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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경제에 대한 스탈린의 (빗나가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던) 예측으로 인해서 남서 전선군은 독립된 거대 군단인 소련군 제9군을 제외하고서도 독일의 북부 집단군에 맞설 북서 전선군의 갑절은 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남서 전선군의 사령관인 키르포노스 상장 역시 적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면서 자기 목줄이 날아갈 위험을 감수해 가며 경계태세에 들어갔고, 때문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남부 집단군은 시작부터 적의 강력한 저항에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게다가 남부 집단군은 하필이면 부크 강이라는 천연장애물이 소련군과 이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초반 공습에 차질이 빚어졌고, 이 때문에 같은 기간 동안 규모가 더 작은 북부 집단군이 거둔 전과에 비해서 남부 집단군은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련군이 완벽히 막아낸 건 아니고... 일단 경계태세에 들어갔다고 해서 전쟁 준비가 끝나는 것도 아니거니와, 결정적으로 전차 운용에 대한 교리가 너무 미숙했고 초반에 제공권까지 완벽하게 장악당하면서 남서 전선군의 전차 손실은 평균이 90%를 웃도는 정신나간 상황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얻어맞는 와중에서 보여준 제9기계화군단의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반격은 놀라운 것이었고, 이 때문에 가뜩이나 느렸던 남부 집단군의 진격은 더욱 느려지게 됩니다.
7월 2일 당시의 양 군의 상황
일단 6월 22일부터 이 때까지의 남부 집단군의 성과입니다.
러시아 어이니만큼 간단히 주석을 드리면, 파란 글씨는 추축국의 군대, 붉은 글씨는 소련군의 군대. 독일측 5 A는 제5야전군, 위쪽 그림의 6 A 아래에 있는 1 어쩌구저쩌구는 제1기갑집단군, 소련측 22 MK는 제22기계화군단, 아래 전황도의 예컨대 8 CK는 제8소총군단입니다. 이외에 위쪽 전황도 맨 아래에 쓰여진 - 소련 제26군 아래 - 글자들은 위에서부터 각각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을 의미합니다. 맨 아래에 3 A (p)라고 되어 있는 건 루마니아 제3군. 러시아 어에서 P처럼 생긴 건 실은 그리스 문자 Ρ(Rho)에서 온 것이라 R 발음이 나고, C처럼 생긴 건 S 발음과 똑같습니다. K야 그냥 K고...
어쨌거나 밀기는 밀어냈지만, (지도에서 그냥 직선 말고 가시 돋힌 붉은 선인) 소련군 병력들은... 글쎄요, 보시다시피 북쪽의 독일군은 그런대로 소련군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남쪽의 루마니아군, 특히 루마니아 제3군쪽의 병력 배치도는 큰 차이가 나지 않음을 볼 수 있죠.
동 기간 동안 북부 집단군이 거둔 성과를 보면 전과의 차이가 더욱 확연하게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슷한 축척의 지도입니다. (같은 줄 알았는데, 라트비아 쪽이 약간 지도가 크긴 합니다만... 6 : 7 정도 될까요?) 이제 좀 실감이 좀 가시는지요.
뮌헨 작전
일단 배경이 이렇기도 하고, 무엇보다 베사라비야(現 몰도바)와 북부 부코비나(現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우치, Chernivtsi, Чернівці́)는 루마니아가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끼여든 이유이기도 했죠. 누차 말씀드립니다만 1940년 7월에 소련은 루마니아를 강제로 협박해서 몰도바와 북부 부코비나를 합병했고, 자기 의지가 아닌 남의 힘에 굴복하여 강제로 넓은 영토를 - 현 몰도바의 영토만 대한민국의 1/3 가량이 됩니다. 비록 가난하다고는 합니다만 - 할양해야 했던 루마니아는 아주 이를 득득 갈고 있었죠.
그래서 루마니아의 주도 하에 - 즉 독일군이 공격하고 영토를 되찾아준 것이 아니라 명명백백하게 주공이 루마니아군이었단 말입니다 - 부코비나를 되찾기 위한 작전이 입안, 실행됩니다. 그게 바로 뮌헨 작전(Operațiunea München)이죠.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좀 싱겁게 기술된 감이 없잖아 있는데 기실 이 전투도 (어느 독소전쟁 기간의 전투가 안 그랬겠습니까마는) 꽤나 격한 전투였습니다. 일단 뒤얽힌 병력의 규모부터 턱 빠지는 수준이었는데, 이 좁은 몰도바 땅에 양군 합쳐서 최소 65만 명(루마니아군 32만 명, 소련군 36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뒤얽혔기 때문이죠. 러시아 어 위키백과에서는 당시 추축국 군대의 수를 70만 명으로 잡고 있는데... 처음에는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영문 위키백과에서 전력 외로 친 독일군 제17군과 헝가리군을 감안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더군요.
무엇보다 이 독일군 제17군과 헝가리군은 몰도바 북쪽을 돌파하여 제9군을 포위 섬멸하려 시도했고, 때문에 뮌헨 작전에 개입한 부대가 맞기는 하거든요.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제17군과 헝가리군을 전력 외로 분류해 놓았는데, 이것까지 세면 70만 명이라는 숫자도 아주 말이 안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17군 예하 사단이 12개였으니, 독일군의 실 평균 사단 전력이 1941년 당시 1만 4천 가량임을 감안해볼 때 적어도 16만은 더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죠. 여기에 헝가리군과 제11군이 더해지고, 루마니아군만 따졌을 때 32만 명 가량이었으니 합치면 얼추 70만이 되기는 되는군요.
여하간 전황이 돌아가는 판 자체는 단순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루마니아 북부를 담당하던 루마니아 제3군의 서쪽과 북쪽에 있던 헝가리군과 독일 제17군이 몰도바 북단의 소련군을 돌파, 포위 섬멸을 시도했고, 때문에 소련은 병력을 현 루마니아 - 몰도바 국경에서 몰도바 - 우크라이나 국경까지 뒤로 쭉 물려야 했습니다. 전황도 하나가 제 백 마디 말을 줄여줄 수 있겠군요. 확대하다 보니 그림이 잘려서 그런데 북쪽의 파란 화살표가 바로 독일군 제17군의 공격 루트입니다.
아, 다만, 이 뮌헨 전투에서 손실이 컸던 것은, 의외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바로
루마니아군이었습니다. 양군이 격돌한 결과 소련군의 전투원 손실이 약 1만 8천 명 가량이었던 데 반해, 루마니아군의 전투원 손실은 그를 상회하는 2만 2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일단 이 전역 자체가 프루트 강을 끼고 있어서(《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p. 113 지도 참조) 도하를 해야 하기도 했고, 루마니아군이라고 해서 소련군보다 딱히 나은 건 아니라서 그랬을 가능성도 꽤나 높습니다. 어떤 책에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진 원인을 설명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추정하자면 역시 위의 두 가지 이유를 들 수밖에 없겠네요. 영토를 되찾고자 하는 열의는 강했으나 장비는 독일군이나 소련군보다 부실했고 제대로 된 기갑사단 하나 없었으며 도하까지 감수해야 했으니, 이는 스타크래프트로 치자면 적군이 벙커 깔고 버티고 있는 라인을 알보병인 머린 메딕 부대로 달려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똑같죠. 스2처럼 중장갑 상대로 몸빵하며 위력을 발휘하는 불곰 부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김태영 전 국방장관이 연평도 포격 사태 당시 남겼던
"실제 상황은 스타크래프트가 아니다"라는 말을 기억해 두셔야겠습니다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죠.
여하간, 손해는 컸지만 루마니아는 염원하던 북부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야의 수복에 성공합니다. 위 전황도에도 나와 있지만 이 때가 7월 26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시계를 열흘 정도 이전으로 돌려 보죠.
우만 전투
우만(Uman, Умань)은 현 체르카시 주(Cherkasy Oblast, Черкаська область)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도시입니다. 훗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이 벌어지는 바로 그 체르카시죠. 그런데 이게 대체 어디 붙어 있느냐, 이걸 먼저 좀 봐야 할 것 같네요. 우크라이나 지도에서 체르카시 주를 붉게 표시한 지도입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아.
보시다시피 거의 우크라이나의 정 중앙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아예 우크라이나 서부가 통으로 날아갔다는 이야기와 똑같죠.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 오신 분들이라면 "뭐여, 소련군이 남서부에서는 선전했다며. 이거 사기 아녀?"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는데... 기실 제가 좀 저번 글에서 소련군을 좀 많이 띄워 준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그거는 그거고, 글 말미에서 밝혔다시피 소련군의 피해 또한 엄청났죠. 몇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소련군은 가진 전차 전력의 90% 이상을 잃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참패를 당했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전선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적의 일부 진격을 로코소프스키의 제9기계화군단이 막아내고도 그를 적절하게 이용할 수는 없었던 것이죠. 최전방에서 버틸 수가 없다면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에서 죽죽 밀려난 겁니다. 게다가 이전 글에서 지나가는 정도로 언급하긴 했습니다만 소련군의 반격도 (제9기계화군단의 그것을 제외하면)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이루어진 편은 아니라서, 역시 손실이 컸습니다. 그런 만큼 병력이 많이 지쳐 있던 것 또한 당연했고, 그러니 전선이 죽죽 뒤로 밀려날 수밖에요.
7월 10일, 그러니까 한창 남쪽의 제11군, 제17군 및 루마니아 제3군이 몰도바 북쪽을 돌파해서 몰도바 방면을 지키던 남부 전선군을 측방 포위하려 시도하고 있을 때, 소련군은 군 체제의 재정비에 들어갔는데, 이 때 창설된 것이 "방면군"입니다. 전선군 한둘 혹은 두셋에 각 지역의 해군까지 관리하는 군단이니 어마어마한 크기죠. 세 개의 방면군이 이 때 만들어졌는데 북서 방면군에는 보로실로프가, 서부 방면군에는 티모셴코가, 그리고 남서부 방면군에는 세묜 부됸늬가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남서부 방면군은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 및 흑해의 함대를 관리하고 있었죠.
문제는 이 부됸늬가, 독소전이 발발하기 무려 20년 전의 전쟁인 적백내전 때에나 전설적인 영웅이었지, 이미 한참이 지난 1941년대에는 군의 현대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나쁜 말로 표현하면 뒷방 늙은이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이후의 소련군이 계속해서 입을 어마어마한 피해는 반 정도도 아니고 적어도 8할 이상은 스탈린의 무조건 현지를 사수하라는 말도 안 되는 엄명 때문이었지만, 그걸 또 그대로 따르고 앉아 있었다고 욕을 먹는 건 부됸늬라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냥 불운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겠네요. 솔직히 스탈린이 무슨 어디 뭐 명목상의 국가원수도 아니고 장군들의 모가지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절대강자인데 거부할 생각을 못 하는 게 더 일반적이지 않았겠습니까. 군의 현대화에 대해 무지했고 그 때문에 줄창 깨지고 패전한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겠습니다만.
부됸늬에 대한 비판 반 실드 반은 이 정도로 하고, 그 7월 11일의 전황을 좀 볼짝시면, 일단 제1기갑집단군의 공격은 로코소프스키에 한 번 막히기는 했어도 아예 뒤집힐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 제1기갑집단군이 (앞서 공격받았던) 로브노에서 키예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토미르(Zhitomir, Жито́мир)를 돌파합니다. 지토미르에서 키예프까지는 불과 140 km. 게다가 최전선에 구멍이 뚫린 것이고, 계속된 공격으로 인해 소련군은 약체화되었으며, 후방 지원 사단이 없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쯤되면 그야말로 키예프로 가는 고속도로가 뚫린 것이나 다름없었죠. 실제로 제1기갑집단군은 북쪽 측후방의 방어는 제6군에게 맡기고 고속으로 치고나가서 단 5일 만에 키예프를 수 km 눈앞에 두게 됩니다. 자꾸 북부 집단군의 제56기갑군 에리히 폰 만슈타인 당시 보병대장의 초고속 기동(하루 평균 70 km 이상)과 비교하게 되는데 그건 그쪽이 정말 비정상적으로 빠른 것이었고, 이쪽도 충분히 빠른 편이기는 했죠.
아예 진군을 막으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아니 뭐 일단 병력이 제대로 준비가 된 상태여야 말이죠. 누차 이야기했습니다만 병력은 지쳤고 전차의 90%는 날아갔으며 상대는 그냥 보병도 아니고 기갑 부대였으니, 반격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했죠. 이 반격명령을 내린 게 부됸늬입니다. 이건 빼도박도 못할 실책이죠. 후방에서 재정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그 군대를 가지고 무리하게 반격을 시도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1기갑군이 드네프르 강에 도달하였습니다. 소련군 사령부(스타브카, Stavka, Ставка)는 이 제1기갑군의 기동을 북부 집단군의 그것처럼 최대한 빠른 돌파 - 교두보 확보 - 드네프르 강을 넘어서 돈바스(現 도네츠크 일대,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2014년에 발발한 돈바스 전쟁 할 때의 그 돈바스 맞습니다)로 아예 고속도로를 뚫어버릴 심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북부 집단군도 에스토니아에서 적을 섬멸해야 할 판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하는 남부 집단군은 뭐 섬멸 안 하고 배길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그리고 그 이전에 독일군의 교리 자체가 적 부대의 섬멸, 섬멸, 섬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적의 주력군을 섬멸하면 너희가 우리를 뭔 수로 막겠느냐 하는 이 섬멸전 교리는 남부 집단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북쪽에 구멍을 크게 뚫어버린 제1기갑집단군은 아예 그쪽 측방까지 죄다 제6군에게 맡겨버린 채 드네프르 강을 따라 급격하게 우회, 적의 부대를 상대로 포위섬멸전을 시도, 멋지게 포위에 성공합니다. 드네프르 강을 따라서 동쪽을 급격하게 제1기갑군이 남하하는 동안 몰도바에서 싸우던 제17군과 루마니아 제3군은 소련군 제9군을 남쪽으로 밀어붙였고, 이렇게 소련군 제9군과 우만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제6군 및 제12군 사이에 간격이 생겨버립니다. 독일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고, 그림과 같이 포위섬멸전이 벌어지면서 소련군 제6군과 제12군은 전멸당합니다. 물론 후퇴할 수도 있었지만, 스타브카가 그걸 허락하지 않았죠.
아 근데, 드네프르 강에 도달할 때 제1기갑집단군이 있던 패스토프(現 우크라이나의 패스티우, Fastiv, Фа́стів)에서 드네프르 강을 따라서 쭉쭉 내려오는 키로보그라드(現 우크라이나의 크로피우니츠키, Kropyvnytskyi, Кропивницький - 2016년 개명)까지의 직선거리는 무려 280 km. 이 거리를 주파하는 데 걸린 시간은 20일 가량입니다. 앞선 돌파야 뭐 일단 뚫으면 그 뒤의 병력은 없었으니 빠르다 쳐도 이건 엄연히 교전을 해 가면서 밀어붙이는 것이었는데 20일 만에 이렇게 밀어붙인 것 자체가 또 한 번 기가 찰 노릇이었죠.
그리고 8월 2일에 포위망이 완성되면서, 남는 것은 철저한 소멸전뿐이었습니다. 독일군이 2만 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 출혈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만, 이 때 소련군은
무려 20만에 달하는 병력 중 10만이 전사하고 10만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교환비 1 : 10의 이 어마어마한 - 그것도 무슨 티거 대 T-34 같은 것도 아니고 순수 보병 대 보병의 교환비가 1대 10인 - 전투의 결과로 제9군과 제18군은 죽기 싫으면 병력을 뒤로 빼면서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 했고, 제9군은 오데사로, 제18군은 8월 말로 접어들자 아예 드네프르 강 건너편까지 밀려납니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보면 제18군도 포위망에 걸려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아마 포위망에 걸려든 건 제18군의 전부까지는 아닐 겁니다. 애초에 뭐 제18군이라고 보내주고 제6군이나 제12군이라고 포위망에 몰아넣고 그러는 것도 아니구요.
이쯤에서 지도를 한 번 보는 게 좋겠군요.
우만 전투 개형도입니다. 아래 지도에서 포위된 것이 소련군 제6군과 제12군이죠.
우만 전투 이후의 전황도입니다. 위 그림이 7월 11일, 아래 그림이 8월 25일인데, 약 45일간의 기간 동안 오데사와 크림 반도의 소련군을 제외한 나머지 소련군은 모조리 드네프르 강 너머로 밀려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석권된 우크라이나 땅에 있는 것들인데, 물론 최선을 다해서 소련 노동자들이 공장 등을 우랄 너머로 빼돌리기는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산업기반시설 등이 넘어갔습니다. 주목하셔야 할 것은 아래 지도의 파란 글씨 바로 밑에 있는 크리보이 로그(Kryvoy Rog, 現 우크라이나의 크리비 리흐, Kryvyi Rih, Кривий Ріг)입니다. 여기와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니코폴(Nikopol, Ні́кополь)은 현재도 공업 도시로 우크라이나에서 손에 꼽는 도시인데, 특히 광공업이 발달한 도시입니다.
음, 우리 나라야 철강산업을 포스코가 꽉 쥐고 있으니까 못 들어보셨을 법도 한데, 전세계 최강의 철강기업이라고 하면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을 꼽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철강을 찍어내는 회사죠. 이 회사가 2006년에 인수한 우크라이나의 회사가 바로 크리보리흐슈탈(Kryvorizhstal)인데, 이 크리보리흐슈탈 - 現 아르셀로미탈 크리비 리흐 - 의 본사가 바로 크리비 리흐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르셀로미탈 크리비 리흐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가장 철강을 많이 찍어내는 회사가 되었죠. 괜히 크리비 리흐와 니코폴 일대에 이 기업이 있는 것이 아닌 게, 니코폴에는 망간이 풍부해서 독일군이 눈독을 계속 들이고 있었거든요. 이것도 원래는 마실 물조차 없던 땅에서 소련 인민들이 피 토하고 최악의 굶주림에 시달려 가며 고생스럽게 일궈 놓은 것인데 그걸 다 독일군이 날려먹어버린 거죠.
하여간 이 크리보이 로그 및 니코폴 일대의 광업 자원과 함께 드넓은 우크라이나 땅이 독일군 손에 떨어졌고, 독일군은 계속해서 당초 작전목표였던 하리코프를 향해 진군할 채비를 마쳤습니다. 그 전에...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두 군데 처리해야 할 곳이 생겼죠. 바로 오데사와 키예프입니다.
키예프야 우크라이나의 수도고 키예프 공국의 발상지고 러시아권 문화의 수도였으니 이래저래 많은 분들이 들어보셨겠습니다면 오데사 하면 "엥? 그건 또 어느 듣보 도시냐?"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좀 있겠군요. 만화가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의 지도에서는 심지어 그냥 5:4로 나오고 쫑이고...
근데 이 오데사는, 2001년 기준 자체 인구만 백만이 넘는 우크라이나의 다섯 도시 중 하나이며, 인구 순위 제4위입니다(나머지는 인구 순서대로 키예프, 하르키우,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도네츠크). 게다가 흑해 함대 하면 대개 세바스토폴만 떠올리지만 오데사도 흑해에 면해 있는 훌륭한 항구였고, 교통과 공업의 요지인 만큼(아예 이 오데사를 중심 지역으로 하는 철도국이 있을 정도입니다. 오데사 철도국, Odeska Zaliznitsya, Одеська залізниця) 추축국이 군침을 질질 흘리던 도시였죠. 그래서 여기에서도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해야겠군요. 공방전은 8월 8일 개시됩니다. 오데사 공방전이 워낙 길었던 관계로, 사실 오데사 공방전에서 할 이야기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번 글에서는 지도도 잔뜩 나왔고 하니) 여기서 일단 잘라야겠습니다.
자료출처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https://pamyat-naroda.ru/ops/ - 이 글에 쓰인 각종 전황 지도의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Operation_M%C3%BCnchen - 뮌헨 작전 (영문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Uman - 우만 전투 (영문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