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여, 남쪽으로 가라!"
전통적으로 '중국'은 황하 유역을 말하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진한 시대와 남북조 시대라는 수백년의 세월을 거쳐 이 경계는 점차 남쪽으로 확장하였고,
양자강(장강) 유역이 새로운 중국의 경계로 편입되었다.
삼국지 시대를 거쳐 북방에 오랑캐들이 쳐들어오자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을 피해 수백만의 북중국인들이 남쪽에 흘러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황하 유역의 북중국 지역은 불규칙한 강우량과 그로 인한 홍수, 황충, 가뭄, 토양 염류화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곤 했다. 이곳에선 주로 밀농사가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 남중국은 규칙적인 강우량을 갖고 있었기에 수리관개에 유리했고,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토양이 비옥했고, 각종 상품작물도 재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강우량으로 인해 늪과 밀림, 그리고 그로 인한 열병이 창궐하는 악독한 환경이었기에, 남중국의 농부들은 한동안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인간의 적극적인 개입은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았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고 온몸이 문신으로 뒤덮여있던 야만족들은 새로운 백성이 되었고, 늪지대는 개간되어 배수와 관개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남중국 농업 혁명의 주체는 북쪽에서 흘러들어온 옛 호족들이었다. 그들은 남쪽에서 새로운 왕이 되었다. 곧, 이들 대가세족은 황제도 마음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자연스레 지역문화와 문학에서의 새로운 장르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서정시의 원류는 북중국 지역의 호족이었던 조조에게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그의 아들인 조식의 칠보시가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칠보시 자체는 후대의 창작임이 분명하지만, 호족들 사이에서 새로운 문학 양식이 태동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시를 짓는다는 것은, 호족들 사이에선 고도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의 일종이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의 일상생활 및 소통에서 개인 메신저와 소셜 미디어를 떼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듯, 이 시기의 시는 귀족들만의 차별화된 언어나 다름없었다. 어떤 귀족이 시를 짓지 못한다면, 그는 벙어리나 다름 없었다. 군권을 지닌 대장군이나 만인지상의 황제도 이 법칙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예술과 정치 사이의 밀고 당기는 상호고발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강남의 시인들은 자신들이 정치권력과 떨어져 있음을 강조하며 자신들이 하는 예술의 순결함을 강조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깨끗하다 자부했고, 그들이 하는 말은 깨끗한 말, 청담(淸談)이 되었다. 이들의 청담만을 따로 모아놓은 『세설신어』에는 항구를 따라 늘어선 대가문의 저택과 별장의 사교모임 풍경이 생생히 드러나 있어서, 그들이 주위의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정치인의 심기를 거스른 시인들은 이 화려한 도원경에서 끌려나와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효수되곤 했다. 깨끗한 말의 대가가 더러운 목의 받침대가 되는 시대였기에.
죽림칠현
어떤 이들은 아예 속세를 등지고 은거하기 시작했다. 본래 진한대의 정치인들은 종종 부패를 경계한다는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는 어떠한 예술적, 종교적 열망이 또다른 동기로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예 자연인이 되어 산 속 혈거인처럼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서울 외곽의 인적 드문 곳에 별장을 짓고 오직 복잡한 세상일로부터만 등을 지기도 했다.
본래 자연은 야만적인 공간이었고, 개척해야할 대상이었을 뿐이지만, 이 때부터는 아예 주거공간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원림(園林)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인공정원을 조성하여 산책하는 것을 예술적 행위로 여겼다.
혜원(慧遠)
호계삼소(虎溪三笑): 여산에 은거하던 승려 혜원이 도연명과 육수정을 배웅하다가 세속의 경계인 호랑이 계곡을 넘어버렸다.
자연으로 간 것은 귀족 뿐만이 아니었다. 도사와 스님들도 자연 속으로 갔다. 그들은 중동의 여러 은자들이 그러했듯, 자연에서 새로운 레시피를 찾아내는 데에서 적극적이었다. 계보가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각종 한약과 단약이 이 때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혜원(慧遠)은 여산(廬山)에 거대한 불교공동체를 설립했고, 화양은거(華陽隱居), 화양진일(華陽眞逸), 산중재상(山中宰相) 등으로 불렸던 도홍경(陶弘景)은 대표적인 이 시기의 은거도사였다.
중국 문명에 틀어박혀 있던 사람들의 세계관은 외부의 자연환경에 부딪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불교도들은 자신들 마음 속의 성스러운 땅 인도를 '중국'이라 불렀고, 시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언어로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중국이라는 개념은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며 팽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중국을 야만인들에게 침탈당한 이래 남조의 귀족들은 늘상 고토탈환이라는 하나의 신성한 꿈을 꾸었다. 새로운 낙원이 고향을 대체해주지는 못한 탓이었다. 이것은 남조에서 상시적 갈등 상황을 불러일으켰는데, 새로운 낙원에 만족하는 재지 엘리트 호족 세력과 조상들의 땅을 탈환하려는 군사 지휘관 세력 간의 다툼이 바로 그것이다.
(계속)