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아침, 보트를 타고 목포 마리나항을 출발했습니다. 주말에 날씨가 안 좋다는 일기예보가 나와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날씨는 화창했습니다. 타고 간 보트는 외화에서 가끔 나오는 작은 보트였습니다. 작긴 해도 침대가 있는 선실과 화장실, 그리고 싱크대까지 다 있더군요. 아름다운 등대를 뒤로 하고 약 2시간의 항해 끝에 벽파항에 도착했습니다. 일단 점심을 먹고 이순신 장군께서 벽파항에 오기 전에 계셨던 어란항으로 가봤습니다. 15노트의 속도로 약 1시간 정도 가봤으니까 3~5노트로 움직이는 판옥선이라면 약 3시간에서 5시간 정도 걸렸겠네요. 가까이 가보려고 했는데 양식장들이 많아서 그냥 먼바다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준비해온 낚시대를 드리웠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서 명량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벽파에서 우수영족으로 흐르는 조류가 가장 강한 3시 경에 도착했습니다. 선장님에게 부탁해서 속도를 최대한으로 줄여놨는데, 뭐랄까 고장난 무빙 워크에 올라탄 기분이더군요. 그 전에는 물살이 빠르면 그냥 앞으로만 나아가는 줄 알았는데 곳곳에 생긴 소용돌이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잘못 걸리면 빙글빙글 돌다가 전복되거나 옆으로 떠밀려가서 바위에 부딪칠 것 같았습니다. 보트가 빠른 속도로 내려가니까 교각 아래에 계신 분들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시더군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우수영 앞바다까지 흘러왔더군요. 배를 돌려서 우수영선착장에 배를 댔습니다. 우수영 선착장에는 벽파진과 우수영을 왕래하는 거북선 모양의 유람선과 행사용인지 촬영용인지 모를 판옥선, 그리고 안택선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고 내렸다가 벗어서 바다에 던졌는데 바다에 풍덩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죠. 그 구명조끼 윗주머니에 제 스마트폰이 들어있다는 사실을요. ㅜㅜ
바닷가 마을이라 그런지 횟집들이 많았지만 다들 영업을 안하고 계셨고, 결국 편의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편의점에는 무려 수조까지 있었고, 전복과 해삼, 갑오징어는 물론 광어와 숭어까지 있더군요. 결국 편의점에서 회로 배를 채우게 되었죠.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배를 타고 벽파항으로 돌아가서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배를 더 타고 싶었지만 몸과 마음 모두 지치더군요. 숙소로 잡은 곳은 폐교를 개조한 펜션이라서 조용하더군요. 그리고 진도라서 그런지 죄다 진도개들이라서 그냥 일반 변견들처럼 보였습니다. 펜션 뒤에 망바위라는 곳이 있어서 구경하러 올라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불쑥 나타난 진도개 덕분에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죠.
다음날 아침을 먹고 다시 보트에 탔습니다. 이번에는 우수영에서 벽파쪽으로 조류가 흐르는 중이라서 거슬러 가봤습니다. 보트가 10노트를 내면 속도는 2노트 정도 밖에 안나오더군요. 거기다 보트가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렸습니다. 결국 조류보다 속도가 높지 못하면 앞으로 나가는건 물론 컨트롤도 불가능했습니다. 거기다 간과한게 있었는데 다른 배들의 존재였습니다. 한번은 쾌속선이 옆으로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꽤 먼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파도가 밀려와서 보트가 요동쳤습니다. 이 좁은 곳에서 수십척의 배들이 진입했다면 접촉사고가 안날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노라도 부러지는 날에는 끝장이죠. 조류가 한참 심할 때는 헤엄쳐서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해보였습니다. 설사 해안가에 닿는다고 해도 바위들 뿐이라서 못 올라갈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안위의 판옥선에서도 격군 몇 명이 뛰어내렸다가 그대로 실종되어버리죠. 몇 번의 테스트를 마치고 목포로 돌아왔습니다. 파도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배에서, 그리고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열차 안에서 생각들을 정리해봤습니다.
1. 전장은 어디인가?
일단 조류로만 본다면 진도대교 부근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조류가 아우, 정말 너무 너무 심해서 멈춰서기도 힘든 곳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조류가 심해지면 단순히 앞으로 나가거나 뒤로 떠밀리는 정도가 아니라 컨트롤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조류가 바뀔 때가 유일하게 버틸 수 있긴 합니다만 워낙 순식간에 바뀌는데다가 지금처럼 시계가 없었으니까 언제 변하는지 예측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벽파에서 우수영으로 흐르는 조류를 탔을때는 우수영 앞바다 그러니까 양도까지 한번에 흘러갔습니다. 이번 테스트 결과로만 놓고 본다면 우수영을 옆에 낀 양도 앞바다와 진도 대교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마 아침에 출격 준비를 마치고 우수영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 함대가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고 바로 출격한 것 같습니다. 우수영 앞바다로 나와서 바로 왼쪽으로 90도를 틀면 진도대교가 보입니다. 여기부터 임하도까지는 벽파 앞바다만큼이나 넓은 곳이라서 소수가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가 어려워보였습니다. 거기다 임하도 서쪽 바다는 너무 넓어서 앞에서 싸운 이순신 장군의 상선과 더 멀리 도망친 김억추의 전선을 제외한 11척의 배가 막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갔다는 이순신 장군의 상선은 어디 있었을까요? 아마도 양도와 진도대교 사이의 어디쯤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긴 조류가 강해서 노를 젖는 것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어서 닻을 내리는 방법 밖에는 없었죠. 기록들 중에는 돛을 내리고 싸웠다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마지막까지 풀지 못한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닻을 내리고 싸웠다면 한 가지 장점은 있을 것 같습니다. 빠른 조류덕분에 일본군의 배들이 접근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저는 고요한 바다에서 수십척의 일본 배들이 상선을 포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조류를 보면 그건 불가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서 조류가 약해질 즈음 조선수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결국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고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2. 일본 수군은 왜 명량에 뛰어들었을까?
그렇다면 일본 수군은 왜 이런 급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진도는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곳으로 이곳만 통과하면 이제 서해입니다. 진도를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 다음으로 큰 섬입니다. 거기다 명량에는 이순신이 있었습니다. 전투를 개인과 가문의 영광을 세우는 일로 여기는 일본 무사들에게 이순신의 목은 최고의 전리품이었을 겁니다. 아마 이순신의 배가 혼자서 명량을 막아서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이성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3. 전투의 결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명량 해전이 끝난 후 조선 수군은 서해로 후퇴하고, 일본 수군 역시 명량을 통과해서 서해로 북상합니다. 따라서 명량 해전은 적을 막아낸 싸움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가치가 폄하될 일은 없습니다.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의 존재를 뚜렸하게 각인시켰고, 특히 말도 안되는 전력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둠으로서 절망에 빠져있던 부하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얼 수 있었습니다.
스마트폰이 바다에 빠지는 대참사가 일어나긴 했지만 나름대로 알차고 즐거운 답사였습니다. 함께 간 동료들에게 사진을 받는대로 몇 장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다시는 이런 답사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견내량을 가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는 중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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