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글은 제가 엔하위키에 항목을 작성했던 글이라
그런데 연나라 지역은 중국의 북방으로, 바로 그 막북의 코 앞에 있는 지역입니다. 당시 주원장은 황자들에게 각각 수천명에서 수만명의 병력을 주고 각지의 왕으로 봉해 명제국의 울타리, 즉 번병(藩屛)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토록 중요한 지역을 '연왕' 이었던 주체는 책임지고 있었으니, 이 사실만 보아도 주체가 어떤 능력을 가진 인물인지 짐작 할 수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주체는 황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들이 죽으면 손자가 대를 잇는 것이 맞다." 는 논지가 나왔고, 이를 반박할 명분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명태조의 후계자가 된 인물은 죽은 주표의 아들, 주윤문(建文帝)이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건문제 주윤문
1398년 5월, 난세의 풍운아였던 주원장은 드디어 쓰러지고 말았고 주윤문은 제국의 적법한 황제로 즉위, 건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제국을 통치하는 개성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주원장이라는 인물이 괴물 같은 능력과 더불어 악마적인 과감성, 그리고 추진력을 더해주는 잔혹함을 갖춘 대단히 강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건문제는 학문을 좋아하고 대단히 선량한 마음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에 따르자면, 건문제는 아버지인 의문태자가 병에 걸렸을때 14살의 몸으로 시종하여 2년간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마침내 의문태자가 사망할 무렵이 되자, 건문제는 호리해져서 몸을 해칠 정도였습니다. 주원장은 이 손자를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실로 효심이 지극하지만, 도리어 자신을 생각하지 않느냐."
지난 명태조 홍무제의 집권 기간 동안 학자들과 문인들은 괴멸적인 대타격을 입었습니다. 가족을 모두 잃은 유랑민 출신이자 탁발승을 하며 중국을 떠돌았던 주원장은 난세에 시문을 외웠던 문인들에게는 호감이라곤 조금도 가지지 않았고, 그 악마적 카리스마와 숙청의 공포에 많은 학자들은 숨을 죽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새로 집권한 선량한 젊은이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건문제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이러한 인물들이 미래의 황제와 보조를 맞추었다는 사실은 그리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황자징, 방효유
그러한 의도를 보인 인물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단연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 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인물일까요? 제태는 율수(溧水) 출신의 인물로, 홍무 17년 응천부 향시(鄉試)에서 첫번째로 천거된 이후에 예부와 병부 2부의 주사(主事), 그리고 좌시랑(左侍郎)을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했던 인물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제태 열전' 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주원장은 제태에게 변경 장수들의 이름을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명나라가 어떠한 나라입니까? 실로 그 당시 소위 '문명인' 에게 알려진 세계의 4분의 1을 장악하고 있는 초거대 제국 입니다. 또한 제국의 변경은 막북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북으로 이르면 고려 - 조선에 이르고, 해안선에서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기라성 같은 명장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태가 대답해야 할 변경 장수들의 이름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을까요? 제태는 모든 장수들의 이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상세하게 대답했습니다.
주원장으로서는 꽤나 놀라웠을 것입니다. "이 녀석 봐라?" 라는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다시 한번 이 괴이한 관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도적(圖籍)들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개국 초기의 정권이었으니 전국에서 활개를 치는 이름난 도적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역시 대단하기 곤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태는 이번에도 놀라운 대응을 했습니다.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이를 황제게 바치는 것입니다. 주원장이 살펴보니 이는 일종의 수첩이었는데, 그 속에는 도적들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고 세밀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홍무제로서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이 괴팍한 황제는 제태를 기이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 당시부터 이렇게 재간을 부렸을 정도이니, 미래의 황제를 생각하고 있던 건문제에게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황태손 시절부터 그는 제태를 중하게 여겼는데, 제태는 남 몰래 하나의 방안을 건문제에게 올렸습니다. 바로 삭번(削藩)의 일 입니다.
삭번이 무엇인가 이야기 하기전에, 또다른 인물인 황자징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황자징은 본명이 아닙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식(湜)으로, 그는 홍무 18년 회시에서 당당히 1등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아직 건문제가 즉위하기 전, 이 젊은이는 황궁의 동각문(東角門)에 앉아 당시 태상시경(太常寺卿)이었던 황자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왕들이 나의 존속(尊屬)이고, 또한 중무장 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을 어기는 일이 많으니 어찌해야 맞겠습니까?" 황태손의 질문에 그의 측근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 왕들의 호위병들은 고작 스스로 지키기에만 족할 뿐입니다. 만일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육사(六師=중앙군)를 믿으신다면 누가 감히 버틸 수 있겠습니까? 한나라 시절에 반란을 일으킨 칠국은 결코 약하지 않았지만, 끝내는 패망하여 멸망했습니다. 대소(大小)와 강양(強弱)의 세력이 같지 않으니, 순역(順逆)의 이치도 서로 다를 것입니다."
황자징은 한나라 시절의 칠국을 언급했습니다. 이는 전한 시절에 벌어진 '오초칠국의 난' 을 말합니다. 이 사건 때 중앙의 정부와 각지에서 세력을 가진 제후들은 대립했고, 게중 가장 강력한 제후왕인 오초 양국은 다른 칠국과 함께 중앙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주아부와 양효왕 유무 등의 활약으로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황자징은 한나라가 제후왕들을 격파한 경우처럼 지금 역시 제후왕들을 격파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봉건제도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고대에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는 정치가였던 이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각지에 군현을 정비하여 군현제도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이내 패망하고 새로 자리를 잡은 한나라의 고조 유방은, 분명히 봉건제도 보다는 군현제도가 통치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있었지만 개국에 공을 세운 공신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봉건과 군현의 중간적인 제도인 '군국제' 가 출현했습니다. 이 군국제가 완전히 군현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혼란이 오초칠국의 난으로, 이 시발점을 당긴것은 중앙 정부와 제후들의 봉지를 '삭번' 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 입니다.
"삭번" 이라? 앞서 제태가 건문제에게 '삭번' 을 제안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제후들의 번국(藩國)을 깎아내는(削) 것입니다. 영토가 되었던, 혹은 목숨이 되었던. 즉 중앙 정부가 제후들의 힘을 빼앗는 시도를 말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남몰래 논의하던 젊은이는 황제가 되었고, 이 새로운 제국의 군주는 황자징을 불러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과거에 동각문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하고 말 입니다. 이에 황자징은 감히 잊지 못한다는 말을 꺼냈고, 이로서 삭번 정책은 시작되었습니다. 정책에 대한 골자는 황자징과 제태, 황제의 두 측근이 모두 동의했지만 그 집행방법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태는 기왕 삭번정책을 하려면 당대 최강의 번왕인 연나라의 주체부터 건드려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반면에 황자징은 우선 다른 번왕들부터 제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비교적 온건한 황자징의 제안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첫번째 목표는 주왕(周王) 주숙(朱鏞)이었습니다. 주숙이 주체의 동모제(母弟)인 만큼, 일단 공격하면 주체를 옥죄어버릴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목표가 된 것입니다. 조국공(曹國公) 이경륭(李景隆)은 국경경비라는 명목으로 병사를 이끌고 갑자기 개봉부(開封府)로 나타나더니, 왕궁을 포위하고 불문곡직하고 주왕을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주왕의 세력을 체포하여 심문을 하는 와중, 일이 갑자기 꺼지면서 다른 왕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왕 주숙과 민왕 주편(朱楩)은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대왕 주계(朱桂)는 대동(大同)에 유폐했으며, 제왕 주부(朱榑)는 감금되었습니다. 상왕 주백(朱柏)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절망하여 분신자살을 해버렸다.
이 시점에서 일의 순서를 살펴보면 1398년 5월에 홍무제 주원장이 사망하였고, 6월에 황자징과 제태가 등용되었으며, 주왕 주숙이 변을 당한것은 8월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사천리는 건문제 정권의 탄생 전부터 모종의 계획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계획의 끝이 이 정도에서 마무리 될 리는 만무합니다. 최후의 목표는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연왕 주체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최종적인 목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황제에게 주왕 주숙의 죄를 해명하는 글을 대신 작성해 보낸 후에는 스스로는 미친척을 하며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했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어질었던 건문제에겐 이 정도 수단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연왕의 글을 읽고 마음이 흔들린 황제가 이 일을 그만 두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황자징과 제태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제 와서 시정은 불가능 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사실 이었습니다. 그들은 연왕이 병을 핑계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이에 습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황제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인 제안에도 불구, 건문제는 뜻밖에 머뭇거렸습니다. 우물우물하며 그가 꺼낸 말은 "짐이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여러 왕들을 연이어 축출했는데, 만약 또 연을 삭탈한다면, 내가 천하에 무어라 해명하겠는가."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머뭇거린다' 는 말 외에 다른 이야기가 불필요한 소리 입니다. 황자징은 황제의 우유부단함에 "남보다 앞서면 남을 제압하고 남에게 제압당하지 않는다." 는 선수필승의 진리로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한 건문제의 태도는 이후 전개되는 정난의 변을 예고하는 모습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주체의 용병술이 뛰어난 사실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그를 쉽게 제압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건문제는 주체를 코너에 몰아넣었지만, 정작 쥐를 잡을 시간이 되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황자징 등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개별적인 움직임을 취했습니다. 도독 송충(宋忠)에게 명령해서 연변(緣邊)의 관군을 징발하여 개평(開平)에 주둔케 하고, 연부(燕府)의 호위군 중 정예군사로 예속된 충성된 자를 선발하여 휘하에 두게 하였으며 연왕의 호위군인 호기지위(胡騎指揮) 관동(關童) 등을 수도로 소환하여 주체의 세력을 점차 약하게 했습니다.
또 북평(北平) 영청(永清)의 좌/우위 군관을 징발해, 창덕(彰德), 순덕(順德)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며, 도독 서개(徐凱)는 임청(臨清)에서 군대를 조련하고, 경환(耿瓛)은 산해관(山海關)에서 군대를 훈련시키면서, 주체의 세력권인 북평을 감시했습니다.
양측의 분위기는 급속으로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체는 수도에 있는 자신의 아들들을 돌려 보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원장이 사망할 무렵 주체는 스스로 수도로 가려고 했었지만, 명태조는 자신의 유조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는 인물들은 그 자리를 지켜라." 라는 이야기를 남겼기에 아들 3명을 대신해서 보낸 것입니다.
제태는 연왕의 제안에 반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들은 인질의 가치가 충분하니 돌려보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황자징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적을 방심시키기 위해서, 여기서는 제안을 들어주는 편이 좋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태의 의견대로 일이 시행되었다면 미래의 홍희제(洪熙帝) 주고치(朱高熾)는 없었을 것입니다.
황자징은 '방심' 을 이유로 주체의 아들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연왕은 이미 거병할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고, 인질이 될 법한 아들들도 돌아오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연왕의 본거지인 북평에서는 조정에서 파견한 도지휘사(都指揮使) 사귀(謝貴), 포정사(布政使) 장병(張昺) 등이 머물고 있었는데, 7월 경 주체는 요광효(姚廣孝) 등의 계획을 이용해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조정의 간신인 제태와 황자징을 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연왕의 반란군은 정난(靖難軍)으로 불렸는데, 황제의 옆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난을 다스린다는 의미 입니다. 주체는 정난군을 일으키면서 조정에 상서하는 형식의 격문을 발표했는데, 이 격문에는 홍무제가 남긴 조훈이 인용되었습니다.
"조정에 올바른 신하가 없고, 안에 간악한 자가 있다면, 친왕은 곧 병사를 훈련시켜 명을 기다려라. 천자는 제왕에게 밀조하여 진병(鎮兵)을 통솔해 이를 쳐라."
처음 기세를 타고 일어난 정난군은 거칠것이 없었습니다. 통주(通州), 준화(遵化), 밀운(密雲) 등은 곧바로 정난군에게 항복했고, 북평으로 향하던 송충은 회래(懷來)로 물러났지만 정난군은 거용관(居庸關)을 함락하고 곧바로 회래까지 함락시켜 송충을 잡아 죽였습니다.
황제군의 문제는 제태나 황자징이나 학자일 뿐이지 군인은 아닌데 비하여, 주체를 상대할만한 뛰어난 장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창업공신들 대부분은 늙어죽거나, 혹은 주원장에게 숙청당해 명을 달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정은 장흥후(長興侯) 경병문(耿炳文)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고, 부마도위(駙馬都尉) 이견(李堅), 도독 영충(甯忠)을 좌/우부장군으로 임명하고는 참장(參將) 성용(盛庸) 등과 함께 주체를 상대하기 위한 북벌군을 편성 했습니다
경병문을 말하자면 당시 나이가 60세가 넘었던 노장이었지만, 주원장의 시대부터 활약하던 장수 중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이끌던 병력은 30만이나 되는 엄청난 대군이었습니다. 다만 아직 13만명 밖에 먼저 도착하지 않았을 무렵, 정난군의 장수 장옥이 적을 염탐하고 기습작전을 권했습니다. “군대에 기율이 없고, 그 윗사람들에게는 패할 기운이 있으니, 의당 급히 쳐야 합니다.”
장옥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몽고가 북으로 달아날때 함께 했다가, 이후 다시 중국으로 내려온 인물입니다. 그는 명나라의 명장 남옥이 북원을 격파할때도 종군했을 만큼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장옥의 제안에 주체는 호타하(滹沱河) 북쪽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대성공으로 끝나 3만이나 되는 적을 참살할 수 있었고, 패배한 경병문은 진정(真定)에서 수비에 전념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난군은 이틀 동안 공성전을 벌였지만 적을 물리칠 수 없자 일단을 물러났습니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황자징은 전쟁을 벌이면 승패와 계속 뒤바뀌는 일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언행은 상반되었는데, 패전한 경병문 대신 조국공 이경륭을 파견할 것을 주청했던 것입니다. 이후 살펴 보게 되겠지만 이 인사 제안은 최악의 판단이었습니다. 제태는 이경륭의 이름을 듣자 그로서는 불가능하다며 극렬하게 말렸지만, 결국 황자징이 밀어부친 끝에 이경륭이 새로운 정로대장군이 되어 파견되었습니다. 이 정로대장군의 병력은 50만에 육박했습니다.
그러나 내부에서도 격론을 이끌어낸 이경륭은 적에게도 비웃음을 당하는 처지였습니다. 이경륭의 이름을 들은 연왕은, 오히려 웃어버렸습니다. 주체를 곤혹스럽게 만드는것은 이경륭 보다도 오히려 후방인 요동에서 병사를 이끌고 영평(永平)을 포위한 오고, 경환, 양문 등이었습니다. 지금 앞에서 50만의 대군이 오고 있는 만큼, 후방의 위협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 할 수 있습니다. 연왕은 장옥과 함께 영평을 공격한 병사들을 쫒아버렸지만, 그 사이에 이경륭의 대군은 북평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연왕의 아들 주고치는 굳게 버티면서 공세를 막아내었고, 11월 경에는 연왕이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둘러 귀환하는 병력이 적과 싸우려먼 백하(白河)를 건너야만 했었는데, 백하는 흘러넘치고 있어 도저히 건널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주체도 막막한 심정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렸는데, 천만다행이게도 도착했을 무렵에는 강이 얼어있어 군대가 건너서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이경륭은 도독 진휘(陳暉)를 정난군의 후방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주체는 군대를 나눠 이를 격파했습니다. 도망치던 진휘의 군대가 백하를 건널 무렵에, 정난군이 지날 때는 멀쩡하던 얼음이 갑자기 깨져서 수많은 병사들이 그대로 익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주체는 정촌패(鄭村壩)에서 황제군과 직접 교전을 벌였습니다. 주체가 직접 정예기병을 이끌고 적의 7영을 격파 하자, 여러 장수들이 곧바로 재차 공격을 가해 이경륭은 형편없이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이경륭은 우선 물러나고 산둥성 덕주(德州) 방면에서 군대를 조련했고, 다음 해 봄에야 말로 제대로 싸우겠다는 태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주체는 오히려 대동(大同)을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대동을 공격하면 이경륭은 대동을 구원하기 위해 진격할텐데, 대동의 춥고 한랭한 기후에 이경륭이 이끈 남방군은 적응을 못할테니 쉽게 이길 수 있다는게 주체의 판단이었습니다.
1398년 - 1400년
12월 경 정난군은 광창(廣昌)을 함락시켰고, 다음 해가 되자마자 울주(蔚州)를 함락시켰으며, 2월 경에는 대동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경륭은 뒤늦게 구원하기 위해 쫒아왔지만, 정난군은 이미 돌아간 뒤였습니다. 고생해서 쫒아온 이경륭의 부대는 적군은 보지도 못했고, 오히려 얼어죽고 굶어죽은 병사들만 가득했습니다.
분노한 이경륭은 정난군을 격파하기 위해서 곽영(郭英), 오걸(吳傑), 평안(平安) 등과 함께 백구하(白沟河)에서 만나기로 모의했습니다. 그런데 주체는 되려 선수를 치기로 결정한 참이었습니다. 이는 장옥의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병사란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니, 청컨대 먼저 백구하에 의거하여, 편안히 함으로써 피로한 자들을 기다리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앞서 이동한 정난군은 먼저 백구하 측면에서 평안의 부대와 만났고, 주체가 직접 백여기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적군을 유인하여 격파했습니다. 이윽고 이경륭의 부대가 도착하여 양군은 서로 격돌하였으나 이때의 싸움에선 그다지 정난군이 유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침 밤이 되어 양군은 서로 물러났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양군은 다시 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이경륭은 부대를 수십리에 걸쳐 진을 치고, 정난군의 후군을 격파했습니다. 그러자 주체는 직접 기병을 이끌고 적군의 장수인 구능(瞿能)을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정난군의 장수 중에 한명인 구복(丘福)은 적의 중군을 공격중이었지만, 적의 수비가 완강해서 돌파 할 수가 없었고, 이에 주체는 직접 부대를 이끌고 적의 측면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경륭이 정난군의 후방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정난군은 포위되는 형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양군은 한동안 치열하게 교전하였고, 화살도 비처럼 날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세가 안 좋은 쪽은 정난군이었습니다. 주체는 직접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화살을 쏘다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들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곧 칼까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체는 갑자기 근처에 있던 제방 위로 올라가더니, 느닷없이 채찍을 휘두르며 원군이 오는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이경륭은 이때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서 머뭇거렸습니다. 이렇게 잠깐 시간을 번 사이에 기적이 일어나 주체의 차남인 주고후(朱高煦)가 구원병을 이끌고 나타나서 포위를 풀어버리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황제군 역시 또다른 부대가 도착했고, 그 위세가 어마어마 했습니다. 대부분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새로 나타난 적의 구원병을 보고 절망하여 움직이지도 못헀습니다. 누구 한명 입을 때지도 못하던 바로 그 순간.
홀로 소리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연왕 주체였습니다.
"내가 전진하지 못해도, 적도 퇴각하지 못한다. 오직 전투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절규하듯 외친 주체는 부대를 이끌고 적 대군의 배후를 향해 돌기 시작했습니다. 무모한 돌진이었지만, 그러나 이 순간 하늘은 연왕에게 기회를 주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이경륭의 군기마저 부러질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그 찰나의 기회를 포착한 주체는 곧바로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았고, 전세는 요동쳤습니다. 정난군은 미친듯이 황제군을 공격했고, 황제군은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수만명의 병사들은 이경륭의 졸렬한 지휘 탓에 죽었고, 또 10만 명이 물에 빠져서 물귀신이 되었습니다. 이경륭은 황제로부터 받은 새서(璽書)와 부월(斧鉞)까지 모두 잃어버린채 덕주로 도망쳤습니다.
大明湖铁公祠에 있는 철현의 모습
덕주로 달아난 이경륭이었지만, 정난군은 5월 경에 덕주까지 함락했고 군수물자를 백만이 넘게 거둬들였습니다. 여기서도 패배한 이경륭은 급기야 제남(濟南)까지 달아났습니다. 정난군은 이를 추격했는데, 만일 제남까지 함락되면 대번에 산동성(山東省)까지 장악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여기서 정난군은 쉽지 않은 전투를 치뤄야 했습니다. 제남을 지키는 인물이 보통 인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산동참정(山東參政) 철현(鐵鉉)은 과거 홍무제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했던 일때문에 황제에게 칭찬을 받은적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초에 이경륭이 북벌할때는 후방에서 물자를 대주는 일을 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그 이경륭이 백구하에서 엄청난 대패를 당하고 덕주까지 함락되자 그 기세를 보고 겁을 먹은 수많은 성들이 정난군에게 항복을 했던 것입니다. 그 사태를 본 철현은 울면서 또다른 지휘관인 성용과 함께 필사적으로 싸울것을 다짐 했습니다.
이경륭은 일단 제남 앞에서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여기서도 정난군에게 박살이 나고 더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이때 건문제는 연이어 패배한 이경륭을 소환했지만, 사면하고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이경륭을 추천한 황자징은 울면서 이경륭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건문제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황자징은 가슴을 치면서 소리쳤습니다. "대사(大事)가 이미 떠나갔으니, 이경륭을 천거하여 나라를 그르친 것은 만번 죽어도 속죄하지 못하겠다!"
이경륭을 수차례 대패시킨 정난군은 기세가 등등해져서 제남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정난군은 물길을 막아 성에 수공(水攻)을 퍼붓고 포위망을 길게 유지하고 밤낮으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철현은 계책을 내어 적의 공성 장비를 불태워버렸고, 적이 당혹하는 틈에 기습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가했습니다. 또한 그렇게 완강하게 저항하면서도 1천여명의 병사를 따로 뽑아 일부러 성을 들어바치는 모양새의 거짓항복을 하는 계책을 꾸몄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주체는 입성하려고 했지만, 그 계획의 실체는 연왕이 성에 들어오는 틈을 타 철판(鐵板)을 떨어뜨려 공격하고, 따로 다리를 끊어버리는 무서운 계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약간 타이밍이 어긋나 주체가 입성하기도 전에 철판이 끊어져버렸고, 놀란 주체는 곧바로 말을 돌려 달아났습니다. 워낙 급박한 사이라 아직 다리도 끊어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분노한 주체는 온갖 계책을 다 짜내어 제남성을 공격했지만,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장장 3개월 동안 기약 없는 공성전이 벌어질때, 황제군의 20만 대군이 후방인 덕주를 공격해서 수복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보급로가 끊길 우려가 있었고, 결국 주체도 그 점을 두려워해 군사를 뒤로 물리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이경륭의 대패로 인해 기가 상해있던 건문제는 크게 기뻐하며 철현에게 금패(金幣)를 하사하고 칭찬했으며, 철현이 입조하자 연회를 베풀면서 그 말을 무조건 들어주었습니다. 철현은 산동포정사(山東布政使)가 되었다가 이후에는 병부상서로까지 승진했습니다. 또한 철현과 함께 공을 세운 성용 역시 역성후(歷城侯)에 봉해졌고, 연나라를 평정하라는 의미의 평연장군(平燕將軍)에 임명되었습니다.
1400년 - 1401년
당시 황제군은 딩저우(定州)에는 오걸과 평안이, 덕주에는 성용이, 창저우(滄州)에는 서개(徐凱)가 각각 주둔하며 서로 기각지세의 형세를 이루어 정난군을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정난군은 그 압박을 분쇄하기 위해서 우선 겨울이 되자 창저우의 서개부터 격파하고 사로 잡은뒤, 군수물자를 잔뜩 챙기고 제녕(濟寧)으로 이동했습니다. 덕주에 주둔하던 성용은 적을 막기 위해서 동창(東昌)으로 나아갔다.
성용은 동창의 성을 부대의 뒤로 하여 진을 쳤고, 이에 주체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황제군의 좌익을 쳤습니다. 그러나 성용은 부대를 정돈하며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후 주체가 부대의 중앙을 치자, 이때는 고의로 진은 열어 정난군을 깊숙히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윽고 충분히 정난군이 황제군의 중앙으로 파고들자, 성용은 역으로 재차 공격에 나섰습니다. 너무 깊숙히 들어온 탓에 여러 겹의 포위망에 둘러 쌓인 주체는 위기에 빠졌으나, 때마침 수하 장수인 주능(朱能)이 날랜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주체는 우선 급한대로 관도(館陶)로 몸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적의 공세가 워낙 강하여 정난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특히 주체가 아끼던 백전노장 장옥(張玉) 마저 전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혼란스러운 전황 속에 주체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고 홀로 분전하다 결국 창에 찔려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정난군을 대파한 성용은 오걸과 평안에게 연락하여 정난군의 퇴로를 막게 하였고, 정난군은 다음 해 정월이 되서야 심주(深州)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북평으로 귀환하자 주체 휘하의 많은 장수들이 스스로 죄를 청할만큼 대패를 당했던 일이지만, 주체가 가장 슬퍼한 부분은 장옥이 전사한 일이었습니다. “승부에 이기고 지는것은 항상 있는 일이고, 헤아리기 쉽지 않으나, 장옥을 잃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간난한 때에, 나의 좋은 보신을 잃었도다.” 이윽고 주체는 눈물까지 흘렸고, 곧 모든 사람들이 따라 눈물을 흘리면서 장내는 부러진 갑옷과 흠집난 칼을 든 병사들이 우는 소리로 가득찼습니다.
이 평하 전투의 패배로 정난군은 정예병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성용군의 위세는 그야말로 어마어마 했습니다. 건문제는 기뻐하며 종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철현과 성용에게 연달아서 큰 낭패를 본 정난군은 다시는 산동으로 진군하지 못했습니다.
1401년 2월 - 1401년 10월.
비록 큰 패배를 당하긴 했었지만, 주체의 입장에서는 전황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었습니다. 3월 무렵 정난군은 다시 남하를 시도하여 보정(保定)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성용은 협하(夾河)에 진을 치고 적을 맞아들였습니다.
처음에 정난군의 장수들은 경기병을 이끌고 조심스레 성용의 군단을 공격해서 약탈하였고, 이에 성용은 1천여명의 병사들을 보내 적을 추격했는데 정난군이 화살을 쏘아대자 잠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용의 군대는 방패의 열을 맞춰 정난군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이에 주체는 보병으로 우선 적을 막게 하고 기병이 그 틈을 타서 돌입하게 했는데, 성용은 오히려 신들린 용병술을 보이며 힘써 싸워 정난군의 장수 담연(譚淵)을 참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정난군의 주능(朱能), 장무(張武)가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주체가 경기병을 이끌고 합류하자 성용군 내에서도 장득(莊得), 조기장(皂旗張) 등이 전사했습니다. 이날의 승부로 전투가 결정되진 않았지만, 성용의 부대가 조금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날 밤, 주체는 10여명 정도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성용의 군영에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눈치를 채고 보니 이미 적군에게 포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주체가 사로잡히거나 죽었다면, 연왕 주체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정난군은 그대로 무너졌을 테고, 역사도 많이 달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주체는 조심스레 말을 이끌고, 뿔피리를 불면서 적진을 돌파했습니다. 다른 장수들은 화살 한대 제대로 쏘지 못하고 주체를 보내주었습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당시 건문제가 내린 조서가 원인이었습니다. 조서에서 건문제는 "짐이 숙부를 죽였다는 책임을 지게 하지 마라." 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다른 장수들도 감히 천자의 조서를 거스를 수 없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황제군은 적의 수괴를 포위하고도 화살 한대 제대로 쏘지 못하고 보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윽고 날이 밝아 오르자 양군은 다시 전투를 벌였습니다. 진(辰) 시에서부터 미(未) 시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싸운 양군은, 너무 지쳐서 잠시 자리에 앉아서 쉬고 이윽고 다시 일어나 싸움을 재개 하였습니다. 이때 정난군은 동북쪽에 있고 성용의 부대는 서남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2차전이 재개될 무렵, 갑자기 동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성용의 부대는 바람을 곧바로 맞으며 싸우는 형세가 되었고, 기세를 탄 정난군은 좌우 측면에서 마구 공격을 가해 성용의 군단을 대패시켰습니다.
성용은 간신히 덕주로 몸을 피했고, 위세가 등등했던 군단의 사기도 상당히 꺾이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정난군의 장수 이원(李遠)이 패현(沛縣)에서 군량과 배를 불태워 식량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협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정난군은 근본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잠깐 눈을 돌린 틈을 타 7월부터 9월 경에는 황제군의 장수 평안이 주체의 본거지인 북평을 향해 기습을 시도하였고, 10월에는 황제군의 방소(房昭) 등이 이끄는 부대를 공격하여 1만여명을 참살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체는 직접 말을 타고 화살과 돌의 위협을 무릎쓰면서 지휘하였고, 대승을 여러번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죽을 뻔한 적도 여러번이었는데, 3년을 그렇게 미친듯이 싸워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북평, 보정, 영평 3부(府) 뿐 이었습니다.
애시당초 아무리 주체가 천재적인 지휘 능력을 보여주고 용맹무쌍하게 싸운다고 하더라도, 이 당시 건문제의 세력은 그야말로 전중국 그 자체 입니다. 게다가 실제 중국을 지탱하는 강남 지방의 경제력이 황제군에게는 고스란히 있었고, 정난군이 30만, 50만의 적들을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황제군은 타격을 금세 회복하고 말았습니다. 주체는 전쟁이 언제쯤이면 끝날지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음해 4월에 정난군은 또다시 대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이 있기 한달전에 정난군은 평안의 4만 부대를 격파하고 철현의 부대를 물리쳤지만, 평안은 언제 그런 패배를 당했냐는듯이 하복(何福)과 함께 소하(小河)에서 정난군을 대파한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정난군의 장수 진문(陳文)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 싸움에서 주체는 평안이 직접 찌른 창에 맞을 뻔 하기도 했으며, 주위의 기병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정도로 엄청난 위기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제미산(齊眉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위국공(魏國公) 서휘조(徐輝祖)가 이끄는 황제군은 정난군을 격파하고 장수 이빈(李斌)을 참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음력 4월이면 한참 더울 때 입니다. 특히, 북방 사람들은 남방의 습기에는 더 어려워 했는데, 전황조차 이렇게 절망적으로 흐르자 많은 장수들이 우선 북방으로 돌아가 다시 시기를 엿보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이때, 정난군에서 가장 용맹하던 장수인 주능은 칼을 어루만지면서 소리쳤습니다. “한고조는 열 번 싸워 아홉 번 졌는데, 끝내 천하를 가졌소. 우리는 거사을 일으키고 연이어 이길 수 있었소. 약간 불리한다고 계속 돌아간다면, 결국엔 남을 섬길 것이오!” 주체 역시 이에 동의하자, 다른 장수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나 불리한 전황은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한 반전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정난군의 남진
당시 정난군 내에서 실제로 북으로 귀환하자는 이야기가 나온것은 사실이지만, 앞서 살펴 보았듯 장옥의 반대와 주체 본인의 의지때문에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명나라 조정에 전해진 정보에는 정난군이 북으로 되돌아갔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졌습니다. 건문제는 이 잘못된 정보를 믿고 서휘조의 군단을 회군시켜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남아있는 하복이나 평안의 부대는 고립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최후의 기회를 잡은 정난군은 영벽(靈璧) 주둔하고 있는 하복의 군단을 격파하고, 평안을 비롯한 37명의 지휘관들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전황의 거대한 흐름이 갑작스레 변하고 만 것입니다.
정난군이 대패하여 절망적인 형세에 처해진지 불과 한달 뒤인 5월, 급하게 구원하러 오는 요동의 군대를 격파한 정난군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남진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성용은 황급하게 전함을 이끌고 회수 남안을 장악하여 정난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정난군의 장수 주능과 구복이 몰래 부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성용의 후방을 공격하여 그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그 후에 철현의 부대 역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정난군의 남진은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한번 기세를 잡은 틈에 그대로 밀고 나가 끝을 봐야 했는데, 회수 남안을 장악한 시점부터 다음 목표를 어디로 할지에 대해, 봉양(鳳陽)으로 가자는 의견과 회안(淮安)으로 가자는 의견이 둘 다 나왔지만, 주체는 "봉양의 수비는 완벽하고, 회안은 쌓아놓은 양식이 많으니까 둘 다 힘들다. 차라리 양주(揚州)로 가자." 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결정이 내린 후에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 이루어져, 바로 그 달에 정난군은 양주를 함락시켰다. 왕례(王禮) 등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항복해버린 탓입니다. 성용은 어떻게든 군사를 모아 육합(六合)에서 싸웠지만,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자 경악한 건문제는 황급하게 천하에 조서를 내려 자신을 도우라고 지시하였고, 주체의 사촌 누나인 경성군주(慶成郡主)를 보내 "땅을 나누자." 는 제안을 했지만, 이게 시간을 끄려는 의도임을 알고 있는 주체는 듣지 않고 계속해서 진격했습니다.
6월,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용은 포자구(浦子口)라는 곳에서 정난군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도독첨사였던 진선(陳瑄)이 휘하의 수군을 이끌고 정난군에 투항해버렸고, 성용은 필사적으로 고깃배까지 모아 고자하(高資港)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진강의 수비대장이었던 동준(童俊) 역시 정난군에 항복하였고, 마침내 남경에 이른 정난군은 금천문(金川門)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좌도독이었던 서증수(徐增壽)가 내응하려고 했다가 발각되어서 처형되었는데, 수도의 도독까지 항복하려고 했으니 건문제는 이미 버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곡왕 주혜와 이경륭 등이 문을 열고 정난군을 맞이하였고, 남경은 함락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건문제는 스스로 불을 질렀습니다.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천하의 주인은 이제 연왕이 되었습니다. 연왕 주체는 뭇 신하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영락제 입니다. 황제가 된 영락제는 자신을 압박하던 황자징과 제태부터 잡아들였습니다.
제태는 당시에 정난군의 기세를 두려워한 건문제 때문에 해임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남경으로 오고 있던 중이었는데, 남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정난군이 승리하자 말을 타고 도망쳤지만, 결국 잡혀서 죽었습니다. 제태의 종형제는 모두 죽었고, 숙부들은 변경으로 귀양을 갔으며, 제태의 아들은 6살이라 죽음은 면하고 공신들에게 지급되었다가 홍희제 시절에 사면되었습니다.
황자징 역시 그 무렵 제태처럼 해임된 처지였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군사를 모으라는 지시를 받고 움직이던 중에, 정난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여기저기를 떠돌며 다시 군사를 일으켜려다가 잡히고 말았습니다.
원한이 쌓였는지 영락제는 직접 황자징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황자징은 굴복하지 않고 항변하였다. 황자징은 기둥에 묶어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磔刑)에 처해졌고, 족인들은 모두 참살되었으며, 인척들은 변경의 수자리로 귀양을 떠났습니다. 유일하게 아들 한명만이 이름을 전경(田徑)이라 바꾸고 살아남았는데, 훗날에 사면령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황제의 스승이었던 방효유였습니다. 그는 당대에 뛰어난 문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송겸(宋濂)의 제자로, 영락제의 측근이었던 요광효는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끊어질 것이다." 라면서 절대로 죽이지 말것을 부탁했고, 영락제 역시 방효유를 등용하려고 하면서, 천하에 내리는 조서를 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방효유는 울면서 거부했고, 영락제는 그런 방효유를 이렇게 달랬습니다. "선생께서는 자해하지 마시오, 나는 주공을 본받아 성왕(成王)을 보좌하고자 할 뿐이오." 하지만 방효유는 되려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락제는 주공단(周公旦)이 성왕을 섭정한 이야기처럼, 자신도 천하를 훔치려는게 아니라 주공단처럼 군주를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겠다고 한 소리지만, 방효유는 "그럼 그 성왕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대답한 것입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여기서 말하는 성왕은 건문제를 가리킵니다.
이 물음에 영락제도 당황해서 "불에 타서 죽었다."고 대답했고, 방효유가 "그럼 왜 성왕의 자손을 세우지 않는것인가." 하고 묻자 황제는 "장성한 사람이 군주에 있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방효유가 "그럼 왜 성왕의 동생을 세우지 않는가?"라고 묻자, 영락제도 "이건 내 집안 일이다!"라고 성질을 내며 붓과 종이를 들이밀었습니다.
하지만 방효유는 "난 못한다." 라며 그것들을 내던져 버렸고, 결국 분노한 영락제는 방효유를 잡아다 책형으로 죽였습니다. 죽기 직전에 방효유는 최후의 절명시를 남겼습니다.
"하늘이 난리를 내렸도다! 누가 그 이유를 아는가, 간신이 계책을 얻어 나라를 도모하고 꾀를 쓴다. 충신은 발분(發憤)하여 피눈물이 흘러 내리는데, 이렇게 임금이 죽었으니, 문득 어디서 구하겠는가. 오오, 슬프도다! 거의 내 허물이 아니겠는가!"
이때, 방효유가 '연나라 도적이 제위를 찬탈했다(燕賊簒位)' 는 글을 써 영락제를 대단히 노하게 만들어, 가족과 친척을 포함한 구족에 친구나 스승, 제자를 포함해 십족이 몰살 되었다는 이야기가 대단히 유명한데, 명사 방효유전에서는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청나라 초기 장가화(張嘉和)가 쓴 황명통기직해(皇明通紀直解)라는 사찬사서에 이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제남에서 정난군을 저지했던 철현은 심문장에 끌려오자, 되려 심문장을 등지고 앉아 버렸고, 재주를 아까워한 영락제가 "다시 생각해 보라." 고 부탁했지만 결국 말을 듣지 않자 책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죽었을 때의 나이가 고작 37세였습니다. 수차례 정난군을 격파했던 성용은 남경이 함락되자 병사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탄핵을 받자 자살했습니다.
가장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건문제의 최후였습니다. 불타버린 성 내에서 황후의 시신은 발견되었지만, 황제의 시신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완전히 타버렸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유해라도 남는 법인데 그런것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혹자는 건문제가 지하 땅굴로 도망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정통제 시절에는 스스로 건문제라고 주장하는 괴인들도 나타났었습니다.
영락제
정난군은 개전 했을 당시는 물론, 개전한지 3년이 지난 시점에도 세력이 협소했으며, 이에 비해 황제군은 전중국을 아우르는 엄청난 물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 쪽의 세력으로 따지자면 서로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정난군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능력이 뛰어난 개국 공신들을 숙청한 주원장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지만, 정난의 변 당시 황제군에게도 성용처럼 공을 세우는 장수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건문제에게 있었습니다. 지극히 우유부단한 건문제 때문에 황제군은 여러차례 승리의 기회를 놓쳤던 것입니다. 경병문 같은 경우 대패를 하긴 했지만, 수비를 하며 적을 저지하고 있었는데 조급한 건문제 때문에 교체가 되었고, 경병문 대신 부임한 이경륭은 싸우기만 하면 패배하는 희대의 졸장이었습니다.
게다가 한 사람으로서는 착하다고 해도, 군대를 통솔하는 총지휘관으로서는 쓸데없을 정도로 인정이 많았던 점도 문제였습니다. 전투 한두번 패배했다고 장수들을 싹 죽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싸우기만 하면 박살이 난 이경륭을 죽여 처벌하자는 황자징의 제안도 무시했습니다. 결국 이경륭은 막판에 성문을 열어주면서 건문제의 은혜에 역으로 보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삭번 정책을 취하며 주체를 벼랑 끝까지 몰고갔지만, 정작 숨통을 끊어야 할 상황에서는 우유부단함 때문에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습니다. '숙부를 죽이게 하지 말아라.' 라는 조서를 내려, 주체를 죽일 절호의 찬스를 놓친 일화는 차라리 개그에 가까운 일입니다. 막판에 서휘조를 귀환 시킨 일에 대해서도, 만약 숨통을 끊을 생각이 있었다면 정난군이 귀환했다는 보고가 오더라도 오히려 공세로 나갔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건문제는 정난군이 북평으로 돌아갔다고 하자 마치 다행이라는듯 서휘조를 귀환시켰습니다.
비록 건문제의 이런 실책이 없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승리하기 힘들었을 테지만, 주체의 경우 정난의 변 내내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압도적인 세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전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주체 본인의 군사적 능력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만일 그런 점이 없었다면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경병문이나 이경륭에게 대패했을테고, 건문제가 말아먹는 기회조차 받아먹지 못했을 것 입니다.
정난의 변 당시, 주체가 보인 가장 큰 장점은 한두번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부분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 카리스마로 부대를 이끌고 유지하며 버티는 점이었습니다. 직접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던 주체로 인해 정난군은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이탈하는 사람 조차 없을 정도로 똘똘 뭉칠 수 있었습니다. 한번 기회를 포착하자 그대로 물고 늘어지며 적을 핀치에 몰아넣던 점 역시 칭찬할만 한 점 입니다.
뮈 뒤에 영향까지 언급 해야 겠지만, 게시판이 여기서 글자가 더 추가되면 올리면 글이 잘리는것 같고 -_- 혹시 보시려거든 위의 위키 링크에서 맨 아래쪽을 보셔도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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