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우리 역사를 반만년 혹은 4천년의 역사 어쩌고 저쩌고 식으로 얘기를 하곤 하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대단히 짧습니다. 1945년 미국에 의해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되어 1948년에 정부를 수립하고, 가까스로 근대세계에 입문하여 어렵게 나라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신생국가입니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엘리트층, 기득권층, 전통이나 제도 등은 존재하지 않고 거의 모든 게 1945년 이후 새로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미국이 깊게 연루되어 있었고,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일부 학자들이 얘기하는 "일제 강점기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론"이 아니라 "미국에 의한 근대화"를 얘기하는 게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3년에 달하는 미군정을 거쳐 탄생한 신생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교육기관도, 행정부도, 군대도 없었습니다. 일본은 일부 조선인들을 부자로 만들어주었지만, 대다수 조선인들은 근대국가 운영에 필요한 행위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1950년대말까지 한국 정부의 국장급 인사 중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29.9%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959년 한국의 공공행정책임 고문(Advisor)로 임명된 스튜어드 매크로클(Stuart MacCrokle)의 경우 미국은 한국을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성과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이 국가의 행정부가 형편없기 때문이며" 또한 이 국가의 지도자가 "복잡하고 현대적인 대규모 공공행정을 관리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지원을 끊지 않았고 신생국가를 공고한 반석 위에 올려 놓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사실 미국은 이미 1949년부터 아래와 같은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극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맞서는 최전선에 있었으며 동시에 미국이 추진하는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거대한 실험장이었습니다. 

이승만이 토지를 유상몰수하여 농지개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도 미국의 원조 덕분이었으며 (당시 한국 행정부에 유상몰수를 할만한 재정적 여력이 없었음) 또 한국전쟁 이후에 특히 미국은 15년간 한국을 최우선적으로 지원했습니다. 1960년 한 해 미국이 한국에 지원한 액수는 3억 8천만 달러로 이는 미국이 전세계에 지원했던 해외원조의 7.6%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한미재단(American Korean Foundation) 및 미국 기독교 단체 등 민간단체를 통한 지원도 막대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한반도를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선전하는 것치고 그들이 물려준 "근대유산"은 건물과 철도 등 물질적인 부분을 (심지어 그마저도 한국전쟁으로 파괴되고..) 제외하면 그닥 크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해방 후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관료계층이 부족하였고, 근대적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간부도 부족하였으며,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고 지도할 수 있는 식자층도 부족하였고, 또 기업과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인재들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관료를 육성하기 위해 리더십 프로그램(Leadership Program)이라는 유학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이를 통해 장래가 유망한 공무원을 미국에 초청하여 미국의 발달한 정치기구와 기업체를 직접 보여주고 경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곧 공무원뿐만 아니라 국회의원과 각 지방의 정치인 그리고 기업가에게도 확대되었고 이 프로그램의 수혜자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된 김영삼과 김대중도 있었습니다. 

민간에서는 포드재단이 한국의 관료들의 유학을 지원했는데, 대표적인 수혜자가 한국은행 부총재, 부흥부 장관(현 국토교통부), 재무부 장관(현 기획재정부)을 역임한 송인상이라고 합니다. 그는 포드재단의 지원으로 미국에 유학을 했고, 훗날 부흥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인맥을 활용, 미국 원조당국과 교섭하여 서울대-미국 미네소타대학 교환교수 연수를 시작하였고, 또 미국의 원조로 고려대와 연세대에 경영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8년 산업경제위원회를 발족시켜 표면상 한국인 관료는 6명이지만, 미국인 고문은 10명으로, 사실상 미국이 한국의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하는 별도의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미국은 한국의 국가운영 능력을 불신했던 모양입니다. 

한편 미국은 언론인을 육성하기 위해 1955년 언론인 미국 연수 프로그램을 출범시켰는데, 언론인들이 미국에서 직접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또 민주적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친미적인 성향을 확산시키고 이들을 이용해 당시 미국과 정책이 엇나가고 있던 이승만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반정부 신문으로 유명했던 경향신문 기자는 선발에 반드시 포함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공보원을 통해 한국 출판계에도 막대한 지원을 하여 이들이 출판 및 운영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대표적 수혜자가 장준하가 편집장으로 있던 "사상계"였는데, 미국 정부의 후원으로 사상계는 미국 잡지 Time과 Life의 한국어 번역판 독점권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독재정권을 지원하면서도 동시에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언론인/문인/시민사회를 암묵적으로 지원하는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행동을 계속했다는 사실입니다. 관료계층을 두텁게 만들고, 또 시민사회도 육성하려고 했던 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는 당초의 목적은 안보에 있었고, 이는 공산주의를 상대로 맞서는 강력한 군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가장 관심을 갖고 최우선적으로 지원한 조직은 군대였습니다. 1960년대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군사원조는 매년 3억 달러를 상회하는 것이었고 이는 당시 한국 전체 국방비의 87%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미국은 군대에 자금만 지원한 것이 아니라, 교육과 훈련 그리고 지휘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담당하고 전문적인 장교단을 육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쓸만한 인재들은 근대적 교육을 이수한 구 일본군 출신이었기에 이들을 대거 기용하였으나, 일본군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미국적 가치와 미국적 방식을 체득한 새로운 장교계급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미국은 성적이 우수한 장교들을 미국에 유학시켰고 또 미국이 계획한 커리큘럼으로 교육하는 새로운 사관학교,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받는 교육은 군사적 분야뿐만 아니라 역사와 국제정치 그리고 각종 실용학문 등도 포함되어 있어 오히려 당대 민간의 명문대학에서 시행되는 교육보다 우수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육사출신 장교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한국의 그 어느 집단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또 실력있는 엘리트라고 자부할 수 있었고, 구식 교육밖에 받지 못한 선배장교들보다 스스로 뛰어난 인재라고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제공하는 각종 교육을 제공받으면서도, 미국적 가치에 딱히 감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이한림 육군 제1군사령관은 미국을 경험한 후 서구세계의 선진적 모습에 감탄하고 미국체제를 경외심으로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참고로 그는 5.16 쿠데타를 반대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미국에 유학하면서 오히려 민족주의적 성향이 더 강해졌다고 합니다. 만주국에서 복무했던 박정희는 후자의 케이스로, 그는 미국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새로 성장한 군인들은 자기들만의 새로운 계급(Caste)를 형성하여 박정희를 필두로 하여 자기들만이 국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국가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 세력에 영감을 얻어 쿠데타를 도모했고 성공했습니다. 사실 일본의 메이지 유신도 번주(다이묘)와 같은 고위직이 아닌 중간계급 엘리트(하급무사)가 획책하고 일으킨 하극상 쿠데타였으며 일찍히 서양문물에 눈을 뜬 하급무사들은 자기들만 나라를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죠.  

요컨대 미국은 군인계급(Caste)과 관료계급(Caste)와 시민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고, 안보의 필요성에 따라 군인과 관료들을 지원하면서도 동시에 이념에 따라 시민사회에 대한 지원도 병행했습니다. 그리고 종종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을 완화하기도 했으며 (김대중 암살 방지 사건 및 김대중 미국 망명 지원 등) 다른 한편 시민사회를 외면하고 정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5.18 광주학살 묵인). 

물론 외부지원과 문물에 대한 한국사회의 주체적 수용과 발전, 그리고 독재자든 시민운동가든 모두 객체가 되기보다 주체적으로 행동하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고 보는 게 맞겠죠. 그러나 그 전 과정에서 미국의 그림자가 정말 대단히 크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건국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미국의 역할과 영향력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 기성 보수 정치인이나 진보 정치인이나 자기가 스스로 경험했던 그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으로 인해 주눅들어있거나 혹은 과도한 피해의식에 휩싸여있거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 세계10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은 이제 미국과 보다 (상대적으로) 대등하고 또 협력적인 관계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미국 뒤를 무작정 따라서가 아닌 미국과 함께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