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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5/06/06 05:34:17
Name The Special One
Subject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지금 고인이 되신 할아버지는 머슴이셨다고 합니다. 나이 50이 넘으셔서 저의 아버지를 얻으셨고 제가 태어날때까지 장수하셨습니다.
아직도 제가 사탕먹고싶다고 할아버지한테 조를때 "옛다 먹어라"라고 물려주시던 한복의 플라스틱 단추맛이 기억납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머슴이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저의 아버지께서는 장농 깊은곳에 그당시 할아버지가 몇만원인가 주고
만드셨다는 족보가 들어있습니다. 이게 있어야 상놈이라는 소리는 그래도 안듣는다고 기어이 없는돈에 만드셨다고 합니다.

제 어릴적에는 초가집에 살았었는데, 20가구 밖에 되지 않는 깡촌에서도 초가집은 몇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 초가집에서 무려 삼대가
같이 살았으니 제가 찰리와 초콜릿공장을 읽으며 자신을 찰리에 이입하게 된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 입니다.

부모님은 중매로 만나셨습니다. 20가구 살던 제 아버지의 마을에서 십리정도 떨어진 집집마다 모여살지 않아서 마을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지역에 살던 저의 어머니는 20세 되던해에 아버지를 만나 결혼 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중학교때쯤 어머니가 푸념하듯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신혼여행이랄것도 없지만 결혼한 다음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같이 갔는데 길가에서 파는 오징어가 너무 먹고
싶어서 사달라고 했더니 니 아버지가 끝까지 안사주시더라. 그게 그렇게 서운할수가 없었어.."

그래도 태생부터 부지런하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남의 소작농으로 일하셨는데 몇년 지난 후에는 자그마한 땅떼기를
사셔서 거기에 하우스도 만드시고 오이도 재배하시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6살쯤되었을 저에게 "하우스 창문좀 닫아라"
라고 하시면 제가 하우스 밖으로 나가서 끝도 보이지 않던(그때는) 하우스를 따라 걸으며 창문을 닫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지금도
아내한테 자랑하곤 해요. "내가 이래뵈도 깡촌에서 하우스 농사도 지어봤어." 시골이라 계절 변화에 민감했는데 동짓날이면 어머니께서
찹살이 동동 들어가있는 팥죽을 끓여 주셨는데 지금도 잊지 못할정도로 달콤한 맛이었습니다.

하우스에서 살던 저희 가족에게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형과 제가 공부를 잘했던 것이었죠. 어머니는 회상하십니다. "선생님이 네가 공부를
너무 잘한다는거야. 서울에 가도 1등할거라고 꼭 가르쳐야 한다고 말야." 동생들 키우느라 초등학교 졸업도 못하신 어머니는 그게 한이
되어서 아버지를 설득해 그해 바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셨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첫 집은 지하였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반지하가 아니라 정말 까마득한 지하였습니다. 계단을 15개는 내려가야 했고 빛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원래는 미싱돌리던 조그마한 작업실이었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최악의 주거조건이라는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모두 다 갖추고 있는 그 장소를 얻기 위하여 부모님은 땅도 하우스도 파셨습니다. 좋은집 나쁜집을 구분할수 없었던 저도 그곳이 초라하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았던것 같습니다. 그때는 절대 친구를 데려오지 않았고 친구와 귀가할때도 그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쓸데없이 동네를 두어번 빙글빙글 돌다가 멀리있었던 친구를 바래다 주고서야 집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가락시장에서 남의 리어커를 끄셨고 나중에는 과일을 파셨습니다. 아버지는 불규칙적인 막노동 일을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힘든
삶에도 버틸수 있었던것은 그나마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던 저와 제 형의 학업때문이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어느날 놀랍게도
우리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서울이라지만 산을 올라가야 했고, 버스정류장도 지하철역도 까마득히 멀었지만 그래도 멀쩡한 빌라의
빛도 들어오는 2층이었습니다. 그날 어머니는 너무 좋으셔서 춤을 추셨습니다. 제 평생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시던 모습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보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불과 2년동안 그곳에서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막노동일을 하시다 보일러 기술자가 되셨고 보일러 회사에 취직하셨습니다. 아버지 월급날이면 같이 가던 중국집 이름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후로 15년쯤 지난뒤 살던 동네를 가보았습니다. 우리가 살던 빌라도 중국집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알게된 상사의 권유를 받아 보일러 대리점을 공동명의로 내셨고 망하게 됩니다. 망한 이유가 그 동업자의 도박빚 때문이며
아버지가 집과 회사가 다 넘어간 뒤부터 아주 가끔만 얼굴을 보이셨던 이유가 도망간 그사람을 찾으러 다니셨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 알게되었습니다.

수년간 노력해서 일구셨던 삶의 기반이 모두 날아가버린 부모님은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리셨습니다. 아직 고작 지금의 제 나이쯤 되었을 어머니도 40에 막 접어들었을 아버지도 지금 생각하면 삶을 놓아버리기에는 너무 젊으셨네요. 그 후로는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돈버신다고 배도 타셨고, 막일도 하셨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술을 드셨습니다. 어머니는 종교에서
안식을 찾고자 하셨고 그곳에서 원하던바를 얻으셨지만 기독교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집안은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로 공부를 잘하던 형은 빨리 돈을 벌겠다며 그당시 취업 잘된다던 수도공고에 진학했고, 그대로 대기업 기능직에 취직했습니다.
어정쩡하던 저는 인문계에 진학했고 서울에 적당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형은 군대 가기 전까지 모은 모든돈을 부모님께 드리고
입대를 했고 제대후 한푼도 돌려받지 못합니다. 지금도 가끔 얘기합니다. "나는 부모님이 제대하면 그래도 생활비 하라고 50만원은 주실줄
알았다. 복직신청을 한 후 회사 기숙사비도 밥값도 낼수가 없어서 상사한테 30만원을 빌렸는데 정말 그때는 죽고싶었다."

저는 대학에 입학한 후 방황했습니다. 항상 돈은 없었고 알바는 생활이었습니다. 과외를 두세개씩 하며 집세와 학비를 벌었고 밤 늦은 시간에는 학교앞 닭갈비집에서 돌판을 닭으며 푼돈이라도 더 벌고자 아둥바둥 거렸습니다. 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도 진취적이지도 못한 학생이었고 항상 성적표는 제 시력만큼 낮았습니다. 저는 현실을 저주했고 항상 도피처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휴학을 한 후 몇개월을 열심히 일해
400만원을 모은후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4년간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고 대학에도 영영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0여년의 세월이 지났고 형은 공무원 형수님을 만나 결혼을 했고 입이 떡 벌어질만큼 멋진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가난하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되어서 너무 좋다고 합니다. 딸에게는 자신이 살았던 끔찍한 주거환경을 대물림해주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학업을 포기하고 기술을 배우러 갔던 자신이 불쌍해서 딸은 능력되는한 잘 교육시켜 줄거라고 술만 먹으면 반복해서 말합니다.

저는 형처럼 강하지 못했습니다. 꿈도 없었고 바라는것도 없었습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후 영어를 주2일 가르치며 일용할 양식만을 벌어먹고 살던 제가 지금 아내를 만나서야 변하게 되었습니다. 서른이되어서야 데이트를 하면 돈이 많이든다는 것을 알았고 여자를 만나려면 차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결혼하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가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닥치는대로 일감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실력은 괜찮은 편이라 일감 소개는 많이 들어오더군요. 부르면 어디든지 가서 어떤 영어라도 가르쳤습니다. 어느 기획사에서는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아침반 수업을 했고, 밤 늦은 시간에는 영업끝난 강남의 미용실에서 디자이너들을 상대로 외국인 손님과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수능도 했고 SAT도 했고 외고입시도 국제중고 입시도 했습니다. 이렇게 3년을 벌고서 그제서야 전세집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제 결혼을 했고 아파트 분양도 받아서 2년뒤면 내 집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저도 형처럼 가난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있을까요?
남들은 너무도 당연한것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원망하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은 여전히 60대시며 젊으시지만 여전히 일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죠.

부디 가난은 내 대에서 끝나기를 빌고있습니다. 나의 가난이 자식 발목에 족쇄가 되어 꿈도 펼쳐보기 전에 날개를 꺾어버리는 일을 생각해보노라면 가슴 안쪽이 아려옵니다. 몇몇은 나보다 더 가난해도 크게 성공했으며, 누구는 나보다 더 힘들었어도 원대한 꿈을 이루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가난을 모르는사람은 잘 알수 없을겁니다. 힘든 여건에도 희망을 잃지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세상
많은분들 존경합니다. 저도 희망을 잃지않고 내 자식들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자전적인 글을 쓰고싶었는데, 글의 방향도 미리 정해놓지 않았고 퇴고도 하지 않아서 글이 많이 난잡합니다. 그럼에도 참을성있게 읽어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9-14 18:18)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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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15/06/06 05:58
수정 아이콘
가난에서 현재를 일구신 모든 분들, 존경합니다.
15/06/06 06:15
수정 아이콘
Respect
귀가작은아이
15/06/06 06:45
수정 아이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행복한 나날만 보내세요.
낭만토스
15/06/06 07:06
수정 아이콘
그래도 우리 부모님 대 까지는
한 만큼은 벌 수 있는 사회였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이들을 좋아해서 낳고 싶은데
나,와이프의 라이프를 포기하지 않으면 답이 안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비겁하게 포기해버렸습니다

포기하면 편해....는 아니고
아니 편한건 맞긴한데 참 거시기 하네요
이런 거시기를 풀려고 여기서 댓글로
시비트고 다니고 그러나 봅니다
어헣 내가 뭔 소리를 하는거야

그래도 저 처럼 비겁자는 아니시네요
화이팅입니다
천무덕
15/06/06 07:47
수정 아이콘
가난은 제약이 참 많지요..
우리 집도 굉장히 가난했고,지금도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전 가난을 알지 못하게 길러주셨습니다. 어릴 때 하고싶은 걸 다 해서 지금까지도 뭔가를 갈구하는 결핍증상이 거의 없네요. 그래서 제가 벌어서 부모님 빚 중 6천정도는 갚을 수 있었고요.(3천은 금융부채,3천은 집 리모델링비)
이렇게 살아오다보니 어릴 때의 기억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60을 바라보시는 아버지가 지금도 가끔 어릴 때 학비가 없어서 안양의 매형에게 학비를 달라고 경기도 광주부터 안양까지 걸어갔던게 얼마나 자존심 상했는지 아냐고 말씀하실 때마다 어린시절 기억이라는게 참 그 사람의 인생을 철저하게 묶어놓더군요. 트라우마라고 해야할지..
저도 그 아버지 이야기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다 큰 지금은 가끔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경제활동을 못하게 되면 수입이 끊기고, 내 주변엔 내가 기댈 사람이 없으니 내가 하는 일이 안되면 안된다는 강박이 있는듯 한데 이것도 가난과 관계된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쉽게 꺼내기 힘든 가난이야기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브랜드
15/06/06 07:51
수정 아이콘
멋지시네요. 멋지십니다. 반성하게 되는군요. 행복하게 사시길..
일간베스트
15/06/06 08:0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콩심는한예슬
15/06/06 08:08
수정 아이콘
글이 담담하게 참 잘읽히네요. 잘 읽었습니다.
15/06/06 08:33
수정 아이콘
저도 참 나름 가난하게 자랐다고 생각하고 그 때의 영향(주로 어머니의 영향)이 아직 인생 전반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거의 낭비를 안하고 계획적으로 지출하려고 노력하거든요.
근데 이게 또 케바케인게...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제 여동생은 오히려 과거에 잘 못살았던 사실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굉장히 지출에 관대하고 특히 해외여행 같은 지출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돈을 거의 모으지 않는 편)
이렇게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그 이후 라이프 스타일은 정반대이니...어떻게 보면 유전적인 이유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건 아닌지 생각하곤 합니다.(저는 어머니 쪽, 동생은 아버지쪽을 닮았습니다.전반적으로)
15/06/06 09:35
수정 아이콘
존경스럽네요.
15/06/06 09:57
수정 아이콘
대단하네요.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인고의 시간들이 얼마나 혹독했을 지 가늠이 안되네요. 저도 툭하면 부모 불만, 사회 불만하면서 가슴 속의 응어리를 풀으며 살았는데 스페셜 원 님처럼 희망을 품고 살아야겠네요. 종종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글들 올려주시길 부탁드려요.
파랑파랑
15/06/06 10:00
수정 아이콘
어느날 집에 돌아오니 빨간 딱지가 집안 곳곳에 붙어져있었고, 그 때부터 쌀 살 돈이 없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라면먹는다고 오히려 좋아했던 철없던 시절이 있었지요. 지금은 대출빚은 있어도 집안 빚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마음 한 켠을 답답하고 지치게 만드는 게 가난이란 놈인데, 극복하신 것 같아서 저도 희망이 생깁니다.
마음에 와닿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peoples elbow
15/06/06 10:04
수정 아이콘
조용히 추천 꾹
파란무테
15/06/06 10:07
수정 아이콘
많은 말을 댓글로 적고 싶지만..
저도 그랬거든요.
대단하십니다.
15/06/06 10:08
수정 아이콘
지금까지 충분히 열심히 살아오셨네요.
15/06/06 10:22
수정 아이콘
존경스럽네요. 저랑은 전혀 다르시네요.
인기있는여자애
15/06/06 10:3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15/06/06 10:57
수정 아이콘
십년전 취업하고 처음받은 성과급을 집안 부채처리하는데 다 쓰고 혼자 뿌듯씁쓸했던 기억이나네요
저도 혼자 가난을 극복한 케이스라 공감이 갑니다
15/06/06 11:43
수정 아이콘
부모님이 60대 이시면 앞으로 병원비만 쏟아부을 연세이신데 잘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유년의 기억은 지나가지 않지요. 옷처럼 항상 지녀야 하고 글쓴분이나 형님분이 그때보다는 낫기 때문에 그때 가난을 얘기할 수
있는거라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견우야
15/06/06 11:49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습니다...앞으로는 부모님과 행복한 날들만 함께 하실 것 같습니다.
.. 추천...
The Special One
15/06/06 12:11
수정 아이콘
자고 일어나보니 많은 분들께서 추천을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저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15/06/06 13:50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습니다. 앞날에 좋은일만 가득하실거에요.
구들장군
15/06/06 13:53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제 집안 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 합니다.
smalltalk
15/06/06 14:2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WeakandPowerless
15/06/06 14:56
수정 아이콘
행복만이 앞날에 펼쳐지시길 바라지만 계속해서 부모님들께 들어갈 돈 생각하면 정말 답답하네요...ㅠㅠ
그보다 조금 뒷세대는 노력해서 공무원 부인 만나도 집도 못사는 새대가 되기도 했고...
모두 힘내시길 바라고 제발 복지의 기본이라도 갖춰진 나라가 되길...
15/06/06 15:41
수정 아이콘
나중에 결혼해서 자제분이 생기고 훌쩍 자라 글쓴 분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 글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파란아게하
15/06/06 16:46
수정 아이콘
한줄한줄이 깊이있게 박혀있는
판화처럼 다가오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더불어 이런 글을 담담하게 쓸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추천으로
토양을 만들고 계신
다른 많은 피지알 회원님들께도 감사합니다.
15/06/06 18:12
수정 아이콘
멋져요 리스펙해요 이런 글솜씨랑 용기가 부러워요
tomboy21
15/06/06 22:25
수정 아이콘
힘든 시간 잘 이겨내시고 이렇게 멋진 글도 쓰시고 훌륭하시네요~
헬튼영감
15/06/07 00:0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비토히데요시
15/06/07 09:14
수정 아이콘
저도 어릴적엔 참 가난했었어요. 그때는 그게 좋은건지 싫은건지 부끄러운지 나쁜지 그런것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이겨내신 부모님이 너무 대단하시다는 생각 뿐이예요.
지니팅커벨여행
15/06/07 10:5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울 뻔 했어요.
저도 부유하게 자라지 못해 돈 쓰는 걸 잘 못하고, 특히 요즘 남들 다 간다는 해외여행 한번 못 갔네요.
물론 지금은 해외여행을 갈만큼 충분한 돈을 벌고는 있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과 자라온 환경에 얽매어 마음의 여유가 없거든요.
아무튼 정말 열심히 살아 오셨으니 앞으로는 본인을 위한 투자와 지출을 하시며 더 즐겁게 살아 가시길 바랍니다.
저도 이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저한테 투자 좀 해야겠어요.
웰치스수박
15/06/08 12:23
수정 아이콘
화이팅!
질럿퍼레이드
15/09/14 18:57
수정 아이콘
존경스럽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15/09/15 08:35
수정 아이콘
많은부분 제 삶과 비슷하여 공감가네요. 우리 모두 화이팅 합시다~!!
15/09/15 12:4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저와 비슷하네요.
은빛사막
15/09/15 12:58
수정 아이콘
이 좋은 글을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네요. 존경스럽습니다. 충분히 훌륭한 삶을 살아오셨어요. 응원합니다.
15/09/15 18:38
수정 아이콘
예전에 읽고 댓글을 달려다가 깜빡했는데, 지금 다시 읽다가 울 뻔 했네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가난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결국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힘드셨던 만큼 즐겁고 행복한 일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15/09/15 22:08
수정 아이콘
좋은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무룩
15/09/16 11:11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다다다닥
15/09/16 17:56
수정 아이콘
오늘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경유치원
15/09/16 20:26
수정 아이콘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었을 때보다 수 배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블루아즈나
15/09/17 10:46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15/09/19 11:29
수정 아이콘
글 서술하시는게 참 드라마틱하게 잘 쓰셨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가난 극복이 목표인 것은 너무 당연하고 좋은데, 부자가 되는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목표가 오로지 돈이 되버리면 삶이 피폐해집니다. 자식도 그저 가난하지 않을뿐이지 행복한 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을액션빔
15/09/19 15:53
수정 아이콘
멋집니다, 진심으로요,
네스퀵초코맛
15/09/19 21:26
수정 아이콘
형님이 장남으로써 집안 일으키려고 노력 많이했네요... 형님을 존경하시나요?
The Special One
15/09/19 21:45
수정 아이콘
네 어떤부분은 존경하고 어떤부분은 싫어합니다.
smallsteps
15/09/20 13:17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조금이나마 힘 얻고 갑니다.
오세돌이
15/09/21 01:16
수정 아이콘
어려운 기억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때 한 인간이 겪을 기쁨과 슬픔의 총량은 같다는 저의 은사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삽니다.
힘든 터널 뚫고 나오신만큼 앞날에는 즐거운 일 가득하실거라 믿습니다.
15/10/20 14:3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15/11/10 18:09
수정 아이콘
감동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6년째도피중
15/11/20 17:1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성공(?)한 이의 힘들었던 과거에 대한 회상. 그 과거의 산물인 부모를 볼때마다 다시 스며드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들에 대한 이야기...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죠. 그리고 암만 못살아도 결국 서울이 딛고 일어서기 좋은 조건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고요.

음...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읽지 않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은 글이었네요.
두 분은 가난을 딛기 위해 일어서셨습니다만 저는 그 가난에 익숙해져 버리는 길을 택했거든요. 비슷한 연배의 분이 극복(?)한 모습을 보니 좀 기분이 이상하긴 합니다. 사실 자격지심이죠.
23년째솔로
16/02/12 18:31
수정 아이콘
올해에는 [1년째극복중]으로 아이디를 변경할 수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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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4 천상병 「귀천」- 말줄임표에 담긴 의미 [18] 마스터충달13397 15/05/18 13397
2623 할거 없으면 농사나 짓던가 [15] 시드마이어14310 15/05/17 14310
2622 짧은 문장에 정서와 이야기 담기 (헤밍웨이와 이화백, 그리고 김훈의 글을 중심으로) [21] Eternity12071 15/05/08 12071
2621 [어린이날] 거짓말하면 손이 썩는 약 [11] 박진호9589 15/05/05 9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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