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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12/21 18:33:39
Name 윤여광
Subject [yoRR의 토막수필.#9]두 사람의 하늘


#
잔재가 남아
눈멀은 사내를 인도..
불꺼진 시야. 무색한 더듬거림

가슴에 굵은 바늘 2개.
둥근 가슴에 숫자도 없이.
멈춘 바늘 2개.

사내를 쳐다보는 일방적 시선
차가운 시간 속.
사내는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바늘이 멈춘 또 다른 이
굵은 바늘이 2개.
사내는 웃어 가슴이 따스하다

<2004. 08. 10. 윤여광>
#


  그와 만났던 때는 꽤 지난 날이다. 고등 학교로 올라가기 위한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긴장이 풀릴대로 풀린 나른한 16살의 어느 겨울날. 나는 그와 그 때즘 처음 만났다. 그는 흔히 동네에 하나 둘 씩 있을법한 바보였다. 사는 곳은 기왓장이 다 떨어져 나가 비가 오면 그대로 방안으로 빗물이 죽죽 새들어오는 허름한 한옥-한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움막이라 하기엔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이기에 차마 그리 부를 수는 없는.-이었다. 그의 집은 내가 가고 싶어하던 상위권 고등 학교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마침 그 학교 운동장에서 혼자 농구공을 튕기며 놀고 있을 때 그가 내가 있는 바로 뒤 스탠드로 슬그머니 다가와 앉는 것을 보았다. 딱히 나쁜 짓을 하고 다닌 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경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긴장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단순히 바보라는 이유만으로 동네 사람들이 그를 피해 다닌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서였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겠지. 그렇다고 내가 바로 자리를 옮긴다면 그건 오히려 그를 자극하는 행동이 되리라 생각하여 조심스레 계속 공을 던졌다. 한 번 힘이 너무 들어가 뒤쪽으로 심하게 튕긴 공이 그의 얼굴에 맞으면서 나는 문득 공을 버리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에 맞고 데굴데굴 굴러간 공을 히죽대며 들고 오는 그의 얼굴을 봤을 때 그런 경계심 따위는 칼 같은 겨울 바람에 흩날려 먼지가 되어버렸다. 단단한 농구공에 정면으로 얼굴을 맞았으니 그의 얼굴은 멀쩡할 리 없었다. 여기 저기 흙먼지가 들러붙어있고 코에서는 얇은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나는 그것을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기에 무작정 그의 손을 잡고 스탠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수돗가로 향했다. 아직 방학은 하지 않은 터라 수도꼭지가 잠겨 있진 않았다. 손이 얼 것 같은 찬 물을 그의 얼굴에 흘려도 그는 아무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피부가 오그라드는 소름 끼치는 촉각조차 그는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얼굴을 씻겨 준다는 것이 기쁘기라도 하듯 공을 가져올 때 보다 더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내가 왜 그 상황에서 그에게 존댓말을 썼는지 모르겠다. 아마 코딱지 만큼 남은 내 경계심이 그렇게 시켰을런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씻기고 보니 그는 나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키와 덩치만 놓고 봤을 때는 내 또래가 아닌 군복을 입히면 잘 어울릴 법한 20대 청년의 모습이었지만 얼굴만 봐서는 4살 어린 내 동생 마냥 동안이었다.

“나이가 몇 살이에요?”

  그게 내 마지막 존대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숫자 15을 가리키는 그를 보며 나보다 어리네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피식 하는 웃음이 새나왔다. 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주고 나는 바닥에 있는 공을 주워들었다.

“조금 더 놀다갈래? 아직 해 안 졌는데.”

  말을 하진 못했지만 공을 들고 운동장쪽을 향해 보이는 내 행동이 더 놀다 가자는 뜻인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는 또 환하게 웃으며 내 옆에 섰다. 그는 절대 내게 등을 보이며 먼저 걸어나가지 않았다. 걷다가 내가 공을 떨어트려 뒤돌아서면 그 역시 반드시 뒤로 돌아서 내게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그렇게 한참을 뛰다 해가 지려고 할 무렵 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교문 너무 허름한 집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켰다. 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 나는 공을 주워들고 그와 나란히 맞춰 걸었다. 보통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이라면 입 밖으로 뭐라 말하려 애쓰는 모습이라도 보여줄 텐데 그는 그런 행동이 없었다. 뭔가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는 꼭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거나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당황스러웠다. 흔히 웃는 말로 차라리 어버버 어버버 라고 하기라도 했다면 그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알아채기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애매모호한 손가락 마저 그와 우연찮게 운동장에서 한 번 놀게 된 이후로는 익숙해져서 가끔은 나도 친구들 앞에서 뭔가 말 할 때 손가락이 먼저 나가는 것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랜 적이 있다. 학교와 학원을 왔다갔다 하는 평일에는 그를 볼 수 없었지만 주말만 되면 그의 허름한 집 앞에 가서 으레 농구공을 튕기며 빨리 나오라는 위세 비슷한 것을 떨었다. 그는 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공이 튕겨 올라오면 방안에서 뭘 하는 소린지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다 떨어진 한지가 안타까워 보이는 문이 벌컥 열리고 웃는 얼굴의 그가 뛰쳐나왔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을 강아지가 산책 가자는 주인 뒤를 반갑다고 따라나오는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를 애완견 마냥 막 대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해주는 것 처럼 가끔은 군것질도 같이 하고 찬바람에 몸이 떨리는 것 조차 잊으며 신나게 뛰어다녔으며 비록 그는 대꾸하지 못하지만 학교에서 있는 짜증나는 일 이것 저것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말을 못한다 뿐이지 다른 행동 사항은 전혀 이상한 것이 없었으며 차츰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이 그를 왜 바보, 장애아라고 부르는지 의아해 지기 시작했다 .

“너 사람들이 피해다니고 기분 나빠하면 화나지 않아?”

  내 물음에도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언어 능력이 없는 것인지 나로선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시점에서 나는 더 이상 그를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그만이며 말을 못한다고 해도 수화를 배우거나 하다못해 하고 싶은 말을 메모지에 적어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상대방의 약간의 불편함을 수반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한 사람을 사회의 구성원 집단에서 외면 시킬만한 사항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럴 능력도 없는 내가 그를 구제해 주겠다 나선다면 오히려 그에게 상처만 남길 것 같은 생각에 그의 곁에서 지금처럼 친구로 남아있기로 했다. 성급한 동정은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 언젠가 노인정으로 봉사활동을 나갔을 때 한 할아버지께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챙겨드리다 오히려 그것이 그 분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겨 심하게 꾸중을 들으며 얻은 재산이 있었기에 그에게 만큼은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와 함께 노는 주말은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그렇게 겨울 방학을 맞이했고 그와 붙어 다니는 시간은 점점 더 늘어갔다.


#
멍하니.
흐린 초점은 그대의 등을 바라봅니다.
멀다고. 그리 말합니다.

기름이 떨어진 등불.
낡은 내 영혼 갉아내면 흩어지는 재로.
꺼져가는 등불 조금이나마 더 피울 수 있으려나....하고.

오시려나....하고...

당신의 등에 붙은 내 잔재는.
왜 그리 초라한지.
조각 하나 더 붙여도 좁지 않을 당신의 등이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흐르는 눈물.

그리고 눈물에 꺼지는 등불.

아아. 그의 등은 조금 더 멀어져서는...

<2004. 06. 29. 윤여광>
#


  그가 왜 그 곳까지 걸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알 수 없는 행동 때문에 내가 그와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언덕을 하나 넘어가면 강릉에서 제일 잘 산다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택가가 있다. 친구들은 흔한 말로 그 곳을 강릉의 강남이라고 불렀다. 상권이 크게 발달한 것도 아니고 관공서가 모여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티비에서나 볼 법한 으리으리한 집들이 단정하게 모여 하나의 동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 방학 내 임시 소집을 위해 집을 나선 1월의 어느 날 주택가를 지나갈 때쯤 학교로 이어진 큰 골목의 한 가운데서 뚱뚱한 중년의 사내에 한 사람을 바닥에 눕혀 놓고 쌍 욕을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일에 관심은 없었지만 학교로 가려면 그 길을 지나야 했기에 하는 수 없이 중년의 옆을 지나가는 순간 나는 길바닥에 엎어져 듣기 싫은 큰 소리로 욕을 하는 그 사내를 쳐다보고 있는 그를 보았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고 연유를 묻자 그는 성난 목소리로 되려 나에게 욕을 퍼붙기 시작했다.

“거지발싸개 같은 놈. 길거리를 다녀도 주제를 알고 다녀야지. 이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사내의 말을 듣자 하니 그는 단지 길을 걷던 중이었고 그 사내의 어린 딸이 그에게 다가가 애비와 마찬가지로 쌍욕을 하고 고사리만한 손으로 주먹질을 하는 것을 보고 그가 웃자 사내가 달려와 딸을 뒤로 물러 세우고 몰아붙이는 중 이라고 했다.

“아저씨. 얘는 아무 잘못한게 없잖아요.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 주제라뇨? 이 길 아저씨가 냈어요?”
“어린 놈이 왜 쓸데 없이 와서 참견이야. 너도 꺼져.”

  분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 봤을 때 그 자리에 멍청하게 웃고 있는 그는 저만치 서툰 걸음으로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달려가 그를 세우고 괜찮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발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 등을 돌리며 걷는 걸음에 또 내 값 싼 동정이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인지 후회가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친구라 생각하는 이가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을 외면하고 지나칠 순 없었다. 중년 사내를 말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연유를 듣고 난 후 타당하지 못한 언행에 언성을 높여 어른에게 대든 것. 그것이 내가 한 잘못의 전부였다.

‘주제를….거지발싸개….’

  중년 사내는 그가 자신과는 다른 환경의 그것도 자신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생활을 하는 그가 뭐가 그리 못마땅 했을까. 그는 단지 말을 못하고 지내는 환경이 불우할 뿐이다. 단지 살아가는 환경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이 인간을 배척한다는 것은 너무나 오만방자한 일이지 않는가. 단지 자신과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차이점을 약점으로 순식간에 포장해 버리는 그 얄팍한 사고에 화가 치밀었다. 그 뒤로 그의 집 앞에 가서 농구공을 튕기는 일은 없었다. 지나가는 길에 그와 스친 일 한 번 없었다. 추측하건데 그 이후로 그는 다른 곳으로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웃으며 걸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과 같아야만 웃음을 보이는, 때로는 그 웃음마저 가식이 될 수도 있지만 뭐 하나 틀리고 뭐 하나 틀리다 해서 서로 등을 돌리면 결국에 외로워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누군가를 배척하는 한 무리에 속해있다 하여 안심하기엔 바로 눈 앞에 서 있는 동료라 부르는 이와 자신과의 차이는 너무나 선명하다. 다르다는 것이 다가서는 데 한계가 될 수 있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만 보 전진의 촉매가 될 수 있다는 것. 고맙다는 말도 못 한 채 연락이 두절 된 환하게 웃는 그의 웃음이 어렸던 나에게 남기고 간 큰 선물. 찬 바람이 메마른 피부를 괴롭히는 겨울이면 생각나는 한 사람이 눈 앞에 아른하게 비쳐온다. 봄이 되면 사라질 그 모습에 조금은 그 선물이 더 간절해지는 추운 날이다.

-음악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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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 the tears
05/12/21 18:5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흐르는물
05/12/21 19:25
수정 아이콘
반가운 이름 이네요^^ 잘 보았습니다
아케미
05/12/21 21:39
수정 아이콘
차이는 결코 잘못이 아니라는 것, 너무나도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이죠. 반성하고 갑니다. 언제나 좋은 글 고맙습니다.
05/12/21 21:57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05/12/22 03:2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이번 글도.^^
유신영
05/12/22 15:42
수정 아이콘
후우..
윤여광
05/12/22 19:32
수정 아이콘
유신영님//한숨에 무슨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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