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한강은 ‘광주 사진첩’을 보고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고 말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이것은 한강 자신이 글쓰기의 동력이었다고 믿어 온 다음의 두 질문과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리하여 이 강연은 이렇게 들린다 :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낀다. 아직 사랑하기에 삶이 고통스럽고, 아직 사랑하기에 삶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있다. 사랑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다. 우리를 연결해 주는 고통이다. 정말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난다면,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이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에서도 인간의 온기를 어루만질 수 있다면,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우리의 한계인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얼마나 아파해야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는 없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도울 수도 없다. 그러나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는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도 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 부디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다.
: 과연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으로 일가를 이뤄낸 사람답다.
*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한 문장이 있다. 분명 벼르고 썼을 것이라 여겼던 구절이다. 문언은 다음과 같다.
“다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폴라리스 랩소디』, 20장 「긴 노래」 中)
하이트(Jonathan Haidt)라면 회의적인 답변을 내놓았을 것이다. 『바른 마음』에서 그는 인간이 이타적이기보다는 이집단적(利集團的, groupish)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집단적인 면모조차 1할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9할은 이기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사람에게는 대부분의 경우 ‘나’가 최우선이고, 특별히 이집단성이 자극되는 경우에만 ‘우리’가 봉사의 대상이 된다. 외계인이 쳐들어오지 않는 한 인류 전체가 ‘우리’로 인식될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인류는 고사하고 국가조차도 웬만해서는 이집단적 희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영도는 몇 줄 아래에 이렇게 두드리고 있다.
“다만 살아가기는 하잖습니까?”
(『폴라리스 랩소디』, 20장 「긴 노래」 中)
살아가기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일까,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일까? 삶, 사람, 사랑 - 이 세 낱말의 울림은 한국어에서는 너무 비슷해서 어떤 시적인 기분을 자주 들게 만든다. 어쨌든 이영도가 한강과 비슷한 발상에서 저런 대화를 기획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살아가기는 한다는 말은 [ 양보의 표현인 동시에 희망의 표현 ] 이다. 생명이 진실을 증거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 정도로 오묘한 문장을 이영도는 훗날에도 한 번 두드린 적이 있다. 역시 한 쌍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구절인데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게 누구라도! 그 사람을 알면! 그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믿으세요?”
(『피를 마시는 새』, 4장 「묻은 것과 믿은 것」 中)
이것은 사람을 믿느냐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해와 사랑은 서로 다른 태도지만, 대체로 이해하면 미워하기 어렵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면 서로 증오하지 않는다. 이해를 시도했으나 상대의 전제를 용납할 수 없을 때 비로소 대화가 결렬된다. 자기 관점에서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를 비정상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면 이미 서로가 적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고 얼마만큼의 가능성을 할당하느냐의 문제다. 얼마나 믿는가? 이영도는 또다시 [ 양보를 선택하는 동시에 희망을 선택 ] 한다.
“믿고 싶어요!”
(『피를 마시는 새』, 4장 「묻은 것과 믿은 것」 中)
선비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라고 하기에는 전자에 못내 더 치우쳤다는 감상이 든다. 누구든지 이해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한비자』의 순임금조차 어부들을 교화하는 데 1년을 들여야 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누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1시간이라도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단지 승자뿐이다. 마음의 여유가 충만한 사람뿐이다. 대세가 정해졌다는 것을 확증받은 뒤에야 자비를 베풀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전까지는 서로를 원수처럼 증오하기 쉽다.
그것을 알기에 이영도는 다음과 같이 두드렸다.
“그렇다. 그리고 최대 600조가 죽을 수도 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나는 그것을 막으려 했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게 해주는 대신 너희들이 서로 죽이는 것만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너희들이 원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들을 더 견딜 수 없다. 꿈을 견딜 수 없다. 나의 아들을 오염시킨 너희들을 견딜 수 없다. 자유롭게 생을 누리고 모두 멸망해버려라!”
(『피를 마시는 새』, 41장 「장생」 中)
물론 익히 알려져 있듯이 그는 반박하기 위해 두드린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향에서의 반박인가? 눈부신 것들을 사랑하기에 세상의 추악함에 아파하는, 동시에 그 아픔에 기대어 인간임을 외치는 숭고함으로써의 반박은 아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흔치는 않다. 우리는 대개 아주 잠시 동안만, 이집단성이 죽은 자들과 공명하는 동안만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둔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민을 유난으로 치부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둔감함 역시 꼭 버려야 할 덕목은 아니다. 아래의 문장은 꽤 유명하다.
······들은, 둔감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 11장 「침수」 中)
그래서 이영도의 관점은 수세가 아니라 공세이다. 속앓이가 아니라 소리침이다. 사랑이 아니라 증오이다. 설령 멸망할지언정 맞대고 싸워보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주장하는가? 사랑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정념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설득은 쉽지 않고, 설득을 당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감정에 작용하는 사랑이 유사 이래로 화합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사랑을 예찬하는 자들은 대개 진실을 온전히 말하지 않는다. 사랑이 내밀하고, 개인적이고, 국소적이라는 점을 말하지 않는다. 기실 사랑이 집단 단위로 작용하는 법은 없다.
반면에 증오는? 증오는 그렇지 않다. 증오는 개인적으로도 유효하고 집단적으로는 유용하다. 치욕을 되갚으려는 자들이 놀라운 위업을 이룩한 역사는 깊다. 전국칠웅식의 구도가 근세까지 이어진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근대를 얻었다. 그런 발전의 원인을 단지 경쟁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점잖은 표현이다. 갈등과 전쟁과 착취와 살육이 있었다. 기예는 싸우면서 벼려진 것이다. 증오는 그런 열정을 준다. 적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동지를 만들어주고, 상대를 쳐부수려는 마음은 자신을 강화시킨다. 그것이 증오의 힘이다.
그러므로 집단의 감정을 조형하는 이 힘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따라 나온다. 일찍이 지라르(René Girard)는 증오의 통제를 공동체의 존립과 연관시켰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사람들의 집단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일부를 죽일 수밖에 없어. 다른 모든 구성원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하는 이 개인은 놀랍게도 모욕과 혐오,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되지. 왜 그런가 하면, 집단의 구성원들이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이 와해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서로 공격하는 대신 만장일치하에 한 명을 공격하지. 이것을 희생양이라고 부르지.
(『눈물을 마시는 새』, 10장 「출발하는 수탐자들」 中)
이런 관점에서 사랑은 사실상 독립변수가 아니다. 증오의 칼날 앞에 스러지는 인간성의 징표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횡행하는 증오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한 곳에 집중시켜 희생을 줄이는 해법이 요구된다. 지라르는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를 추종함으로써 증오가 생겨날 여지를 차단하자고 제안했다. 이영도는 위기를 타개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희생양으로 죽어서라도 증오를 소진시켜야 한다고 암시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내지는 않았다. 증오에서 파괴만을 찾지는 않았다.
이러한 두 번째 입장의 대강은 아래와 같이 표현된다.
“규범보다 무의미한 것은 없다. 엄밀히 말해서 규칙은, 규범은, 윤리는 한계 짓는 능력밖에 없다. 반짝거리기나 흐르기, 끓기를 금지하는 도덕이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규칙과 규범과 윤리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밖으로 나아가는 대신 안으로 한계 짓는다. 죄를 저질러라! 증오해라! 죽여라! 규범을 무시하고 죄를 저지를 때, 타인이 안간힘을 다해 지키는 것을 거리낌없이 빼앗아 마실 때 생은 장절한 날개를 펼치고 미답의 하늘로 날아간다! 그 하늘에서 너희들은 반짝거리고 흐르고 끓을 수 있다!”
(『피를 마시는 새』, 41장 「장생」 中)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를 추종하는 생은 평온할지언정 단조롭다는 것이다. 결코 닿을 수 없는 동일성을 이상향으로 놓는 것은 스스로를 한계짓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집단이 와해되고 사랑이 파괴될지언정 자유롭게 투쟁하겠다는 패기가 있다. 물론 이 말은 비꼬기 위하여 선언된 것이다. 하지만 이영도는 반박에 재반박을 더함으로써 끝내 증오가 열어젖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 양보하는 동시에 희망 ] 하기에는 그것이 지나치게 뚜렷하기 때문이다. 증오에는 당연히 힘이 있다. 합치고 가르고 이룩하고 없애버리는 힘이 있다.
대신에 그가 진정으로 [ 양보하는 동시에 희망한 ] 바는 지속에 대해서였다. 사랑보다 증오가 강하다면, 그것이라도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랐다. 1만 6천 년만에 고상해질 수 없다면 30만 년 동안 치고받기를 바랐다. 이것은 일견 증오와 반목이 영원할 거라는 저주처럼 들리지만, 실은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 관점에서 희망으로 두는 것은 사실상 그것 하나뿐이다. 그 논설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것이 사람의 힘이다. 너희들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멸망을, 후손에게 저지르는 죄를,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낭비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마라. 무엇이 그리 급하고, 무엇이 그리 두렵고, 무엇이 그리 슬픈가? 너희들은 강하다. 600조의 개체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찬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들의 힘에 바치는.”
(『피를 마시는 새』, 41장 「장생」 中)
과연 들뢰즈의 눈으로 니체의 언어를 옹호하는 문학가다운 말이다.
*
그리하여 사랑은 개인적인 기적이고, 더 큰 단위에 대해 기대하는 사랑은 고통으로 돌아와 인간성을 증거할 따름이다. 증오는 무척 강력하지만, 싸우고도 멸망하지 않은 자들에게만 투쟁에서 창출된 신비를 공유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성인군자로 살 만큼 예민한 사람은 적다. 그러나 둔감한 자들이라도 멸망이 예정된 싸움에 제물로 나아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당연히 정답이란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현대국가의 이상은 균형점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두고 있다.
그 결과는 매우 유명하다.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모두가 모두를 사랑할 수 없다면, 증오하면서도 멸망하지 않을 수는 있는가? 대의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민주공화정은 공화제에 민주성을 확대함으로써 지금에 이른다. 그러므로 선출권력은 국민에 의하여 성립하지만 정치적 대결은 대행자들의 몫이다. 총의로서의 국민은 주권자의 권능으로 면책당하고, 정치인이 몰락하더라도 지지자들이 멸망하지는 않는다. 멸망하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증오할 수 있다. 증오할 수 있으므로 한없이 벼려질 수 있다. 이것이 공동체를 깨뜨리지 않고도 증오를 주고받도록 고안된 최대한의 틀이다.
사람이 행위를 만드는가, 행위가 사람을 만드는가? 정견을 보고 정치인을 지지하는가, 정치인을 보고 정견을 지지하는가? 당연히 둘 다이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사람은 신뢰를 소모해 양해를 얻어낸다. 따라서 신뢰를 잃어버린 자는 행위로만 거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멸망을 피하려는 제도는 행위를 처단하되 사람을 처단하지는 않는다. 정치인을 처단하되 정견을 처단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장기지속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이기 때문이다. 모두의 합의는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합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균형이다. 서로 증오하기에 우리 사회에서는 점점 더 조심하는 자들이 많아져왔다. 유명무실한 규정이 줄었다. 감시하는 눈초리가 늘었다. 예컨대 2010년대 이후 정치권의 병폐들이 많아진 듯 보이는 것은 구태가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증오가 많아졌고 알려지는 바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증오는 그 속성상 늘 합리적인 선을 넘는다. 그러나 무리한 공격은 대개 계승되지 못한다. 상대가 멸망할 수 없는 싸움에서는 유효한 논리만이 일시적인 승리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이 [ 양보하는 동시에 희망했던 ] 것은 바로 이 원리의 작동이었다.
그런 한에서 위 같은 구조는 초인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건곤을 뒤바꾸는 일을 지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아래와 같은 태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中)
물론 누차 확인되었듯이 이것이 성에 차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슬픔은 세상 속에서 반복된다. 나의 세계는 나와 다시금 별리된다. 길들은 헤메일 만큼 알기 어렵다. 미래는 벽처럼 차갑고 빛은 희미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궁구된 바에 의하면 그것이 차악이다. 다른 최선처럼 보이는 것은 대체로 최악이다. 차선이 가능했던 시대는 이미 반세기 전에 지나갔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기에 지적하자면, 우리가 한평생 나눠야 할 것은 증오다. 증오이지 멸망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다.
증오의 자장 안에서도, 이 정도의 의론은 유효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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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지배자이시며 하늘의 통치자이시며 우리 모두가 믿는 이라세오날의 거룩한 영광에 의지하여 말한다 귀하디 귀한 우리들은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삶은 형극이고 시간은 잔인한 강탈자다. 풍요롭지 못하여 인색한 세상은 타인의 간난을 통해서만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 뿐 스스로 행복을 자아내지 못한다. 결핍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증오를 낳으며 증오는 죽음을 낳는다. 죽음의 사슬은 끊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줄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은 우리가 서로에게 주는 것 뿐이다. 세상이 주는 증오를 버리고 우리가 만들어 낸 사랑만이 남게 해라. 귀하디 귀한 우리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일평생 쉼 없이 줄 수 있는 것도 사랑뿐이다. - 이라세오날의 사자, 피를 마시는새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과 더 많은 인간애다 - 옌스 스톨텐베르그, 722 테러 추도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