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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1/18 12:49:16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비운의 소련 외교관 막심 리트비노프 (수정됨)
막심 리트비노프(1876~1951)

220px-Litvinoff_Profile.jpg

사회주의 혁명가, 정치인, 그리고 소련의 외교관. 원래 그의 이름은 마이르 헤노흐 발라흐 핀켈슈타인(Meir Henoch Wallach Finkelstein)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부유한 은행가 가문의 차남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젊은 그는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고 그때부터 막심 리트비노프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여느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같이 그 또한 1901년 체포당하고 수감되었는데, 여느 사회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러시아 제국의 교도소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거냐.....). 

러시아에서 탈출한 후 그는 스위스에 망명했고, 그곳에서 그 유명한 [이스크라]의 편집부원으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영국 런던에 가서 사회주의 운동을 재개했는데 그곳에서, 대영제국 도서관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이 둘은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산책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볼셰비키 운동에 가담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러시아에 돌아가서 1905년 러시아 혁명을 지원하게 됩니다. 

1905년의 혁명의 결과로 러시아에 최초로 두마가 개설되지만, 차르 정부는 사회주의자 및 볼셰비키들을 더욱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리트비노프는 다시 망명길에 올랐고, 이번에는 정말 오랫동안 해외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10년이 넘게 말이죠. 그는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서 볼셰비키를 위한 무기 및 물자 조달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넘나들면서 무기를 밀수했고, 핀란드와 흑해를 통해 러시아에 있는 동지들에게 물자를 조달했습니다. 1907년에는 제5차 사회민주주의노동당 전당대회 참석을 위해 잠시 런던에 가게 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그때 그의 룸메이트가 다름 아닌 [요시프 스탈린]이었죠. 

그는 프랑스에 다시 돌아와 활동을 하다가 티플리스 은행 강도 사건(스탈린이 기획한 유명한 은행 강도 사건이죠)에 연루된 것이 발각되어 1908년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아일랜드 벨파스트로 재차 망명을 떠나고 그곳에서 유대인 초등학교에서 외국어 교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아일랜드 시골생활에 지쳤던 것일까...1910년에 다시 런던에 가서 그곳에서 다시 활발한 사회주의 운동을 재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죠. 그는 처음에 열렬한 반전주의자였지만,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영국은 조약에 따라 마땅히 참전해서 벨기에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반전주의와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검을 쥐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검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오직 방어목적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모여있을 수 있는 이유는 대영제국의 해군이 바다를 보호하고, 수백만명의 연합군이 독일을 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독일제국이 승리한다면, 우리가 통과시키는 모든 결의안은 러시아 국립은행의 수표만큼 무가치해질 것입니다."

한편 리트비노프는 영국에서 생활하면서 한 유대계 영국여인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이비 로우(Ivy Low). 유대인 교수이자 유명 작가의 딸로 부유한 가정 출신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할아버지, 숙부들 모두 [Sir] 호칭을 받은 상류사회의 인사들로, 어떻게 그녀가 러시아 출신의 사회주의자를 결혼할 수 있었는지 참 아리송합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권은 그를 주영국 전권대사로 임명하였으나 영국은 볼셰비키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지위는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곧이어 러시아는 내전에 빠지고 연합군은 백군편에 서서 러시아 내전에 개입합니다. 리트비노프는 당연 이에 반발하여 영국을 가열차게 비난하였고 영국은 그를 체포하게 됩니다. 결국 볼셰비키 정부는 자신들이 포로로 잡은 다른 영국인과 그를 맞교환하면서 리트비노프를 러시아로 귀국시킵니다. 리트비노프는 거의 15년만에 모국땅을 밟게 된 것입니다. 

모스크바에 귀환한 그는 인민위원회 외교분과 소속으로 일했고 적백내전 당시 영국, 프랑스 및 기타연합군 측에 포로로 잡힌 러시아인들 석방협상에 몰두했으며 이들을 대부분 귀환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영국 및 프랑스는 간접적으로 볼셰비키 정부를 인정하게 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오랜 외국 경험, 영국인들과의 친분, 레닌과의 친분등을 인정받아 그는 곧 소련의 외교차관이 되었고 그의 주도로 오히려 당시 소련 외교장관의 의향에 반하면서까지, 소련은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서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서명국들은 조약을 비준하는 데 실패했고, 리트비노프는 역으로 리트비노프 의정서를 제안하면서 여러 국가들의 동참을 얻어냅니다 (참고로 Protocol은 Treaty에 비해 구속력이 현격히 낮지만 더 많은 참가국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국제사회의 왕따였던 소련을 국제무대의 정당한 플레이어 부활시킨 것입니다. 

여러 업적을 인정받았고 또 스탈린과 개인적 친분도 있었던 그는 1930년 소련의 외교장관 자리에 임명됩니다. 그는 이후에도 눈부신 외교적 업적을 일궈냅니다. 1933년 미국으로부터 공식적 인정(formal recognition)을 받아냈으며 1934년에는 국제연맹에 정식으로 가입했습니다. 그런 외교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몹시 불편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나치의 집권]이었습니다. 히틀러의 반공주의는 전혀 비밀이 아니었으며 그는 틈만 나면 유대-볼셰비즘을 박멸시키겠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침 리트비노프는 유대인이었고 또 볼셰비키였으니 나치독일은 그에 대한 폭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리트비노프 또한 맹렬히 대응했습니다. 그는 국제연맹에서 히틀러는 위험한 인물이며 유럽을 불태울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나의 투쟁]이 그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그는 프랑스에 가서 과거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상기시키면서 프랑스와 러시아가 독일위협에 맞서 공동의 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프랑스는 그닥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프랑스의 반공주의도 상당했으며 둘째로는 당시 프랑스의 외교는 영국외교에 종속되어 영국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소련과 협력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트비노프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어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 루이 바르투의 협력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프랑스-소련 군사협약 체결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왕과 함께 하는 행사에서 테러사건으로 목숨을 잃게 되고, 바르투의 후임자 피에르 라발은 소련과의 협력을 중단합니다. 

하지만 리트비노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를 설득할 수 없다면, 영국과 직접 담판을 짓고자 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반공주의]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반공주의의 최전선이었습니다. 영국 언론들은 매일같이 반공뉴스를 퍼뜨리곤 했습니다. 리트비노프는 자신의 대리인 이반 마이스키를 통해 영국 언론사들과 활발히 만나면서 그들을 설득했고, 반소련 기사를 어느 정도 감소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영국의 많은 인사들과 교류를 했고 특히 훗날 총리가 되는 앤서니 이든(Anthony Eden)과 돈독한 관계를 맺습니다. 심지어 앤서니 이든은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고 리트비노프에게도 우호적이어서 소련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따라서 리트비노프는 앤서니 이든의 국빈방문을 기획하고 모스크바에 초대합니다. 서방세계의 장관급 인사가 소련에 가는 것은 최초의 일이었고, 소련으로서도 이를 위해 최고의 예우를 준비했습니다. 심지어 어려울 거라고 생각되던 스탈린과의 면담도 기획했습니다. 리트비노프는 스탈린에게 영국의 협조가 이루어질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앤서니 이든의 방문은 그저 사건에 지나지 않았고, 스탈린, 몰로토프, 리트비노프 소련 내각의 주요요인들이 모두 참석한 만찬을 가졌음에도 그는 본국에 스탈린은 그저 [야만인]이라고 보고하는 등 소련의 [집단안보 - 영불러 3자동맹] 제안에 대해서는 완전히 냉랭했습니다. 리트비노프로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엎친데 덥친격으로, 영국의 외무장관은 아주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던 [할리팩스 경]으로 교체되고 영국은 소련과 협조하는 대신 독일과 협조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뮌헨을 방문하고 괴링에게 대영제국은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언했습니다. 

그 후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심지어 체코에서까지 위기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리트비노프에게 마지막 기회를 줍니다. 어떻게든 독일을 막아보라. 이에 리트비노프는 다시 [집단안보, 영/불/러/폴/체코의 방위동맹][체코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영국과 프랑스 및 폴란드와 회담을 갖습니다. 아주 길고 지루하고 또 어려운 협상이었습니다. 폴란드는 소련의 모든 제안을 비토했고, 프랑스는 우유부단했으며 영국은 이러다 저러다 결국 폴란드와 의견을 같이 하게 됩니다. 리트비노프는 완벽히 실패한 것입니다. 

결국 1939년 리트비노프 집무실에 베리야와 몰로토프가 NKVD 요원들과 함께 찾아와 그의 해임을 알렸고, 그의 측근들이 모두 고문당하거나 처형당했음을 알렸습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는 과부가 된 레닌의 부인과 친분이 있어 목숨은 건질 수 있었고, 한동안 근신해야 했습니다. 스탈린은 몰로토프로 장관을 교체한 후 정책을 180도 선회하여 오히려 나치독일과 협상을 했고, 리트비노프의 해임건을 들어 볼셰비키는 유대인들을 모두 숙청했다는식으로 히틀러의 환심을 사고자 했습니다. 스탈린으로서도 영국과 프랑스와의 협상이 모두 실패한 이상, 독일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다행히 리트비노프의 근신은 짧았고 얼마 후 미국 대사로 파견되었고,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그곳에서 나치독일을 규탄하면서 자신은 옛날부터 이 날을 경고했다면서 미국도 참전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참전 후 미-소 협력을 원활하게 하는 중개인이 되었고 종전 후 1951년 교통사고 후 그 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일각에서는 NKVD의 암살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그는 스탈린과 항상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말하면서 스탈린의 연관성은 부인했습니다. 과부가 된 아이비 로우는 계속 소련에 거주하다가 70세에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그곳에 묻혔습니다.

막심 리트비노프의 손자 파벨 리트비노프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소련에 환멸을 느끼며 반소활동을 전개하다가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출처1: 위키피디아 (영어)
출처2: Arte Docu "Le pacte Hitler-Staline" (Arte 채널 유튜브,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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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crimosa
19/01/18 14:4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anddddna
19/01/18 15:09
수정 아이콘
손혜원 글 때문에 이런 글이 묻히네요
aurelius
19/01/18 15:25
수정 아이콘
앞뒤로 조회수 차이가 넘사벽이네요 크크크. 이런 글은 별로 재미가 없나봐요 ㅠㅠ
명란이
19/01/18 16:37
수정 아이콘
2222
초식성육식동물
19/01/18 16:2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애초에 소련이 독일과 손을 잡은 이유가 있었군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참 아쉬운 부분 중 하납니다.
저항공성기
19/01/18 16:29
수정 아이콘
영프와 소련이 상호 간에 신뢰관계가 전혀 없어서 나치독일이라는 진짜 위기에 제대로 대처를 못 한 사태죠. 그런데 소련도 딱히 할 말은 없는 게 결국 독소 불가침 조약 맺고 폴란드 반으로 갈라 먹었으니 머...
aurelius
19/01/18 17:03
수정 아이콘
그게 정말 재미있는게,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에 가서 사실 반코미테른 동맹(독일/이탈리아/일본)은 소련을 겨냥한 게 아니며 대영제국을 위시한 자유주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한 동맹이라고 말하면서 스탈린의 환심을 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농담조로 소련도 반코미테른에 가입하는 게 어떠냐고 떠보니까 스탈린은 [오늘부로 나도 반공주의자요]라고 대답했다는 것. 그리고 리벤트로프는 스탈린에게 구 러시아제국의 영역을 회복하는 데 독일이 협조하겠다고 약조했고, 이는 폴란드 침공 후 지켜졌습니다. 키신저에 따르면 스탈린은 정말 엄청난 [현실주의자]였다고 하는데, 히틀러에 대해서만큼은 정말 멍청하리만치 순진했고 또 믿었습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는 당일까지 소련은 독일에 군수품을 보냈고 히틀러가 실제로 침공했을 때 스탈린은 끝까지 믿으려고하지 않았죠. 정말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걸그룹노래선호자
19/01/19 08:58
수정 아이콘
그럴만한게 소련은

유럽 추축국 1인자인 독일과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도 모자라서 동쪽의 추축국 일본과도 소련 - 일본 중립조약을 체결해서 양쪽의 추축국과 조약을 체결한, 완전히 "이거 완전 추축국 아니냐?" 수준의 상황까지 가기도 하였죠.

하지만 곧, 독일의 뒷통수로 인해 소련은 급속도로 추축국에서 빠져나와 연합국행.

한편, 소련 - 일본 중립조약은 독소 불가침조약보다 인지도는 낮지만 그 명줄은 길었는데,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소련과 일본간의 교전은 일어나지 않다가, 일본 패망 직전에 소련이 만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게 되죠.
강동원
19/01/18 16:41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
19/01/18 17:41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자꾸 누군가 연상되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히틀러에게 밉보였던 독일의 폰 노이라트가 생각나네요.
리벤트로프에게 외무장관 자리를 내어주게 되는 그 노이라트요. 난세가 앞에 펼쳐질때 원치 않아도 조금 옆으로 비껴서는 것도 능력인 것 같습니다. 다만 자신의 구상/이상이 부정당하고 목숨만 건져서 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정말 그 개인에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조차 가지않습니다...
첸 스톰스타우트
19/01/18 18:27
수정 아이콘
그래도 이정도면 말년이 그렇게 비극적이지는 않네요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었네요
19/01/18 19:51
수정 아이콘
대세를 읽는 것이 중요하지만, 대세란 결국 확률일 뿐. 사람을 읽지 못하면, 미래를 완전히 잘못 판단할 수 있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0년째도피중
19/01/18 23:40
수정 아이콘
발버둥치고 발버둥쳤지만 그리고 능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천운이 따라주지 않아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요. 덕택에 새로운 이야기 알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야다시말해봐
19/01/19 00:36
수정 아이콘
예전부터 아우렐리우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던데 번역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시고 글이 술술 읽히게 매끄럽게 잘 쓰시네요.
특히 외신기사 원문 링크 해주시는 건 항상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원문을 읽고 비교해보면 거의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번역을 잘하신다고 느꼈습니다.
펠릭스30세(무직)
19/01/19 03:34
수정 아이콘
그러고 보니 아우렐리우스님의 본지은 마더 러시아 였었지요.

예전에 독소전쟁 때 뿌터 잘 읽고 있습니다.
껀후이
19/01/19 05:15
수정 아이콘
매번 양질의 역사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선추천후감상!!
출입문옆사원
19/01/19 08:26
수정 아이콘
스탈린이 지독한 현실주의자란게 재밌네요. 몽상가인 히틀러와 동족혐오(?)인줄 알았는데 서로 죽을때까지 이해못했을것 같넉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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