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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7/07 15:26:44
Name 눈시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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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남한산성 - 10. 폭풍전야


압록강 국경에서 평양까지의 주요 축선입니다. 보시다시피 두 개로 크게 나눌 수 있죠. 고려 때 요나라와 원나라의 침략도 이 축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로 이용된 건 해안길인데 역시 다니기 더 좋고 바다를 통해 보급할 수도 있으니 그랬을 겁니다.
요의 1차 침입은 내륙길을 통해 갔고 영변-박천을 연하는 선에서 강화를 맺은 후 오히려 강동 6주를 토해내게 됩니다. -_-; (구성이 그 유명한 귀주고 선천, 정주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2차는 해안길을 통해 갔다가 후방이 차단돼서 내륙길을 통해 퇴각하죠. 3차에서는 그 기억 때문인지 내륙길을 통해 갔지만 여의치 않아 후퇴했고, 귀주 대첩을 맞게 됩니다.

+) 흥화진의 경우 조선에서는 쓰이지 않았고 지역 자체가 의주랑 통합되었습니다만, 여요전쟁 때 유명한 지역이었으니 굳이 넣었습니다.

몽골의 경우 1차 침입 때는 양 쪽 길을 북남로로 나눠서 갔고, 본군은 남로를 이용했습니다. 2차 때는 내륙으로 갔다가 아예 동쪽으로 빙 돌아서 갔구요. 1차 때 방어선이 막힌 경험 때문일 겁니다. 3, 4차 때는 해안길을 이용했고 5차 때도 해안길을 쓰며 내륙길로는 소수의 별동대만 운용했습니다. (몽골의 경우 너무 많아서 자세하게 설명할 순 없네요) 그 이후에도 그런식이었죠. 일부러 방어선을 크게 돌아가지 않는 이상 진군로는 대동소이했습니다. 지도를 자세히 보면 빨간색 선이 있는데, 양 쪽 다 현대에도 주요 도로가 지나가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정묘호란 때 후금군은 의주 - 용천 - 철산 -> 가도 , 선천 -> 곽산 - 정주 - 박천 - 안주에 이르는 길을 이용했습니다. 해안길, 남로였죠.

결국 적의 침입을 막는다는 것은 이 축선에 대한 방비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에 대한 조정의 방침을 살펴보죠.

1. 조선의 방침
정묘호란 이후, 조선이 중시한 것은 산성 수축이었습니다. 용골산성의 기억 때문일까요. 병력 부족도 큰 이유일 겁니다. 의주부터 안주까지 함락된 성은 복구하기 힘들었고, 해도 적을 다시 맞을 수 있을까 의문이었습니다. 아예 청천강 이북을 포기하자는 논의까지 나왔죠. 실제 32년까지는 이북의 방어를 포기하고 안주를 중심으로 하자는 결론을 냅니다. (김류는 이것도 반대하면서 "백성들 고생시키지 말고 어루만지면 된다"고 했죠 - -a) 그나마 33년에 위기가 닥친 때문인지 임경업을 청북방어사로 임명합니다. 이 때 쌓은 성이 바로 백마산성입니다. 이 때 청천강 이북의 병력은 겨우 4000여로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정묘호란 전부터 계속 후금군 오고 모문룡군 오고 하는데 뭐가 될 리가 있나요. -_-;

그 외에도 유사시 평양은 자모산성으로 황주는 정방산성으로 평산은 장수산성으로 옮겨서 싸우게 했죠. 그렇지 않은 성은 안주성 정도였죠. 각 지방에도 마찬가지여서 각기 입성할 산성을 정합니다. 한양의 경우 역시 남한산성이었죠. 특히 김자점이 여기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대신 인조는 중앙군 정비에 다시 주력합니다. 1000명 정도였던 어영군은 6200명으로, 훈련도감은 2700명에서 5000명까지 늘립니다. 기병의 수도 5초, 600명으로 늘렸죠. 또한 총융청에서 7000명을 떼어 강화도에 항시 주둔하게 했고,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신설, 경기도 광주 주변의 고을과 원주, 대구, 안동 등지의 병력을 소속시켜 경기도 남부 지역을 총괄하게 합니다. 그 규모는 12700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도권에서 유사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강화도까지 합치면 5만이 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대제였습니다만. -_-a 이를 보면 병자호란을 맞는 조선의 방침을 알 수 있습니다. 서북 쪽은 병력이 적으니 산성에서 적을 맞으며 최대한 시간을 끌고, 수도권에서 결전을 벌인다는 것입니다. 늘 하던 것처럼 적의 보급로는 길어질 테고, 후방에서는 적의 뒤를 끊을 테고, 왕은 강화도로 가니 안전하고, 전국에서 병력이 집결할 테니 그걸로 막는다. 이런 거인 거죠.
뭐... 이게 잘 됐으면 정말  좋으련만요. 그래도 서북쪽이 걱정됐는지 천에서 이천 정도의 병력을 매년 올려보냈고, 36년 병자년에는 4000여명의 병력을 올려보내서 8000명 정도의 병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평안도에서 무과를 치러 만 명 넘는 급제자가 나왔다고 하는데 이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모르겠네요. 인재 면에서도 북인계 인물들을 (벌 줄 놈은 아예 죽이고) 대거 사면하고 등용합니다. 특히 이민환, 박난영 등 후금과 화친을 원했던 인물들도 최대한 등용했습니다. 후금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한편 인조 정권은 심하 전투와 광해군의 궁궐 건축, 이괄의 난에 이은 정묘호란의 콤보로 맛이 가 버린 나라를 정비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인조 8년인 30년에는 군적이 완성되고 여기에 공을 세운 최명길이 가자됩니다. (최명길은 당연한 거 한 거라면서 거절하지만요) 34년에는 하삼도에 양전을 실시, 이 때 확인된 신결은 경상도의 경우 기존의 2/3가 더 늘어났고, 전라도와 충청도도 절반이 더 늘어난 모양입니다. 아직 세금을 걷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기로 했고, 이어 경기도와 강원도에도 실시하려다가 미루죠. 이 양전사업의 경우 원래는 20년마다 한 번 해야 되는 거였고 선조 36년에 했지만 전후라서 제대로 하기 힘들었고 광해군은 미루다가 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인조 역시 전쟁 등의 이유로 미뤄지다가 이제서야 할 수 있게 된 거였죠. 인조 초에 확대 시행했다가 반대 먹고 강원도로만 축소했던 대동법도 30년 초부터 서서히 다시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도 최명길이 이름을 올리는군요.

정묘호란 직후 인조는 "백성들을 고달프게 한다"는 이유로 호패법, 군적, 사족 수포론 등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지난 세월의 상처를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고, 포기했던 사업들을 진행시키고 있었죠. 이런저런 반대에 어려운 문제들이 많았지만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시간은 없었습니다.

2. 사신을 참하라
타타라 잉굴다이. 청 초기의 군인이자 외교관, 재무관, 행정관 등 모든 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한 인물입니다. 그 능력 및 인망으로 홍타이지의 굳은 신임을 받았죠.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인물입니다. 조선에서 음차한 이름은 용골대였죠. 정묘호란 후 그는 심심할 때마다 사신으로 옵니다. 다른 후금 사신들에 비해 그는 말이 잘 통했다고 하죠.

이 때 용골대는 35년 겨울에 죽은 인조의 비 인렬 왕후의 조문 겸으로 왔습니다. 그는 조문과 보낸 물품의 목록, 봄에 보낼 사신에 대한 홍타이지의 서신을 들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죠. 그는 두 개의 봉서를 더 건냅니다. 하나는 금국집정팔대신, 즉 팔기가 보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금국외번몽고, 즉 몽고의 왕자들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신하가 다른 나라 임금에게 편지를 보내는 예는 없다고 보자마자 따졌고, 용골대는 정색하며 말 합니다.

"우리 한께서는 정토하면 반드시 이기므로 그 공업이 높고 높다. 이에 안으로는 팔고산과 밖으로는 제번(諸藩)의 왕자들이 모두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자, 우리 한께서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각각 차인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는가"

따라 온 몽골의 왕자들도 말 했습니다. (서달이라고 했는데 서쪽 달자, 서쪽 오랑캐를 뜻 하는 거니까 몽골 맞겠죠 -_-; )

"명나라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나라와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한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 때 실록에는 "대의로써 물리쳤다"고 돼 있습니다. 이에 용골대는 화가 나서 내일 돌아가겠다고 하죠.

바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대사간 정은은 "대의가 뭔지는 알라들도 다 알거니까 다른 말 할 필요 없고 상께서도 그러실 거지만, 혹시 답 할 때 우물쭈물하면 쟤네들이 돌아가서 '조선도 안 된다고는 안 하더라'고 하면 안 될 겁니다." 라고 말 합니다. 그 후의 상소나 의논들을 보면 오히려 이게 온건한 말이었습니다. 관계를 끊자는 말까진 안 했거든요. 그 다음날부터 격렬한 논의가 이어집니다.

태학생 김수홍 등 138명은 연명상소하여 사신을 참하고 글을 불태우자고 합니다. 인조는 뜻은 좋지만 그건 너무하다고 답 했죠. 최명길은 "그냥 거절하면 되고 굳이 까칠하게 할 필요 없다. 잘못하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말 하고, 비변사도 이와 같이 앞으로도 무역할 일을 생각해서 적당히 답서를 보내자고 합니다. 반면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는 그들을 구금하는 것부터 목 베는 것까지의 요구를 하죠.

여기서 확실하게 볼 수 있듯 당시 비변사는 온건파, 즉 주화파였고 삼사는 척화파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신하와 유생들이 척화파를 편 들었지만 국정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죠. 이들은 여기서 크게 부딪히게 됩니다.

한편 용골대는 25일 인렬 왕후의 장례를 조문한 후 26일에 돌아가려 합니다. 인조는 박난영을 보내 만류하지만 그는 편지를 받는다면 돌아가겠다고 답 하죠. 다시 무신과 역관을 보내 벽제까지 따라가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때 구경하는 관중이 길을 메웠고, 아이들은 기와 조각이랑 돌을 던지며 욕 했다고 합니다. 생명의 위협도 있거니와 조선의 반응을 확실히 확인한 상황에서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죠.

인조가 이 때 반응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3월 1일 그는 전국에 방비를 철저히 하라는 분부를 내리며 후금을 욕 하고 다들 이를 통쾌히 여기고 있으니 전쟁이 벌어지면 열심히 싸우자는 내용을 알리죠. 이 때 병조는 부원수 신경원을 후금에 보내서 상황을 무마시키자고 건의하지만, 인조는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면서 거부합니다. 하지만 이틀 후 바로 "국상 때 위로해준 거 고맙다. 병이 있어서 바로 만나지 못 했는데 가 버렸다. 오해하지 마라"는 내용의 회답사를 보내고 용골대에게도 따로 편지를 보냅니다. 한편 적을 막을 방비를 강력히 주문하고, 서생들이 이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걸 엄금합니다. 군사는 전문가에게 맡기라는 거죠. 한편 후금의 사신이 다시 왔다가 평양 근처에서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이 때 평안 감사에게 보낸 서신을 뺏겼다고 합니다.

3. 마지막 자존심
4월 26일, 춘신사 나덕헌과 회답사 이곽이 돌아옵니다. 그들은 마침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구타 당해서 쓰러지면서도 절 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 때 청의 국서를 받아 옵니다. 거기에는 스스로를 대청 황제가 부르고 조선을 "너희 나라"라고 했죠. 그 내용은 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는 황제가 쓰는 어투였습니다.

홍타이지는 이렇게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가 되고,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고 고칩니다.

인조는 저 답서에서 "형제끼리 이렇게 하면 되겠냐"면서 청을 탓 합니다. 불안한 평화가 확실히 끝난 거죠. 조선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습니다. 한편 평안도에서는 과거로 재주 있는 자를 뽑고, 함경도에서도 병력을 더 뽑으려 했습니다. 한편 김택룡이란 자는 일찌감치 의병을 일으켜서 복수군이라고 자칭했죠. 6월에는 병조 판서에 임명된 최명길이 강화도로 미리 가기를 청하지만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6월 17일, 엄청난 내용의 격문이 청으로 떠납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 귀국의 군사는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우리가 이길 자신이 있다고 이러겠느냐.
- 우리가 중국을 섬기는 건 당연한 거다. 니네도 인정했다. 근데 왜 지금은 그거 가지고 탓 하느냐.
- 몽골 왕자는 망한 나라의 포로인데 우리에게 대등한 예를 원했다. 이걸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
- 우리는 200년간 명을 섬겼다. 어찌 요동과 심양을 잃었다 해서 귀국이 하는 바대로 따를 수 있겠는가.
- 중국은 우리에게 지존이다. 근데 우리에게 나무람이 없었고 대접도 후했다. 그런데 귀국은 우리를 깔보고 욕 했는데 이것이 이웃 나라를 대하는 예인가?
- 지난날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도 우리는 대의로 이겼다. 왜는 천도를 어겨서 망할 뻔했고, 원씨(이에야스)가 우리와 다시 친해지니까 지금은 강성해졌다. 천도는 선을 돕고 악을 벌한다.
- 지난번에 우리가 화친한 것은 천도에 순종한 거다. 그런데 귀국은 우리를 핍박하고 있다. 나는 그저 하늘을 믿는다. 공갈 협박을 계속 하면 민심이 떠나가고 나라가 무너질 것이다.
- 다시 생각해라.

조정에서는 적을 막는 데에 대해 여러 논의를 했습니다. 그 자체는 위에서 말한 것과 별 다른 게 없습니다. 의주, 평양 본성보다는 산성을 중시하자. 평안도에 병력을 보충하자 이런 것들이었죠. 병자록을 지은 나만갑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화친하는 일에는 이미 믿을 바가 없는데도 싸워서 지키는 일에도 또한 강구하는 바가 없었다"

한편 9월초에는 명의 감군 황손무가 와서 치것를 전하고 오랑캐를 토벌하는데 협조하자고 합니다. 이 때는 어떻게 칠지 의논합니다만... "귀국이 무를 무시해서 그렇다"면서 쓴소리를 한 후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귀국 사람들의 인심과 기계(機械)를 보건대, 결코 저 강한 오랑캐를 대적하지 못할 것이니, 중국 조정에서 일시의 장려하는 말 때문에 저들과의 화친을 단절하지는 말라"

9월 10일, 임경업은 중강에 무역 때문에 온 마부대에게 격서를 전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한(汗)이 여러 왕자들과 더불어 매번 이르기를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 하고, 항상 웃는다"
"우리들은 오로지 물건 값을 맞추어 지급할 뿐이다. 이 서찰은 한의 명령이 없었으니 가지고 갈 수 없다. 꼭 보내고자 한다면 사람을 따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때 감군 황손무의 요청에 따라 간첩을 파견할 문제를 의논합니다. 하지만 "이미 절교하기로 했는데 다시 편지 보내면 민심도 떨어지고 명분에도 안 맞고 비밀도 다 들통났을 거다"면서 보내지 않기로 하죠. 간첩은 필요한 데다 명의 요청인데도 보내지 말자고 하는 것은 참 -_-;

날마다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조정은 전쟁 분위기를 열심히 내고 있었습니다. 이 때의 분위기를 병자록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벼슬아치 가운데 간혹 “금한은 스스로 자기 나라에서 황제 노릇을 하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다만 정묘년의 형제의 맹약만을 지킬 뿐이니, 저들이 참칭하는 것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병력을 헤아리지도 않고 먼저 우호 맹약을 저버려 원망을 돋구고 화를 부르기에 이르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록 소견이 이와 같다 하더라도 감히 입을 열지는 못하였다."

"대개 당시의 의논이 화친을 배척하는 것을 청의(淸議)라 하고 화친하여 얽어매는 것을 사론(邪論)이라 여겼으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제동을 건 것이 최명길입니다.

4. 작은 흐름
최명길이 차자를 올린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실록에는 그에 대한 비판부터 나타나는데, 9월 27일 "최명길이 금에 대한 호칭을 청으로 하자고 하니 개념이 없는 것이고 주변을 다 물리치고 왕과 독대하자고 하니 무슨 술수를 쓰려 하는 거다" 고 하며 그의 관직을 삭탈하라고 합니다. 실제 그는 임금과 독대해서 화친을 의논한 것으로 보입니다. 연려실기술에 있는 최명길의 차자 내용은 이렇습니다.

- 싸워서 지킬 계책도, 화를 완화시킬 책략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오랑캐의 기병이 달려오면 체찰사는 강화도로 가고 원수는 정방 산성으로 갈 것이다.
- 그 동안 백성들은 어육이 되고 종묘 사직은 파천할 뿐이니 그 허물은 누가 질 것인가.
- 마땅히 체찰사와 원수는 평안도에 가고 병사들도 의주로 들어가 절대 후퇴가 없게 해야 한다.
- 또한 심양에 사신을 보내 군신의 대의를 갖추고 한편으로 오랑캐의 정세를 정탐해야 한다.
- 그들이 형제의 예를 지키려 한다면 그대로 화친하면서 후일을 도모해서 석진 (거란과의 약속을 깨고 거란을 치다 망한 후진의 왕) 처럼 되지 않게 해야 하고, 의주를 굳게 지키고 국경에서 안위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 이게 만전의 계책은 아니겠지만 속수무책으로 망하는 것보단 낫다. 싸우자고 해 놓고 두려워하고, 화친하자는 말이 비난이 두렵다고 하지 않으면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 곧 얼음이 얼고 적이 올 것이다.

보시다시피 최명길도 "청이 형제의 예를 지킨다면"이라는 것과 "싸울 준비를 확실히 해야 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말에도 다른 대신들은 그를 극렬히 욕 합니다. 후에 삼학사로 유명한 오달제는 "간사함이 실로 가증스럽다" "임금의 귀를 현혹시키고 어지럽힌다"고 했고 윤집은 "간사하고 아첨하고 괴이하고 못된 말이 있다" "이제 안팎으로 모두 최명길의 고기를 먹고자 하는데 임금만 모를 뿐이다" 고 합니다.

재밌는 건 이 때 인조는 "설사 그의 말이 맞더라도 절대 멸시하고 욕 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국가 풍습은 과연 한심스럽다"면서 오달제를 파직하고 최명길을 비호했다는 점입니다. 사간원의 상소에도 "그렇다면 장량이나 진평도 만고의 죄인이냐. 그의 충성심과 계략은 누구도 미칠 수 없다"고 하죠. 현실을 알게 된 것일까요. 비변사도 최명길의 말에 힘 입어 사신을 다시 보낼 것을 요청합니다. 그에 대해서 거센 비판이 따르지만 인조는 "묘당의 계책은 우연한 것이 아닌 듯 싶으니 경들은 심사 숙고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죠.

최명길은 다시 차자를 올립니다.
- 사람들이 나를 욕하면서도 내 마음을 모르는 것은 결국 얘기하다 보면 답이 화의이기 때문이다. 난 이게 왜 틀렸는지 모르겠다.
- 석진은 하루아침의 분함 때문에 거란을 적대하다가 당했고 뒤늦게 신하를 칭했지만 거란이 허락치 않고 마침내 망했다.
- 화친을 맺어 보존하기보다 의를 지켜 망하겠다 하는 것은 신하의 절개를 지키는 말이지만, 종묘와 사직의 존망은 보통 사람의 일과는 다르다.
- 의리 또한 시세를 보아서 판단해야 한다. 오랑캐가 여전히 강하니 일단 맹약을 지키고 뒷 일을 기다려야 한다.
- 남송의 화친을 주장한 진회는 화가 나라에 돌아가고 이익은 자기에게 돌아갔지만, 지금 화친을 주장하는 자(바로 자신)는 화는 자기에게 돌아가고 이익은 국가에 돌아갈 것이다.

인조는 최명길을 비호하는 것에 대해 "어린 놈들이 공신에게 막말하니 위아래를 제대로 가리려고 하는 거다"고 변명하지만, 그 뜻은 확실히 화친에 있었습니다. 최명길을 욕 하는 유생들에게 벌을 준 거죠. 하지만 화친에 대한 얘기를 아직 꺼내지는 못 합니다.

5. 마지막 사신
10월에 마부대는 의주 부윤 임경업에게 "내가 11월 26일에 군사를 일으켜 동으로 쳐들어올 것인데, 너희 나라에서 만일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맺고자 한다면, 비록 군사를 출동하는 도중이라도 마땅히 파하여 돌아갈 것이다. 또 우리나라가 황제라 칭하는 것은 남조(南朝 명 나라)에서도 금하지 못한 바인데, 너희 나라가 금하고자 함은 무슨 까닭인가"라는 말을 전합니다. 이 때문에 역관 박인범에게 서신을 급히 보내지만 홍타이지는 받지 않았고, 대접이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용골대와 마부대가 이를 탓하면서 왕자와 척화신을 들여보내라고 합니다. 최후통첩이었습니다. 조정은 거기까지는 못 하더라도 사신을 보내서 무마시키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역관 레벨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그 기한은 11월 25일이었습니다.

11월 4일, 접반사 이필영은 적이 겨울에 조선을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장계를 올립니다. 이 때 최명길은 계속 공격을 받다가 사직하게 해 달라고 하고 사직합니다. 하지만 인조의 비호는 여전해서 윤집이 그를 공격하자 "윤집은 김상헌의 친척인데 전에 최명길이 김상헌을 비판했으니 그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닌가?" 하면서 물리치죠.

11월 12일, 이성구는 병력을 모아 국경에 보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 그의 말은 이렇습니다.

"이미 병화를 입을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니 민망스럽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인조의 답이죠.

"수어할 준비를 하고자 하면 형세가 이와 같고 기미(??)할 방책을 세우고자 하면 명사(名士)의 무리가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적은 오고야 말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절박함이 묻어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비변사가 박난영을 사신으로 보내 적정을 탐색하고 우리가 절교한 게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야 된다는 걸 알리죠. 한편 각 도의 병력을 징집해서 난에 대비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 때까지 조정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지만, 청에서는 그 말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최명길은 다시 차자를 올립니다. 올해는 추신사를 보내지 않았으니 우리가 오히려 약속을 어긴 거고, 우리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면 그들도 마음이 변할 거라는 거였죠.

11월 16일, 마침내 이전에 화친하자는 상소를 올렸던 박로로 결정됩니다. (그 내용 보면 화친이라기엔 좀 그렇지만 다른 이들의 의견에 비한다면야 화친에 가까웠죠) 이조 참판 정온을 중심으로 사신을 보내지 말라는 격렬한 상소가 올라옵니다. 인조는 "부득이해서 정한 것이니 고치긴 어렵다. 그대들도 심사 숙고하라"면서 거부합니다. 병조 판서 이성구와 대사헌 이경석은 그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국서에 "청"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하지 말자고 하죠. 이 문제로 11월 한 달이 끝납니다. 청이 요구한 기한이 지난 겁니다.

6. 폭풍전야
병자록에는 이 해 재난이 연겨푸 일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3월에는 대동강에서 오리떼가 싸우고, 4월에는 청파에서 개구리가 싸웠죠. 부평과 안산엣는 돌이 옮겨지고 예안에서는 강물이 끊기고, 서울 도성 안에서 하루에 지진이 27개 곳에서 일어났고, 큰 물이 갑자기 밀려와 동문의 길이 끊겼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늘 나타나는 재난이었죠.

12월 1일에는 비변사에서 홍타이지가 역사서를 좋아하니 몇 권 들고 가면 괜찮을 거라고 건의합니다. 2일에는 박로가 가기 전에 몇 가지 물어보는데 이 때 인조는 "나중에 조선이 왜 '청'이라고 안 하냐고 하면 그 때는 싸움 각오하고 들어주지 말자"고 합니다.

뭔가 태도가 왔다리 갔다리죠. -_-a 일단 인조는 이 해에 주화파와 척화파 사이에서 계속 갈등한 게 아닌가 합니다. 전쟁 끝나고 얘기해 보죠.

4일, 양사는 심양으로 떠난 박로를 돌아오게 하자고 했지만 인조는 허락하지 않았고, 대사간 김반은 그에 충격을 받아 자기를 파직시켜 달라고 했지만 역시 허락하지 않습니다. 6일에도 그에 대한 차자가 올라오고 박로를 돌아오라고 하지만 역시 인조는 허락하지 않죠.

박로가 가지고 올 결과를 기다리던 인조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추측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박로가 아니었죠.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가 올라옵니다.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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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unt_ValenciaCF
11/07/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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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그야말로 폭풍전야군요. 이렇게 글 하나로 몰아 보는 저도 두근거리는데, 당대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불안했을지...혹은 일상적이다보니 아얘 신경을 안썼을 수도 있겠네요.
백마탄 초인
11/07/07 16:05
수정 아이콘
정말 긴장감이 철철 넘칩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이미 다........ /흙

염치 없지만 어여 다음편을 올려주세요.. /기다리다 지쳐...

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11/07/0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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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음회부터는 멀리 가겠군요....ㅠㅠ
11/07/0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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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이네요...
11/07/07 16:55
수정 아이콘
쉼없이읽게되네요~ ~ [m]
11/07/0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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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위협을 감지해서 고심도 하고 대비도 하긴했던거 같던데 더 나은 방법은 없었던거였을까요?
그리고 조선은 나름 군주제 국가인데 왜 국민총동원같은 전시체제가동이 불가능했던것일까요? 인구로는 후금보다 많았을텐데..
그리메
11/07/0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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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충무공 덕분에 많은 공부를 했고 눈시BB님 덕에 더 깊은 자료도 많이 찾아보았으나, 호란은 순전히 추노때문에 관심을 가졌는데 시리즈물 항상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무리수마자용
11/07/07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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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전쟁 직전의 심각하고 침울한 분위기가 오늘 날씨와 멋드러지게 어울려서 숨도안쉬고 읽은것만 같네요 [m]
Je ne sais quoi
11/07/07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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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있었는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실행한 것은 없으니 말만 앞섰군요. 다음편부터는... 또 답답하겠네요.
그런데 내용의 답답함과는 별개로 음악하고 글이 오늘은 더 잘 맞는다고 느껴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물여우
11/07/07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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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그 날이 오고 있습니다. ㅠ-ㅠ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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