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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8/01 22:53:43
Name 계층방정
Subject [일반] '은행 시스템에는 이자가 없다'라는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의 위험한 착각
수많은 상을 휩쓴 EBS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로 받아들여진 우화가 있습니다. 바로 '랭그릭의 섬'입니다. 이 섬은 로저 랭그릭(Roger Langrick)이 개인적으로 쓴 글을 미국의 변호사이자 공공은행 운동가로 《달러》란 책을 쓴 엘렌 브라운(Ellen Brown)이 인용하면서 이 다큐멘터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로저 랭그릭Roger Langrick의 ‘새로운 천년을 위한 통화시스템A Monetary System for the new Millennium’이라는 논문에는 이 문제가 쉽게 설명돼 있다.

    여기에 외부와 전혀 소통을 하지 않는 단일한 통화체제를 가지고 있는 한 섬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중앙은행 A는 딱 1만 원을 발행했고, 시민 B는 그 돈을 빌린 후 1년 후에 이자까지 합쳐서 1만 500원의 돈을 갚아야 한다고 해보자. 시민 B는 또 다른 시민 C에게 배를 구입한 뒤 그 배로 열심히 물고기를 잡아서 돈을 벌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과연 시민 B는 1년 뒤에 1만 500원을 중앙은행에 갚을 수 있을까? 정답은 ‘절대로 갚을 수 없다’이다. 왜냐하면 섬에 있는 돈은 딱 1만 원일 뿐, 이자로 내야 하는 돈 500원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금융 시스템에는 애초에 이자라는 것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자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중앙은행이 또다시 500원을 찍어내고 그 돈을 다시 시민 D가 대출하는 것이다.


이 모델을 한 마디로 줄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B가 아무리 물고기를 많이 잡아도, 화폐가 1만 원뿐이라 이자 500원을 절대 갚을 수 없다.”

언뜻 보면 맞는 것 같죠?


하지만 현실 경제는 다릅니다. 현실에선 수요와 공급이 만나서 가격이 결정됩니다. 물고기 가격이 시장에서 정해지기 때문에, 그 가격에 따라 충분히 이자 상환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의 가격이 한 마리당 20원이라면, B가 물고기 1000마리를 잡았을 때:

1000마리 × 20원 = 2만 원어치 물고기

충분히 이자 500원을 갚고도 남죠. 섬에 500원짜리가 없지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500원만큼의 물고기(25마리)를 은행(A)에게 주면 됩니다.

이런 게 가능한 이유는, 현실 경제는 ‘가격’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서, 화폐가 없어도 실물로 빚을 갚는 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랭그릭의 섬 모델에서 이게 불가능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이 섬엔 ‘가격’을 정하는 시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랭그릭의 섬 모델에서는 사람이 단 3명뿐입니다. 이들만으로는 수요·공급 논리에 따라 가격을 형성할 수 없고, 따라서 물고기의 가치도 결정되지 않습니다. 결국, 은행(A)은 물고기를 받을 근거가 없고, B는 파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섬 모델에서 B가 파산하지 않고 경제가 굴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긴요한 것은 가격입니다. 시장이 없으므로 가격을 외부에서 임의로 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편의상 1마리에 20원이라 하고, 아래와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어 봅시다:

1. B는 물고기 1000마리를 잡았습니다.

2. C가 물고기 500마리를 1만 원에 삽니다.

3. B는 받은 돈에서 이자 500원을 은행(A)에게 먼저 갚습니다.

4. A가 물고기 25마리를 500원에 삽니다.

5. B는 이제 남은 원금 1만 원을 은행(A)에게 갚습니다.

이러면 파산하는 사람 없이 경제가 잘 작동합니다.


B가 A에게 원금과 이자를 동시에 갚지 않고 이자만 먼저 갚는 게 일견 어색해 보이지만, 은행(A) 역시 소비자로 참여해야 경제가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자 5백 원을 먼저 받는 것은 은행이 B의 물고기를 사기 위한 것입니다.


물고기 가격을 임의로 정한 것이 인위적으로 느껴진다면, 정확합니다. 그게 바로 랭그릭의 섬이 자연스럽게 축소된 현실이 아니라 인위적인 가상 세계라는 증거입니다. 랭그릭과 이 모델을 인용한 엘렌 브라운, 그리고 EBS 다큐팀이 내린 결론 - 물고기 가격이 얼마든 이자는 못 갚는다 - 은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물고기 가격이 정해지고 A가 거래에 참여하면 바로 깨집니다.


이 결론은 경제 규모=화폐 총량이라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데, 심화 설명에서 더 자세히 짚어보겠습니다.


시장이 없는데 시장경제의 필수 요소(화폐, 이자)만 남은 모델이 랭그릭의 섬입니다. 이 섬에서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시장이 없고, 가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랭그릭의 섬 모델은 시장경제가 아닙니다.


이 모델을 보고 “자본주의가 원래 이런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착각일 따름입니다.


심화 설명  

이제부터는 약간의 수식이 나옵니다.

하지만 꼭 읽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이런 이론적 근거도 있다는 점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랭그릭의 섬 모델에서는 화폐 총량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돼 있죠. 하지만 실제 현실 경제에서 화폐량(M)은 다음과 같은 관계를 갖습니다.

MV=∑PQ

여기서, M은 화폐 총량(Money Supply), V는 화폐 유통속도(Velocity), P는 각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Price), Q는 각 재화나 서비스의 수요량(Quantity)입니다.

여기서 오른쪽(∑PQ)은 경제 전체의 규모를 나타내고, 왼쪽(MV)은 이 경제 규모를 움직일 수 있도록 사회에 공급되는 화폐량과 그 화폐의 유통속도를 나타냅니다.


현실의 중앙은행이 화폐를 더 찍거나 회수하는 결정은, 바로 이렇게 경제의 실제 규모와 상황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랭그릭이나 브라운이 말하듯 단지 "이자를 갚기 위해 억지로 돈을 더 찍어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랭그릭의 모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은행이 돈을 빌려준 뒤 다시 돈을 받기만 하고 전혀 소비하거나 지출하지 않기 때문에 V가 0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섬에서 경제가 유지되려면 화폐를 계속 추가 발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은 실제로 따지자면 경제 위기가 왔을 때 정부가 소비를 촉진하려고 펴는 정책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면 재난지원금이나 경기부양책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외부적 요인으로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키려는 게 목적이며, 이자 상환은 이런 경기 활성화 과정에서 따라오는 부수적 효과일 뿐입니다.


돈이 돌아야 이자를 갚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돌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장이 필요합니다.  

랭그릭의 섬에는 이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랭그릭의 섬은 자본주의의 축소판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핵심을 삭제해버린 왜곡된 가상세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자본주의의 고질적 한계로 일반화한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의 논지는 결정적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반드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며,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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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닉으로
25/08/01 23:16
수정 아이콘
원래 기본적인 경제학 모델들이 다 그렇죠
계층방정
25/08/01 23:19
수정 아이콘
이건 기본적인 경제학 모델도 아닙니다. 로저 랭그릭이나 엘렌 브라운이나 둘 다 경제학자가 아니에요.
이미등록된닉네임
25/08/02 00:16
수정 아이콘
경제학 모델의 추상화는 꼭 필요한 특성만 남기고 나머지를 무시하는 것이죠. 그 현상에 대한 본질적이고 핵심적 직관만 남기기 위해서요.
문제는 이 글을 보면 저 ‘모델’은 꼭 필요한 것을 남기지 않았고, 그건 그냥 무지성 단순화라는 거죠. 본질을 담은 특성을 지웠으니까요.
ekejrhw34
25/08/01 23:57
수정 아이콘
저는 제목을 보고 은행의 대출시스템을 생각했습니다. 대출로 신용이 창출되면서 화폐총량보다 많은 통화가 시중에 있기 때문에 상관없는거 아닌가 이런 식으로요 ^^
공실이
25/08/02 04:02
수정 아이콘
한가지 빠뜨리신 부분은 은행이 실물로써 상환을 받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군가에게 해당가격을 이용해서 돈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랭그릭의 섬에서는 그걸 돈으로 바꿀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랭그릭 섬 안에서의 논리는 맞습니다.
현실로 바꾸어보면 누군가는 돈으로 바꿔서 갚아야 하는거고 돈을 계속 찍어서 대출해주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파산이 생기는건 맞죠. 다만 이게 지속적으로 가능하도록 돈의 양을 조금씩 지속적으로 늘려서 감당하는것이 현대 금융 시스템이라 생각합니다.
계층방정
25/08/02 04:59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은행 자신이 교환에 참여할 수 있죠. 현실에서도 은행이 번 수익을 투자하거나 비용으로 쓰는 등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모링가
25/08/02 08:46
수정 아이콘
지급준비율과 신용제도가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이자 딜레마라고 생각해서 저 모델은 그냥 아닌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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