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인은 『8월의 폭풍』의 역자이자 연재소설 『경성활극록』의 저자임을 먼저 알리는 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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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일본제국은 최악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를 기점으로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며 필리핀을 비롯한 점령했던 모든 도서지역을 다 뺐긴 일본에는 파멸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45년 4월, 악전고투 끝에 이오지마 섬을 점령한 미군은 이곳을 B-29 전략폭격기의 기지로 전환하여 일본 본토의 주요도시를 목표로 대대적인 전략폭격을 퍼붓기 시작했으며 오키나와에 상륙해 대전투를 벌였습니다.
전시내각인 도조 히데키 내각과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연달아 사퇴하며,은 해군제독 출신이자 쇼와 천황의 내대신이었던 스즈키 간타로 남작이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대본영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대본영은 표면적으로는 1억총옥쇄를 내세우며 미군과의 본토결전을 부르짖었지만, 실은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억총옥쇄와 본토결전 운운은 어디까지나 패배의 와중에서도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내며 강화협상을 치른다는 의도였습다.
대본영이 원하는 것은 조건부 항복이었습니다.
일본 내각 구성원들을 전범재판에 기소하지 않으며 천황제 통치를 유지하고 조선과 대만의 식민통치 유지를 "명예로운 조건"으로 관철하여 연합국에 항복한다는 것이 대본영의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무조건 항복요구와는 상충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미국 국무부 내에서 무조건 항복은 오히려 일본의 저항의지만 높일 것이라는 지일파 관료들의 주장이 있긴 했지만,루스벨트 행정부와 이후의 트루먼 행정부 모두 무조건 항복을 일본에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서방연합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본 엘리트의 소련관은 놀라울 정도의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소련은 천황의 신성성과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는 사악한 빨갱이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1945년 4월 시점의 소련은 4년 동안 불가침조약을 지키려 노력하면서 연합국 국가 중에 유일하게 일본과 전쟁상태가 아니며 정상적인 외교통상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부담을 덜어주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에 대한 인식이 호의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불교철학자이자 대동아공영권으로 대표되는 반서구 사상에 영향을 끼친, 이른바 "교토학파"의 니시다 기타로는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의 사위인 호소카와 모리사다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래의 세계는 어떻게든 미국적 자본주의적이 아니고 아무래도 소비에트적이 될 것이다."
불교철학자란 사람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천황의 내대신인 기도 고이치 후작은 은행가 무나가다 하사다카와의 대화 중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공산주의라고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까지 겁을 낼 것은 아니다. 세계가 모두 공산주의가 되어있지 않은가. 유럽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아직 남아있는 것은 미국 정도이지 않은가. (중략) 지금 일본이 당면한 상황을 볼 때, 이제 하는 수 없다.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이 좋다. 미국과 영국에 항복해서야 되겠는가라는 기운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결국 황군은 러시아의 공산주의와 손을 잡아야 할것이 아닌가."
천황의 내대신이란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 후작은 분명 루이 16세와 니콜라이 2세의 운명을 잊어버린 게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대소인식의 변화 속에서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강화협상을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이 나치와 소련의 싸움에서 나치를 도와주지 않았으니 소련도 그 반대급부로 일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한 견해에서 대표적으로 표출된 주장은 해군 교육국장 다카기 소키치 소장의 파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다카기 소장은 계급은 소장이었지만 1937년에 독-이-일 삼국동맹 발상을 처음으로 개진한 사람으로 무시 못할 영향력을 가진 전략가였습니다.
다카기 소장이 제출한 "중간보고안"은 소련을 동북아시아에 끌어들여서 미국과의 충돌을 유도한다는 방안을 담고 있었습니다.
다가키 소장의 계획에 의하면 소련이 원하는 것들, 예를 들어 북사할린 이권의 반환이나 어업권의 반환 등을 주고 중국 화북지방에서 일본군을 철수하며 소련과 협약을 맺어 화북지방에 소련군이 남하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군이 중국 남부에 상륙한다면 자연스레 북상하다가 소련과 충돌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은 미소 충돌 와중에 운신의 폭이 넓어지며 전쟁을 멈추고 내실을 다지다가, 소련과 미국의 힘이 약해지면 다시 웅비한다는 것이 다가키 소장의 주장이었습니다.
다가키 소장의 이러한 발상은 유명한 항공모함 제독이자 당시 해군 군령부차장(참모차장)이었던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도 공유하는 발상이었습니다.
오자와 중장 또한 중국 화북지방에 소련군을 끌어들여 미소충돌을 유도한다는 방안을 해군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육군참모차장 하타 히코사부로 중장도 일본의 약화가 장차 미소간 세력균형에 소련에 불리함을 가져올 것이니, 소련을 일본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세력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발상들을 기초로 대본영은 1945년 5월 11월부터 소련을 통하여 미국과 강화협상을 한다는 일소교섭요령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일소교섭요령에 따르면 장래 소련이 미국과 대항할 관계로 발전할 것이니 일본, 소련, 중국이 단결하여 미국과 영국을 상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소련의 참전 방지, 소련의 중립 일본과 소련이 대항하여 미국에 대항한다는 사안을 교섭목적으로 합니다.
이 목적을 위한 교섭요령은 우선 1905년 포츠머스 조약과 1925년 소일기본협약을 폐기하고 아래 사항들을 소련에 양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 북사할린 반환
2. 어업권 반환
3. 쓰가루해협 개방
4. 북만주의 모든 철도 양보
5. 내몽골 괴뢰정권을 소련의 세력권으로 양도
6. 뤼순과 다렌의 소련 조차
대본영 회의에서 전 총리 히로타 고키로 하여금 일본 주재 소련대사 야코프 말리크와 사전교섭을 진행하고 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를 소련에 특사로 파견하여 스탈린에게 교섭안을 제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대본영의 대표적인 강경론자인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대장 또한 소련과의 교섭에 기대감을 보였습니다.
"소련은 전후에 미국과 필히 대치하게 되는 관계로 일본을 약화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상당히 여유 있는 태도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신중론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련에 교섭을 맡기면 감당할수 없을 정도로 큰 대가를 요구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은가?"
그러나 대본영의 다른 인사들은 대소교섭요령을 만장일치로 찬성했습니다.
스즈키 총리는 대소교섭요령을 확정지으며 이렇게 발언했습니다.
"스탈린 수장은 사이고 난슈 같은 사람이니 그에게 종전교섭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
사이고 난슈는 사쓰마의 유신지사이자 유신삼걸 중 하나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신의 영웅인 사이고 다카모리에 스탈린을 비유할 정도로 신뢰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는 스즈키 총리가 바보여서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아나미 육군대신을 비롯한 강경론자들은 완강히 미국과의 교섭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소련을 통한 교섭이라면 괜찮다는 의사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강경파를 달래기 위해서는 소련에 접근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스즈키 내각은 소련이 중재자로 나서 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소련과 미국의 충돌을 유도하여 운신의 폭을 확보하고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고 꿈꾸며 대소교섭을 시작하였습니다.
소련을 두려워하고 혐오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만들어 완충지대로 삼으며 하산호 전투와 할힌골 전투를 도발한 것이 몇년 전임을 감안하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헛된 꿈에 불과했습니다.
스탈린은 일본의 구상을 들어줄 생각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