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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3/06 23:54:53
Name 아루에
Subject [일반] 대안 없는 학벌주의 부정론, 실력주의 부정론, 반전문가주의, 반계몽주의
학벌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까닭은 학벌주의가 절대악이어서가 아닙니다. 학벌주의가 공공선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으로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학벌주의가 공공선을 달성한다면 학벌주의를 배격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학벌주의는 문벌주의보다는 약간 더 나은 것 같지만 그보다 더 나은 시스템에 비하면 공공선을 달성하는 데 실패합니다. 그래서 다들 학벌주의를 타파하자고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력주의와 학벌주의를 손쉽게 등치합니다. 그러나 둘은 상당히 다릅니다. 학벌은 실력과 완벽한 상관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학벌은 (특정 부문에서의 특정 업무에 대한) 실력을 가늠하고 예측하게 해주는 유의미한 지표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니 학벌만으로 누군가의 (모든 부문의 모든 업무에 대한) 실력을 예측하고자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나 다른 더 나은 지표도 없이 학벌이라는 지표를 내동댕이 친다면 그 역시 어리석은 인사권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학벌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학벌이 아닌 다른 실력의 지표를 찾아야 할 겁니다. 그게 "그릿"이건, "시크릿"이건, "테스트"이건, "블링크"이건 뭐던지 간에요. 그러나 많은 경우 학벌주의 반대론자들은 학벌이 실력의 불충분한 예측변수라는 사실을 근거로, 그러므로 (딱히 더 나은 다른 대안도 없이) 학벌 자체를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위험천만한 결론으로 치닫습니다.

이러한 논의의 구조는 학벌주의 뿐 아니라 실력주의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실력주의 역시 공공선을 달성하는 시스템으로 불완전하고 불충분합니다. 그러나 아무 대안도 없는 상태나, 귀족주의, 혈통주의, 엽관제 보다는 실력주의가 공공선을 달성하는 더 나은 수단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실력주의를 로또로 대체하자 합니다. 어떤 이들은 실력주의를 인성, 품성으로 대체하자 하는데, 가만 떠드는 말을 듣다 보면 그 인성, 품성이란 정치적 편향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따위 학부생 레포트 결론 수준의 대안보다는 실력주의가 백 배는 낫습니다.

마이클 센델이 실력주의를 비판하고 학벌주의를 비판할 때 그리고 차라리 명문대생들을 기본 실력만 입증하면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하자 할 때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여러 부연설명들을 했습니다. 그는 실력과 운을 모두 변수로 고려하는 인재 선발 함수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여러가지 부연을 해가며 또 자기 주장의 비현실성도 감안해 가며 제시했던 거라고 기억합니다. 정작 센델 자신이 입학처장이 되면 정말로 돌려 돌려 돌림판을 돌릴 지 의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옹호론자건 반대론자건 이걸 "실력주의는 무작위 추첨만 못하다" 라는 이상한 걸론으로 왜곡해 독해합니다.

실력주의나 학벌주의는 분명 성공한 자를 과대평가하고 실패한 자를 평가절하하며 오만과 수치심을 증폭하여 공동체의 붕괴를 조장합니다. 그러나 그 대안이, 그래서 "혁명 전사들의 손자녀들은 입학이건 취업이건 창업이건 프리패스하는 그런 세상"일 수는 없습니다. 오지선다형 찍기 문제 출제를 통한 줄세우기는 필요악임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대안이 "부모의 후원으로 자기 스펙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는  금수저들끼리의 포토폴리오 자랑 대결 리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자주, 기존 시스템에 내재한 악을 규탄하는 이들과 그 악에 못 견딘 이들이 대안도 없이 그 시스템을 제 손으로 붕괴하고, 결국 시스템만 붕괴되고 아무런 대안도 없이 약육강식의 자연상태로 회귀하는 패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실력주의나 학벌주의에는 분명 우리가 타파하고 극복해야 할 악이 내재해 있으나 그 대안이 결코 문벌주의, 부족주의, 씨족주의, 족벌주의, 사색당파의 천거제, 엽관제, 연고주의, 또는 제비뽑기와 같은 순수한 무작위성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프라이팬을 피하려다 불구덩이로 떨어지는 일을 잘하는 짓이다 할 수 없습니다. 대안 없는 비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말은 언제나 기득권층이 저항세력을 입막음하는 데 쓰는 전가의 보도였지만 그러나 그 악용가능성만을 알리바이 삼아 아무 대안 없이 모든 것을 허물기만 하자는 몽상가의 선동을 잘하는 짓이다 해 줄 수도 없습니다.

전문가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는 전문가주의와 학벌주의 또 실력주의를 미친 듯이 혼동합니다. 그 옹호론자와 반대론자들 모두가 맹렬히 헷갈립니다. 전문성에 대한 존중은 title이나 degree의 숭배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라벨에 불과하고 사실은 그 전문 분야에 투여한 시간과 노력과 ㅡ어느 정도는 천부적인 ㅡ 재능에 대한 존중이 요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타이틀이나 디그리라고 하는 라벨이 종종 우리를 속이는 false signal, 가짜 신호라는 사실로부터 반전문가주의를 잘못 추론하고는 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쌓아 올린 고민의 결실들을 손쉽게 폐기처분하고 그들이 다시 거칠 필요 없게끔 만들어 놓은 시행착오들을 굳이 다시 처음부터 거치려고 합니다. 가짜 전문가가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진짜 전문가와 가짜 전문가를 식별하기 위한 분별력을 길러야 하고 이를 위해 일단은 전문가 앞에 겸손하되 항상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는 지침으로 이어져야지 모든 전문가를 무시하고 괄시하고 업수히 여겨도 좋고 내가 구글 몇 번 검색한 것으로 수 십 수 백 년 간 누적되어 온 전문성을 가벼이 적폐 취급해도 된다는 잘못된 습관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흔히 의사 변호사 등 특정 직역 특히 이른바 사짜만을 전문가로 취급하는데 전문성의 개념은 이보다 확대되어야 합니다. 누구건 자기 분야에서 진득히 공부하며 현실과 부딪혀 실천해 온 이들은 전문가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공무원은 그 공무 소관 법령 전문가이며 기업자는 그 상품 전문가이고 해녀는 바다 해산물 채취 전문가이고 쇼핑몰 운영자는 온라인 거래 중개 전문가입니다. 그리고 모두는 각자 자기가 전문성이 인정되는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 권위가 내재적으로 신성하고 고귀해서가 아니라, 전문가의 권위를 일단은 인정한다고 하는 이 사회 협약이 공공선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게 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스스로 판단했어야 할 뻔 했던 많은 사안들에 대한 판단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아낄 수 있습니다. 전문가를 전문가로 인정하는 것은 결코 반민주적인 것도 아니고 엘리트주의도 아니며 오히려 민주주의적입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을 수 있으며 그에 대해 발언권이 있는 전문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에 대한 겸손에서 우러난 존중을 마치 권위주의인 것인 양 깎아 내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오랜 검토를 거쳐 확신에 이른 전문가의 자기 주장을 마치 오만인 양 또 독선인 양 폄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문가에 대한 의심이고 회의라면 다행이고 또 바람직하겠으나 가끔 아니 자주 그것은 단지 독선과 증오와 진영논리와 열패감이 복합된 감정에 사로잡힌 자의 무분별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이들에게 침묵을 명령할 수는 없겠으나, 침묵을 권고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전문가를 존중하라는 것은 그의 학벌이나 그의 사회적 지위나 그의 외양이나 그의 외관이나 그런 것들 앞에 무조건 순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의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들인 고민과 훈련의 시간을 인식하고 그 시간의 힘 앞에 겸허히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이가 깡패다, 식의 무식한 연령주의나 경험이 최고다 해 봤어? 안 해 봤음 말을 말아, 식의 천박한 경험주의나 짬 안 찬 것들 말은 무시해도 돼, 식의 소모적인 연공서열주의와는 또 다른 것입니다. 전문가의 전문성을 고민과 훈련의 함수로 정당히 파악하지 못하고 다짜고짜 배척부터 하고 보는 자는 전문가 라벨이라는 우상을 맹목적으로 숭배부터 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을 겁니다.

계몽이라는 말이 재수없는 말로 인식되는 세태를 보고 칸트는 통탄할 것입니다. 계몽이라는 말을 우리는 일방적인 "교육"이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계몽하겠다고 드는 자나 계몽하려 들지 말라고 발끈하는 자나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나 계몽은 타인만을 계몽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계몽은 언제나, 시작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을 계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몽은 미몽으로부터의 해방인데, 타인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미몽으로부터 해방합니다. 계몽은 결코 자신의 우월한 지위의 반복적 재확인이 아닙니다.

계몽은 계몽주의자들이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공자인지 누군지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 하나는 반드시 내 스승이라 말할 때 그는 이미 계몽주의자였던 겁니다.

"나는 너를 계몽하겠노라" 말하는 이를 그러므로 섣불리 꼰대 취급하면 안 됩니다. 그가 "너를 계몽하며 나 역시 계몽될 각오가 되어 있노라" 한다면 그리고 그 말대로 한다면 그는 꼰대가 아닌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나는 신처럼 불변하겠으니 너만 계몽되어라" 하는 꼰대와 "나는 계몽될 필요가 없는 온전한 자이니 나를 계몽하려 들지 말라" 하는 꼰대들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백가쟁명의 시대에서 하나 달라진 것 없는, 반계몽주의의 시대입니다.

아무 대안 없는 학벌주의 부정론, 실력주의 부정론, 반전문가주의, 반계몽주의는 학벌주의, 실력주의, 전문가주의, 그리고 계몽주의라는 이름의 독선만큼이나 경멸받아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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