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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7/30 11:07:25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번역] 일본 NSC차장 - 역사의 교훈 - 조선이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 NSC 차장이 2020년 5월에 저술한 역사의 교훈 중 조선 관련 파트를 번역해서 소개해드립니다. 원래 교황의 역사 시리즈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이 책이 나름 꿀잼(?)이어서 이것부터 하게 되네요. 그들의 역사관을 정말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이죠. 일단 조선반도는 무엇인가 파트를 소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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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있어 조선반도는 무엇인가?

메이지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일본은 조선반도 정세에 못박혀 있었다. 19세기 후반 조선반도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제정 러시아가 극동 시베리아로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반도의 사람들과 우리들은 사실 서민감정이 비슷한 점이 많다. 인간관계의 거리감은 동경사람보다도 관서사람에 가깝지만, 관서사람보다 훨씬 농밀한 인간관계를 좋아한다. 참견하기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며 함께 마시기 시작하면 가족처럼 된다.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일쌍방이 의식하지 않는 것은, 한일 양국 지배층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수나라의 중국통일 이후 중국왕조에 강하게 자석처럼 붙어버린 상황이 계속되었다. 특히 고려왕조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래 무사계급이 성장하지 못하고, 계속 왕조정치가 계속되었다. 조선반도의 지배층은 말하자면 "귀족문화"로서, 일본으로 말하자면 마치 교토의 공가(公家, 역자주: 무사와는 다른 조정의 귀족을 말함)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조선반도의 지배층은 문관의 문반, 무관의 무반으로 구성되어 이 둘을 합하여 "양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실상 문반이 주류가 되어 유학자가 그대로 귀족화된 것이다. 권력의 소재지에 극히 민감하여 변론이나 권모술수를 일삼아 투쟁하면서 공격적인 말들을 격하게 내뱉어 일본인을 놀라게하지만, 일본과 같은 강력한 무사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의 왕조가 강력한 군대를 갖지 못한 것은 종주국인 중국이 싫어한 탓도 있다. 이들은 독립적인 외교 또한 허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때로는 사무라이를 동경하기도 한다. 실제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의 애독서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역자주: 한국어 번역본은 대망)"이었다. 

조선반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진공지대 혹은 완충지대였다. 중국과 일본만 플레이어였을 당시에는 그럭저럭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의 북방으로부터 중국보다도 강한 새로운 국가가 나타나 상황은 급변하게 되었다. 힘의 공백지대였던 조선반도가 일본을 향해 돌출, 일본침략을 위한 다리가 될 수 있어 일본은 이를 비상한 위험으로 생각했다. 북방의 대륙세략이 남쪽으로 눈을 돌려 중국으로 향하면 몰라도, 일본에 화살을 겨누게 된다면 큐슈가 위험해진다. 일본인은 그것을 원나라 시대 때 이미 경험한 바 있다(역자주: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을 의미). 

후금을 건국하여 후일 대청제국을 건설한 것은 누르하치의 만주족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다행이도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으로 인해 피폐해지고 또 이자성의 난으로 자멸하게 된 명나라로 남하하여 일본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조선반도에 두번 출병하여 조선반도를 신하국으로 두었다. 만약 홍타이지가 큐슈를 공격하기를 원했다면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호조 도키무네처럼 외래세력에 맞서 필사적인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조선 또한 원나라 시대 당시 고려와 마찬가지로 일본침략을 위한 선발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다시 메이지 시대로 돌이켜보자. 조선반도의 북방에는 제정러시아가 나타났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의 진출은 원나라의 그것과도 상당히 비슷해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당시 사람들은 "평양 이북은 러시아에게, 서울 이남은 일본에게"라든가 "조선반도를 중립지대로 삼자"라든가 하는 지정학적 의견 등을 주고받았다. 어쨌든간에 "이대로는 안된다"라는 국가적 위기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제정러시아는 메이지국가가 처음 구체적으로 인식한 대외적 위협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였을 시절 벌어진 청일전쟁,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원로로 있었을 적에 벌어진 러일전쟁은 일본의 근대국가 건설기 때 벌어진 일로, 일본군은 전략적 체계가 없었고 제도적으로도 미비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는 국가의 규모도 군대의 규모도 작아 도쿠가와 막부를 무력으로 타도한 메이지 국가의 창업자 (원로) 들이 건재하여 수십만단위의 군대를 통제하고 전쟁을 지휘하는 데 성공했었다. 

이제 막 태어난 메이지 정부는 열강의 해양 진출을 두려워하여 오다이바에 대포를 설치하고, 해양방어를 강화하는 등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사가의 난, 세이난전쟁 등 내란진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국내가 불안한 와중 사방을 둘러보면 아시아는 제국주의 구미열강에 의한 지구분할의 최종단계에 들어간 장소였었다. 당시 백인 기독교 국가였던 유럽과 북남 아메리카 국가 이외의 국가들은 국제정치의 주체가 아니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본,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는 국제정치의 무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식민지분할경쟁의 경합지에 지나지 않았다.  <-- 역자주: 이 책뿐만 아니라 일본의 다른 역사서에서도 줄곧 드러나는 표현(leitmotiv)인데 백인 기독교 구주국가.... 백인이라는 인종적 특성이나 기독교라는 종교를 계속 강조하는 게 개인적으로는 많이 거슬리는데, 그만큼 서양을 [타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겠죠. 

신생 메이지 정부가 우려했던 것은 러시아의 남하였다.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북으로부터는 러시아가, 남으로부터는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아시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동쪽을 취했고 영국은 인도를 취하고 말레이시아의 동쪽과 서쪽을 취했다. 인도차이나 중앙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은 오직 태국 뿐이었다. 

아시아는 결국 19세기말까지 오스만제국, 태국, 그리고 일본만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프랑스, 독일, 영국은 점점 중국을 잠식하고 러시아 또한 만주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쑨원이 반식민지라고 부른 상황으로 전락한 것이다. 러시아는 해양의 패권을 장악한 영국과 달리 육군수송이 용이한 철도망을 유라시아대륙 내부에 길게 건설하여 극동(중국), 인도 방면으로 향하게 하여 영국의 권익과 충돌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또한 부동항을 원하여 남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메이지 정부가 무엇보다도 두려워한 것은 조선반도의 전략적 진공상태였다. 조선은 오랫동안 청나라의 속국, 자치령과 같아 내정은 스스로 결정하였지만 제대로 된 군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벗겨진 몸과 같은 조선반도는 그것 자체가 러시아의 초대를 부르는 위험이 있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상황으로 전쟁은 자유로웠고, 전쟁으로 영토 심지어 경우에 따라 주권마저 빼앗을 수 있었다. 식민지가 된다면 주권국가로서 인정받지 않게됨에 따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며 글로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게 되었다. 이것이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당시의 국제사회의 모습이었다. 

조선반도를 획득하게 된다면, 부산, 대마도까지 러시아군이 진출할 수 있게 될 터. 러시아는 또한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동중국해에 이르는 요충지인 대마도를 획득하고자 했다. 대륙세력에 맞서 전략적 깊이를(Strategic Depth)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 당시 일본정부의 전략적 과제였던 것이다.   <-- Strategic Depth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원하는 거이 무엇인지... 

이토 히로부미의 전쟁지도,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적 수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반도를 이익선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현재의 언어로 말하자면 전략적깊이 확보를 위한 완충지대이다. 이를 위한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우호적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보장 상 중요한 것이다. 이를 위한 [안정화되고, 번영하고, 우호적인 조선반도]라는 목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조선반도전략이며 국가로서의 전략목표이기도 하다.  <-- 저자는 이를 다시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그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NSC 차장을 역임한 고위관료였습니다. 

그러나 늙었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종주국이자 아시아 최강의 국가라고 자부하던 청나라는 속국인 조선반도에 대해서 일본의 관심이나 조선왕조 내부의 친일개혁파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왕조와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반도에 3개의 군항을 조차받았다.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에 끈질기게 매달렸고 스스로 또한 제국주의국가가 되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리고 청일양국은 동학당의 난을 계기로 충돌하게 되어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청전쟁이 발발하기 전 1886년 세계 최초로 육해군을 통합한 군령기관인 참모본부를 설치했다. 육해군의 통수권을 일원화하여 통합운용하는 것은 세계에서 최초로 일본이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원통수권은 육해군의 저항으로 곧 형해화되어 붕괴되었다. 군령(작전지휘)의 세계에서는 육군참모본부와 해군군령부가 육해군을 각자 별도로 통제하는 구조로 확립되었다. 그 이후 육해군의 통합운용은 전쟁 때마다 설치되었던 임시통합지휘소인 "대본영"이 담당하게 되었다. <-- 역자주: 그러니까 정부가 통수권을 상실한 게 비극의 시작이라는 의미, 틀린 말은 아니지만. 

청일전쟁은 대일본제국 최초의 전쟁일 뿐만 아니라 대본영이 설치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전후 일본으로서는 잊어버렸지만, 대본영은 본래 가설조직이며, 전쟁이 시작되면 군사작전을 위해 설치되는 마치 전국시대 무장들이 설치한 장막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원로로서 외교와 군사를 총괄하여 국가전체를 지휘함에 따라 청일전쟁 승리할 수 있었다. 육군참모본부, 해군군령부로 인한 육해군의 지휘명령계통의 분리에 불구하고 카와카미 소오로쿠 정청총독부참모장이 사실상 육해군을 모두 통솔했다. 서로 총을 겨눈 상태에서 서로 움직일 수 없는 "멕시칸 스탠드오프" 상황과도 같았던 제국주의 시대에 무쓰 무네미쓰가 열강의 속내를 냉정히 읽고 분석한 것도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일본에 의한 조선반도, 요동반도 원정은 7세기 백촌강 전투, 16세기의 히데요시의 조선출병 이후 처음이었다. 청일전쟁의 원정계획에는 즈리평야전투와 베이징 함락까지 상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종반에 이토 히로부미는 군부를 억제하고 패주한 청국군을 추격하지 않고 배상금과 대만할양 그리고 요동반도 할양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토 히로부미의 전략판단은 스스로의 국력을 잘 아는 현명한 처사였다. 이것이 바로 총리의 전쟁지휘였다. 대만의 획득은 당시 일본이 국력발전의 방향을 대륙이 아니라 남방으로 향하게 하는 사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역자주: 오늘날 일본은 대만에 엄청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문고판 교양서로 "대만에 남아있는 일본!" 이라는 책도 나오고 있고요

청일전쟁 이후 중국이라는 커다란 먹이를 일본이라는 쥐에게 빼앗긴 것을 싫어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삼국간섭을 진행시켜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를 토해내게 했다. 그 후 영국은 웨이하이웨이, 독일은 칭다오, 러시아는 뤼순, 프랑스는 광저우만을 청국으로부터 집어삼켰다. 맹수와 같은 구미열강이 쇠퇴가 확실해진 거대한 청나라를 잠식하여, 살아있는 상태로 잡아먹는 것과 같았고 일본은 이를 섬뜩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쓰 무네미쓰는 번민하지 않고 와신상담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을 결의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도 외교에서 패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은 이토 히로부미가 무스 무네미쓰, 카와카미 소오로쿠라는 인물을 얻어 정치, 외교, 군사를 총괄하여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략)

러시아는 일본이 만주와 조선에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허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러시아에 삼국간섭을 부추긴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스스로 러시아와의 국경을 안정화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일본 간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싶어했던 것이다. 적의 배후에 문제를 일으켜 작업하는 것은 유럽형 권력정치의 상도(常道)이다. 일본이 와신상담하며 러시아에 대한 원한을 키우는 것을 본 독일의 외교관들은 이를 보며 필시 웃었을 것이다. <-- 역자주 : 독일이 삼국간섭을 주도한 건 팩트 맞습니다. 그런데 이를 유럽정치의 상도라고 말하면서, 뭐랄까 스스로 먼발짝에서 서서 유럽을 비난하는 게 이상하지요. 

러일전쟁 당시의 국제정세

청일전쟁의 결과, 조선은 종주국이었던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얻었다. 지금도 서울의 중심부에 독립문이라는, 파리의 개선문과 같은 건물이 위치해있다. 당시 조선의 사람들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건설한 기념물이다. 그 이전에 두개의 석조기둥과 같은 문의 초석이 있었다. 오랜 기간 조선은 중국의 자치령과 같은 존재였었다. 거기에는 대청제국의 사절을 환영하기 위한 좌석이 있었으며, 또 굴욕적인 신하의 예를 강요하기 위한 영은문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독립을 축하하는 조선사람들은 영은문을 독립문으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조선은 오랜기간 중국에 굴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유학자 귀족인 양반들이 오랫동안 무예를 경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적인 군대를 조직할 수 없었다. 이 점은 짧았던 일본의 점령기간 중 각지도민이 조직한 게릴라부대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네덜란드를 상대로 실력으로 독립한 인도네시아인이나, 호치민의 지휘 아래 프랑스를 구축하고 미국과도 전쟁을 수행한 베트콩과도 꽤나 다른 모습이다. 조선은 어디까지나 중화질서의 가운데에 서서 [소중화]라는 의식을 유지한 유교문화, 문관중심주의의 국가였기 때문에, 갑자기 두목 얼굴을 한 무가의 나라 일본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했다.  <-- 역자주 : 그러니까 조선은 인도네시아나 베트남보다도 뒤떨어진 의식을 보이지 않았느냐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의 국력은 쇠퇴하였고 구미열강의 중국진출은 한 단계 더 격화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청일전쟁의 결과 청이라는 거대한 왕국이 존재감을 상실하여 구미열강의 동북아시아 진출을 더욱 진전시켜 일본의 안전보장환경이 더욱 열화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을 독립시켰지만, 약체화된 이씨왕조는 곧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힘을 과소평가했던 조선은 급속하게 러시아에 가까워졌다. 조정내부에서 권력투쟁과 외교세력과의 결탁은 스스로의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조선의 사대주의 외교가 가져온 비극이었다. 러시아로 말하자면, 극동은 외무성 소관이 아니라 개척의 대상, 따라서 대장성의 소관이었다. 대장성 대신이었던 위테 백작은 약소한 일본과 세력권 분할 교섭을 기분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청일전쟁의 배상금지불을 어려워한 청에게 프랑스로부터 조달한 자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만주를 횡단할 수 있는 철도 (동청철도), 히얼빈에서부터 뤼순까지 이어지는 지선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어냈다.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 상태였지만,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러시아의 수송망은 완성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육군기동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으로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에 커다란 권익을 갖고 있었던 영국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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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은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그리고 조선병합입니다. 이것도 곧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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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상품권
20/07/30 11:11
수정 아이콘
무슨생각으로 글을 썼는지 짐작이 가네요. 뭐 대다수 일본인들이 이렇게 생각하니 할말은 없습니다.
Je ne sais quoi
20/07/30 11:20
수정 아이콘
저게 일본x들의 생각이고, 또 넓게 보면 일부 미국x들의 생각이기도 하죠. 잘 읽었습니다. 어서 교황 시리즈도 재개 부탁드립니다 ^^
20/07/30 11:31
수정 아이콘
와 독립문이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위해 지어졌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영은문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서도 알게되었습니다.
후추통
20/07/30 11:34
수정 아이콘
이거 이미 국사교과서에 다 나오는 내용인데요...;
20/07/30 11:43
수정 아이콘
(수정됨)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모두 다 기억하고 넘어가진 않으니까요...
공부를 제가 못했거나 무식한가보죠;; 되게 불쾌한 댓글이네요.
후추통
20/07/30 11:49
수정 아이콘
-_-a 그런가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느끼셨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이거가지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경도된 사람들이랑 쌈박질 하면서 다시 공부하던 내용이고, 제 전공이 역사학이어서 대부분 알고 계시는 내용인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20/07/30 11:56
수정 아이콘
국사시간에도 좀 후딱 넘어가는 경향이 있어서 한국인들이 잘 모르죠...
독립문=청으로부터의 독립
은 일본 우익들이 꽤 자주 써먹는 레파토리입니다. 알아두는편이 좋아요.
20/07/30 14:03
수정 아이콘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조선인들이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사용했다. <출처 : 나무위키 '독립문'>
이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바로 이해했습니다.
안스브저그
20/07/30 11:40
수정 아이콘
수천년동안 중국이 한반도를 병합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본문을 읽고보니 그게 가장 궁금하군요. 내몽골, 티벳, 실크로드까지 죄다 섭렵해본 중화제국이 어째서 뒷마당 미네랄멀티는 냅둿는지.
담배상품권
20/07/30 11:44
수정 아이콘
병합시도는 있었습니다. 당나라도 시도했었고요. 원나라는 성공했죠.
그런데 중국의 적은 한반도에만 있지 않아서 문제였죠. 한반도가 그렇게 탐나는 땅도 아니었고, 한반도 국가들도 어지간하면 중국한테 개기지 않았고요.
고기반찬
20/07/30 11:50
수정 아이콘
수, 당, 요가 해봤다가 실패했죠. 그 후론 한반도 정복, 유지에 소요되는 비용이 엄청나다는걸 중국 왕조들도 알게 되었고, 그 대가로 한반도를 점령해봐야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지정학적(중국과 북방 유목민이 대립하고 있을 때는 제외...지만 그 시국이 되면 한반도에 눈 돌릴 틈이 없죠)이득이 큰 땅도 아니니 한반도 국가들이 중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면 정복할 유인이 크지 않죠.
후추통
20/07/30 11:54
수정 아이콘
중국 입장에서는 한반도라는 땅이 투자하는 것에 비해 그다지 이득이 안나기도 했거니와, 함부로 건드렸다가 나라가 망하거나(수), 건드렸다가 본전도 못찾았거나(당), 굴복시켰음에도 본전도 안나왔거나(원), 굴복시켰음에도 더 건드리면 원 목적을 달성할수 없게 생겼거나(청)거든요.

간단히 말해서 뒷마당 미네랄 멀티인데 러커 에그로 가로막혀 있고 3/3 업그레이드 야생저그들이 그득한 일반 광물 3덩이 멀티라고 보시면 됩니다.
20/07/30 14:48
수정 아이콘
그런데, 우리가 중국에 병합당하지않았다는건 사실 우리 생각이고

밖에서보기에 우리나라는 원나라에 한번 복속되었다가 -> 흐지부지 -> 조선으로 탄생 -> 병자호란쯤에 청에 병합 (뭐 사실 그렇게 봐도 할말없죠)

-> 그러다가 일본에 병합

이런식으로 볼겁니다

그래서 일본이 병합하기전에 청에게서 독립했다며 독립문을 만든거죠..
11년째도피중
20/07/31 01:43
수정 아이콘
한반도가 중국에 병합당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같은 동아시아 인들에게는 별로 공감을 사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중국쪽에서 발간된 역사 서적들 읽다가 한반도 부분이 나오면 깜짝 깜짝 놀라고는 했습니다. "그걸 그렇게 연결하네?"하고요.

예를 들면 고구려 역사를 한반도 역사로부터 분리하면 중국 한족왕조들은 한 번도 침략한 적 없이 한민족들을 위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해석됩니다.
임진왜란 출병, 청일전쟁 출병, 한국전쟁 의용군(...). 모두 한반도를 외세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보호 전쟁이었다는 해석말이죠.
장제스 이야기까지 끼면 완성이긴 한데 정작 장제스는... 크크크
young026
20/08/01 18:25
수정 아이콘
한반도는 고사하고 요동(or만주or동북)도 중국의 영역이었던 시기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르비테즈
20/07/30 11:58
수정 아이콘
독일이 칭다오를 집어삼킴

칭다오 맥주의 시작이군요
이선화
20/07/30 12:25
수정 아이콘
전반적으로 유체이탈 화법이 강하게 드러나는 군요.

[조선의 사대주의가 러시아와 중국에 의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서술인데, 우리 입장에서는 그건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그리고 고종 개인의 권력을 되찾는) 움직임의 일환이었는데..

백인 기독교 국가라는 워딩도 그렇고 일본인들은 철저히 자신들이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러시아와 청을 버리고 일본에 다가가는 것 역시도 일종의 [사대주의]이자 [(서구 열강이 청에게 했던 것처럼)조선을 뜯어먹는] 행위일 텐데..

일본의 진주만 습격과 2차세계대전 개전에 대해서 변호하던 논리가 [미국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 수 없게 압박했다]는 논리였는데, 전반적으로 그 정도 인식에 그치는 것 같습니다.
아이군
20/07/30 13:05
수정 아이콘
이 점은 짧았던 일본의 점령기간 중 각지도민이 조직한 게릴라부대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네덜란드를 상대로 실력으로 독립한 인도네시아인이나, 호치민의 지휘 아래 프랑스를 구축하고 미국과도 전쟁을 수행한 베트콩과도 꽤나 다른 모습이다. 조선은 어디까지나 중화질서의 가운데에 서서 [소중화]라는 의식을 유지한 유교문화, 문관중심주의의 국가였기 때문에, 갑자기 두목 얼굴을 한 무가의 나라 일본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했다.

<--- 요 부분은 유체이탈 화법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운동은 긍정적으로 보는데 조선의 운동은 부정적으로 보죠
Jedi Woon
20/07/30 15:53
수정 아이콘
일본의 세계관이 어떤지 잘 보여주네요.
중국 중심의 중화 세계관에서 일찍 벗어나서 근대화에 성공하고 좀 맘에 안들지만 열강체제에 합류한 자부심과 우월함이 느껴집니다.
메이지 유신의 밑바탕이된 미토학은 뭐라고 빨아주고 자랑할지 궁금하긴 하네요
24/08/25 05:08
수정 아이콘
댓글 중에서는 한낱 일본의 치우친 생각 내지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객관적으로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일본의 입장이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본 입장에서는 유일한 위협의 대상은 한반도를 통한 문제 발생 뿐이기 때문입니다. 영국만 하더라도 동서남북(북유럽, 아일랜드, 프랑스, 스코틀랜드)에의 대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걸린 것과는 다른 상황입니다.

한반도의 국가는 사실상 현재를 포함해서 인접국을 활용해서 자국의 쇄신을 도모한다는 전략을 활용한 사례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일본과 같은 아이디어가 익숙치 않은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역사상 대부분의 국가들은 일본과 같은 생각은 정답에 가까운 발상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한국또한 일본의 연장선으로서의 한국이 아니라면 안타깝게도 존립이 힘들기 때문에 본문에서의 내용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봐야합니다. (한국에서 치열하고 민감한 주제이지만/국제적으로 보자면 당연한)일본에 의한 한반도의 근대화가 없었다면 한반도는 당연히 중국 내지 러시아에게 영구 병합되는 것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일본-한국 두 국가 간의 소소한 신경전은 있을지라도 대외적으로 일본-한국은 같은 노선을 걷기 때문에 한국을 더 분할해서 병합하지 않고 완충지이자 전략적 동반자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실체화된 근거는 없기 때문에 뇌피셜에 불과하지만, 단지 한반도만의 것이 아닌 국제적인 완충지로서의 역할 때문에 한반도의 분할은 다수 국가의 합의에 의해 전략적으로 이미 기획되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독일의 경우는 동서로 분할된 것이 독일이 국제적으로 가장 그 일대에서 위협요소가 크기 때문인 것과 같이, 동북아 일대에서는 한반도가 국제적인 면에서 위협요소가 가장 크기 때문에 남북으로 분할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경우는 그 자체가 위협요소라고 보기에는 전쟁은 일으켜서 아시아 전체에 해를 끼쳤더라도 그 인과가 합리적인 전제(아시아 다수 국가 스스로의 우매함)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인 입장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실체가 없는 빈 땅에 마피아 수준의 일개 무리가 이끄는 지역에 가까우나, 러-중-일의 이해관계에 막대한 미래 위협이 발생할 수 있는 최대 지점이기 때문에 결코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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