는 건 처음 분재를 살 때부터 들었던 의문중에 하나긴 합니다만 결국 키우는 것 자체도 이기심의 발로인 터라 제가 보고싶은 모양대로 살짝살짝 새순이나 잔가지를 치면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제 분재 이뻐요를 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 터라, 사진 몇 장을 올려보겠습니다.



먼저 마취목입니다. 배경탓도 있습니다만 꽃봉오리가 생각보다 붉은기가 돌아서 신비한 분위기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습을 보다보니 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아사히사쿠라입니다. 일본 전국의 개화 시기보다 살짝 늦긴 했지만 무사히 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벚꽃이 내 방에서 피는구나, 하는 소소하지만 남다른 감회가 느껴졌습니다.


에바 완결을 기념해서, 시원섭섭한 마음을 담아 EOE 배경으로도 남겨봤습니다.
LCL에서 사람도 살아돌아온다는 세상인데 벚꽃도 돌아오지 않을까 싶네요.

<출처: Lego 홍보자료>
여담이지만 레고 분재도 판다고 합니다. 8천엔쯤 한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예뻐서 혹하네요.
총론삼아 정리하면 사람들이 왜 식물 키우기를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는 점하고 독신생활에서 점점 빠져나오기 힘들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해서 갑자기 분재파는 셀렉트샵이 늘었다고 느꼈는데, 실제로도 요새 분재가 잘 나간다네요. 혼자 살고 재택근무가 길어지면 다들 생각하는건 비슷한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