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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6/14 21:25:51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runch.co.kr/@wgmagazine/161
Subject [일반] 광무제를 낳은 용릉후 가문 (11) - 뒤늦은 깨달음, 경시제 유현 (3) (수정됨)
전편 요약

경시제 유현(劉玄)은 제무왕 유연(劉縯)과 광무제 유수의 팔촌 형제로, 모두 전한 경제의 손자인 용릉절부군 유매(劉買)의 현손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모은 빈객이 벌인 사건 때문에 외가가 있는 평림으로 달아나 녹림병의 일원인 평림병에 가담했다.


유연을 중심으로 뭉친 녹림군은 신나라에 맞서 한나라를 다시 일으켰으나, 유연이 아니라 녹림의 주류 세력인 신시·평림병 소속인 유현이 황제로 추대되었으니 곧 경시제다. 유연과 유수 형제가 군공을 세워 신나라를 뒤흔들자, 이를 꺼린 공신들의 견제에 동조한 경시제는 유연을 죽였다.



부끄러워하는 경시제

한나라 부흥 운동을 이끌고 신나라를 무너뜨리는 데에 일생을 바친 유연이 허무하게 죽었다. 그러나 이미 경시제를 세워 놓은 한나라는 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유연과 함께 신나라에 타격을 준 유수는 형의 죽음을 듣고, 공성하고 있던 영천군 부성현에서 형이 함락해 한나라의 임시 수도가 된 완으로 급히 달려갔다.


자신이 모살한 사람의 동생, 유수. 경시제는 유수까지도 경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수는 경시제를 형의 원수가 아닌 황제로 대했다. 항의하지 않고 사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도의 속관들은 전 사도인 유연을 조문하기 위해 유수를 찾아왔는데, 유수는 그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며 몸가짐을 조심했다. 또 황제의 명을 어긴 죄로 죽었다는 이유로, 형의 상복조차도 입지 않았다. 더욱이, 먹고 마시며 말하며 웃는 것을 모두 평상시처럼 지냈다.


그렇게 유수는 형이 죽었는데도 형을 죽인 황제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황제가 형을 죽인 것이 마땅한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유수의 행동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형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것이 경시제와 공신들에게 위협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처럼. 훗날 경시제가 유수를 하북 원정 대장으로 보낼 때 주유가 유수를 경계해 반대한 것을 보면, 이런 행동으로도 공신들이 여전히 유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경시제는 이런 유수에게서 매우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경시제는 마음이 냉혹하고 얼굴이 뻔뻔한 인물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공신들의 견제 때문에 부당하게 유연을 죽인 것임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수가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원망을 내비치지 않으며 사죄하고 자신에게 굽히고 들어오자 경시제는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결국 경시제는 유수를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으로 삼고 아직 작위가 없던 그에게 무신후(武信侯)라는 작위도 내려주었다. 형 유연의 직위나 작위를 이은 것은 아니지만, 형에 버금가는 군부의 유력자로 대우해준 것이었다.



신나라를 꺾은 한나라의 두 창 중 하나는 부러졌으나, 다른 하나는 여전히 경시제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비록 공신들과 경시제가 큰 꿈 없이 자신의 욕심 따라 사는 존재들이라 하더라도, 그 창을 들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아직까지 가쁘게 숨을 헐떡이며 살아 숨 쉬고 있는 신나라의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이미 심한 상처를 입은 신나라는 비틀거리며 고꾸라지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신나라의 중신, 또 다른 유수의 죽음이었다.


또 다른 유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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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흠이 쓴 책으로 소실된 칠략의 문장을 모은 칠략일문. 칠략은 동양 서지학의 시조로 여겨진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가면, 유연과 유수 형제가 매형 등신 등과 함께 연 잔치에서 채소공(蔡少公)이라는 사람이 도참을 들어 유수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자기 바로 앞에 있는 유수가 아닌, 궁궐에 있는 국사공 유수를 가리키는 것 아니겠냐고 생각했었다.


이 국사공 유수의 본명은 유흠(劉歆)으로, 전한 말기와 신나라의 학자이자 사상가며 한나라 고조 유방의 동생 유교(劉交)의 먼 후손이다. 애제 유흔(劉欣)이 황제가 되자 흔(欣)과 흠(歆)이 소리가 비슷하다 해 황제의 이름을 범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개명했다. 이때 자도 자준(子駿)에서 영숙(穎叔)으로 고쳤는데, 광무제 유수의 자인 문숙(文叔)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한서》 초원왕전에 주석으로 남은 응소의 견해에 따르면, 당시에 유수라 이름하는 사람이 무도한 자들을 잡고 불의 나라인 한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도참이 있었다. 즉 유흠은 이 도참에 따라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개명했다는 것이다.


그런 야심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외의 일이지만, 유흠은 왕망의 심복이 되어 신나라의 중신 노릇을 했고 ‘국사공’이라 불렸다. 왕망이 뭇 대신들에게 왕씨 성을 하사할 때에도, 유흠, 아니 국사공 유수는 딸이 왕망의 아들에게 시집갔기에 따로 왕씨 성을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국사공 유수의 마음도 곤양 전투로 신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흔들리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왕망의 사촌인 위장군 왕섭(王涉)이었다. 왕섭은 수하에 도사 서문군혜(西門君惠)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서문군혜가 천문과 도참에 근거해 유씨가 다시 일어날 것이며 유수의 이름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유수가 천자가 되리라는 도참이 당대에 꽤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왕섭은 서문군혜의 말을 믿고 대사마 동충(董忠)과 함께 국사공 유수의 집무실인 국사전에서 여러 차례 천문을 해석하고 도참의 논리를 따라 국사공을 설득했다. 국사공은 이제는 그 옛날의 야심을 잃었고 꽤 오랫동안 신나라를 섬겼기 때문인지 이렇다 할 답이 없었다.


이에 왕섭은 홀로 국사공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당신의 종족을 보존하고자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제서야 신나라에 굳건하게 충성을 바치는 것 같던 국사공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국사공은 천문과 인사를 논하며, 동방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의미심장한 전환이었다. 국사공은 도참에 따라 이름을 유흠에서 유수로 고쳤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아닌 동방, 즉 장안을 지키는 관문 이동에서 일어난 한나라 부흥 운동이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즉 겉으로는 신나라에 충성하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신나라는 이미 천명을 잃었고 한나라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을 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 곧 국사공 유수에게는 스스로 “유수가 천자가 되리라”라는 도참을 성취할 야망은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새로 일어나는 한나라는 마땅히 지금 신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경시제의 한나라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왕섭도 자신의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국사공을 천자로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방에 이미 세워진 경시제의 한나라에 투항하는 것이었다.


“신도애후(新都哀侯: 왕망의 아버지 왕만)는 어려서 병이 있었고, 공현군(功顯君: 왕망의 어머니)는 술을 좋아하니, 사람들은 지금 황제가 우리 왕씨 가문의 친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합니다. 대사마는 중앙군의 정예병을 주관하고, 저는 궁궐 호위를 맡고 있으며, 이휴후(伊休侯: 유흠의 장자)는 전각을 맡고 있습니다. 마음을 모아 함께 도모하여 황제를 붙잡고, 동쪽으로 남양의 천자(경시제)에게 귀순한다면 종족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함께 멸족이 될 것입니다!”


국사공은 일찍이 신나라의 경시장군으로 왕망의 심복이었던 진풍(甄豐)이 왕망과 사이가 벌어져 죽었을 때 자신의 세 아들도 연루되어 죽은 것 때문에 왕망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원한을 내색한 적이 없었다. 이제 신나라가 뒤흔들리자, 그 원한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렇게 유수, 왕섭, 동충 세 사람은 금성이 출현할 때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의 모의는 동충이 끌어들인 무관 손급(孫伋)이 음력 7월에 처남 진함(陳邯)과 함께 밀고함으로 말미암아 들통이 나고 말았다. 왕망이 동충 등을 소환하자, 호군 왕함(王咸)은 음모가 드러난 것은 몰랐으나 동충에게 발각되기 전에 지금 사자를 베고 쳐들어갈 것을 권했고 동충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유수, 왕섭, 동충은 왕망의 심문에 죄를 자복했다. 왕망은 환관들에게 이들을 끌고 나가게 했는데, 동충은 칼을 뽑아 자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호송되는 중에 환관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비록 반란은 실패했으나, 신나라의 중신들과 황제의 사촌이 정권을 뒤엎고 경시제에게 투항하려고 한 이 사건은 신나라가 이제는 곧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왕망 역시 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왕망은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한 염단을 대신해 경시장군(更始將軍)이 된 황제의 장인 사심(史諶)에게 동충은 미쳐서 발작하다 죽은 것이라고 선포하게 했다. 이미 경시제가 들어섰는데도 아직까지 경시장군이라는 칭호를 놓지 않은 것에서 경시제뿐 아니라 왕망 역시 이 ‘경시’라는 이름에 집착하는 것이 엿보인다.


또 자결한 유수와 왕섭의 죄는 숨기고, 유수의 장자인 이휴후는 직위를 강등하는 선에서 그쳤다. 대사마 동충의 일족만을 한 구덩이에 묻어버렸을 뿐, 대사마의 속관들과 병사들도 불문에 부쳤다.



그렇게 유수가 천자가 되리라는 소문은 모든 이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주목받지 않는, 묘한 도참이 되고 있었다. 경시제는 아직까지 스스로 무엇을 이뤄내지 못했으면서도 다시 세워진 한나라의 황제라는 이유만으로 도참을 초월해 만인의 기대를 받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신나라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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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이 있는 관중 지역을 둘러싼 네 관문(소관, 대산관, 무관, 함곡관)과 신나라의 최후. 붉은색은 관중을 포함하는 현대의 산시성.


곤양 전투 이후, 신나라의 여러 군현들에서 봉기가 일어나 신나라의 관료들을 쫓아내고 한나라로 귀순했다. 신나라는 이런 불온분자들을 진압하기는커녕 내부 반란을 수습하기도 벅찼다. 군사력이 무너지고, 지방 통제력도 무너지고, 조정 장악력도 무너지고 있었다.


왕망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곤양 전투에서 패배하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왕읍이 책임을 지고 자결하지 않도록 위로했다. 그를 당시 아들이 없는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죽은 동충을 대신해 대사마로 삼았다. 또 왕읍을 위로하도록 진언한 최발(崔發)을 대사공으로 삼는 등, 조정의 빈 자리를 채우며 어떻게든 나라를 정상화하려 했다.


그러나 왕망은 우울하고 또 분노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술과 당시에는 매우 호화로운 음식인 전복만을 먹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매일 군사 문서들을 읽다가 지쳐서 의자에 기대 잠깐 졸 뿐 편히 베개를 베고 눕지도 못했다.


왕망은 이런 때에 더욱 도참과 요술에 집착했다. 한나라 원제의 능인 위릉과 성제의 능인 연릉을 훼손하는 등 백성들이 더 한나라를 추억하지 못하게 하고 온갖 미신과 술수를 지어냈다.


가을이 되자, 국사공 유수 등이 생각하던 그 날, 곧 금성이 황제와 조정을 의미하는 태미의 영역을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기회로 천수군에서는 성기현 사람인 외최(隗崔) 형제가 형의 아들 외오(隗囂, 외효)[1]를 추대하고 태수와 자사를 협박해 굴복시키거나 살해했다. 이제 신나라의 수도 장안 근처까지 병화가 닥치고 있었다.


그러나 신나라의 종말은 경시제에게서도 외오에게서도 비롯하지 않았다. 홍농군, 신나라 식으로는 우수(右隊)의 석현(析縣: 현 난양시 시샤현) 사람인 등엽(鄧曄)과 우광(于匡)이 스스로 거병하고 한나라에 가담한 것이었다. 이들은 장안과 완을 잇는 관문인 무관이 석현 인근의 단수현(丹水縣: 현 난양시 시촨현 서)에 있는 것에 주목했다.


고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시작한 이들은 무관을 수비하기 위해 교정(鄡亭)에 주둔하고 있던 석현의 현령과 그의 수천 병사를 항복시켰다. 또 석현과 단수현을 점령하고 무관을 공격해 도위 주맹(朱萌)을 항복시키고 홍농태수 송강(宋綱)을 죽였다. 나아가 호현(현 싼먼샤시 링바오시 서)까지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장안을 수비하기 위해 배치한 신나라의 병력이 도리어 한나라의 병력이 되어서 신나라의 심장을 찌르고 들어온 것이었다.



왕망이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자, 대사공 최발이 진언했다.


“《주례》와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나라에 큰 재앙이 있을 때에는 울부짖으며 하늘을 위무한다고 했습니다. 《주역》에도 ‘먼저 울부짖고 통곡한 후에야 웃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구원을 청해야 합니다.”


왕망은 최발의 말을 따라, 군신들을 이끌고 남쪽 교외로 나아가 친히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신나라를 구원해 달라고 외쳤다. 더 나아가, 자신의 공로를 하늘에 아뢰는 “고천책”이라는 글을 짓고, 백성들과 선비들은 아침저녁으로 울고, 그들에게 간단한 밥과 죽을 주었으며, 고천책을 외울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낭(郞)으로 삼아 등용했다.



신나라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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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라의 화폐. 신나라의 멸망 원인 중 하나는 복잡한 화폐개혁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왕망은 실질적으로 하는 것 없이 미신이나 믿는 바보 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왕망도 그런 바보는 아니었다. 장군 아홉 사람을 임명하고 호(虎)라는 칭호를 주어 구호(九虎)라 일컬어 북군의 정예병 수만 명을 내주어 동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왕망은 그러면서도 구호 장군들을 믿지 못했는지,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모두 인질로 삼았다. 유연과 맞서 싸운 신나라의 남양태수 진부가 잠팽의 아내와 어머니를 인질로 삼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또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신나라 황실의 재보를 아끼고 구호와 그 군사들에게는 은전 4천 문만을 하사해, 병사들은 싸우기 전부터 이미 전의를 잃었다.


이미 수만 명으로 규모가 불어났고 수천 쇠뇌를 갖춘 등엽과 우광의 부대는 전의를 잃은 구호 부대 중 여섯을 손쉽게 격파했다. 패주한 여섯 구호 중 사웅(史熊)과 왕황(王況)이 죄를 청하자 왕망은 이들을 자결하게 했고, 나머지 넷은 모두 도망쳤다. 패주하지 않고 남은 셋은 군사를 물려 수도의 식량 창고, 경시창을 지켰다.


경시제는 서병대장군 신도건(申屠建)과 승상사직 이송(李松)을 보내 등엽과 우광에게 호응하게 했다. 등엽과 우광은 무관을 열였고, 이송이 이끄는 2천 군대가 등엽 등에게 합류했다. 이들은 경시창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자 왕헌(王憲)을 교위로 임명하고 이곳을 우회해 장안을 직접 공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러자 장안 주변에 사는 여러 유력자들도 들고 일어나 한나라 장수라고 일컬으며 신나라 공격에 동참했고, 백성들은 왕망 일가의 무덤과 종묘를 부수었다.


등엽과 이송은 경시창을 함락하지 못하자 처음에는 경시제의 대군을 기다리며 공성 장비를 준비했다. 그러나 봉기 세력이 우후죽순 일어나고, 천수의 외씨 일당도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자, 다들 공적과 재물을 탐내 앞다투어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경시제가 친히 공적을 세울 기회는 사라졌다.


왕망은 옛 진나라가 무너지기 직전 죄수 부대를 꾸려서 진승의 봉기군을 막은 전례처럼 죄수 부대를 편성해 경시장군 사침에게 맡겼다. 그러나 이들은 장안 근처를 흐르는 위수 강의 다리를 건너가야 하자 도주했다. 왕망은 이들이 출진할 때 피로 맹세해 싸우지 않는 자들은 신의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포했으나, 막상 왕망을 떠나자 병사들은 맹세를 잊어버린 듯이 흩어졌다. 그렇게 신나라 최후의 희망도 허망하게 꺼졌다.


23년 10월 4일(음력 9월 1일, 신나라 역법으로는 10월 1일)에는 한군이 장안성 문을 넘어 쳐들어왔고, 5일에는 성내의 민간인들도 한군에 가담했다. 왕망은 겉으로는 천문을 계산하며 위엄 있게 옷을 입고 항전 의지를 내보였으나, 실제로는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결국 6일에는 궁궐까지 한군이 쳐들어왔고, 왕망의 일족들과 끝까지 왕망에게 충성한 신하들은 한군과 맞서 싸워 전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왕망은 상인 두오(杜吳)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교위 공빈취(公賓就)는 왕망의 목을 베었다. 군사들은 왕망을 죽였다는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 왕망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고 나누어 다투어 서로 죽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신나라 사람들은 경시제의 존재만을 믿고 스스로 일어나 신나라를 무너뜨려 경시제에게 바쳤다. 경시제는 그저 한나라의 황제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천하를 손에 넣었다.



요약

경시제는 유수가 형의 죽음을 원망하지 않고 몸가짐을 조심하자, 부끄러워하며 그를 장군과 제후로 삼았다.

장안에서는 국사공 유수(유흠) 등이 신나라의 붕괴를 예감하고 반란을 모의했으나 실패했다.

홍농에서 등엽과 우광 등이 거병해 장안을 공격하자, 경시제도 신도건과 이송을 보내 이들을 도왔다. 장안 사람들도 가담해 결국 왕망의 저항을 분쇄하고 왕망을 죽여 신나라를 멸했다.


연표

23년 음력 7월, 신나라의 국사공 유수, 대사마 동충, 위장군 왕섭 등이 한나라에 투항하려고 모의했으나 발각됨. 동충은 살해되고 유수·왕섭은 자결.

23년 가을, 천수에서 외오가 거병.

23년 가을, 홍농에서 등엽·우광이 거병, 무관을 함락하고 장안으로 진격. 경시제가 신도건·이송을 파견해 합류. 장안 주변에서 한나라에 호응해 봉기.

23년 10월 4일(음력 9월 1일), 한군이 장안성에 입성.

23년 10월 6일(음력 9월 3일), 왕망 전사.


각주

[1] 囂는 ‘들렐 효’, ‘많을 오’ 두 가지 훈음이 있는데, 《후한서》 주석에 따르면 ‘오’로 읽어서 ‘외오’라고 해야 한다. 흔히 외효라고 하지만, 이 글에서는 외오라고 하겠다.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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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페인
25/06/14 21:53
수정 아이콘
외효가 아니라 외오였군요, 덕분에 알아갑니다. 왕망의 비참한 최후는 자업자득이란 생각입니다. ‘망탁조의’의 첫 번째 주자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죠. 잘 읽었습니다.
계층방정
25/06/14 22:2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마지막 결사항전을 위해 준비한 부대도 믿지 못하는 모습이나, 형벌 부대까지 도망치는 모습에서 왕망의 통치가 얼마나 인망이 없었는지가 느껴지더군요.
임전즉퇴
25/06/15 06:54
수정 아이콘
숫자 맞춰 망탁조의지 탁이한테도 미안한..
Liberalist
25/06/15 07:27
수정 아이콘
왕망은 정치질은 잘하지만 본신의 능력은 쥐뿔도 없는 인간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인 것 같습니다. 왕망이 최고 권력자가 되기까지의 판단력은 무지막지하게 날카롭고, 궁정 정치의 맥을 다 꿰뚫고 있었는데 경세가로서의 역할을 할 때가 되니까 순식간에 똥멍청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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