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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9/20 21: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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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berserk122.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베르세르크'에는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검술실력을 지닌 용병대장, '그리피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리피스는 작중, '매의 단'이라 불리는 용병단의 단장으로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용병술을 지녔습니다. 그는 더 높은 신분, 마침내는 일국의 임금이 되려는 욕망을 갖고 있으며,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도 그리피스의 모티브가 된 어느 용병대장이 존재했습니다. 그 또한 '매'라는 별명을 지닌 채 여러 나라에 걸쳐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는 밀라노에서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방문한 제프리 초서를 만났고,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로부터 약탈을 멈추어줄 것을 촉구하는 격노섞인 서한을 받았으며,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결혼 잔치에 참석하여, 위대한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이자 시인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등과 한 자리에 모이기도 했습니다.


Paolo_Uccello_045.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그러나 존 호크우드는 본디 무시무시한 용병대장이었습니다. 14세기에 그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유행했습니다. 수도사들이 존 호크우드를 보자 기분좋게 인사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께 평화를 주시길.". 

그러자 호크우드가 답변했습니다. "주께서 당신으로부터 땡전 한 푼의 자선이라도 모조리 거두어 가시길." 

깜짝 놀란 수도사들이 말했습니다. "아니, 대체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당신들이 그 따위로 말했기 때문이오. 전쟁으로 먹고 사는 본인을 굶어 죽게 할 작정이 아니고서야, 본인에게 평화를 비는 게 말이나 되겠소?"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존 호크우드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탈리아 일백년래 최고의 용병"이라는 평가나, "영국산 뱀", 그리고 "영국계 이탈리아인은 악마의 화신이다."라는 속담이 모두 그에게서 유래했습니다. 그가 이리 저리 떠도는 용병 출신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평가보다는 이런 저런 호사가들의 말말말이 뒤따랐습니다. 낭만적이고 방탕호쾌한 유랑기사, 덕망있고 충직한 명예의 기사, 그리고 로빈 훗이나 프랜시스 드레이크 같은 민중 출신의 의적 등,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이미 당대서부터 서로 도저히 섞일 수 없을만큼 모순적이었고, 또한 끝도 없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체첸 반군, 그리고 르완다 내전기의 여러 용병단들과 마찬가지로, 존 호크우드는 잔학무도한 기회주의적 용병단의 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호크우드가 살던 곳은 중세 14세기의 혼란시대였고, 그 때는 저마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용병들이 넘쳐나던 시대였습니다. 심지어는, "신과 연민과 자비의 적"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흉갑을 착용한 채 적들을 도륙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용병대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 호크우드는 기상천외한 용병단장들 중에서도 단연 독특한 인물이었는데, 그 무시무시한 사람들 중에서도 최고로 성공한 용병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존 호크우드의 일생과 중세 용병단의 생활상을 한 파트씩 교차해나가며, 실제 중세 용병단은 어떤 식으로 굴러갔는지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국왕의 병사


rsw1280.pn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존 호크우드의 생애는 영국 에식스 주 구릉지대에서 시작됩니다. 오래 전부터 농사와 양 방목이 이루어지던 이곳의 힌크포드(Hinckford) 헌드레드(행정구역 단위)는 활발한 원모(原毛) 수출에 힘입어 서서히 직물 산업을 발달시키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도 같은 에식스 주의 코게샬 화이트(Coggeshall whites)나 콜체스터 러셋(Colchester russets)과 같은 지역 특산 직물 제품이 생산돼 유럽 전역으로 수출됐습니다. 제조업의 발달 덕인지, 이 지역 민초들은 뿌리깊은 반골기질로도 유명했습니다. 존 호크우드는 바로 이런 곳에서 길버트 드 호크우드(Gilbert de Haukwode)라는 무두장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Mendel_II_077_r.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길버트는 상당한 재산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지역에서 명망있는 유지이기도 했습니다. 에식스의 저명한 코게샬 가문이나 보우치어 가문 등은 이때부터 호크우드 가문과 긴밀하게 연결돼, 훗날의 존 호크우드와 함께 용병단에 합류하는 여러 인사들을 배출하게 됩니다. 1340년, 길버트가 사망하자 존의 형이 장남으로서 가독을 계승했고, 존 호크우드는 런던에서 양말 제조업자의 견습생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늘을 칼로, 골무를 방패로" 바꾸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Hundred_years_war_collage.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몇 해 전부터 영국은 백년동안 지속될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존 호크우드는 기꺼이 국왕의 군대에 장궁병으로 합류했습니다. 

Englishlongbow.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이 시기의 장궁병은 흰색으로 칠해진 1.8 미터 길이의 스페인산 주목을 통째로 깎아만든 활을 썼습니다. 장궁은 숙련된 기술과 엄청난 힘을 필요로 했는데, 장력이 무려 70kg에 달했기에 숙련된 궁수는 이내 상체 골격이 영구적으로 변형되기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활쏘기는 국가 차원에서 장려되던 취미였고, 틈만나면 사격 대회가 열렸습니다. 아마도 재봉사였던 존 호크우드 또한 어릴 때부터 활쏘기를 즐겼을 것입니다. 

 영국의 장궁병들은 하루에 6 데나리온을 봉급으로 받았는데, 이것만으로도 꽤나 쏠쏠했지만 사실 당대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이역만리로 떠난 근본적인 이유는 전리품에 있었습니다. 전리품은 직속 상관과 국왕에게 많은 부분을 상납해야했지만, 그것을 제하고 보아도 개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이에 더해 귀족 포로에게서 뜯어낸 몸값이나 가난한 농민들을 협박해 얻어낸 보호비도 무시 못할 몫이었습니다. 

 19세기 역사학의 전통적인 해설에 따르면 존 호크우드는 7대 옥스포드 백작 존 드 베레 휘하에서 복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베레 가문은 '싸우는 베레 가문(fighting de Veres)'이라는 가문 전통을 가진 당대의 저명한 군사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베레 가문의 기치 아래에는 독립적인 소부대를 지휘하며 부대의 깃발을 드러낼 권리가 있는 기사 일곱, 그리고 에스콰이어 스물 여섯, 기마궁수 스물 넷이 모여 출진했습니다. 그러나 존 호크우드는 이들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기사나 에스콰이어 밑에서 간접적으로 복무하던 이름없는 자들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러나 어쩌면 존 호크우드는 노스햄프턴의 백작인 윌리엄 드 보훈 휘하에서 종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곳에 코게샬 가문의 토마스 코게샬을 비롯한 그의 에식스 고향친구들이 대거 합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전쟁 중간에 지휘관 유고 등의 이유나 순전히 병사의 개인적인 사유 등으로 인해 복무 부대가 변경됐을 수도 있는데, 당대의 전쟁 관행에 따르면 이건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Battle_of_crecy_froissart.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1346년, 크레시 전투에 존 호크우드도 참전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 전장에는 존 드 베레도, 윌리엄 드 보훈도 모두 참가해있었기 때문입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궁병들이 쏟아부은 화살비에 프랑스 말들은 "새끼 돼지 더미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격전으로 인해 많은 에식스 출신 사람들이 죽었지만, 존 호크우드는 살아남았습니다.


Battle-poitiers(1356).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존 호크우드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의 푸아티에 전투에서였습니다. 윌리엄 드 보훈은 이미 고인이 되어 이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크레시 전투 참전자 다수가 이 전투에도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총사령관은 웨일스공 흑태자 에드워드, 선봉은 워릭 백작과 가스코뉴의 캡탈 드 부흐 장 3세, 그리고 존 드 베레가 맡았습니다. 

 이미 베테랑 전사가 되어 있었던 존 호크우드 또한 이 선봉대의 일원이었을 겁니다. 부대는 남프랑스 일대에 대한 약탈행진(Chevauchée)을 일삼다가 마침내 1356년 9월 19일 아침, 푸아티에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덩굴이 우거진 언덕에서 국왕이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맞붙었습니다. 이 때 존 호크우드는 프랑스 기병대의 등 뒤를 노리기 위해 우회 기동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궁병대의 일원이었습니다. 

Battle_of_Poitiers.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푸아티에 전투는 처절하게 끝이 났습니다. 영국 측의 흑태자는 끝없이 몰려드는 프랑스 기사들의 행렬을 목도하고, 한 때는 거의 낙담하여 반쯤 정신이 나간 채 큰 소리로 기도를 외쳤고, 프랑스 국왕 또한 절박한 심정으로 금박입힌 창대에 매달린 피처럼 붉은 깃발을 들라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프랑스 왕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성한 군기 오리플람(aurea flamma)으로서, 참수된 성 디오니시오의 피에 적셔져 붉어졌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 깃발이 휘날리는 한, 전장에 더 이상의 포로와 자비는 없었습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짓밟혀 내장이 찢기고, 뽑힌 이를 토해내고, 꿰뚫린 채로 땅에 박히고, 선 채로 한 팔을 잃은 자들이 수두룩했으며, 위대한 영혼들이 육체를 떠나며 내뱉은 무서운 비탄이 가득했"습니다. 한 쪽에서는 부상으로 온 몸이 찢긴 분견대가 적 지휘관을 노리는 생의 마지막 돌격을 수행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다른 쪽에서는 이리저리 패주하는 부대가 속출하는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가스코뉴의 캡탈 드 부흐, 장 3세 또한 예순 명의 중무장 기사와 일백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소수의 기동대를 이끈 채 전장을 이탈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일부 영국군 부대는 당황하여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흑태자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마한 기사들이 다시 말 등에 올랐고, 화살을 모두 소진한 장궁병들 또한 활을 내팽개친 채 일부는 냉병기를 주워들었으며, 일부는 즉흥적으로 주인 없는 말의 고삐를 잡고 내달렸습니다. 그러나 이 극적인 돌격의 기세는 프랑스 왕실군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별다른 이변이 없었더라면 아마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프랑스 군의 후방에서 캡탈 드 부흐가 이끄는 예순 명의 기사들이 돌격해오고, 일백 명의 장궁병들이 쏘아올린 화살들이 프랑스 군을 "끔찍하게 꿰뚫"자, 이전까지의 전투로 지쳐있었던 프랑스군의 다수가 패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끝까지 국왕의 곁에 남은 이들은 충성스런 국왕 경호대, 별의 기사단, 그리고 어릴 적부터 평생을 살인기계로 훈련받은 고위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다수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살해당했습니다. 오리플람을 든 영광의 기수, 조프루아 드 샤르니 경 또한 다섯 기의 중무장 기사를 상대하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깃발을 손에 쥔 채로 전사했습니다.



Sack_of_the_town.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존 호크우드가 장궁을 내팽개친 채 마지막 돌격에 참가했을지, 아니면 캡탈 드 부흐를 따라 프랑스군을 기습한 궁병대의 일원이었을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후자였을 확률이 높아보입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기습은 그의 용병 지휘관 생활 내내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차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푸아티에 전투가 끝나자, 영국군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흑태자와 존 드 베레는 귀국했고, 캡탈 드 부흐는 북독일 지역으로 십자군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존 호크우드는, 다른 많은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프랑스의 시골을 배회하게 됩니다.



중세 용병단의 특징



Entrada_de_Roger_de_Flor_en_Constantinopla_(Palacio_del_Senado_de_España).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독일 출신인 로제 드 플로르의 첫번째 '대용병단'이 '카탈루냐인 용병단'으로도 불렸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를 모티브로 해 자신만의 '대용병단'을 창설했던 베르너 폰 우르슬링겐 또한, 자신의 용병단을 고향의 독일인들을 주로하는 동질적인 민족 집단으로 꾸렸습니다. 우르슬링겐 밑에서 일하다가 독립해 새로운 용병단을 창설한 프로방스 출신의 몬레알 달바르노는 나폴리의 퇴역군인 위주로 자신만의 용병단을 설립했으며, 그 자신도 헝가리 출신이었던 존 호르바티는 헝가리인 용병단을, 이탈리아인 알베리고 다 바르비아노는 이탈리아인 용병단을 이끌었습니다. 뒤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존 호크우드의 백색용병단 또한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용병단장과 용병 구성원들 사이의 국적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용병단은 특정한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뭉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용병단은 하나의 민족만으로 형성되지는 않았습니다. 백색용병단 또한 많은 수의 독일, 헝가리, 그리고 현지 출신의 용병단원을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현지의 정치적 상황에 불만을 가진 협력자는 용병단에 엄청난 전략적 이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용병단은 자체적인 회계 담당자와 법률 전문가, 그리고 서기와 공증인들을 포함했습니다. 총대장은 보통 하급 지휘관들에 의해 투표로 선출되었는데, 각각의 지휘관들은 상당한 수준의 자율적 권한, 이를테면 독자적으로 분견대를 파견하는 등의 지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용병단은 리더가 떠난 이후에도 해산되지 않고, 새로운 리더를 선출한 뒤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Malpaga10.jpg 베르세르크 '매의 단' 실제 모티브를 알아보자

 용병단은 오늘날의 다국적 벤처 기업에 비견될만 했습니다. 재정고문은 대체로 이탈리아인들이 맡았는데,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법률 교육을 받은 이들로서, 문서를 작성하고 이탈리아 현지의 고용인들 사이에서 중재를 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용병단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군수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자급자족적인 용병단에는 천막과 장작, 그리고 말에 편자를 박고 손상된 무기를 수리할 화로가 딸려있었습니다. 대장장이와 이발사들, 그리고 거대한 규모의 여자들의 행렬이 뒤를 따랐습니다. 여자들 중에는 자발적으로 기회를 찾아온 사람들 뿐 아니라 적지에서 납치된 민간인들이나 수녀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연대기 작가들은 이러한 여자들을 음탕하다고 비난하곤 했지만, 용병단을 따라다니는 여성들이 늘상 성적인 수단으로만 다뤄지진 않았습니다. 이들 중에는 용병 지휘관들의 정부나 병사들의 아내가 포함되어있었고, 또한 음식을 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보조적 역할도 담당하곤했습니다. 

 규모가 더 거대한 용병단 행렬에는 대포도 추가됐습니다. 당대의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용병단이 프랑스 정규군보다 야전에서의 식량 보급 및 물자 조달에 관하여 훨씬 능숙하다고 기록했는데, 사실일 것입니다. 중세시대의 전쟁이란 것은 사실, 오늘날의 시점으로는 엉망진창 떠돌이들의 행렬처럼 보입니다. 적지에서는 사실상 보급선이랄게 존재하지 못했기에, 어떤 부대든 자급자족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용병집단은 이러한 자급자족에 당대의 그 어떤 군사집단보다 숙달되어 있었을 겁니다. 

 약탈은 도덕적 딜레마를 고려해야할 선택 사항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필수 요소였습니다. 적지 내의 민간인 재산은 아주 정당한 전리품으로 여겨졌고, 여기에 있어서는 용병과 정규군, 그리고 신성한 교황의 군대에 있어서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약탈은 오히려 하나의 전술로서 장려되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용병들은 이러한 초토화 전술에 그들이 '파괴자'라고 불렀던 현지 농민들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낙오된 용병들이나 파괴자들은 분노한 해당 지역 땅주인들의 손에 맞아죽을 각오를 해야했을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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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시려워
+ 25/09/20 22:43
수정 아이콘
훌륭하시네요
짭뇨띠
+ 25/09/20 22:46
수정 아이콘
우린 정말 낙원의 시대에 살고 있군요
+ 25/09/21 00:01
수정 아이콘
항상 양질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다음편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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